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길
함석헌
씨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금년 여름은 참 덥습니다. 더위에 절대 눌리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온이 몇도 올라가니 사람 모양이 참혹합니다. 강한 자, 약한 자,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지식 있는 이, 없는 이 구별 없이 그 꼴이 꼭 뜰 아래 헤매는 강아지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팔팔하던 놈이 시뻘겋게 늘어진 혀를 한 발이나 빼물고 헐럭벌럭, 이 구석 저 구석을 찾아 좌불안석(坐不安席)입니다.
눈을 높이 들어 팔백만 서울 장안 살펴보니 가엾기 짝 없습니다. 선풍기, 냉장고, 에어콘, 해수욕장, 무엇보다 그놈의 텔레비, 기상예보가 사람 마음을 걸레 쪽 같이 만들어 놨습니다. 문명은 사람을 행복케 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 어리석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금강산 만폭동에라도 간 듯, 시원한 그림이 꼭 하나 있습니다. 골목 길가에서 고무줄넘기를 하는 꼬마들입니다. 그것들은 그 불별 밑에서 팔다리를 번개 같이 놀리며 땅바닥을 맨발로 박차고 공중에 올라갔다가는 또 비둘기 같이 사뿐 내려오고, 내려왔다가는 또 다시 솟구쳐 오르는 그 운동을 쉴새 없이 계속하는데, 누구의 명령에 그렇게 복종해서인지, 땀이 흘러 씻으려도 않고, 숨이 차도 덥다는 중얼거림 한 마디 뱉을 겨를 없이, 그저 하늘의 천사가 저럴까고 생각되는 영광이 가득 찬 얼굴로 나비처럼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 살림 속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저 약동하는 생명뿐입니다.
나는 “너희가 돌이켜 어린이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하신 예수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노라니 또 바울이 “여러분은 열심으로 더 좋은 것을 구하십시오.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께 보여 드리겠습니다”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가장 좋은 길은 가장 좋은 길을 찾는 일입니다. 그 이하의 일등 이등은 소용없습니다. 참에 등급 없습니다. 가장 좋은 길이 무엇입니까? 무엇도 아닙니다. 어디 있습니까? 어디도 아닙니다. 좋고 언짢고, 편 불편, 행복 불행을 모르는 일입니다. 홀로 하나인 이를 바라면서 자연스런 살림을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악에 대한 싸움도 그렇지 않을까?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기라.”사랑은 사랑이 아니요, 의는 의가 아닙니다. 곱고 미움 모르는 데 사랑이 있고, 옳고 그름 모르는 데 의가 거합니다. 골목의 천사들이 잡념 없이 하늘 땅 사이에 운동할 때 거기 사나운 더위도 모진 추위도 없듯이, 그렇듯이 우리도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며 제절로의 살림을 할 때, 모든 어긋남은 자연 없을 것이고 싸움을 없이 만드는 가장 좋은 길이 강물처럼 흐르지 않을까?
不思善 不思惡,착하다는 생각도 모질다는 생각도 없을 때 거기 너의 참 모습이 있다 했습니다.
上善若水라, 썩 잘하는 이는 물 같다 했습니다. 不居라, 있지 않는다. 그러므로 不去,가지 않는다 했습니다.
亡國奴(나라 잃어버린 놈)의 멸시를 받으면서도 초연해서 흐르는 강물, 떠다니는 구름 같은 말로 전국시대의 악착한 인심을 건져주었던 장자의 재미나는 이야기나 해서 이 더위를 잊기로 합시다.
자공(子貢)이 남쪽 초나라에 갔다가 진나라로 돌아오는데 한음 땅을 지나다가 보니 늙은이가 하나 채마밭에 일을 하는데 땅 구멍을 파서 만든 우물에 항아리를 안고 들어가 물을 길어가지고 나와서는 밭고랑에 물을 대고 있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힘은 많이 쓰는데 공로는 적었습니다. 자공이 보다못해 말하기를 기계가 하나 있어서 하루에 백 이랑도 줄 수 있는데 힘은 드는 것 없이 효력은 아주 큽니다. 그것 하나 써보면 어떻습니까. 했습니다. 채마하던 사람이 그거 어떻게 생긴 것이냐 한즉, 자공의 대답이 을 파서 만든 것인데 뒤는 무겁고 앞을 가볍게 해서 잡아다려 가지고 물을 퍼내는데 물끓듯 쏟아져 나옵니다. 그것을 용드레라 하지요. 늙은이가 화를 펄적 냈다가 다시 웃으면서 하는 말이 우리 스승님한테 들으니「기계 가진 놈은 기계 일을 하게 되고 기계 일 하는 놈은 기계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속에 기계 생각을 하게 되면 쌔하얀 것이 없어진다. 쌔하얀 것이 없어진즉 정신이 가라앉지 못하고 정신 가라앉지 못하면 길(道)을 탈수는 없지, 하셨다.」내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을 차마 부끄러워서 못한다 했습니다.
씨알의 소리 1978. 7,8 75호
저작집; 9- 219
전집; 8- 3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