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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1892년 7월 15일, 독일 제국 베를린에서 유대계 독일인 아버지 에밀 벤야민과 어머니 파울리네 엘리제 쇤필리스 슬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벤야민이 태어난 집은 샤를로텐부르크 지역 마그데부르크 광장(현재 티어가르텐 구역)에 위치했다. 쾰른 출신인 아버지 에밀 벤야민은 은행에서 경력을 쌓고 당시 번창하던 골동품 및 예술품 경매소의 지분을 획득하면서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자본을 증식시킨 전형적인 유대계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벤야민의 집에는 수많은 가내 고용인들과 하녀, 프랑스인 가정 교사와 여름 별장 등이 갖춰져 있었고 이런 환경 속에서 벤야민은 가난에 대한 걱정 없이 윤택한 생활을 영위했다. 거기에 벤야민의 외가인 쇤플리스 가문도 베를린 구시가지에 방이 12개가 넘는 대저택을 소유한 가난함을 모르는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9살이 되었을 때 그는 자비그니 플라츠에 있는 샤를로텐부르크 프리드리히 대제 학교에 등록하여 처음으로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곳은 개혁적인 베를린의 교육 기관이라는 명성과 함께 학생 중 다수가 상류층이었던 명문 학교였지만 건강이 안 좋았던 벤야민은 1년 반 동안 회복을 위해 튀링엔에 있던 하우빈다 기숙 학교에서 보내게 된다. 학생들 다수가 독일의 지방 사투리인 튀링겐 방언을 쓰는 등 이전의 학교와 완전히 다른 생활이었지만 벤야민은 하우빈다에서의 생활에 크게 만족했다. 그곳에서 당대의 교육 개혁자 구스타프 비네켄(Gustav Adolf Wyneken, 1875년 3월 19일 ~ 1964년 12월 8일)을 만나 그에게 독일 문학과 철학을 배우게 되었고 이는 벤야민의 사상과 저술에도 영향을 끼치는 계기가 된다.
하우빈다에서의 생활이 끝나고 다시 프리드리히 대제 학교로 돌아온 벤야민은 1909년부터 1년 동안 군 복무를 하게 된다. 원래 독일 제국 청년들은 당시 3년 동안 의무 복무를 해야 했었지만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던 벤야민의 복무 기간은 상당 부분 감면되었다. 그러나 벤야민은 군 복무 자체를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고 제대한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11년부터 정기적으로 인쇄된 학생 잡지 "출발"에 벤야민은 익명으로 시와 산문을 투고했다. 이 시기의 벤야민은 일종의 낭만적인 격정에 차 있었다.
프리드리히 황제 학교를 졸업한 벤야민은 1912년 아비투어를 치른 후 프라이부르크에 소재한 알베르트 루트비히 대학에 등록했다. 여기서 벤야민은 당시 철학자인 하인리히 리케르트(Heinrich Rickert, 1863년 5월 25일 ~ 1936년 7월 25일)와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 1862년 10월 30일 ~ 1954년 2월 6일)의 수업을 들었다. 벤야민은 자신의 어릴 적 친구인 헤르베르트 블루멘탈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프라이부르크의 대학에서 학문의 희생자인 자신은 비네켄의 지령을 받은 교육 개혁의 영웅 역할을 했었다고 당시의 심경을 밝히고 있다(몸메 브로더젠, 발터 벤야민, p.26.). 벤야민은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향에 위치한 베를린 대학교를 오가며 당대 석학들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교육 개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벤야민은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자유 학교 조합 연맹 회원으로 대학 내 학교 개혁 분과를 맡았으며 의장단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13년 주최된 제1차 자유 독일 청년 대회 이후 청년 운동 진영은 불안한 유럽 정세와 맞물려 민중주의와 사민주의, 공산주의 등 여러 파벌로 나뉘게 되고 벤야민은 차츰 당시의 청년 활동과 결별하게 된다. 1차 대전이 차츰 가까워지면서 당시 독일은 찬전 운동과 반전 운동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벤야민과 친했던 2명의 친구들이 반전 데모 중 전쟁 반대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자살을 택하게 되자 벤야민은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1차 대전 직전 전쟁의 광기를 여러 이데올로기로 정당화하는 와중에 벤야민은 침묵을 택하며 간접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뜻을 보였다. 그리고 1914년 베를린 자유 학생 연맹의 회장이자 의장단의 일원으로 재선출되었음에도 벤야민은 일체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으며 대학 강의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야말로 반쯤 자포자기했던 벤야민은 1915년 베를린을 떠나 뮌헨으로 향하게 된다. 벤야민은 뮌헨의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했으며 벤야민은 이때 여러 석학들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같은 유명인과도 친분을 트게 된다. 뮌헨에서 여러 유명인들과 친분을 튼 벤야민은 1917년 외국으로 나갔다. 