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0년 5월 스루가, 돗토미, 미카와 3국의 태수인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강적들인 다케다, 호죠와 3국의 동맹을 맺고 바라고 바라던 상락을 이루기 위해 총 4만 5천의 대군을 편성한다. 자신의 거성인 슨푸성을 교토식으로 치장하고 자신의 생활도 교토의 귀족들을 따라하는 등 수도인 미야코를 동경하던 이마가와는 드디어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어 서쪽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눈에 띄는 것은 2천 500의 병력을 거느리고 선봉을 맡은 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최대한 자국민의 피해를 줄이려는 이마가와의 전략대로 상락군의 화살받이가 된 부대였다. 그러나 마쓰다이라의 미카와 군대는 뛰어난 용맹을 발휘하여 오다군의 요충지를 하나 둘 점령해 나가고 끝내 오다의 수송로를 차단하는 성과를 이룬다. 이것을 호기로 요시모토의 중군도 오와리의 오케하자마 내의 덴가쿠 골짜기에 포진한다. 이때 요시모토의 중군은 약 2만. 한편 이마가와의 상경소식을 들은 27세의 오와리 영주 오다 노부나가는 아버지 오와리의 호랑이 오다 노부히데의 사후 가문내의 반발세력을 제압하고 차츰차츰 영주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1556년 나가라가와 강변 전투에서 장인인 사이토 도산이 자신의 적자 요시다쓰에게 패해 전사하는 사건도 겪긴 했지만 누구보다도 훌륭한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 노부나가는 이마가와군이 자신의 영토를 짓밟고 성까지 진군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시바타 가쓰이에, 하야시 미치카쓰, 니와 나가히데 등의 가신들이 결단을 청했지만 노부나가는 낮잠을 즐기고 아츠모리를 추는등 태평한 세월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첩자들에의해 요시모토의 중군이 덴가쿠 골짜기에 포진했다는 보고를 듣는 순간 노부나가는 태도를 달리해 갑옷을 갖추고 가신들을 독촉하여 성을 뛰쳐 나간다. 요시모토와의 결전에 옥쇄할 각오를 한 당찬 모습이었다. 한참을 달리던 노부나가는 신전 앞에 서서 충분한 군사들이 모이기를 기다리다가 기습에 충분한 병력이 모이자 군신에게 예를 올리고 요시모토의 중군이 포진해있는 오케하자마로 달렸다. 한편 분지에 진을 치고 있는 요시모토의 중군은 그곳에 사는 백성들이 바친 술과 음식에 빠져 갑옷까지 벗어버리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전, 후, 좌, 우의 부대와 분지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최상의 안전지대였고 5월의 여름날씨에 무더운 분지속에 있던 터라 뛰어난 지략가로 이름난 요시모토 조차 중군의 병사들에게 갑옷을 벗고 쉬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들을 노리던 눈빛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오와리의 영주 오다 노부나가와 그를 따르는 용감한 장졸들이었다. 노부나가는 기회를 포착해 전군에게 돌격을 명하고 오직 요시모토의 머리만을 노리도록 지시했다. 처음에 저희들끼리의 싸움인 줄 알았던 이마가와의 중군은 오다군의 기습이란 것을 알았을때 이미 중군까지 적이 돌격해 들어간 뒤였다. 요시모토 또한 단순한 진영내의 다툼인 줄 알았지만 오다군의 기습이라는 황당한 보고를 받고 급히 진을 갖추려 했지만 이미 오다군은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처음 창을 겨눈 핫토리 코헤이타 다다쓰구와 싸울때 뒤이어 달려온 모리 신스케 히데타카의 칼에 목을 잃고 말았다. 이 전투로 인해 이마가와 군은 전원 회군하게 되었고 오다 노부나가의 용맹을 전 일본을 경악케 했다. 또한 오랫동안 이마가와의 휘하에서 인종의 세월을 보내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는 이마가와로 부터 독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라 개명한뒤 이마가와와 손을 끊고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게 된다. 바야흐로 노부나가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양군의 군사동원력을 살펴보면 이마가와군은 4만 5천 정도(그 이하라고 알고있음) 오다군은 총병력은 약 7~8천 요시모토의 중군을 기습한 오다군은 약 4~5천 정도로 알고있으며 이때의 이마가와 중군은 2만~2만 5천이었다. 세력차를 생각하면 오다 노부나가 통일된 오와리 1개, 이마가와 요시모토 통일된 스루가, 돗토미, 미카와 3국을 지배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노부나가의 압승인 것 만큼은 확실하다. 무엇이 이 약한 영주가 거대한 거인을 쓰러뜨리도록 한 것일까? 여러가지를 살펴보자면 일단 노부나가의 지형이용능력과 정보력의 승리였다고 볼 수 있다. 오케하자마는 오와리 내의 영지로 노부나가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 안에 있는 덴가쿠 골짜기는 분지였는데 5~7월 정도의 여름이면 엄청나게 더운 곳이다.(분지의 특성상 더운것은 당연) 하지만 노부나가의 비범함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사실 오다는 처음부터 이마가와를 이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사할 각오를 굳히고 정말로 싸울 때를 포착하면서 끊임없이 첩자를 보내 적진을 탐지했다. 그때 첩자의 보고로부터 "적이 덴가쿠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란 보고를 들었을때 부터 노부나가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곳의 지형은 분지인데가 지금은 오월, 즉 여름이고 갑옷을 벗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러한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갑옷까지 벗고 축 늘어진 군대라면 총대장의 목만 따면 그뿐이었다. 이에 노부나가는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가 이마가와를 급습하여 그 수급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위험한 상황에서도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노부나가의 정보력과 그 정보를 통해 순간적이고 기민한 판단력을 자랑하는 노부나가의 지략이 잘 조화된 전투였던 것이다. 또한 정보의 힘이 가장 컸다는 사실을 노부나가는 그의 논공행상에서 잘 알수 있다. 총대장 요시모토의 목을 벤 모리 신스케야 말로 제일의 공훈을 올린 인물이지만 노부나가는 일단 정보를 가져온자 일번창을 날린자(핫토리 코헤이타)를 먼저 포상한 뒤에야 신스케를 포상했다. 그야말로 노부나가가 얼마나 정보를 중시 여겼는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전투로 인해 노부나가의 명성은 단번에 상승하였고 도쿠가와라는 든든한 동맹자를 얻어 8년동안의 대격전 끝에 미노를 공략하고 1~2년 사이에 상락을 이루어 가히 일본제일의 실력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