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 최정
반 토막 외
졌다
완벽하게 졌다
매년 기록을 깨는 폭우와 폭염
풀은 비가 내리는 대로 자라고
벌레들은 어찌 점점 많아지는 걸까
비가 와서 일 못하고
너무 더워 나갈 엄두는 안 나고
감자 반 토막
미니 단호박도 반 토막
고추는 따기 전에 전멸
사실 갱년기 내 몸도 반 토막
덩달아 머리숱도 반 토막
지구가 몸살 중이라
반 토막만 걷어 가라 하니
유구무언有口無言
이왕 토막이 난 김에
내 마음이라도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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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
비가 올 때마다 물을 먹어
커질 대로 커지더니
간신히 들어 올릴 만큼 커지더니
속이 꽉 차 더는 불릴 수가 없는지
꼭지 부근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저리 상처가 났으니 썩어 버리겠다 싶었다
불볕이 며칠 이어지자
늙은 호박은 투명한 진액을 뱉기 시작했다
진액을 잘게 이어 붙여 상처를 덮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스스로 꿰맸다
엄마는 늙은 호박을 장롱 위에 올려 두고
겨우내 노란 호박죽을 끓였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이깟 고단함쯤은 거뜬하게 꿰매야 한다는 듯
여자에겐 이만한 게 없는 겨
삭신이 쑤신다며 호박죽 쑤며
농사에 지친 몸을 노랗게 풀던 엄마
나도 해마다 늙은 호박을 심는다
푹 끓여 내린 호박즙 엄마처럼 노랗게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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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정
충북 충주 출생으로 2008년 시집 『내 피는 불순하다』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산골 연가』, 『푸른 돌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