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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수행이다
영적의지를 가지고 영적수행을 하는 삶
의도, 의지, 몰두, 봉헌, 헌신, 예배.. 신에 내맡김
그리고 BEING
내안의 참나를 만나다 6월 30일 정리
길은 곧고 좁다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Gloria in Excelsis Deo!
봉헌(신에 내맡김)에 의해 우리의 삶은 기도가 되고 우리는 그로써 자신과 타인의 삶을 축성합니다.
머리말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서의 영적진실에 대한 진지한 헌신자라면 알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길은 확인할수 있을뿐 아니라 주관적으로 경헙됩니다. 그래서 헌신적 비이원성의 길은 핵심적 본질의 명료화를 통한 깨달음에 이르는 직선경로이며 이 길은 (깨닫겠다는) 결정,의도의 봉헌(신에 내맡김)에 의한 활성화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서문
'이 책의 내용은 진정으로 몰두한 영적노력을 위해 입증가능한 진실의 실용적 적용을 정제한 것이며 이 책은 그러한 목적에 봉헌됩니다'
오! 주님 모든 영광이 당신께 있습니다.
Gloria in Excelsis Deo!
서론
영적진화에 이르는 가장 곧은 길은 '존재하는 전부의 기층인 비선형적 신성에너지의 광휘인 의식의 장 그 자체를 통'한다.
비선형적 참나의 광휘와 광채는 자동적이며 그에 대한 각성을 배제하는 선형성/에고 위치성과 감정을 포기한 귀결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단순하게 각성(realization)의 상태를 배제하는 장애를 내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적인 자기는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이며 이전에는 가려져 있던 내재한 신의 광휘로서의 참나의 실상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사람이 깨달은 참나-각성을 불리는 의식의 상태 혹은 조건에 도달하기 위해 알 필요가 있는 전부가 이 책에 제공된다'
1부. 영적과정
개관
궁극적 진실은 근본적으로 주관적이며 또한 의식연구를 통해서 확인가능하다.
25년간 고된 일끝에 진실과 지복의 상태로서 신의 현존으로 되돌아가려는 열망이 깊은 명상의 재개로 인도했다.
신이 저런 상태를 허락할수 있었다는 엄청난 충격과 경악의 감정으로 마음은 신을 비난했고 무신론자가 되었다.
타는 듯한 의문은 계속되었다.
'신이 없다면 존재의 진실의 핵심이란 무엇인가?'
불교는 신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피했기 때문에 매력적이었다.
신이 계시다면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무슨 일이 었더라도 곧장 앞으로 가라. 모든 두려움은 환상이다.
마침내 앎이 돌아왔다. 오직 현존만이 압도했고 전부가 개인적 의지나 동기부여없이 자동적으로 출현했다.
측정된 의식수준은 '실상(reality)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지각의 대치와 왜곡으로 그리고 형상을 본질로 오인함으로 인해 손상된 정도'를 가리킨다. 또한 대단히 흥미로운 발견은 일체의 행위, 감정, 혹은 생각이 전부를 둘러싸는 의식의 맥락의 장속에 시공을 초월하여 영구적으로 기록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사건이든 생각이든 감정이든 혹은 행위든 의식측정기법으로 항상 확인할 수 있다.
측정수준 200은 '에테르 뇌'의 활성화의 시작!!
높은 영적 존재들에게 있어 에테르 뇌의 활성화는 쿤달리니 혹은 영적에너지가 상승한 결과인데 이는 상위 영체들과 에테르 뇌의 형성으로 귀착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인간 뇌의 생리를 변화시켜 이제는 들어오는 자극을 다르게 전달한다.
생명은 영원한 의식의 표현이고 따라서 실제의 진짜 죽음은 가능성조차 없는데 이는 보다 익숙한 에너지(의식에너지 장)와 물질의 보존법칙에서는 당연한 결론이다. 모두가 태어날때부터 이미 측정가능한 의식수준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카르마적 유산을 반영한다. 모두가 저 의식의 진화하는 여정에 있으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라는 외침에 의한 각성에서 연민이 태어난다.
