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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생일 정묘년 계묘월 1. 출생과 생애 조선후기 방랑시인으로 자는 난고,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 본관은 안동. 경기도 양주출생으로 선천부사였던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으나, 형 병하와 함께 노복 김성수의 도움으로 황해도 곡산으로 도망가 살았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강원도 영월로 옮겨 살다가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으나, 자신의 집안 내력을 모르고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를 택한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방랑길에 올랐다. 57세때부터 전라남도 동북에서 객사하기까지 삿갓을 쓰고 전국각지를 유랑하였으며, 발걸음이 미치는 곳마다 많은 시를 남겼다. 후에 둘째 아들 익균이 유해를 영월의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그의 한시는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고 회화적으로 파격적 요인이 되었다. 아직도 수많은 한시가 구전되고 있다.
2. 활동내용 * 사회적 배경 : 19세기는 조선조 양반신분체제가 동요되어 계급적 혼란기를 맞이하는 시기였다. 영·정조가 탕평책을 썼던 동안 정계는 대체로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순조가 어린나이로 즉위하자 소위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제 정치는 양반들의 공존이나 상호간의 다툼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개 척족의 세력에 의해 좌우되는 시대로 변화하였다. 세도정치에 의한 권력집중은 정치의 문란을 가져왔으며, 이로 말미암아 농민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헸다. 점점 양반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이런 가운데에서 농민들은 사회적 위치에 눈뜨기 시작했다. * 업적 : 김병연은 1천여 편의 시를 쓴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재까지 456편의 시가 찾아졌다. 그가 현대인에게도 익숙한 사람이 된 것은,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이야기들을 그것도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꽃잎처럼 낙엽처럼 날려버린 시들을 이응수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모으고 정리하여, 비로소 그가 죽은 지 76년 만인 1939년에 김병연의 첫 시집인 ‘김립 시집’을 엮어 냈기 때문이며, 그 속에 실린 내용과 형식이 다양한 시들과 흥미있고 통쾌한 일화들을 자료로 삼아, 여러시인·작가들이 시집과 소설로 발간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욱이 근래에 와서 다분히 흥미 위주로 보아온 그의 시들을, 형식의 파격성과 내용의 민중성을 문학사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이 몇몇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서 성과를 거두고 있기도 하다. 그는 5세 때부터 이곳저곳으로 피해 살아야 했고, 청년기 이후에는 방랑생활로 일관했기 때문에 생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대부분을 추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그가 남긴 시와 일화들이 더욱 신비로우며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3. 재미있는 일화 그가 개성에 갔을 때에 어느 집 문앞에서 하룻밤 재워주기를 청하자, 그 집주인은 문을 닫아걸고 땔감이 없어 못 재워준다고 했다. 이 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시가 이러했다. "고을이름은 개성인데 어찌 문을 닫아걸며 산이름은 송악인데 어찌 땔감이 없다 하느냐 (읍명개성하폐성/산명송악기무신)" 이 시는 해학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한문 또는 한시를 대중화한 것이다. 이런 것은 언문을 섞어 짓는 그의 모습에서 또 달리 나타난다. 김삿갓은 삐뚤어진 세상을 농락하고 기성 권위에도 도전하고 민중과 함께 숨쉬며 탈속한 ‘참여시인’이었고 ‘민중시인’이었다고 하겠다.
삿갓을 보면 쓰고 무작정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나만 그런가~~~~ㅎㅎㅎㅎ
계곡 주변에는 김삿갓 시비가 많이 있다
4. 교훈 집안의 몰락으로 인한 신분 사회에 대한 개인적인 반항을 극복하고 신분 제도와 빈부의 격차 등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니게 됨. 금강산 유랑을 시작으로 해서 각 지역의 서원을 주로 돌아다니면서 풍자와 해학이 담긴 뛰어난 시를 많이 지음 * 김삿갓 시의 특징 : 사회 모순에 대한 저항 정신과 인도주의를 풍자와 해학의 시 문학으로 승화.
