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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1-5)
할렐루야! 하나님이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살다 보면, 전혀 예기치 못한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일들은 우리를 기쁘게 하기보다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더 나아가,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한밤 중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너무 놀라서, 119에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전쟁이 일어났느냐? 야간통행금지가 되었느냐?”
지난 주일 아침, 무안 공항에서의 비행기 사고로, 유가족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어디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까?
다윗은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라고 고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기자도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시 71:5)라고 고백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음의 선배들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실망하고,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로 인하여,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오는 이 때에,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나는 주님만 바라보겠습니다. 나의 소망은 주님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라고 하는 말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하고,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깊은 산속에 들어간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집니까?
세상의 관심을 끊는다고 저절로 마음이 자유로워집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그런 평안을 알지도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런 평안을 우리에게 줄 수도 없습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에,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어떤 평안인가를 분명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연말이나 연초가 되면, 세상 사람들은, 새해에 되어진 일들에 대하여, 무언가를 알고자, 점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있으면, 점집을 찾아갑니다. 지금에만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도 그랬습니다. 사울왕도, 그의 마지막을 보면, 신들린 여자를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수도 없이, 우상을 찾아가지 말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하셨습니다.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암 5:5)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 가서, 자기의 앞날 같은 것 물어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 우상 같은 것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달픈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두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잘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찾을 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갈급함이라고 하는 것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없으면 절대로 안되는 그런 경우를 말합니다. 물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옆에 물이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다음에 마시지”라고 하는 것은 갈급함이 아닙니다. 당장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그래서, “물, 물” 하면서, 찾는 경우보다도, 더 심각한 경우를 갈급함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간절하게 바라고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좋고, 안 도와주시면, 뭐 내 힘으로 하지”
이것은 갈급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갈급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망”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기자는 무엇을 갈급했습니까? 무엇을 갈망했습니까?
2절 말씀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주님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계시는 성전에 나아가, 예배하며, 찬송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영적 목마름, 영적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영적 싸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인가? 아니면, 바알과 아세라인가?”
그 당시 세상은 온통 바알과 아세라 판이었습니다. 그래도, 세상 사람들은 “어느 쪽이 진짜인가?”라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갈멜산으로 올라왔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메마르고 더운 날씨가 계속되었습니다. 당장이라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는 그런 날씨였습니다. 그런 날씨였기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것”으로 대결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쉬운 일이었습니다. 먼저 하는 쪽이 이길 확률이 높았습니다. 아침부터 저녁이 될 때까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미친 듯이 부르짖었지만, 하늘에서는 불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엘리야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왕상 18:37)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습니다. 그제서야, 하루 종일 그 모든 광경을 쳐다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엘리야 선지자는 영적 싸움을 보고자 그 갈멜산에 올라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라고 외쳤습니다. 그때에는 아무도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으로 직접 하늘에서 내려온 불을 보고 나서야,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 싸움이 있다는 말에, 호기심을 가지고, 갈멜산에 올라왔지만, 머뭇머뭇거렸습니다. 두리번거렸습니다. 지금껏 조상 대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말했지만, 실상은 뒤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었기에, 어느 한쪽을 쉽게 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복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무능함을 보았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쪽이 진짜일까?” 마음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살다 보면, 좋은 일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웃을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니다.
세상 사람들 누구나, 크게 웃을 수 있는 좋은 일들만 있기를 바라고 바랐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한 낙심되고 불안한 일들이 몰려올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심하게 만드는 일들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온 여호수아가 혼자 여리고 성에 가까이 갔을 때, 칼을 빼어든 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때, 여호수아는 그에게,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수 5:13)라고 물었습니다.
다윗은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시 56:9)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다윗이 적들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저 원수들을 다 물러가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그가 기도한 대로, 그 원수들이 다 물러갔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니, 확실히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알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살다 보면, 내 편이 있고, 반대편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 편보다는 반대편의 힘이 훨씬 더 세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기기보다는 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하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칼을 빼어 들었던 그 사람이 여호수아에게,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라고 말했을 때,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던 것입니다.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시 118:6-7)라고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갈 때, 우리 앞에 승리만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어주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데, 어찌 패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갈 때, 우리의 앞길에 오직 승리만이 있게 될 것입니다.
2025년, 올해, 뿐만 아니라, 남은 생애 동안,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여러분! 어떤 일을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불0안해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우리의 소망이 되신 주님!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눈을 들어, 오직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세상이 우리를 유혹한다 할지라도, 딴 곳에 우리의 마음을 두지 않도록, 우리를 강하게 붙들어 주옵소서. 머뭇거리거나 갈팡질팡하지 않게 붙들어 주옵소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편, 내가 주님 편에 서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께만 소망을 둠으로,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