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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적지 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운영자
알기 쉬운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답
● 우리나라 국호인 ‘대한민국’은 어디서 따 왔나?
-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의 국호는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사용한 국호를 그대로 따 온 것이고, 제헌 헌법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 헌법이 뿌리가 되었다.
따라서 ‘대한제국’(大韓帝國,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존속한 조선 왕조의 국호)에서 따 오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 ‘한’은 한자 ‘韓’으로 적고 있지만, 본래 순 우리말이라는 주장도 있다.
●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했다는 뜻인가?
- 그렇다. 1987년 10월 29일 우리나라 헌법을 국민투표로 개정하면서, 헌법의 머리말이라 할 수 있는 헌법의 전문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뿌리가 일제강점기에 중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명문화한 것이다.
그리고 1948년 7월 17일, 제헌 국회가 제정해 공포한 헌법 전문에도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란 내용이 들어 있다. 여기서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는 뜻은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임시정부가 탄생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나?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의 결과로 탄생했다. 3·1독립선언서 첫 줄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밝혔다. 그 독립 국가의 이름을 짓고 그것을 운영할 정부를 만들고 나선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또한 이들 민족 지도자들은 더욱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우리의 정부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마침 이 즈음에 천여 명의 한국 혁명 지사가 머물고 있던 중국 상하이에서는 동제사와 신한청년당의 인사들이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상하이에선 한국의 임시정부가 태어날 여건이 마련돼 있었다.
마침내 1919년 4월 10일 저녁, 각 지방 대표 29명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인 김신부로(金神父路, 현주소 瑞金2路)에 있는 한 집에 모였고, 거기서, 임시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을 구성했다. 그리고 곧 이어 첫 번째 의정원 회의를 열어, 임시정부의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한 뒤에,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그때가 날이 바뀌어 4월 11일. 그리고 이런 사실은 4월 13일에 세상에 공포됐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초 헌법과 초대 각료는···?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초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우리 역사에서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국이자 민주 공화 정부임을 밝혔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한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의 귀천과 빈부의 계급이 없이 일체 평등하다.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신서, 주소 이전, 신체와 소유의 자유를 향유한다.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서 공민의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다.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병역의 의무를 가진다.
제7조 대한민국은 신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나아가 인류의 문화와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한다.
제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한다.
제9조 생명형, 신체형 그리고 공창제를 전폐한다.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년 내에 국회를 소집한다.
대한민국 원년 4월 일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각료>
국무총리(이승만), 내무총장(안창호), 외무총장(김규식), 법무총장(이시영), 재무총장(최재형), 군무총장(이동휘), 교통총장(문창범)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초창기에 어떤 활동을 했나?
- 가장 먼저 임시정부는 국내의 비밀 지방 행정 체계라고 할 수 있는 연통제를 시행했다. 1919년 7월 10일 국무령 제1호로 공포된 이 비밀 조직망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임시정부와 연락하거나 독립운동에 가담할 수 있고, 애국 공채를 발행해 군자금도 전달할 수 있게끔 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와 탄압 때문에, 기대한 성과를 못 낸 채 1921년에는 국내의 연통제가 거의 무너지고 말았다.
이 밖에 통신과 교통, 무기 수송 따위의 일을 하기 위해 교통국을 설치했고, 해외의 동포 사회를 총괄하기 위해 거류민단제를 실시했다. 대표적인 조직으로는 상하이 거류민단과 만주 지역의 대한국민회, 한족회가 있었고, 미주 지역의 대한인국민회와 대한인교민단이 있었다.
두 번째로 외교 활동을 펼쳤는데, 외무총장 김규식을 전권대사 겸 강화회의 파리 주재 대표위원으로 임명해 파리 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토록 한 것과 미국에 구미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토록 하는 등,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인 사안으로 만들었다. (구미위원부는 설립 초기 임시정부의 합법성을 인정받기 위해 미국 행정부를 상대로 외교 활동을 폈는데, 미국 대통령 토머스 윌슨과 국무성의 냉담한 반응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제의 침략과 한국의 입장을 미국 사회에 호소하고 여론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활동했다.)
세 번째로 임시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나라 안팎으로 보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독립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또 사료편찬소를 두어 《한일관계사료집》을 펴내, 한국이 일본과 다르고 독립을 해야 하는 역사적 증거를 국제연맹에 제시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에 국회 성격의 기구가 있었나?
- 입법기관으로서, 1919년 4월 1차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회)’이 구성됐다. 의장으로 이동녕이 선출돼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각 지방을 대표하는 의원들을 뽑았다. 이 날 회의가 곧 제헌국회인 셈이다. 여기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임시의정원은 국토를 되찾았을 때 국회로 고친다고 정했다. 임시의정원은 일체의 법률안과 임시정부의 예산과 결산을 의결하는 외에도 행정부가 집행하는 국정 전반에 대한 사항을 심의 의결하고, 대통령의 선출과 탄핵권까지 가지는 막강한 권한이 부여되었다.
