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무학교 전공부를 서너 번 다녀온 뒤로부터 나는 꿈이 생겼다. 홍순명 선생님을 일찍부터 책을 통해 알게 되었고, 교사가 되기 전 잠시 일했던 교육출판사에서 풀무학교에 관한 책을 만들면서 홍선생님을 직접 뵙고 풀무학교 고등부를 몇 번 다녀온 기억으로 풀무는 내게 희망의 거처로 아로새겨졌다. 그리고, 풀무학교 전공부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들었고, 존경하는 선생님과 벗이 이 학교에서 근무하는 이유로 몇 번 이 학교를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3년전이었던가, 특강이랍시고 초대를 받아 짐을 풀기 위해 기숙사에 들어갔을 때 몰려오던 체취를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흙냄새이기도 했고, 시큼한 땀냄새이기도 했다. 빨랫줄에는 흙 묻은 작업복들이 널려 있었고, 작은 도서관에는 종교, 철학, 농업, 환경 관련 서적들이 빽빽했다. 뭐랄까, 농부를 키우는 대학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적인 기품이 서려 있었다. 이런 학교를 밀양에서도 만들어 보는 것. 되든 안 되든, 이 일을 위해 애쓰는 것만으로도 내겐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나에겐 대체로 학교 교육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거의 종말적인 상황에 이른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네 학교 교육이란 ‘사람을 키워보겠다’는 뜻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고, 그저, 경쟁대열의 앞자리에 올라타서 땀 흘리는 삶으로부터 도피시키는 것이 제일의 목적이자 명분이었다. 학교에 무어 대단한 것이 요구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가 아무리 아이를 못살게 굴고, 가둬 놓고 공부를 시키면서 거의 집단가학체제로 굴러가도 용서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우리 교육의 외적 환경을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대략 둘러치는 습속에 반대한다. 식상해서가 아니다. 의식있는 이들에게 만악의 근원으로 지적되는 신자유주의 교육 체제는 이런 집단가학체제로서의 근대 교육이 자기 진화한 한 형태일 뿐이다. 교육 부담의 사적 전가, 교육 주체들간의 경쟁 조장, 자본에 의한 교육의 종속과 상품화, 이것들은 한번도 공공적인 교육 체제를 수립해보지 못했고, 복지 국가 시스템의 근처에도 못 가본 우리로서는 별로 새롭지 않은, 익숙한 것들이다.
나는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우리 교육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산업화가 불러온 농업의 죽음, 경제 성장이 낳은 껍데기뿐인 풍요. 이것들이 우리 교육과 아이들의 삶에 끼친 변화를 그저 ‘어찌할 수 없음’으로 무심하게 괄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교육적 견지에서 산업화와 경제성장은 ‘악몽’인 것이다. 유사 이래 가장 나쁜 교육 환경이 조성되었다.
박정희 시대 이래 우리는 ‘가난’을 박멸해야할 바이러스로 여겼고, ‘농업’은 쪽팔리는 산업이었다. 나눔과 유대, 인간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숨쉬던 지난 시대의 ‘가난’ 은 이제 양극화 시대의 처참한 ‘빈곤’으로 자태변환했다. ‘농업’은 우리 아이들에게 사물과의 진정한 교섭을 가능케했던 가장 교육적인 조건이었다. 농업의 죽음으로 한국 사회는 재생의 근거지를 잃었다.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은 오직 ‘안락한 삶’으로만 나 있는 시스템의 상자 속에 유폐되었다. 이제, 먹고 살 만해진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회의 물밑에서는 극악한 지위 경쟁이 꼭대기까지 차오른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국인의 정신세계에는 ‘안락’에 대한 희구와 그것을 잃었을 때의 공포밖에 없다. 이 시대는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나야 하는지, 영혼의 자유를 위한 조건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뿌리내리기
내 삶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확실히 ‘귀향’이다. 도회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고, 세입자로 부초처럼 떠돌아야만 하는 삶이 서글펐다. 아이가 몹시 아플 때, 맞벌이를 하는 우리 부부가 하루라도 맡길 만한 이웃이 없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자리잡았을 때, 결국은 고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미 익숙해진 도회적 생활방식의 관성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뿌리내린 삶’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잘 알고 있다. 어쨌든 고향에도 나의 ‘일자리’가 있었고, 아내 또한 자신이 도회에서 하던 일을 이어갈 수 있는 교사이기 때문에 나의 귀향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수업시간에 나는 아이들의 삶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들을 중심으로 수업을 준비한다. 거기에 ‘농업’과 식량위기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리 없다. 이대로 가면 먹을거리의 3/4을 사다 먹는 우리나라는 끔찍한 식량공황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극히 현실적인 위기의식을 내 수업을 듣게 된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느끼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 던지는 최종적인 나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앞으로 너희 세대의 삶은 ‘계약과 해지를 반복하는 비정규직의 삶’인가, 아니면, ‘고향에 뿌리내린 독립적 소농의 삶’인가 라는 선택항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말이다.