스위스 베른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던 중 그는 희망철학으로 유명한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년 7월 8일 ~ 1977년 8월 4일)와 다다이스트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후고 발(Hugo Ball, 1886년 2월 22일 ~ 1927년 9월 14일)을 만나게 된다. 이들에게 많은 영감을 받은 벤야민은 베른 대학에서 4학기를 등록한 후 1919년 6월 독일 낭만주의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박사 학위를 따게 된다. 베를린을 떠나 타지 생활을 하는 동안 벤야민은 원래의 약혼녀이자 어릴 적 친구의 여동생이었던 그레테 라트와 결별하고 베를린에서 알고 지내던 유능한 저널리스트 도라 조피 켈너(Dora Sophie Kellner, 1890년 ~ 1964년)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벤야민과 도라의 결혼 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이미 한 번의 결혼 경험이 있던 도라였지만 부모의 지원 없이는 경제적으로 지극히 무능했던 벤야민이었기에, 다년간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은 아내인 도라의 몫이었고 이는 결국 1930년 둘의 결혼 생활이 파경을 맞는 계기가 된다. 비록 이혼은 했지만 그럼에도 언론인로서 도라는 벤야민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나치의 발흥으로 벤야민의 목숨이 위태로워졌던 때에도 영국으로 망명했던 도라는 위기에 처한 벤야민을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다.
혹독한 망명 생활에서 자살까지도 생각했던 벤야민에게는 아직 목표가 남아 있었다. 이제 친구들에게 돈을 부탁하는 전보를 보내는 것도 진력이 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이걸 계속해야 된다는 푸념을 늘어놓는 벤야민에게 삶을 이어나갈 만한 자극을 주는 것은 어떤 꼼꼼한 작업이었다. 소위 아케이드 프로젝트, 미완의 고찰로 알려진 파사젠베르크(Passagenwerk)가 그것이다. 망명 생활 통에 건강까지 악화되는 상황에서도 벤야민은 파사젠베르크를 계속 진행해 나갔다.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논평과 모아왔던 인용문, 현실에 대한 비평 등 모든 요소가 집약된 파사젠베르크는 벤야민에게 꼭 완성해야 할 무언가와도 같았다. 그러나 파사젠베르크는 그 규모와 다루는 주제에 비해서 너무 광대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벤야민 자신도 이 프로젝트가 망명 생활이라는 비정상적인 삶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방대한 작업이라는 것을 인정했을 정도일 만큼 말이다. 그래서 벤야민은 자신의 언급대로 "전쟁과 경주라도 하는 기분으로" 파사젠베르크를 채워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사젠베르크는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었고 벤야민은 결국 자신을 도와주던 사회조사 연구소와 상의해서 파사젠베르크의 축소판을 먼저 내놓기로 했다. "파리, 19세기의 수도"로 명명된 이 글은 벤야민 자신이 사회조사 연구소가 발행하던 잡지에 싣을 예정이었던 보들레르 원고를 축약한 것이었으며 그 글은 <보들레르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라는 제목으로 파사젠베르크라는 거대한 조형물의 첫 번째 조각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포화는 이미 벤야민이 살고 있던 프랑스에도 차츰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벤야민이 글을 싣던 사회조사 연구소도 위협을 느끼고 미국으로 옮겨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벤야민은 파사젠베르크를 끝마치기 위해 프랑스에 남아 저술 작업을 계속했고 연구소와의 갈등이 있긴 했지만 수정된 채로 자신의 에세이가 출간된 것에 벤야민은 "세계가 종말을 고하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었다는 승리의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벤야민은 그 자신의 안위에는 소홀했다. 프랑스 당국은 벤야민이 히틀러에 대해 명백히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벤야민과 일단의 망명인들이 히틀러의 첩자라며 억류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다행히도 벤야민은 프랑스에서 사귀었던 지식인들의 도움으로 풀려나올 수 있었지만 이렇게 풀려난 이후에도 벤야민은 파리로 돌아와 파사젠베르크를 완성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때 벤야민은 <역사 개념에 대하여>를 완성하고 자신이 쓴 수필집인 <1900년 베를린의 유년 시절>을 출판하기 위해 이 와중에도 출판사를 몰색하고 있었다. 결국 1940년 5월 독일 군대가 프랑스 국경을 넘어 진군해오게 되자 그는 수백만 명의 프랑스인들과 함께 미국으로 가기 위해 에스파냐로 향하게 된다. 에스파냐 국경은 이미 막혀 있었고 결국 벤야민은 자신의 지병인 심장병에도 불구하고 피레네 산맥까지 넘어가며 프랑스를 간신히 탈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말 운이 없게도 벤야민과 그들이 속해 있었던 난민 대열은 에스파냐 세관에 붙잡혔다. 에스파냐 세관은 벤야민과 함께 온 난민 집단을 출국시키겠다고 협박했고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버린 그는 결국 음독자살을 택했다. 시대를 풍미했던 한 문필가의 최후는 이렇게 허망했다.