<임시의정원 역대 의장>
초대 이동녕, 2대 손정도, 3대 홍 진, 4대 김인전, 5대 조소앙, 6대 장 붕, 7대 윤기섭, 8대 조상섭, 9대 여운형, 10대 최창식, 11대 이동녕, 12대 이 강, 13대 이동녕, 14대 송병조, 15대 김붕준, 16대 송병조
● 임시정부는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것 하나뿐인가?
- 그렇지 않다. 가장 먼저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1919. 3. 17.)’가 세워졌고, 두 번째로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 4. 11.)’, 마지막으로 국내에서, ‘한성임시정부(1919. 4. 23.)’가 세워졌다. 그런데 러시아 땅의 임시정부는 의회는 있으나 행정부가 없었고, 국내의 한성정부는 행정부는 있으나 의회가 없는 반면, 중국 땅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유일하게 의회와 행정부를 모두 갖췄다. 그리고 1919년 9월 11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헌법을 고쳐 다른 두 임시정부를 흡수 통합했다. 그 밖에 국내에서 움직임에 그쳤던 조직으로는 ‘대한민간정부’와 ‘조선민국임시정부’, ‘신한민국정부’가 더 있었다.
<통합 임시정부 각료>
(1919년 9월 통합 정부의 각료 조직은 한성 정부의 것을 그대로 인수했다. 다만 행정부 최고 수반의 명칭은 ‘집정관 총재’였던 것을 이때 ‘대통령’으로 바꿨다.)
대통령(이승만), 국무총리(이동휘), 내무총장(이동녕), 외무총장(박용만), 군무총장(노백린), 재무총장(이시영), 법무총장(신규식), 학무총장(김규식), 교통총장(문창범), 노동국총판(안창호)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왜 이승만을 최고위직에 추대했나?
-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국내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기독교 세력이 주도해 만든 한성임시정부가 자신을 집정관 총재로 선출하자 그리고 또 이 내용이 세계 통신사인 연합통신(UP)에 보도돼 미국에까지 알려지자, 그때부터 그는 자신을 한국 임시정부의 대통령(President)이라 칭하며 그렇게 적은 명함을 사용했다. (이때까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이승만은 ‘대통령’이 아닌 ‘국무총리’였다.)
어쨌거나 그때 세 군데 임시정부가 모두 이승만을 국무총리나 집정관 총재로 추대한 배경은 이럴 것으로 추정한다. 그 시절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의 상당수가 기독교 신자였는데, 이승만은 한국인으로선 처음으로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기독교인 (개신교 신자) 독립운동가였다. 그런 데다가 그가, 우리나라 독립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미국의 28대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이 총장으로 재직했던 프린스턴 대학교의 졸업생이란 사실 때문에, 각 임시정부의 구성원들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기대를 많이 했다.
* 이승만은 1910년 7월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임시정부 역대 수반>
초대 (국무총리제) 이승만, 2대-5대 (대통령제) 이승만, 6대 (대통령제) 박은식, 7대 (국무령제) 이상룡, 8대 (국무령제) 홍 진, 9대 (국무령제) 김 구, 10대 (국무위원제) 이동녕, 11대 (국무위원제) 송병조, 12대 (국무위원제) 양기탁, 13대-14대 (국무위원제) 이동녕, 15대-16대 (주석제) 김 구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왜 탄핵됐나?
-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돼 임시정부의 진용이 구성되면서, 초대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가 선출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상해에 오지 않고 미국에서 직제에 없는 대통령 행세를 했다. 그래서 수립 초기 임시정부는 어쩔 수 없이 부재 중인 국무총리를 대신해서 상하이에 있던 안창호가 한동안 이끌었다.
그런 중에 이승만은 그 해 9월에 바뀐 임시헌법에 따라 자신의 뜻대로 임시 대통령이 됐고, 이듬해인 1920년 12월에 상하이로 왔다. 그러나 그가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한국에 대한 (국제연맹에 의한) 위임통치 청원 편지(1919. 2.)로 인해, 신채호 등 여러 사람한테서 심한 질책과 공격을 받고는, 1921년 5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마침내 1925년 3월에 이승만은 임시 대통령직에서 탄핵됐다.
[참고 자료] 1919년 8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와 워싱턴 구미위원부 이승만 사이에 오간 두 통의 전문 내용
<1919. 8. 25. 상하이에서>
구미위원부 이승만 각하;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 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지금은 각하가 집정관 총재 직명을 가지고 정부를 대표하실 것이요,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사를 하시면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려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안 창호
[답장] <1919. 8. 26. 워싱턴에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창호 씨;
“우리가 정부 승인을 얻으려고 전력하는데, 내가 대통령 명의로 각국에 국서를 보냈고 대통령 명의로 한국 사정을 발표한 까닭에, 지금 대통령 명칭을 변경하지 못하겠소.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한테 돌아갈 것이니, 떠들지 마시오.”
- 워싱턴 이승만
● 백범 김구는 언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지위에 있었나?
