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컴퓨터는 1983년, 당시 인하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조현정 사장이 자본금 450만 원과 직원 두 명을 데리고 창업한 국내 벤처기업 1호다. 이 회사의 매출액은 2005년 9월 말 기준 148억 1,200만 원.
조현정 사장은 관련업계에서 ‘신화적 인물’로 통한다. 조 사장에게 성공 비결을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일찌감치 전공 분야를 선택해 집중했고,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설정한 후 달성할 때마다 한 단계씩 꾸준히 높여 왔습니다. 하루아침에 무지개를 잡겠다는 꿈은 꾸지 않았어요. 목표에 도달했다고 해서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거만하지도 않았고요. 나름대로 윤리경영을 실천한 것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한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경남 김해 출신인 그의 어릴 적 꿈은 전자제품을 고치는 일류 기술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남달라 라디오나 시계 같은 것을 쉽게 분해하고 조립했다. 이 일이 좋아서 중학교 때는 먼 친척이 운영하는 읍내 전파사에서 살다시피 했다. TV가 막 보급되기 시작한 그 시절 그는 친척 아저씨를 따라 가가호호를 방문, 안테나 설치하는 일을 도왔다. 그러는 동안 전자제품의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익혔다고 한다.
경남 의령중 2학년 때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자퇴했다. 아버지 없이 넉넉지 못한 살림에 형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면서다.
“상경 직후 친척의 소개로 충무로에 있는 수입 가전제품 수리센터에 취직했어요. 국내 가전 3사(社)가 아직 대리점 체제를 갖추지 못한 시절 충무로는 전자제품의 중심지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죠. 제가 들어간 곳은 수리 전문점으로 전국의 전파사와 외제 가전제품 판매처에서 수리를 하다 도저히 안 돼 포기한 물건들을 고쳐 내는 곳이었습니다.”
버스 요금이 15원 하던 당시 그는 이곳에서 월급 3,000원을 받으며 일했다. 가게에서 새우잠을 자며 기술을 익혔지만 좋아하는 일이라 피곤한 줄 몰랐다고 한다. 그렇게 2년 반 동안 기술을 익힌 덕에 그는 충무로 일대에서 ‘꼬마 일류 기술자’로 불렸다. 자신이 제1의 목표로 잡았던 일류 기술자의 꿈을 이룬 것이다.
1973년 여름, 그는 대학 진학을 목표로 가게를 그만두고 검정고시 준비에 들어갔다. 좀 더 수준 높은 전문가가 되어야겠다는 제2의 목표를 세우고 보니 대학을 졸업해야겠다는 판단이 서더라는 것이다.
“가게를 그만두고 보니 그해 검정고시까지겨우 83일 남았더군요. 퇴직금으로 받은 1만 5,000원으로 청계천 헌책방에서 책을 산 후 방에 틀어박혔습니다.”
83일 동안 지독하게 공부한 덕에 그해 중학교 과정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내친 김에 고교 진학 시험인 제1회 연합고시에도 응시, 턱걸이로 통과했다. 시험 결과 발표 후 그는 고교 입학 전까지 학비를 벌 생각으로 충무로 일터에 복귀했다. 이때 가게 주인은 전에 받은 월급의 다섯 배인 1만 5,000원을 월급으로 제시했다고 한다. 주인은 그가 없는 3개월 동안 비로소 ‘꼬마 일류 기술자’가 매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깨달은 것이다.
서울 용문고 재학 시절 그는 TV, 라디오, 전축 등 교사들의 가전제품 수리를 전담했고, 인하대 전자공학과 재학 중에는 외부 기술자들이 손도 못 대는 학교 기물과 실험기기들을 척척 고쳐 학교 측에서 아예 본관 1층에 작업실까지 마련해 주었다.