깨달음은 모든 이원적 환상을 진실에 내맡긴 결과이다. 모든 고통은 에고의 위치성들이 해소되면서 끝난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빛을 발하고 계심에 대해 주 하나님을 찬미한다.
01. 헌신적 비이원성
영적진화는 시간과 노력의 효율성은 물론 '의도, 정렬, 봉헌, 명료함의 결과'로 가속된다. 따라서 빗나간 영적 가르침을 피하고 온전성이 확인된 높게 측정된 가르침과 수행은 이롭다.
영적몰두는 영적의지(측정수준 850)를 진실, 사랑, 연민, 지혜 그리고 불편부당성인 신성의 속성들과 정렬시킴으로써 에너지를 얻는다.
헌신(devotion)은 사람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매기고 도움이 되는 것을 끌어당긴다.
신의 종이 된다는 것은 봉헌이며 이로써 그 목표는 다른 모든 위치성, 매력 혹은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들보다 우선하게 된다.
헌신과 몰두에 의해 길은 펼쳐지고 드러남이 추정적인 인과적 획득을 대신한다. 결국 모든 행위는 예배의 행위로 봉헌된다.
비이원성에의 헌신(헌신적 비이원성)
'만약 실상에 분리된 이것(나) 혹은 다른 어딘가의 저것(신)이 없다면 비실재의 환상은 어떻게 실재로 대체되는가? 그 방법은 신에 대해 더 많은 정보나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모든 추측을 내맡기는 것이다. 헌신의 핵심은 겸손함이며, 모든 신념체계 및 나는 안다는 착각을 기꺼이 내맡기려는 자발성이다.
'종교에 대한 충실함의 일차적 전제가 믿음인 반면 비이원성의 길을 따르는데 요구되는 필수적인 성질은 겸손함, 내맡김 그리고 그 길에 대한 헌신적 봉헌이다.
종교신도들은 신, 경전에 대해 '나는 안다'는 추정으로 출발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비이원성의 영적 헌신자는 '나는 모른다'에서 출발한다. 예수는 구원의 길, 붓다는 깨달음의 길을 가르쳤는데 깨달은 스승없이는 각성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비이원성의 길은 힘겹지 않습니까?
힘겨운 것은 비이원성의 길이 아니라 그에 대한 에고의 저항의 정도일 뿐입니다. 에고의 저항은 영적 의지를 불러일으킴으로써 극복되는데 그 다음에 의지는 봉헌하고 노력하는 영적능력 및 장애를 기꺼이 내맡기려는 자발성을 일으킵니다. 헌신은 사랑의 힘을 초대하고 겸손함은 이것으로 에고의 버팀목과 위치성을 제거합니다. 헌신은 또한 변형력을 갖는 정보의 이용을 활성화합니다. 의도는 자발성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이로써 변형이 저항의 귀결인 한계들을 대체할 수 있게 해줍니다.
헌신은 왜 필요한지요? 왜 중요한지요?
마음은 오류와 성격상의 결함을 아는 일이 많지만 그것을 실상(신)에 내맡길 수 있는 힘이나 동기는 결여되어 있습니다. 헌신은 가슴에 속해 있으며 단순한 정신화의 능력을 넘어서 저항과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과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헌신적 사랑의 한 측면은 충실함과 몰두일 뿐 아니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불변성입니다. 헌신은 강인함 및 노력과의 정렬을 포함하며 이 모든 측면을 결합시키는 접착제와 같습니다.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욕망은 이미 소중히 여기고 받들어야 할 신성한 선물입니다. 부름을 받는 이들은 많으나 선택받는 이는 드물다는 다시 말하면 부름받는 이들은 많으나 따르기를 선택하는 이는 드물다입니다'
이렇듯 선택은 결정과 내적 의지의 동의에 따른 것이고 그리고 이 동의에 의해 신성한 의지의 막강한 힘이 의도와 정렬하며 모든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헌신에 힘을 불어넣습니다.
02. 내면의 길
사람들은 누구나 믿음으로 살아간다. 유일한 차이는 그러한 믿음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이다. 취사선택은 의식수준을 반영하며 이것은 차례로 지각, 가치, 고유한 이해 능력 및 일차적 동기부여와 상호 관련된다.