- ‘임시정부 청사의 문지기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상하이로 망명한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직후 현지에 도착한 관계로 초창기에는 아무 직책도 맡지를 못했다. 그러던 그가 처음으로 중책을 맡게 된 것은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통합 단일 정부가 되면서부터이다. 첫 직책은 임시정부와 요인을 지키고 일본 첩자를 색출해 처단하는 경찰·정보 업무를 지휘하는 경무국장, 이어 1922년 9월에 내무총장을 거쳐, 1926년 12월에 비로소 임시정부 최고위직인 국무령 직에 취임했다. 그 뒤 임시헌법 개정에 따라 국무위원, 군무장 직을 맡기도 했다가, 1940년 10월, 마침내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주석 제도가 생기면서 그 자리에 올라 환국 때까지 그 직을 이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위상이 높아진 때가 있었다면 언제인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위상이 한껏 높아진 때가 세 번 있었다. 그 첫 번째가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 사쿠라다문 앞에서 히로히토 일본왕이 탄 마차에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의거 때이고, 두 번째는 같은 해 4월 29일 상하이 홍구공원(虹口公園, 현재 魯迅公園)에서 일본 거류민들을 모아놓고 전승 기념 행사를 벌이던 일본군 수괴들에게 폭탄을 던져 거꾸러뜨린 윤봉길 의거 때이다. 거사의 주인공들은 김구가 임시정부 안에서 조직하고 지도한 한인애국단의 단원이었다. 한국인의 강인한 독립 정신과 저항 정신을 온 세계에 과시한 이 양대 의거는 국내외 동포 사회는 물론 중국인들에게도 대단한 감격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국민당의 영수 장졔스(蔣介石)는 중국의 백만 군대가 못한 일을 단 한 사람의 한국인이 해냈다고 말했다. 이로써 그 동안 침체했던 한국 독립운동은 활력을 되찾게 됐다.
그리고 세 번째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크게 신장됐던 계기는, 일본군에 징집돼 중국 땅에 와 있던 수십 명의 한국인 학병이 70일 동안 장장 6천 리를 걸어서 1945년 1월 31일 충칭(重慶)에 있던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온 때이다. 일본군대를 탈출한 한국 지식 청년들이 임시정부를 찾아온 사건은 국제적인 뉴스가 됐다. 이미 30여 년 간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던 터에, 자신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빼앗긴 나라의 주권을 되찾겠다고, 사선을 넘어온 이들의 행동은, 한국인들의 식을 줄 모르는 독립에 대한 의지와 한국 임시정부의 위상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27년 내내 상하이에만 있었나?
-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가 처음 수립된 1919년 4월부터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 의거를 벌인 1932년 4월까지 13년 동안만 상하이에 있었다. 그런데 윤 의사 의거로 큰 타격을 받은 일본의 군경이 프랑스 조계지까지 들어와 마구잡이로 한인들을 잡아가는 바람에, 임시정부는 급히 항쩌우로 옮길 수밖에 없었고, 요인과 가족들 역시 항쩌우나 쟈싱(嘉興) 같은 인근 도시로 숨어들어야 했다. 그리고 5년 뒤인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고 일본군대가 중국 국민당정부의 수도인 난징을 공격하자, 임시정부와 요인 그리고 이들 가족 백 수십 명은 본격적인 피난 길에 오른다. 그러나 임시정부와 대가족은 중국 땅 어디에서도 안전할 수가 없었다. 내륙으로 피난해 잠시 머물라치면 곧 이어 일본군대가 그 곳까지 쳐들어오고, 그러면 다시 안전한 다른 도시로 급히 이동해야만 했다. 이처럼 중국 남부 여러 도시를 전전하는 힘겨운 유랑생활은, 일본군의 육상 진입이 거의 불가능한 내륙 천혜의 요새 도시, 충칭(난징을 탈출한 중국 국민당정부가 전시 수도로 삼은 곳)으로 들어가 중국 국민당정부 곁에 머물기까지 3년이나 계속 됐다.
<임시정부의 이동 순서>
상하이(上海상해 1919. 4.)→항쩌우(杭州항주 1932. 5.)→쩐쟝(鎭江진강 1935. 11.)→창사(長沙장사 1937. 11.)→광쩌우(廣州광주 1938. 7.)→류쩌우(柳州유주 1938. 11.)→치쟝(綦江기강 1939. 5.)→충칭(重慶중경 1940. 9.)→서울(1945. 11.)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군대를 가지고 있었나?
-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지방에서 독자적인 무장 항일 운동을 하던 독립군들은 통합 조직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으나, 주변 국가들의 비협조와 일본의 방해로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강한 군사력을 지닌 독립군을 양성해 독립전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이때 광복군은 인원과 부대 편제를 갖춰 창설한 것이 아니어서, 그 뒤 광복군이 존립하는 내내, 국내와 만주 지역, 중국 관내에 있는 한인 장정을 비밀리에 불러 모으는 초모 활동이 계속됐다. 그 결과 중국에서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한인 병사들도 한국광복군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들을 장교로 길러 내기 위해 산시성 시안(西安)에 한국청년훈련반을 두었고, 안휘성 린첸(臨泉) 지역에는 일본군대를 탈출한 한인 사병들을 모아 광복군 간부로 양성하기 위해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을 두어 역시 장교로 길러 냈다.
● 한국광복군의 활동상은?