김삿갓이 여러 고을을 방랑하던 중
한 서당에 도착하게 되어 물이나 한모금 얻어마실까 하였는데 훈장이 김삿갓의 용모를 보고 대꾸도 안하자 그 즉석에서 지은 한시를 보면 얼마나 한문을 자유로이 다루었는지 짐작이 간다. 書堂乃早知 서당내조지 學童諸未十 학동제미십 房中皆尊物 방중개존물 訓長來不謁 훈장내불알 서당에 당도했으나 (내가 온것을) 일찍 알아차리지 못하였구나. 배우는 아이들이 모두 열이 채 안되고,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존귀하구나. 훈장이 나와서 (나를) 내다보지도 아니하는구나
5. 평가 * 긍정적 평가 : 사회몬순에 대한 저항 정신과 인도주의를 풍자한 해학의 시를 지음. * 부정적 평가 : 자식과 가장으로서의 책임에 대해 소홀함. 참고 자료
각박한 인심을 풍자하며 파격적인 한시를 쓴 그는
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 같다. 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스무(二十) 나무 아래 서러운(←설흔) 나그네, 망할(←마흔)놈의 집에서 쉰(五十) 밥을 먹는구나,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일흔) 일이 있는가. 차라리 집에 돌아가 설은(←서른) 밥을 먹으리. "가산군수 정시의 충성을 찬양하고 역적 김익순의 죄를 한탄하라" 였으니 자신의 할아버지를 욕보이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야만 했다. "한 번은 고사하고 만 번 죽어 마땅하고 / 너의 치욕스러운 일동국의 역사에 유전하리." 그는 조부를 규탄하는 명문으로 장원에 급제하나 할아버지를 팔아 입신양명 하려고 한 자신에 부끄러움을 느껴 글공부를 포기하고 농사를 지으며 은둔 생활을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백일장을 보기 전에는 그의 조부가 김익순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러나 김삿갓은 신분 상승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지만 부패한 과거 제도에 실망을 하고 어느 세도가의 집에서 식객으로 지내던 중 그의 출신 성분이 주위에 알려지면서 제도권 진입을 포기하고 스물 다섯에 기나긴 방랑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스무(二十) 나무 아래 서러운(←설흔) 나그네, 망할(←마흔)놈의 집에서 쉰(五十) 밥을 먹는구나,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일흔) 일이 있는가. 차라리 집에 돌아가 설은(←서른) 밥을 먹으리. 김삿갓의 살림이라곤 얼굴을 거의 가리다시피 하는 큰 삿갓, 개나리 봇짐 하나, 그리고 대나무 지팡이가 전부였다.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특이한 복장을 한 김삿갓에게 물었다. "어찌 그렇게 큰 삿갓을 쓰고 다니오? 불편하지 않소?" "하늘 아래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몸이라 그러오. 허허허" 김삿갓은 할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것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그의 본명인 김병언으로 불려지지 않고 김삿갓이라고 된 것이다. 방랑 초기에는 지방 토호나 사대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나름대로의 품위를 유지하나 세상 인심이 한결 같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고 서민들 속에 섞여서 날카로운 풍자로 상류 사회를 희롱하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으며 일생을 보낸다. 타고난 글 솜씨와 영리함으로 급제까지 했던 김삿갓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즉흥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산과 들 그리고 사람에 얽힌 그의 시는 한 수 한 수 철학이 깃들여져 있으며 풍자성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그란 강돌을 주워다 정성스럽게
쌓은 탑들이 여기 저기 보인다.
부정부패를 일삼는 세도가와 거만한 부자들의 허풍을 마음껏 풍자하고 조롱하는 그의 시 속에는 당시 부당하게 대우받고 사는 가난한 백성들의 한풀이로서 충분했다. 때문에 김삿갓의 시는 가난한 백성들의 안식처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쉰 일곱, 전라도 땅에서 눈을 감음으로써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일생을 마감하고 아들 익균이 유해를 영월로 옮겨 장사를 지냈다. 영월 와석리에 그의 생가 터와 묘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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