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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이산하 펜으로 북을 치다 2015년 10월 5일 <The Huffingtonpost> 글 박균호 <수집의 즐거움>의 저자 ▲시인 이산하
내가 시인 이산하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기에 대학생활을 시작한 내가 결코 몰라서는 안 될 이름이 이산하이며, 동학혁명이나 4·19 못지않게 기억해야 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제주 4·3이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두산 백과사전 인용)이다.
동영상을 보시려면 상단 배경음악은 잠시 꺼주세요. 설민석의 제주4·3평화기념관
공식적인 집계로만 무려 1만 4천명의 민중이 희생된 이 사건은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 발생한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사건임이 분명하며, 억울하게 희생된 민중들의 억울함과 보상이 현재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4·3 사건의 애통함을 절규한 장시(長詩) <한라산>을 잡지 <녹두서평>에 '목숨을 걸고' 발표한 이후 시인 이산하는 기나긴 수배생활을 해야 했고 결국 체포되어 긴 수감생활을 겪었다. 체포된 그를 취조한 검사가 바로 현 국무총리인 황교안이며 '악질 빨갱이'로 낙인 찍힌 그를 위해 '뉴욕의 지성' 수잔 손택이 구명활동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그가 성장소설 <양철북>을 냈다. 그가 살아온 행적을 생각하면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 되는데 의외로 그의 치열한 투쟁과 고난보다는 법운 스님과 만행을 함께 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세상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4·3과 필화사건에 관한 행적은 뒷이야기로 다루어질 뿐이다. 희한하게도 우리 현대사에서 군사정권과 맞서 싸우다가 오랜 수형생활과 고초를 겪은 분들의 저서는 일상생활과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이야기한 경우가 많다.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신영복의 <청구회 추억>,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와 더불어 시인 이산하의 <양철북>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그가 어린 시절 탐독한 책과 가족들과의 추억 그리고 그의 멘토 역할을 한 법운 스님과의 선문답이 눈여겨 볼 만하다. 아니다. 오히려 그의 성장소설 <양철북>은 아픈 현대사의 질곡보다는 차라리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만담이 눈에 더 띈다.
"그러니까 사람 피 빨아묵는 모기는 다 새끼
밴 암논들이라서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건 이 법전에도 나와 있고 <경국대전>에도 나와 있고, 또 저 머나먼 기원전 1750년
바빌로니아 왕국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제정한 인류 최초의 함무라비 법전 제 283조에도 분맹히 명시돼 있는데, 니는 우찌 무식하게 고것도
모르노?"
그러니까 <양철북>은 독자의 기호와 성향에 따라서 다양하게 읽히는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성장 독서기로, 해학과 풍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문구의 관촌수필에 버금가는 추억담으로, 불교와 선문답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에게는 쉽고 재미난 선문답 집으로 읽기에 충분하다. <양철북>에는 성장기에 읽어야 할 좋은 많은 책들(데미안, 죄와벌, 감자, 이병주의 지리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겨울공화국, 어느 돌멩이의 외침, 광장, 자기 앞의 생,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민족경제론,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사상계, 씨알의 소리)이 소개되고, 혼자 피식 웃게 만드는 해학이 가득하며, 평이하지만 깊은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선문답이 가득하다. 그래서 이 소설은 남은 페이지를 헤아려가며 아껴 읽게 된다.
어쩌면 이 소설은 "나는 왜 한라산을 쓰게 되었는가? "나는 왜 세상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싸우게 되었는가?"에 대한 시인 이산하의 대답이 될 수 있겠다.
한라산 이산하
서시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산하 구석구석에서 민족해방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가신 전사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1 지금으로부터 어언 120여 년 전 동아시아의 해군기지로서 조선이 결정된 지 80년의 모진 세월이 흐른 1945년 불볕 여름 한 손에 ‘빵’과 또 다른 한 손엔 ‘해방군’의 탈을 쓰고 발톱까지 무장한 채 당당하게 상륙한 그들은 마침내 순결한 조선의 하늘과 푸른 산하를 두 토막으로 분질러 놓았다. 그리고 다시 40여년의 기나긴 세월이 흘렀건만 총독부가 대사관으로 바뀌었을 뿐 ‘창살 없는 감옥’ 식민지 산하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제국주의 침략사 120여년, 다시 써야 할 피어린 민족해방투쟁의 한국현대사 압제의 사슬을 이빨로 뚝, 뚝, 끊으며 붉은 피로 얼룩진 그 장엄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우리 어찌 잊을 것인가! 바람 부는 대로 쓰러지는 풀잎이 아니라면 결코 그들의 노예가 아니라면 우리 어찌 보고만 있을 것인가!
2 이 땅은 아메리카의 한 주(州) 그들의 병영에서 짐승처럼 사육되어 왔던 수많은 날들 그 수많은 신음의 밤들을 누가 잊을 것인가. 누가 잊으라고 하는가. l948년 4월 3일 ‘제2의 모스크바’ 밤마다 먼저 간 동지들의 피를 묻고 살을 묻고 뼈를 묻는 혹한의 한라산 그 눈 덮인 산하, 붉은 피를 흘리며 끝내 숨져 간 이름 없는 해방전사들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끝내 이어지는 저 붉은 핏자국을 누가 잊는가. 누가 잊을 것을 강요하는가. 동상으로 썩어 문드러진 발가락을 자르며 뼈를 깎는 모진 고문에 여성전사들의 생리마저 얼어붙는 밤 그들은 기어이 갔다. 총알 박힌 다리를 절룩거리며 동지의 어깨에 매달려 진지로 돌아가다 진지로 돌아가다 끝내 쓰러져 버린 그들은 갔다. 기어이 갈 곳으로 가고야 마는 것인가. 분노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통곡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의 혁명전사들은 그렇게 갔다. 尾帝의 각을 뜨다 적의 가슴팍에 불을 지르다 끝내 다 뜨지 못한 채 끝내 다 지르지 못한 채 한줌 피 묻은 뼛가루로 날아갔다.