아무리 찧고 까부는 철없는 고등학생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시근머리는 있다. 자신의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보듯 도회에서 승용차 굴리며 드넓은 아파트에서 그럴듯하게 살아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녀석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답답한 시골이 그래도 인간적이고 정겨운 면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도 또한 잘 알고 있다. “일자리가 없잖아요” “농사 지어서 돈 못 벌잖아요.” 이런 것이다. 결국 ‘돈’ 문제인 것이다.
사실, 나는 진작부터 이런 딜레마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국가가 혹은 지방자치단체가 이런 ‘시골의 삶’을, ‘농업’을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농가소득의 절반에 가까운 몫을 보조금으로 지급하는 것이 미국을 위시한 구미 선진국들의 일관된 정책이 아닌가. 통계청에서 발표한 2009년 농가 평균 소득은 월 90만원 가량이다. 월 90만원, 누가 이 돈으로 시골 들어와서 살겠다고 하겠는가. 국가가 100만원의 보조금을 주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인간 생존의 물질적 기초를 담당하는 농업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공개념해야 하는 것이다. 월 100만원의 소득을 보장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90만원의 평균소득을 거둔다면, 즉 농가당 200만원의 소득이 보장된다면 농사를 지으며 고향에 남겠는가.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적지 않은 아이들이 손을 든다.
희망의 물적 기초-사회신용론과 시민배당
나는 최근에 <녹색평론>에 소개되고 있는 사회신용론과 시민배당에 대한 이야기를 골똘히 지켜보고 있다. 자랑 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진작부터 나는 비슷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녹색평론>에 오래전부터 소개되어 왔던 지역화폐운동을 통해 ‘돈 문제’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조금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이 끔찍한 화탕지옥의 삶의 모습, 그렇지만 오갈데 없이 출구가 막혀버린 듯한 이 막막함은 모두 ‘돈의 지배’로 생겨난 것이다. 최근, 4대강 사업 관련한 르포를 쓰기 위해 취재를 다니면서 나는 깊이 상심하고 분노했다. ‘농지 리모델링’이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준설토 야적장을 제공하면 농민들이 일생 만져보지 못했던 거금이 쥐어졌다. 낙동강변 하천부지에서 채소를 가꾸어 팔던 농민들에게 비닐하우스 폴대를 꽂아 사진을 찍어 시설농 시늉을 해서 서류를 꾸며 내면 몇 배의 보상금을 얹어주었다.
동네에 돈잔치가 벌어지고, 여기 끼지 못한 이들, ‘속일’ 뜻이 없었던 농민들과 분란이 생겨났다. 일생을 함께 살아온 이웃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고소와 고발이 남발되었다. 보상을 받은 농민들끼리 서로 빚잔치를 하고 함께 동남아여행을 갔다 오는데, 보상 대열에서 밀려난 농민은 이를 갈며 분해하는 일이 생겨났다. 위장 보상 대열에 합류했다가 경찰의 조사가 임박하자 자살한 농민도 있었다. 돈이 만들어낸 지옥이었다.
