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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김민선의 경우 - 소신(所信)과 자유(自由)
노랑 염색머리를 한 십대에게 물었다. 그게 뭐 좋으냐, 왜 그렇게 했느냐라는 물음에 내 멋이라는, 개성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얼핏 별 문제가 없는 대답인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성이 아니라 유행을 따른 것이요, 내 멋이라는, 자유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또래들의 세계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그런 두려움의 결과인 것이다. 시류(時流)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그가 속한) 사회의 압박에 굴복한 결과인 것이다.
근래 순우리말 이름이 흔해졌다. 그런 이름을 지은 부모들은 그것이 옳은 결정으로, 주체적(主體的)이며 애국적인 태도의 결과물로 자부심을 가질지언정, 그것 역시 시류에 굴복한 비주체성의 결과임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주체성은커녕, 한자가 2000년 이상 지나면서 우리의 피와 살이 된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놀라운 폐쇄성에 불과한 것이다. 한자말의 그 뛰어난 함축과 은유의 그런 대단한 장점을 외면한 비이성적(非理性的) 태도인 것이다.
주체성이 무엇인가 한다면 그것은 이성(理性)이라고 답할 수 있다. 능동성, 자유의지, 모두가 이성의 결과인 것이다. 이성적이 아닌 것은 주체성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김민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대단히 용기있는 소신있는 행동처럼 생각하고 말했겠으나, 시류의, 사회의 보이지 않는 압박에 굴복한, 소외에 대한 두려움의 결과일 뿐인 것이다.
역시, 바로 알고자하는 노력없이, 사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오로지 자신이 가고 싶었던 방향으로 가버린, 무의식의 세계에 매인, 비주체적, 비이성적 태도의 결과인 것이다.
보통, 自由라고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이 비주체 반자유(反自由)인 것이 대부분이다. 갈등을 유발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닌 것이다. 그런 일방적인 자유는 금방 저항에 부딪히고 만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란, 갈등없는, 갈등을 없애는 쪽으로 가는 자유인 것이다. 그것은 이성적(理性的)일 때만 가능한 것이다. 소통이요 교류(交流)며 잇고 살리는 것이다. 파괴가 아니라 생산(生産)인 것이다.
반면, 비이성적인 자유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매인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 갈등과 단절(斷絶)이 있을 뿐이다. 의존(依存)이며 파괴인 것이다.
** 2000년이나 함께 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이런 엄청난 폐쇄성을, 이런 극단적인 폐쇄성을 주체성으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도약은 여기에서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전혀 근거가 없는 반미 감정 역시, 좌파 선동에 현혹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우리 안에 있는 강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폐쇄성이 작동한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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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가요. 탤런트 김민선씨 무슨일 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