깨달은 조건이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혹은 마음/지성으로 획득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구도자는 실망한다. 그래서 깨달음에는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따라서 목표로서 실용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
'유일한 조건은 먼저 존재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깨달음에 대해 들었을 것이며 그 다음에는 실현 가능한 목표로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마음이 원인과 결과라는 관점에서 개념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적제자들은 실제로 미래의 운명에 이끌리고 있는 현실 대신에 자신들이 내몰리고 있다고 여긴다.
삶의 목표로서 깨달음에 실제로 이끌리고 있는 드문 사람들은 그것이 이미 자신의 운명이기 때문에 이끌리고 있다는 확인가능한 실상에서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오직 미래의 골퍼들만이 골프교습을 받고 있을 것이다.
'깨달은 자에게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 채 일종의 꿈꾸는 상태로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기관찰은 깨어남으로 이끌며 이것은 그 다음에 배우고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진화하려는 욕망을 자극합니다. 자기탐구는 발견으로 그리고 참나(Self)를 덮고 있는 층들의 펼쳐짐으로 인도하지요. 자기탐구를 통해 사람은 신념과 믿음의 기초를 살펴보고 영적기법과 기준을 세움으로써 스스로 영적진실에 대한 내적확인의 발견으로 나아갑니다.
진실에 대해 들었다는 것과 진실을 내적실상으로 발견했다는 것은 다릅니다. 그것으로 존재하는 길은 경험적 현실로서 그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03. 지향
영적진화는 교육과 정보의 도움을 받는데 이는 지성이 더이상 보통의 학습에서처럼 주된 도구가 되지 않는 지점까지의 일이다. 그 다음에 영적수행은 정신적/지적/개념적 선형에서 인간의식이 내용과 형상 혹은 데이터보다는 맥락과 관계되는 비선형적 영역으로 이행한다. 이행은 특정한 내용에서 주관적 경험함의 성질 자체로 가는 것이다. 이 중대한 변동은 믿음, 의도, 헌신, 의욕, 의지와 같은 서로 다른 성질들에대한 의존을 수반한다.
보통의 정보는 노력으로 획득하는 것이지만 영적노력에서 강조하는 것은 항복, 포기, 놓아버림, 내맡김이다. 수행은 위치성들을 확인하는 것 그 다음에 에고의 저항을 초월하고 에고의 환상적 통제나 통치권을 포기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래서 영적수행의 핵심은 마음을 살찌우는 일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짐을 풀고 내려놓는 일과 부합한다.
비이원성을 통한 깨달음을 구하는 영적수행은 의도와 몰두의 귀결이다. 실제 수행은 '행'의 문제라기보다는 하나의 '존재'방식이거나 삶의 주관적 앎과의 정렬이다.
감정은 위치성들과 조건화를 반영하므로 진실의 지표가 아니다.
의지
영적의지는 에고의 사적의지와는 다르다. 에고의 사적의지는 이를 악물고 분발하는 감정적 힘과 고조된 감정성을 의미한다. 이 의지는 에너지가 들며 수고롭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적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수문을 열어젖힌 다음 뒤로 물러서는 일과 같다. 영적의지는 사적인 것이 아닌 의식의 한 성질이고 이는 참나의 힘으로의 초대에 내맡김으로써 맥락을 바꾼다. 영적의지는 850으로 측정되는데 사적의지는 그 사람의 현재 의식수준으로 측정된다.
완전한 내맡김을 통해 초대한 영적의지는 그래서 표면상으로 기적적인 일들을 수행할 수 있는 반면 역설적으로 사적인 의지는 자동적으로 저항을 유발하는 일이 많다. 사적인 의지를 신의 의지에 내맡기는 것은 통제의 포기를 나타낸다.
04. 영적 수행
일상생활에서 공식적 감사기도로 가장 흔한 것이 식전기도인데 그 이로움은 음식자체의 실재적 에너지가10~20점까지 상승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식측정 연구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대다수의 종교에서 유력한 영적수행의 두드러진 형태는 '경전구절의 암송'이며 이는 또한 설교나 공부모임들을 통한 교육적 가르침의 기초를 이루는 일이 많다.