대학 재학 중 벤처기업 설립
‘벤처인 100만 대군 양성’을 선언한 조현정 사장(왼쪽)이 직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비트컴퓨터는 전체 직원의 85%가 연구개발 및 서비스 직원이다. |
조 사장이 컴퓨터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0년 인하대에 애플컴퓨터가 들어오면서다. 교수들도 작동법을 몰라 고민하던 이 컴퓨터를 그는 혼자서 익혀 자유자재로 사용했고, 프로그래밍 기술까지 터득했다. 덕분에 애플 복제품을 만들어 파는 세운상가의 한 전자업체에 기술 지원을 하며 컴퓨터 시장의 성장세와 소프트웨어 산업의 가능성을 읽어 냈다.
“컴퓨터 사용자는 늘어 가는데 쓸 만한 우리 소프트웨어가 없으니까 고객들이 하나 둘 업무용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 분야로 창업하면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83년 8월,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동생과 함께 청량리 맘모스호텔(현 롯데백화점 자리) 스위트룸을 빌려 비트컴퓨터를 설립했다. 창업자금이 많지 않은데 어떻게 사무실을 호텔에 낼 생각을 했을까.
“냉난방 시설이며 관리 문제 등을 따져 보니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변두리 허름한 곳보다 모든 시설이 갖춰진 호텔을 얻는 게 효율적으로 보였어요. 업무 특성상 밤늦게까지 근무해야 하는데 작업 환경도 호텔이 유리했고요.”
첫 사업 대상으로 그는 의료 분야를 택했다. 개업 의사들이 보험 청구서 정리 문제로 많은 시간과 인력을 허비하는 사실을 알고 전산 처리 시스템을 만들어 판 것이다.
창업 첫해 매출은 5,000만 원, 대성공이었다. 이후 종합병원용 프로그램을 개발, 수도권 지역의 병원에 지원하면서 매출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덕분에 대학을 졸업하던 1985년 비트컴퓨터는 자본금 6,000만 원의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회사 성장은 더욱 가속화됐으며, 연 매출이 10억, 100억, 200억 원대로 증가했다. 그는 직원 채용에 신중했다. 대부분의 직원을 전자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들로 채웠다. 관리와 영업은 최소화하고, 기술직을 늘리는 게 그의 경영 방침이자 원칙이었다. 그 원칙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비트컴퓨터는 지금도 관리와 영업 부서가 전체의 15%에 불과하고 나머지 85%는 연구 개발 및 서비스 직원이다.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1990년 그는 ‘소프트웨어 강국’을 목표로 비트교육센터를 설립했다. 그는 전국 4년제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한 우수 학생들을 엄선해 비트교육센터 학생으로 받아들였고, 서울대와 KAIST에서 석겧迷?학위를 받은 강사진 120명을 투입해 하루 14시간씩 교육시켰다. 조 사장은 “우리나라 전체 프로그래머 13만 명 중 비트교육센터 출신이 7,100명”이라고 말했다.
탄탄하게 다져진 이 인적(人的)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그는 또 다른 목표를 설정했다. 벤처인 100만 대군 양성이 그것이다. 그는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중산층이 두터워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현재 국내 벤처기업에 종사하는 인원이 40만~50만 명 정도 될 겁니다. 이 인원을 100만 명 정도로 늘리고, 양질의 교육을 통해 벤처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들면 우리 사회 중산층을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비트컴퓨터는 1997년 코스닥에 등록했다. 공모 경쟁률 637 대 1로 IT 기업으로서는 최고를 기록했다. 같은 해 이 회사는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사거리에 위치한 현 사옥을 구입했고, (주)청구로부터 서울 왕십리 민자역사를 32억 원에 인수했다. 현재 시세로 1,000억 원대가 넘는 왕십리 민자역사에 대해 그는 “벤처 인큐베이터를 세우려고 구입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상 상업시설로 전환하게 됐다”고 말했다.
비트컴퓨터의 총자산은 375억 1,500만 원. 개인적으로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됐지만 조현정 사장의 생활은 벤처기업 설립 초기와 다르지 않다. 20년 넘은 구형 승용차를 아직도 기사 없이 직접 운전하며, 부인 신현미 씨는 서울 신당동에서 치과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이제 부인은 좀 쉬게 해도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자식들에게 최고의 교육은 부모의 성실함”이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