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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1-47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31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32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34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35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36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37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38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41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42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47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En aquel tiempo, dijo Jesús a los judíos: «Si yo diera testimonio de mí mismo, mi testimonio no sería válido. Otro es el que da testimonio de mí, y yo sé que es válido el testimonio que da de mí. Vosotros mandasteis enviados donde Juan, y él dio testimonio de la verdad. No es que yo busque testimonio de un hombre, sino que digo esto para que os salvéis. Él era la lámpara que arde y alumbra y vosotros quisisteis recrearos una hora con su luz. Pero yo tengo un testimonio mayor que el de Juan; porque las obras que el Padre me ha encomendado llevar a cabo, las mismas obras que realizo, dan testimonio de mí, de que el Padre me ha enviado. Y el Padre, que me ha enviado, es el que ha dado testimonio de mí. Vosotros no habéis oído nunca su voz, ni habéis visto nunca su rostro, ni habita su palabra en vosotros, porque no creéis al que Él ha enviado.
»Vosotros investigáis las escrituras, ya que creéis tener en ellas vida eterna; ellas son las que dan testimonio de mí; y vosotros no queréis venir a mí para tener vida. La gloria no la recibo de los hombres. Pero yo os conozco: no tenéis en vosotros el amor de Dios.
»Yo he venido en nombre de mi Padre, y no me recibís; si otro viene en su propio nombre, a ése le recibiréis. ¿Cómo podéis creer vosotros, que aceptáis gloria unos de otros, y no buscáis la gloria que viene del único Dios? No penséis que os voy a acusar yo delante del Padre. Vuestro acusador es Moisés, en quién habéis puesto vuestra esperanza. Porque, si creyerais a Moisés, me creeríais a mí, porque él escribió de mí. Pero, si no creéis en sus escritos, ¿cómo vais a creer en mis palabras?».
«Si yo diera testimonio de mí mismo, mi testimonio no sería válido»
Rev. D. Miquel MASATS i Roca
(Girona, España)
Hoy, el Evangelio nos enseña cómo Jesús hace frente a la siguiente objeción: según se lee en Dt 19,15, para que un testimonio tenga valor es necesario que proceda de dos o tres testigos. Jesús alega a favor suyo el testimonio de Juan el Bautista, el testimonio del Padre —que se manifiesta en los milagros obrados por Él— y, finalmente, el testimonio de las Escrituras.
Jesucristo echa en cara a los que le escuchan tres impedimentos que tienen para reconocerle como al Mesías Hijo de Dios: la falta de amor a Dios; la ausencia de rectitud de intención —buscan sólo la gloria humana— y que interpretan las Escrituras interesadamente.
El Santo Padre Juan Pablo II nos escribía: «A la contemplación del rostro de Cristo tan sólo se llega escuchando en el Espíritu la voz del Padre, ya que nadie conoce al Hijo fuera del Padre (cf. Mt 11,27). Así, pues, se necesita la revelación del Altísimo. Pero, para acogerla, es indispensable ponerse en actitud de escuchar».
Por esto, hay que tener en cuenta que, para confesar a Jesucristo como verdadero Hijo de Dios, no es suficiente con las pruebas externas que se nos proponen; es muy importante la rectitud en la voluntad, es decir, las buenas disposiciones.
En este tiempo de Cuaresma, intensificando las obras de penitencia que facilitan la renovación interior, mejoraremos nuestras disposiciones para contemplar el verdadero rostro de Cristo. Por esto, san Josemaría nos dice: «Ese Cristo, que tú ves, no es Jesús. —Será, en todo caso, la triste imagen que pueden formar tus ojos turbios...—Purifícate. Clarifica tu mirada con la humildad y la penitencia. Luego... no te faltarán las limpias luces del Amor. Y tendrás una visión perfecta. Tu imagen será realmente la suya: ¡Él!».
♣ 사랑에 대한 기억상실과 불신 ♣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주신 하느님의 자비를 잊은 채 우상숭배에 빠져 하느님의 진노를 삽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탈출 32,9-10) 그러자 모세는 조상들에게 베푸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타오르는 진노와 재앙을 거두어달라고 절절한 사랑으로 간청합니다(32,12-1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엉뚱하게도 수송아지를 섬겼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메시아로 오신 당신을 믿지 않고 죽이려 드는 유다인을 질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지 않는 이들이 믿음을 갖도록 자신의 사명과 정체성을 알려주시며 믿음을 통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끝내 죄 많은 이들을 위해서 수난을 받으시고 목숨까지 내 놓으셨지요.