- 광복군은 임시정부 산하의 정규군이다.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독립군과 중국 대륙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 청년들이 중심이 됐다. 그러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맨 처음 부딪친 어려움은 군인이 될 만한 한인 청년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래서 적지의 동포를 포섭하고 빼내는 초모공작이 가장 절실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이 창설되기 전부터 조성환을 주임으로 하는 군사특파원들을 시안(西安) 방면으로 파견해 초모공작에 착수했다. 이 시안공작대의 활동은 총사령부 성립 뒤에도 계속돼, 그 성과가 이듬해 1941년 초에는 광복군 제5지대 편입으로 나타났다. 또한 같은 해 3월에는 강남 일대의 초모공작을 위해 김문호를 단장으로 하는 특파원들을 쟝시성 상아오(上饒)에 파견했다. 이러한 초모공작의 결과 총사령부 창설 1년 만에 광복군은 창설 당시의 10배에 달하는 300여 명의 인원을 확보했다. 이들을 토대로 한국광복군은 세력을 키우던 중, 1942년에 들어서서 중국 군사위원회와 나눈 협의에 따라, 이미 1938년 10월에 조직돼 대일 전투에 참여한 적이 있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흡수해 3개 지대로 개편한 뒤, 1942년 5월 이청천(일명 지청천, 본명 지대형) 총사령관 아래 부사령(제1지대장 겸임) 김원봉, 제2지대장 이범석, 제3지대장 김학규, 참모장에 김홍일을 임명했다. 한국광복군이 조선의용대를 흡수함에 따라 좌우 계열이 통합한 것만이 아니라 ‘국군’으로서 위상을 굳혔다.
● 한국광복군은 일본 군대와 전투를 벌였나?
- 1940년 9월 충칭에서 창설한 한국광복군은 장졔스 국민당정부의 지원과 규제를 동시에 받으며 일본 패망 때까지 대일 항전 활동을 펼쳤다. 직접 전선에서 총을 들고 적과 전투를 벌이진 않았지만,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 초모공작을 폈고, 교육과 훈련, 선전 활동 그 밖에 대적 심리전을 수행했다.
● 한국광복군은 연합군과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한 적이 있는가?
- 있다. 한국광복군은 연합군과 함께 부분적으로나마 대일작전을 수행했다. 인도·버마 전선에 파견한 공작대는 영국군을 도와 전단 살포 같은 심리전에 참여했는데, 특히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여 수집·정리한 정보를 바탕으로 영국군 1개 사단을 일본군 포위에서 벗어나게 했다. 또 광복군은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의 전략첩보기구와 합작해 OSS훈련을 전개했다. 일본군대를 탈출한 한인 학병들이 중심이 된 광복군 제2지대는 시안에서 3개월 간 미군한테서 특수훈련을 받은 뒤,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한반도에 비밀히 침투하는 국내진입작전을 미군과 합동으로 막 전개하려는 순간 일본이 항복해, 안타깝게도 이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광복군 제3지대도 허난성 리황(立煌) 지역에서 1개월 간 이러한 훈련을 받았고, 제1지대는 충칭에서 훈련 대기 중에 해방을 맞았다.
* 한미군사합작의 이 작전이 계획대로 성공했더라면, 한국광복군은 떳떳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우받게 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연합국으로부터 망명정부로 인정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해방 뒤 한반도가 삼팔선으로 갈려 남북한이 미군정이나 소군정의 지배를 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같은 겨레끼리 싸우고 죽이는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엔 마침내 독립선열들의 바람대로 평화로운 통일 민주 국가가 들어섰을 것이란, 가정을 떨칠 수가 없다.
● 광복군으로서 임무 수행 중에 순국한 대원이 있나?
- 일본군대를 탈출한 학병 출신 광복군이었던 제3지대 한성수(韓聖洙, 일명 李想一) 대원이 작전 중에 체포돼 일본군 감옥에서 순국했다.
1921년 8월 18일 신의주 낙청동 102번지에서 한일현의 장남으로 태어난 한성수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정주(定州)의 오산고보를 거친 다음, 1941년 일본 전수대학 경제학과에 입학, 그 해 여름 정숙저와 결혼했다. 그리고 1944년 1월 20일 일제의 학도병 소집 명령으로,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제50부대에 강제 입대해, 그 해 2월 말 중국 쉬쩌우(徐州)에 도착했다. 3월 말, 일본군 병영을 탈출해 푸양(阜陽)에 있는 광복군 제6초모분처에 합류, 10월 말 적 지구 내 초모공작을 위해 다른 동지들과 함께 상하이로 밀파됐다. 거기서 광복군에 입대시킬 청년들을 모집하는 데 성공한 뒤, 군자금을 확보하던 중에 불행히도 1945년 3월 13일 새벽, 친일 부호의 밀고로 일본군 특무기관원 10여 명에게 기습을 당했다. 이때 함께 있던 7명의 대원이 체포됐고, 그들은 상하이 주둔 군법회의에서 비공개 재판을 받았다.