오늘날 대학이 이 모양인줄 알면서도 아이들은 왜 대학을 가기 위해 이 난리들인가. 경쟁은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20여년전보다 훨씬 더 격화되어 거의 총력전 체제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대학을 통과해서 기업에 고용되지 않고서는 ‘돈’에 접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업에 고용되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고있는 것이다.
그러나, 돈은 사실상 ‘헛것’이 아닌가. 태환되는 금이나 지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은행이 통장에 찍어주는 숫자로서만 존재하는 ‘신용’으로만 유통되는 헛것의 돈이 전체 유통 화폐의 90%라고 하지 않는가. 은행은 예금자가 맡긴 돈에서 지급준비율이라는 명목으로 중앙은행에 살짝만 예치해놓고 그 나머지로 새롭게 돈놀이를 해서 마음껏 몇십배의 돈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 오늘날 돈은 분명 과잉인데도, 국가도 기업도 돈이 모자라 끝없이 돈을 빌리고,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몸부림치고, 결국 사람 몫으로 돌아갈 돈을 가로챈다. 시장 경제에서 가장 약한 자리에 있는 농민에게 돌아갈 몫의 ‘돈’은 항상 이렇게 모자라고 그래서 서로 싸운다. 우리는 모두 ‘돈’의 노예이다.
그러므로 ‘돈’이 무엇인지, 오늘날 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새롭게 질문해야 한다. 사회신용론이 거기에 답을 주고 있다. 신용을 사회화하는 것이다. 은행이 아니라 국가가, 지자체가, 혹은 공신력있는 민간의 어떤 단위가 돈을 발행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돈을 모두에게 배당해주는 것이다.
‘돈’을 모두에게 주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를 물을 것이다. 대단히 상식적인 답변을 시도해본다. 누구나 ‘돈’에 접근할 권리가 있다. ‘부’(富)는 자본가와 창의적인 몇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협력한 결과물이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으로 벌어들이는 그 어마어마한 돈은 스티브 잡스와 그에게 투자한 인간들만 가져가서는 안 된다. 스티브 잡스는 백지에서 아이폰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멀리보자면 그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지금껏 이어져온 인류 문명의 가장 첨단의 자리에서, 수학과 정보공학, 시각 예술뿐 아니라, 핵심 부품의 원료를 제공한 제3세계 민중들의 고통 위에서 아이폰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부는 근원적으로 자연의 선물이며, 인류의 축적된 유산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예수의 비유처럼 포도원주인이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든, 저녁 무렵에 도착한 일꾼이든 똑같은 한 닢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분배의 방식이다. 모두다 똑같은 돈을 나눠갖고 그것으로 끝내자는 것이 아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유대 세계에서는 작은 돈이었다. 누구에게나 기본적 필요를 충당할 권리를 주자는 것이다.
홍성군이 되든, 충청남도가 되든, 대한민국이 되든, 그 지역에서 화폐를 은행이 아니라 책임있는 기관이 직접 발행하여 나누어주고, 그 동아리 안에서 유통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돈’이 교환수단으로서의 제 기능을 할 수 있고 사람들은 노예의 삶에서 풀려날 수 있다.
나는 결국 사회신용론에 바탕한 공공통화의 발행과 더불어 가지 않고서는 지역과 풀뿌리를 살리기 위한 모든 노력이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나에게 꿈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풀무학교 전공부’ 같은 학교를 이 지역에서 작고 소박하게나마 만들어 대학을 졸업하고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하는 아이들을 받아 ‘의식있는 농민’으로 길러내는 것, 그리고 그들이 살아갈 수 있을 물적 환경을 제공해 주기 위해 사회신용론에 바탕한 공공통화를 발행할 수 있도록 농업 부흥의 의제를 제기하고 직접 실천하는 것이다. 둘 다 그럴 듯하게 들릴지언정, 꿈같은 소리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다.
가까운 벗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또한 갸웃거린다. 그러나 나는 이반 일리치가 말하듯, ‘기대’(expect)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hope)을 갖고 있다. 누군가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해 보자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 말고는 달리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지역과학교 2011년 3-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