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전 모 방송사에서 숙종과 장희빈에 관한 드라마가 방영 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인 장희빈. 여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쯤 하고 싶은 역할이다. 미모의 여성으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천한 출신으로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자신이 낳은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기까지 했으니.
그러나 그녀는 죽은 뒤 계속 떠돌다 신위는 칠궁으로 모셔졌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칠궁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육상궁이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재건하는 과정에서 곳곳에 흩어져 있던 사친(왕을 낳았으나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들의 사당을 합사한 곳이 아닌가. 더군다나 숙빈 최씨와 희빈 장씨는 묘한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당시 희빈 장씨가 왕비에 오른 뒤 한 궁녀가 인현왕후를 위해 매일 기도를 올리다 숙종에게 발견되었고 그녀의 착한 심성에 감복한 왕은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바로 그 궁녀가 숙빈 최씨다. 이를 안 희빈 장씨는 그녀를 가만히 둘 리 없었다. 어느 날 숙종이 꿈을 꾸었는데 내전 마당의 큰 독에서 빈사상태의 용이 기어오르다 쓰러지는 것을 보고 달려갔더니 그곳에 숙빈 최씨가 독을 쓰고 빈사상태로 쓰러져 있었다고.
숙종은 그녀를 육상궁에 머물게 하였는데 이후 숙빈 최씨는 영조를 낳는다. 바로 그 곳에 장희빈의 신위도 함께 모셔져 있는 것이다. 정작 희빈 장씨의 아들인 경종은 몸이 허약해 왕위를 오래 지키지 못했고 자신이 그렇게도 천대하던 숙빈 최씨의 아들인 영조는 한 갑자가 넘도록 왕위를 굳건히 했을 뿐 아니라 조선조 진경시대의 화려한 문화를 여는 훌륭한 왕이 되었다.
묘한 질투 관계가 얽혀있는 칠궁의 주인공들이 드라마로 현실화됐다. 이 와중에 한 노신사가 필자를 찾아왔다. 칠궁에 대해 쓴 내 칼럼을 읽고는 칠궁에 모셔진 사친 영가들을 위해 구명시식을 올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신문에 칼럼을 연재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칼럼에 연재한 내용을 읽고 구명시식을 위해 찾아오다니. 나는 너무나 당황했지만 정작 그 분은 진지했다. “법사님 말씀대로 칠궁에 제사를 올려주지 않은 게 몇 해입니까? 실제로 궁정동의 주인은 칠궁에 계신 후궁 영가님들입니다. 그 분들이 얼마나 시장하시겠습니까?”
어찌 보면 자신과 관계없는 영가들을 위해 구명시식을 올릴 정도로 아주 여유 있는 분도 아니다. 작은 부동산업을 하는 그저 평범한 중산층 가장. 그런 분이 왜 칠궁에 대해 쓴 내 칼럼을 읽고 감동을 받아 구명시식을 청한 것일까. 이는 괜히 뜬금없는 마음의 동요가 아니다.
내가 슬쩍 본 그분의 전생은 칠궁에 있는 후궁 영가들과 인연 있는 궁궐의 수문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 구명시식을 올리지 않았기에 뚜껑을 열어보진 못했지만 분명 궁 관계자였을 듯. 이 분 뿐 아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칠궁과 인연이 있다는 중견가수 L씨도 연락을 취해왔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서 구명시식을 청했던 것.
칠궁과 전혀 관계없이 살아왔던 두 노신사가 각각 칼럼을 읽고 구명시식을 청한 이번 사건은 나로서도 참으로 신기한 일. 어린 시절 봤던 장희빈 영가와 재회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조선 미인형의 여장부 같았던 그분은 과연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필자의 칼럼으로 인연이 되어 올려진 칠궁 구명시식. 드디어 칠궁 일곱 분의 사친 영가를 모셨다. 칠궁을 위한 제사를 지낼 때 나름대로 인터넷으로 철저히 조사, 영가 명단을 작성했다.
칠궁 안 육상궁에 모신 숙종 후궁 영조 생모인 숙빈 최씨 영가, 대빈궁에 모신 숙종 후궁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 영가, 연우궁에 모신 영조 후궁 진종 생모인 정빈 이씨 영가, 선희궁에 모신 영조 후궁 장조 생모인 영빈 이씨 영가, 저경궁에 모신 선조 후궁 원종 생모인 인빈 김씨 영가, 경우궁에 모신 정조 후궁 순조 생모인 수빈 박씨 영가, 덕안궁에 모신 고중 후궁 영친왕의 생모인 순비 엄씨 영가.
이렇게 적힌 영가 명단을 영단에 붙여 놓고 제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난데없는 궁중 암투가 시작된 것이다. 시작은 선조 후궁이며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 영가였다. “차법사, 이건 궁중 법도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엄연히 선조께서 선왕 되시는 분인데 어찌 내 이름이 제일 위에 있지 않습니까?”
생각해보니 그랬다. 수십 명의 후궁들을 거느리고 나타난 김인빈 영가의 강한 항의로 명단을 수정하려고 하는 찰나 그 유명한 장희빈 영가가 나타나 “선왕의 후궁이셨던 김인빈 마마께서 가장 윗분 되시는 분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엄연히 왕비를 지냈던 내가 가장 높은 서열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희빈이 아닙니다. 중전이라 함이 옳습니다.”
그러자 최숙빈 영가가 거세게 반발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엄연히 칠궁은 나를 위해 지어졌던 육상궁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러니 육상궁의 주인인 내 이름이 가장 위에 있어야 지당합니다.” 순간 아찔했다. 궁중 암투의 주역들 사이에서 구명시식을 하려니 눈앞이 깜깜해지고 만 것.
겨우겨우 윗분 마마들을 달래어 다시 영가 명단을 써오도록 당부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쓰인 영가명단은 김인빈 마마가 가장 위에 그리고 중전을 지냈던 장희빈 영가, 그 뒤로 최숙빈 영가의 순으로 이어졌다. 물론 장희빈 영가는 구명시식이 끝날 때까지도 자신을 중전이라 하며 ‘희빈 장씨 마마 영가’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칠궁의 구명시식을 올린 제주는 두 분이었다. 한 분은 전생에 정5품으로 상궁 중 가장 높은 계급을 지낸 분이었고 또 한분은 종6품으로 궁의 수문장을 지냈다. 자신의 전생을 알지 못하고 청한 구명시식이었으나 모두 다 궁과 인연 있는 분들만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의 일치이다.
함께 구명시식을 올린 여러 가족 모두 궁과 인연이 깊었다. 때문에 아기를 갖지 못해 구명시식을 올린 커플도 두 쌍이나 됐다. 한 커플은 20년 동안, 다른 커플은 7년 동안 아기가 없었다고. 알고 보니 아래쪽은 모두 상궁을 지낸 분들이었으니 전생에 아기 인연이 없어 현생에 아기 갖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나는 궁중의 한을 품고 돌아가신 사친 영가들을 위해 한국춤의 대가인 P선생에게 요청, 살풀이와 승무 그리고 가요 ‘사랑이여’와 함께 어우러진 멋진 춤으로 마음을 달래줬다. 또한 궁중 춤인 태평무도 잊지 않았다. 단지 후궁이었다는 이유로 근 33년 동안 제사 한번 지내지 않았던 칠궁 영가들을 위해 나는 매년 한 번씩 구명시식을 올리겠다고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