재판장이 “너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학병 출신인데, 왜 국어(일본어)를 쓰지 않는가?” 하고 묻자, 한성수는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는 일어를 국어라 하지만 내 국어는 아니고 원수의 말이다. 나의 국어는 한국말일 뿐이다.” 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그는 1945년 5월 13일, 조국 광복을 3개월 앞둔 채, 난징형무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죄목으로 처형됐고, 다른 대원들은 제각기 수년씩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은 한국광복군과 어떻게 다른가?
- 우선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기 두 해 전인 1938년 10월 10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武漢)에서 김원봉을 총대장으로 하여 창립됐다. 그리고 며칠 뒤, 중국 내륙의 최대 거점 도시인 이 지역을 향해 일본의 백만 대군이 쳐들어오자, 조선의용대의 백여 명 대원은 중국 군대와 함께 우한방위전에 참가했다. 그러나 며칠 못 가 방어선은 일본의 엄청난 화력에 속절없이 무너졌고, 조선의용대원들 또한 우한이 함락되기 직전 사방으로 흩어져야만 했다. 하지만, 이때 치른 전투는, 중일전쟁 때 조선인들로 구성된 항일 부대가 처음으로 일본 군대와 맞서 싸운 역사적인 사건이 됐다.
총대장 김원봉은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조선의용대 대본부를 이끌고 꾸이린(桂林)까지 철수했고, 그 해 12월부터 1941년 3월까지 조선의용대 본부를 그 곳에 두었다. 중국 국민당 군대를 쫓아 다른 전투 지역으로 이동한, 남은 두 개 지대는 이후 중국 각 방면에서 유격 선전 활동을 계속 벌였다.
1941년 7월, 중국 북부 지방에서 활동하던 의용대원들은 조선의용대 화북(華北)지대로 이름을 바꾸고, 팔로군, 신사군과 함께 여러 작전에 참가했다. 특히 중국 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팔로군과 함께 했던 태항산(太行山) 마전장(麻田莊) 전투에선 많은 대원이 격렬한 전투를 치른 끝에 장렬히 전사했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 총대부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고, 김원봉은 그 해 12월,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그 해 7월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 그렇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은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크게 자극했다. 일본의 비행기들이 전혀 방비가 없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것이다. 항만 안에 정박 중이었던 미국 함선들을 비롯해서, 비행장과 해군 공창이 두 시간 동안에 완전히 파괴됐다. 이튿날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에 대해 즉각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일본을 뒤따라 미국에 선전포고했고, 이에 맞서 미국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중국, 소련 등 세계 40여 개 나라는 연합국을 형성해 일본과 싸웠고 끝내 승리했다. 이것이 1945년 8월 15일까지 벌어진 태평양전쟁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
우리는 3천만 한국인과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 영국, 미국, 소련, 카나다, 호주와 기타 제국의 대일 선전을 삼가 축하한다. 그것이 일본을 격파하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특별히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한국의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침략을 반대하는 진선(陣線)에 참가하였으니, 1개의 전투 단위로써 축심국(軸心國/일본,독일,이탈리아)에 선전(宣戰)한다.
2. 1910년의 합병조약과 일체의 불평등조약의 무효를 거듭 선포하고, 침략을 반대한 국가들이 한국 안에서 얻은 합리적인 기득권익을 존중한다.
3. 한국과 중국, 서태평양으로부터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한다.
4. 일본 세력 아래 조성된 창춘(長春)과 난징(南京) 정권을 절대로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스벨트·처칠 선언의 각 항이 한국의 독립을 실현하는 데에 적용되기를 견결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진영의 최후 승리를 축원한다.
대한민국 23년 12월 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 구, 외무부장 조소앙
* 성명서 발표 날짜는 12월 10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떤 정당이 주도했고 기본 이념은 무엇인가?
-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하이에서 이동녕, 김 구, 조소앙, 이시영, 안창호 등 26명에 의해 조직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정당은 ‘한국독립당’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핵심 요인들이 참여한 이 정당은 독립 투쟁 전선의 통일과 지방 파벌의 청산을 목표로 삼았다. 특히 이동녕, 안창호 등은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채택해 당의와 당강을 기초했고, 항일 투쟁을 펴 나갔다. 직할 단체로는 상하이한인청년당과 상하이한인애국부인회, 상하이한인여자청년동맹, 상하이한인소년동맹 등을 두고, 지방 조직도 설치했다. 김구의 주도 아래 강력한 항일 투쟁을 벌이던 중, 1932년 4월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로 김구를 비롯한 주역들이 몸을 숨기고 안창호가 체포돼 한국으로 압송되자, 당은 버텨 내기도 힘들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김구가 1935년 11월에 ‘한국국민당’을 만들었다. 그 뒤 임시정부가 충칭에 자리잡게 되자, 1940년 5월 9일, 김구의 ‘한국국민당’,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이청천의 ‘조선혁명당’이 통합해, “한국독립당”으로 다시 창당되고, 이 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집권당 구실을 했다.