적과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인공의 깃발을 그 밑에 죽기를 맹세한 깃발 …….
3 30여년 만에 걸어 보는 이 학살의 숲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산등성이마다 뼛가루로 쌓여 있는 흰 눈이며 나뭇가지마다 암호를 주고받는 새들의 울음소리며 멀리 사람 실은 배 한척, 돌 실은 배 한척, 떠나는 바다며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허겁지겁 땅을 파헤쳐 씹고 또 씹었던 이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며 마지막 남은 이파리마저 가솔린 냄새를 풍기며 불탔던 이 학살의 숲은 아직도 총소리로 가득하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쏘았지만 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 학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하늘에서는 정찰기가 살인예고장을 살포하고 바다에서는 함대가 경적을 울리고 육지에서는 기마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모든 처형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던 그날, 빨갱이마을이라 하여 80여 남녀중학생들을 금악벌판으로 몰고 가 집단 몰살하고 수장한 데 이어 정방폭포에서는 발가벗긴 빨치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 나무기둥에 묶어 두고 표창연습으로 삼다가 마침내 젖가슴을 도려내 폭포 속으로 던져 버린 그날, 한 무리의 서북청년단이 17살도 안 된 한 여고생을 윤간한 뒤 생매장해 버린 그 가을 숲 서귀포 임시감옥 속에서는 게릴라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 몽키 스패너로 혓바닥까지 뽑아 버리던 그날, 바로 그날, 관덕정 인민광장 앞에는 사지가 갈가리 찢어져 목이 잘린 얼굴은 얼굴대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전봇대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빨갱이다!” “빨갱이의 종말은 이렇다!” 광장을 가득 메운 도민들에게 허수아비의 졸개들이 이미 죽은 시체들을 대검으로 쿡쿡 쑤시며 소리쳤다. 처참하게 찢어져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었지만 도민들은 저건 이덕구,저건 김운민,저건 김병남,남진,박남해…… 속으로 속으로만 어림잡았다. 통곡도 오열도 없었다. 도대체 사람이어야 통곡이라도 하지.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결코 죽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것은 푸줏간에 걸린 한낱 짐승일 뿐이었다. 한 개의 총알이 심장을 뚫고 간 것은 차라리 행복한 죽음이었다. 해안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한라산을 미친 듯이 뒤흔들고 있었다.
미군은 즉각 철수하라!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조국통일 만세! 제주빨치산 만세!
붉은 저녁노을이 멀리 관덕정 인민광장위로 지고 있었다. 산은 다시 한 번 알몸이 되고 그 빈숲에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살아 흘러가고 죽어 흘러가고 마침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흘러갔다. 몸 가릴 곳 하나 없는 이 참혹한 겨울숲 마지막 몇 사람이 기적처럼 살아 걷는 이 학살의 숲 누가 그날을 기억하지 않는가.
4 돌려주자! 오늘도 노란 유채꽃이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는 아~! 피의 섬 제주도 그 4.3이여! 우리의 심장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이 진달래꽃을 그 누가 꺾을 수 있으랴! 돌려주자! 기름진 지주와 자본가의 살을 죽창에 꽂아 그들에게 돌려주자! 공장의 프레스에 싹둑싹둑 잘려 나간 노동자들의 손가락을 포크레인에 찍힌 철거민의 팔과 다리를 얼어붙은 배추포기 같은 삶을 살다 농약 속으로 사라져 간 농민들의 그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그리고 푸르른 5월의 금남로를 승냥이처럼 할퀴고 간 저 피 묻은 손을 찢어 갈가리 찢어서 ‘조국 아메리카’의 후예들에게 돌려주자!
그리하여 똑똑히 들어라! 우체통이 빨간 것은 빨갱이사상에 물든 탓이 아님을 바로 너희들 때문임을 한반도 인민들의 피가 붉은 것도 바로 너희들 때문임을 그리고 침묵하라, 피로 맺어진 ‘혈맹우방’이여 그대들이 두 눈 뜨고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잠들 수가 없다. 너희들의 칼날 위에서 우리는 잠들 수가 없다. 그 누구도 잠들 수 없는 이 해방의 산하에 싹둑 잘려 나간 손가락이 아직도 팔팔 살아 뛰는 붉은 피가 있어 농약 먹은 가슴으로 타오르는 싯붉은 피가 있어 탄환의 불꽃으로 탄환의 불꽃으로 저 헐벗고 굶주린 노동자, 농민들의 여윈 손들이 숲을 이룰 때까지 마침내 해방의 숲을 이룰 때까지 적들의 심장에 불벼락을 안겨 주자!! 적들의 시체를 넘고 넘어 동지의 시체를 되돌려 받자,받자!!!
▲그림 강요배 '동백꽃 지다' 연작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