고전요가는 모두 지극히 높게 측정되며 사심없는 봉사의 카르마 요가 915, 박티요가 935, 라자요가 935, 쿤달리니 요가 510, 크리야 요가 410, 하타요가 390. 그리고 자나요가는 아드바이타 혹은 비이원성의 길(975)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명상과 관상을 강조하며 붓다와 역사상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의 길이다.
진정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일은 의도에 의해서 에너지를, 헌신에 의해서 힘을 얻는데 이는 명상 및 관상적 생활방식을 특징으로하는 내적인 진실의 추구로 인도한다.
명상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마음이 쉼없이 활동한다고 불평한다.
명상의 취지는 분리인데, 특히 생각이 나의 것이고 나를 나타낸다는 개념으로부터의 분리이다. 실제에서 생각은 마음자체가 그런 것처럼 그냥 그것으로 있을 뿐이다. 소유권의 개념은 친숙함으로 인하여 이러한 생각들이 사적인 것이 되는데서 비롯되는데 친숙한 것은 마음/카메라가 현존하며 과거의 생각, 사건, 기억들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 그러한 것을 기록한 것은 오직 그것이 중요성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불러오기와 재생 또한 상상되고 투사된 가치의 귀결이다.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유일하게 실재적인 가치는 그것이 나의것이라는데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무엇이 얼마나 가치 있느냐는 실제나 상상속의 상실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보고 판당할 수 있다. 일단 생각이 대상과 마찬가지로 비개인화된다면 생각은 가치와 매력을 상실하게 된다. 생각과 감정은 욕망에서 일어나고 마음을 스스로가 가치부여한 것을 욕망한다.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부여하고 덧씌우고 투사시킨 신념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특별하거나 독특한 가치 혹은 중요성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된다. 그러니 '가치, 중요성, 흥미'를 철회하라.
'유럽의 대성당들을 찾아가보면 방문객들이 휴대폰을 들고 바쁘게 통화하며 그 현기증나는 아름다움의 경이로움을 완전히 놓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사람들은 침묵하고 있는 영원한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망각한채 꿈나라에 빠져 무의식적으로 걸어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마음은 더이상 자기애적으로 에너지를 부여받지 않을때 멈춥니다. 생각은 본질적으로 허영입니다. 생존은 자연발생적이고 자율적이며 카르마의 자동적인 귀결입니다. 마음이 전적으로 침묵하게 될때조차 육체는 카르마의 태엽을 감아놓은 인형처럼 제 할일을 해 나갑니다.
예리한 집중과 관여의 거절을 통해 사고가 구체화되고 특수성을 드러내고 선형적으로 되기 전의 사고형성과정에서 점점 더 빨리 사고의 형성을 예리하게 지켜볼 수 있는 능력이 개발됩니다.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주의는 사고의 에너지 장 자체의 침묵하는 비선형적 기원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이 사고의 에너지 장은 생각하고 싶어하는 욕망의 에너지 장인데 에고는 이를 대단히 소중히 여깁니다.
사람은 생각하려는 욕망을 신에게 내맡길 수 있는데 이것은 그 다음에 재빨리 마음의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지점에서 사람은 생존에의 의지를 신에게 내맡겨야 하지요. 생각이 멈추면 어리석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납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신성한 바보 혹은 신성한 어리석음'으로 불립니다.
관상
명상과 관상은 단지 서술방식일 뿐이다. 두 과정은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분리되지 않는다. 실제로 정식명상은 일상활동에서 물러남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특별함을 발생시키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구획되며 시간적으로 산발적이 된다. 열중의 시기들이 있지만 명상수행은 일상생활의 요구들에 대해 취약하다. 지속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 방식으로 본질적인 무드라/위치/초점/의도를 적용하는 것이 보다 이로운데 그래야 관상은 하나의 생활방식이 되고 더불어 사람의 삶은 명상이 되어간다. 진화하는 사람의 삶은 기도/관상/명상/간구와 내맡김으로 바꿔놓는다. 사람의 삶은 기도가 되고 기도가 관상이다.