<삼균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며 독립운동 진영의 이론가로 활동한 조소앙이 제창한 민족주의적 정치 사회 사상으로, ‘삼균’이란 개인간, 민족간, 국가간 균등을 말하고,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균등의 실현으로 삼균을 이루어, 세계일가(世界一家)의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평등주의 사상이다. 독립운동 내부의 좌우익 사상을 지양 또는 종합해서 독립운동의 기본 방략과 미래 조국 건설의 지침으로 삼기 위한 사상이다. 1918년 무렵부터 싹트기 시작해, 1931년 임시정부의 ‘대외선언’에서 체계가 성립됐으며, 1941년 11월 28일 발표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 기본 이념과 정책 노선으로 확정됐다.
<한국독립당의 주요 인사>
(집행위원장) 김 구 / (집행위원) 홍 진, 조소앙, 조시원, 이청천, 김학규, 유동열, 안 훈, 송병조, 조완구, 엄항섭, 김붕준, 양 묵, 조성환, 박찬익, 차리석, 이복원 / (감찰위원장) 이동녕 / (감찰위원) 이시영, 공진원, 김의한
● 민족주의 계열의 3당 통합 과정에서 발생한 남목청 사건이란···?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후난성 창사(長沙)에 머무는 동안, 독립운동계 인사들은 다시 민족진영의 통합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38년 5월 7일, 광복진선 3당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조선혁명당 본부가 있는 남목청 9호 2층집에 모였다. 임시정부 수호파인 한국국민당의 김구와 조완구, 조선혁명당의 이청천과 현익철, 한국독립당의 홍진, 조소앙 그 밖에 유동열 등 몇 사람이 더 참석했다. 그런데 이들이 구체적인 토의를 한창 진행하고 있을 때, 난데없이 괴한 한 명이 회의장으로 뛰어들어와 권총을 난사했다. 괴한이 쏜 첫 탄환에 김구가 먼저 심장 근처를 맞고 쓰러졌다. 이어 날아온 총알들은 현익철과 유동열을 차례로 쓰러뜨렸고, 마지막 총알은 실전 경험이 많아 재빨리 몸을 피할 수 있었던 이청천의 손등에 가벼운 상처만을 입혔다. 중상을 당한 세 사람은 아래층에서 달려온 청년 당원들에 의해 급히 병원(湘雅醫院)으로 실려 갔지만, 현익철은 이미 운명했고, 유동열은 경상이었다. 그리고 김구는 한 달 넘게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중태였는데, 완치 뒤에도 그때 박힌 총알 하나를 살아생전 가슴 속에 안고 지내야 했다.
한편, 범인 이운한은 며칠 뒤 중국 경찰에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일본군이 창사를 침공할 때 탈옥 도주했다. 사건 배후나 범행 동기로는 일제의 책동일 가능성이 많지만,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좌우 통합 정부였나?
- 1941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고, 다음 달 12월에는, 일본 비행기들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응해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어, 1943년 11월에는, 미국, 영국, 중국 세 나라 국가 영수들이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 한민족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하는 선언서에 서명하는 등, 이 즈음, 한국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국제 정세가 긴박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 중일전쟁 이후 김구가 이끄는 광복진선(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과 김원봉이 이끄는 민족전선(조선민족전선연맹) 양쪽을 모두 지원하던 중국 정부가 효율적인 대일 투쟁을 위해서는 서로 단합해야 한다며, 양 진영의 통합을 종용했다. 그 결과, 1944년 4월 22일, 마침내 한민족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뜻 깊은 일이 충칭 오사야항 청사에서 이뤄진다. 이 날 열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제36회 회의는 비상시국에 따라 연립정부 형태를 갖추고 주석의 권한을 더욱 확대하는 내용으로, 임시헌법을 개정했다. 이로써, 한국의 임시정부는 망명 세력 전체가 오랫동안 바랐던 대로 모든 정파의 인사가 고루 참여하는 임시정부로 다시 태어나게 됐고, 대내외로도 그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이 마지막 임시정부 체제는 일제의 패망으로 환국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됐다.
제5차 개헌에 따라 국무위원과 각 부서장은 한국독립당을 비롯해,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의 당원 가운데서 고루 뽑혔다.
<좌우 합작 통일 임시정부의 각료 명단>
(주석) 김 구 / (부주석) 김규식 / (국무위원) 이시영, 조성환, 조완구, 차리석, 황학수, 박찬익, 조소앙, 김붕준, 김원봉, 장건상, 성주식, 유 림, 김성숙, 조경한, 엄항섭, 최동오, 유동열, 신익희, 김상덕
* 김구는 이때의 경험과 확신으로 외세에 의해 분단된 남한과 북한의 통일이 대화로써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이 추구하는 남한만의 단정 수립을 반대하고, 1948년 4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는 등, 1949년 6월 26일 서거 때까지, 남북협상을 통한 한반도의 자주 통일 국가 건설에 대한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방된 조국의 당면 과제가 무엇이라고 여겼을까?
- 조국의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9월 3일 충칭 청사에서 다음과 같은 임시정부 당면정책을 마련했다. 특히 이 가운데 마지막 14항은 친일파 청산 의지를 밝힌 것이어서, 오늘날 정부(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민간 단체(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진행하고 있는 친일파 조사 사업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를 제공한다.
<1945년 임시정부 당면정책>
1. 본 임시정부는 최대한 빨리 입국한다.