오늘날에도 목이 뻣뻣해져 하느님이 아닌 우상을 섬겼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하느님의 일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는 신약의 유다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 목숨도 시간도 재능도 주변 환경과 삶의 터인 온갖 생태계와 사람들도 다 주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눈앞의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는 것이지요.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기에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주님의 모습을 뵙지도 못하며, 주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요한 5,37-38). 그들은 믿음이 없기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5,40).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을 추구하지 않습니다(5,42-44).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봐야겠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하느님이 아닌 내가 중심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받아들일 여백이 없어지고,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는 착각에 빠질 것입니다. 이른바 공주병, 왕자병에 걸려 자신의 구원은 물론 불의와 불동평과 거짓 앞에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나락에 떨어질 것이 뻔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매순간 하느님의 감당할 수 없는 자비를 ‘기억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희로애락으로 점철하는 모든 순간에 함께해주신 하느님의 자비를 잊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지를 온몸으로 드러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다른 이들의 배려와 호의를 기억하는 능력을 상실해버리는 그것이 우리를 더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합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와 사랑과 헌신을 통한 중재자의 역할도 수행해야 함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모세는 우상에 빠진 어리석은 백성에 대한 사랑과 그들의 구원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주님께 간청했지요.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유다인들이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도록 알려주시고, 자기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우리 또한 모세나 예수님처럼 사랑과 화해의 중재자가 되어 세상에 빛을 밝히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믿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받아들이며, 우상을 섬기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복된 날이길 소망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세상을 역행하는 삶
나는 아직도 그 날의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쫓기듯 시작에 다녀왔을 때, 집안은 온통 난장판으로 어질러져 있었습니다.
“어휴... 세... 상에.”
“엄마 맘마... 빠빠빠바.....”
놀라는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는 장바구니 앞으로 달려들었습니다.
보지 않아도 뻔한 일. 나는 눈치 없이 장바구니 앞으로 달려드는 둘째 아이를 잡고
다짜고짜 엉덩이를 때려 줬습니다.
“금방 청소 했는데 고새 이게 뭐야... 응?”
“으 앙!”
아이는 기겁을 하고 울었고 갑자기 숨이 턱 막힌 나는 때리던 손을 멈췄습니다.
사실 아이한테 무슨 죄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나이 마흔이 넘어 본 둘째는 태어날 때부터 발육이 늦었습니다.
아이큐 80이 될까 말까... 게다가 언어장애까지.
그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내 가슴에 못을 박은 아이입니다!
천지분간 못하고 뒤뚱대는 아이를 큰 딸은 그래도, 제 딴에는 언니라고 참 열심히도 챙깁니다.
밖에만 나갔다 하면 짓궂은 남자애들한테 놀림을 당하기 일쑨데도
동생을 부끄러워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날도 엄마한테 야단맞은 동생을 달래려고 놀이터에 갔다가 한바탕 격투를 벌였다는 큰 딸.
그 애가 저녁 무렵 멸치를 다듬는데 저도 거들겠다고 소매를 걷어부치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몸통은 버려두고 머리만 그릇에 소중히 담는 것이었습니다.
“정은아, 멸치는 몸통이 필요한 거지, 머리는 버리는 거야.”
그 말에 아이가 대꾸했습니다.
“치... 나도 알아.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멸치는 머리에 DHA가 들어 있어서 많이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대. 이거 해은이 줄 거야.”
많이 먹고 동생 머리가 좋아졌으면 좋겠다며 모은 멸치머리.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아이를 꼭 껴안았습니다.
천방지축 늦되는 동생이 큰애의 가슴에도 아프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TV동화 행복한 세상 1, 머리가 좋아지는 약]
정은이는 멸치 머리만 한데 모읍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그 행동 안에는 동생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정은이는 해은이의 언니이기 때문에 남들과 다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은이가 하는 일이 정은이가 해은이의 언니임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음을 증언한다.”
얼마 전 한 개신교 신자분과 이야기 하는데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은
시대상황이 그래서 어쩔 수 없으셨던 것이고
하실 수만 있다면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다고 믿고 있으셨습니다.
가끔은 천주교 다니시는 분들에게서도 이런 생각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죽으실 운명이었고, 평생 그것을 알고 사셨습니다.
물론 성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자 시므온이 성모님께 예언한 대로입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예수님도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 죽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시며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셔야 하는 것까지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수난을 당하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야 한다는 내용을 모세와 예언서를 통틀어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운명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고, 예수님은 “제 뜻대로 마시고”라고 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당신의 뜻을 끊임없이 포기하셨습니다.
이것이 당신에겐 따라야 하는 아버지가 계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고통과 죽음을 원치 않지만, 예수님에게는 그것을 원하는 하느님이 계셨기에
그분의 ‘자발적인 죽음’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다 똑같습니다.
고통을 싫어하고 죽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런 본성을 역행하고 있다면
그것을 원하는 어떤 분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누가 아무 이유 없이 수난과 죽음의 길로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태석 신부님이 수단 가장 가난한 곳에 가셔서 당신 생명을 소진한 이유도
바로 그 분의 아버지가 하느님이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세리 자캐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자기 재신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삶의 변화가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우리 행동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언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삶이란 이 세상 사람들의 상식적인 삶과는 역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이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이 돈을 모으려고 하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고,
안 좋은 일이 있다고 불평할 때 우리는 감사할 것이며,
쉬고 싶을 때도 봉사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하신 것은,
당신께서 아버지의 뜻으로 세상의 법을 거슬렀음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삶과 구별되지 않고 있다면
아직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첫댓글 특별하게 태어난 저희 둘째 해은이랑 이름이 같네요. 첫째 이야기도 저희집 이야기같네요.
그런데, 아픔보다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모른답니다.
큰 숲과 깊은 물을 지나니 내 키가 커지고 내 영혼이 깊어졌다는 시인에 공감하게 된 건 덤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