벤야민은 문필과 역사, 철학 등 하나의 분과를 집중적으로 파고들기 보다는 다수의 분과를 다양한 관점으로 파고든 것이 특징이었다. 거기에 역사 개념에 대해서와 같이 은유적 개념과 초현실적인 개념을 통해 전개되는 그의 사유과정은 하버마스가 그에 대해 했던 말처럼 비일관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좀더 들여다보면 벤야민의 사유과정에서는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벤야민 자신이 강조한 '유물론적 사유'에 대한 것이다. 유물론적 사유에서 중요시 되는 것은 파사젠베르크에서 이어지는 문제의식과 궤를 같이한다. 그것은 빛이 번쩍거리지만 기만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판타즈마고리아'를 걷어내고 현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역사 개념에 대해서란 글에서 나타나듯 벤야민은 르네 데카르트를 모티브로 삼아 사람들에겐 매우 친숙하고, 심지어 희망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지는 '유행'과 '새로움', 그리고 '역사적 진보'라는 개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벤야민은 우군으로 여겨지던 새로움이란 개념은 단지 사람들을 꾀어내기 위한 착취자들의 장식품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역사적 진보라는 개념 때문에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현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말이다.
예술 분야에서 그의 저작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필독서가 되었다. 사진이나 영화 등의 기술 발전을 복제의 관점에서 고민하고, 이것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숙고한 벤야민의 시도는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은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었고, 확실히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아우라 개념이 나오게 된다.
Solange es noch einen Bettler gibt, solange gibt es noch Mythos.
여전히 거지가 있는 한, 신화는 있다.
가난한 사람이 있는 한, 마르크스주의는 지속될 것이라는 말이다.
"문명의 역사는 야만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라는 말을 했던 독일의 작가이자 문예 평론가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유디인인 '아슈케나짐 유대인'으로서 나치 독일 때문에 스스로의 삶을 마감해야 했던 불행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대다수의 유럽인들이 나치에 굴복할 것인지 저항할 것인지를 종용받았던 시대를 살았던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 독일에 굴복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신세였다. 유대인인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이 발터 벤야민을 향해 서서히 등을 돌리기 시작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일자리를 잃고, 목숨을 보존할 여유조차 없어지자 결국 그는 다른 나라로 망명을 간다. 이런 이유로,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유대인이라는 멍에를 고려해봤을 때, 그가 말한 야만의 역사는 어쩌면 지극해 당연해 보인다.
인류의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며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학습해야 한다고 혹은 지난 역사를 통해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노라고 뇌까리는 지식인들이 상당히 많아 보인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이념과 명분에 조금이라도 기스가 날 때, 자신과 같은 여권을 지닌 민족뿐만 아니라 자신의 DNA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피를 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역겹기 짝이 없다. G.W.F. 헤겔이 <역사철학강의>에서 한 말처럼 과거의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웠다거나 무엇을 반성한 흔적은 겨울바다에서 헤엄을 치는 사람을 찾기보다 어려워보인다.
그냥 역사가 주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껄이지 말고, 매끈한 아스팔트로 깔린 도로망처럼 문명이라는 신진대사에 '야만'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인정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첫댓글 베냐민이 마지막에 도달한 ‘역사유물론’은 “신학적 사유의 극단적 세속화”라는 말로 요약된다. 유대신학적 사유와 유물론적 사유가 중첩된 시선으로 역사와 세계를 보는 것인데, 이런 이중성에서 빚어지는 긴장이 베냐민의 독특한 사유의 풍경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