2. 우리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혈전한 중국, 미국, 소련, 영국 등 우방 민족과 절실히 제휴하고, 연합국 헌장에 따라 세계 일가(一家)의 안전과 평화를 실현함에 협조한다.
3. 주요 연합국인 중국,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5개 강국에 대하여 먼저 우호협정을 체결하고 외교도경(外交途經)을 따로 덧붙인다.
4. 동맹국의 군대가 주둔하는 동안 필요하고도 적절한 모든 일들을 적극 협조한다.
5. 평화회의와 각종 국제집회에 참가하여 한국이 마땅히 가지고 있는 발언권을 행사한다.
6. 국외 임무의 결속과 국내 임무의 전개가 서로 접속되매 필수한 과도 조치를 집행하고, 전국적인 보통선거에 의한 정식 정권이 수립되기까지는, 국내 과도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국내외 각층 각 혁명당파, 각 종교집단, 각 지방대표와 저명한 각 민주지도자의 회의를 소집하도록 적극 노력한다.
7. 국내 과도정권이 수립된 즉시 본 정부의 임무는 완료된 것으로 하고, 본 정부의 직능과 소유 물건 전부를 과도정권에게 넘긴다.
8. 국내에서 건립된 정식 정권은 반드시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를 원칙으로 한, 신 헌장에 의하여 조직한다.
9. 국내의 과도정권이 성립되기 전에는 모든 국내 질서와 대외 관계를 본 정부가 책임지고 유지한다.
10. 교포의 안전과 귀국, 국내외에 거주하는 동포의 구제를 신속히 처리한다.
11. 적(일본)이 만든 모든 법령의 무효와 새 법령의 유효를 선포하는 동시에, 적의 통치 아래 발생한 모든 형벌자를 사면한다.
12. 적(일본)의 재산을 몰수하고 적의 교민(일본인)을 처리하되, 동맹군과 협상을 진행한다.
13. 적군(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출전한, 한국 적을 가진 일본군인을 국군으로 편입하되, 동맹군과 협상해 진행한다.
14.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에 대하여는 공개적으로 엄중히 처분한다.
대한민국림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김 구
● 일본의 항복으로 한반도가 해방됐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망명정부로서 인정을 받았나?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통치권을 행사할 국토와 국민이 없이 다른 나라에서 제한적으로 활동을 한, 말 그대로의 임시 정부이다. ‘대한제국’과도 시간적 연속성이 없고 주체 세력과도 이념이 달랐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망명정부’라고는 할 수가 없다.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은 황제가 빼앗긴 대한제국을 넘어 국민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을 세웠다. 그리고 이를 운영할 정부를 만들었다. 이것은 국민의 뜻이요, 독립운동가들이 그 뜻을 실천해 낸 열매였다. 국제적으로는 주권국민의 대표기관(정부)이고, 또 대내적으로는 한민족 독립운동의 통할기구로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망명정부의 구실을 다 했다.
그럼에도, 일본 항복 직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1945. 9.부터 1948. 8. 15.까지, 38°선 이남 지역에서 군사 통치)’을 설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한민족을 대표하는 망명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평생을 나라 밖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환국할 수밖에 없었고, 한국광복군 역시 해산돼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김구 주석은 “내가 들어왔으니 정부도 들어온 것.”이라고 말했고, 이어 “국제 관계에서는 개인 자격일지라도 국내 동포의 처지에서는 엄연히 정부”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민은 망명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돌아온 것으로 여기고, 임시정부가 환국한 지 26일 만인 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를 열었다. 비록 강대국들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조국의 3천만 동포는 임시정부 27년의 위업과 노고를 기꺼이 인정했던 것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은 적이 있었나?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계기로 작용한 것이 1919년 1월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파리 강화회의였다. 임시정부는 첫 번째 외교 활동으로, 김규식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을 이 곳에 보내 한국의 독립을 청원했지만 승인받지는 못했다. 미국에 대한 외교 활동은 구미위원회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그 시절 미국은 전통적으로 친일적인 방향에서 동양의 평화를 도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늘 냉담했다.
다만 중국에 대한 첫 번째 외교 성과는 1921년 11월 3일에 이뤄졌다. 임시정부의 정부 특사 신규식은 중국 호법정부의 임시 대총통 쑨원(孫文)을 광쩌우에서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받았다. 그리고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이 이끌던 소련 정부가 1920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200만 루불의 독립운동 지원 자금을 비밀리에 약속하고는 그 가운데 60만 루불을 먼저 제공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한국의 임시정부를 인정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일선전포고를 한 지 수 개월 뒤인 1942년 4월에는 중국 국민당정부 국방최고위원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안을 가결했고, 1944년 6월에는 프랑스와 폴란드의 망명정부가 주중대사관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통고해 왔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나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끝내 승인하지 않았다.
1943년 12월 1일 열강들이 카이로선언을 발표하면서 식민지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덕분이다. 간혹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열강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고 낮추어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남의 나라를 빼앗아 부를 누리는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 해방운동과 독립운동을 벌이는 국가와 정부를 승인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은 바로 제국주의 시각에서 나온 말일 뿐이다.
● 일제강점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존재한 의미는 무엇인가?
- 나라 안팎의 수많은 학자가 그 존재 의미를 여러 가지로 갈파하고 있지만, 대만국립정치대학의 후춘혜 교수가 한 다음의 말이, 가장 짧으면서도 핵심을 짚은 그래서 우리 모두 귀담아 들어야 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존재했던 의미가 아닐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에서 27년 동안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 업적에서 찾아낼 수 있는 가장 큰 의미는, 대한 민족은 어떠한 어려움에도 꿋꿋이 견디어 나가는 불요불굴의 정신과 일본 제국주의에 결단코 투항하지 않는다는 자주독립의 정신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 것입니다. 아울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나라 밖 중국에서 27년 간 존재하고 분투했다는 사실은, 일본이 그 기간 동안 한국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계 식민지 국가들은 모두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 목표는 자주국가, 근대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우리도 독립운동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근대국가를 세웠고, 이를 운영할 정부(임시정부)와 의회(임시의정원)를 조직하였다. 27년이나 되는 긴 기간 동안 정부 조직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식민지 해방 투쟁을 벌인 나라는 세계에서 오직 대한민국뿐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새는 지금 어디에 있나?
-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으로, 그 해 11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지사들이 중국 충칭에서 귀국하면서, 두 기관이 가지고 있던 중요 문헌들을 정리해, 임시정부의 문헌과 물품을 넣은 상자 열 개, 임시의정원의 문헌과 물품을 넣은 상자 세 개, 합해 모두 열세 개의 가죽 상자를 가지고 환국했다.
그때부터 1946년 1월 중순까지는 백범이 묵고 있던 서울시 경교장에 그것들을 간직했다가, 그 뒤 몇 차례 보관처를 옮기는 과정에서, 의정원의 문헌과 물품 상자 세 개는 의정원의 후신인 ‘비상정치회의’ 본부로 옮기고, 임시정부의 정치문헌과 물품이 든 상자 열 개만은 그 해 5월에 다시 정리해서 상자 열 개를 여덟 개로 만든 뒤, 6월에 임시정부 비서처에 근무하는 조남직의 혜화동 주택으로 옮겨 보관했다. 그 뒤 조남직은 가정 사정으로 혜화동에서 성북동으로, 성북동에서 다시 돈암동으로 두 차례 이사를 했는데, 보관물도 그때마다 함께 따라다녔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물품 관리의 총책임자인, 전 임시정부 국무위원 조경한 지사는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가 1953년 여름 서울로 돌아와, 그 해 10월 조남직 가족이 살고 있는 돈암동 집을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그리고 그때 그 곳에서 임시정부의 문헌과 물품이 모두 사라진 것을 알게 됐다.
조남직의 부인이 말했다. ‘육이오동란 중 임시정부 보관물을 안채에서 일 미터쯤 떨어진 작은 창고 안 밑바닥에 깔아두고, 그 위에다가 집안의 각종 세간을 쌓아 두었었다. 남편은 북으로 끌려갔고, 팔순 시부모와 자식과 함께 갖은 험난을 겪으며 지냈다.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이 서울을 철수하게 되자, 모자는 병든 시부모 두 분만 집에 남겨 놓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다시 올라와 보니, 그 사이에 이 집이 소이탄을 맞아 창고가 완전히 불에 타 없어졌고, 그 안에 두었던 보관물도 당연히 그때 다 사라졌다.’
애국지사 조경한은, 임시정부 물품을 보관했던 조남직 주택의 여러 정황이 소이탄과 같이 화재를 일으키는 포탄을 맞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가족의 말을 의심할 수도, 그 이상 추궁할 수도 없는 처지라서, 깊은 상심만 안고 돌아왔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새는 임시정부의 공인함에 넣어져 따로 보관되다가, 1·4후퇴 때 경기도 안성에 있는 한 민가 지하로 옮겨져 보관되던 중 역시 소실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인함은 손에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상자인데, 6·25사변 전에는 조경한 지사가 보관하고 있다가, 사변 때 피난을 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면서 당시 혜화동에 살고 있는, 동지며 같은 계열인 조태국(趙泰國)에게 맡겼다. 그리고 조태국은 1·4후퇴 때 자신이 맡아 가지고 있던 임시정부의 공적인 물품과 사적인 물품의 절반을 신당동에 사는 같은 동지 유선기(柳善基)에게 다시 맡겼다. 이때 임시정부의 공인함을 포함한 물품들을 넘겨 받게 된 유선기는 서울을 떠나는 피난 길에 자신이 맡은 물품들을 경기도 안성군 읍내에 사는 한 친구 집 지하에 묻었다. 그런데 그 뒤 기이하게도 하필이면 그 장소가 (로켓탄) 공습을 당해서, 임시정부 국새를 비롯한 공인이 모두 재로 바뀌거나 부서져 버렸다고, 유선기는 1953년 6월 조경한에게 보고하였다.
이상이 국새를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귀중품과 독립운동 사료로서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헌들이 세상에서 사라진 전말이다.
(집필자 이봉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