관상적 생활방식은 정체감각이 몸/마음에서 목격자/관찰자로 이동하는 것을 촉진시키는데 후자가 보다 일차적이며 참나와 실상의 진실에 더욱 가깝다. 다음 단계는 나 감각을 목격자/관찰자에서 철회하는 것인데 여기서 나 감각은 의식/앎의 능력자체로 이동한다. 의식/앎의 능력은 개인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성질이다. 참여자가 아닌 목격자/관찰자로 있는 것의 한가지 이점은 목격자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목격자는 논평하지 않고 그냥 바라볼 뿐이다. 목격자/관찰자는 나무보다는 숲과 정렬되어 있다.
어떻게 관상을 도입, 시작하거나 배울 수 있습니까? 그것은 결정입니까?
그것은 오직 앎의 문제일 뿐입니다. 유용한 결정이나 선택은 일체에 대해 정신적으로 말하는 것을 그만두겠다고 그리고 논평, 주장, 선호, 가치에 대한 진술을 끼워넣는 일을 삼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평가와 가치부여 혹은 편집과 논평없이 그리고 목격되는 것에 대한 선호를 갖지 않고 그냥 지켜보는 훈련입니다. 사람은 그 다음에 현상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외관의 일시적 본성을 보는데 이 것은 보통의 정신작용으로는 인과의 연쇄로 개념화됩니다.
바보인 척하는 것은 유익한 수행이며 근본적 겸손함을 불러냄으로써 본질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모든 생각은 허영이고 착각이며 자만일 뿐입니다. 생각을 덜할수록 삶은 즐거워집니다. 사고는결국 앎으로 대치됩니다. 사람이 있다는 것은 실제로 어떤 생각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신적 대화와 쓸모없는 지껄임을 그만두겠다고 결정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침묵을 지키는 집단 피정(안거)은 종종 귀중한 경험이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삶은 즐겁게 계속되고 일체는 저절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의사소통은 비언어적으로 계속되고 모두가 놀랍도록 짧은 시간내에 텔레파시가 통하게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05. 설명
역설적으로 비이원성의 길은 '하지 않음의 함(doing of undoing)이다. 경전이나 외적 권위에 대한 의존은없다. 진실은 선언하지 않아도 혹은 과장할 필요없이 저절로 드러난다.
오락과 유행하는 매력적인 것들로 하여 곧고 좁은 길에서 이탈하지 않는 구도자는 운이 좋다. 사람들은 진정한 가르침을 찾아서 몇생을 보내며 매력적이고 미화된 진실에서의 일탈의 유혹에 의해 곁길로 빠지게 된다.
상승하는 쿤달리니 영적에너지장의 귀결로서 의식수준이 500대 후반에 이를때 싯디가 나타난다. 제자는그러한 기적적 현상이 사적인 것이 아님을 알고 그저 지켜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러한 현상이 영적 에너지 자체에 특유한 성질이라는 것이 자명해질 것이다.
싯디는 경이로운데가 있으며 그 영적에너지 장은 저절로 타인에게 전이되어 카르마적 경향과 일치하는 치유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렇듯 기적적인 일은 의지에 따른 것이거나 통제가능한 것이 아니며 그 어떤 사람의 귀결도 아니다. 그것은 참나의 치유력의 귀결일 뿐이다.
싯디는 저절로 일어나며 사이코메트리, 투시, 투청, 천리안 그리고 다른 텔레파시적 능력들을 불러일으킨다. 싯디는 또한 예측불가능하며 덧없다. 다양한 기간동안 어떤 것들이 오고가는데 지속기간은 몇주에서 몇달, 몇년일 수도 있다.
참고)사이코메트리는 대개 물건을 손으로 만지거나 이마 앞에 대면 과거에 그 물건을 만졌던 사람에 대한 정보를 얻는 방식으로 발현되며, 상대방과 접촉할 시 상대방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경우의 독심술 역시 사이코메트리로 분류된다. 정보는 감정, 영상, 소리, 냄새 등 다양한 방식으로 느껴지며 물건의 전 소유자가 질병으로 죽었을 경우 사이코메트리스트 역시 같은 병의 증상을 느낀다고도 한다.
실용적 관점에서 싯디의 출현은 또한 세상사에 대해 정리를 시작하라는 신호이기도 한데 그것은 세상사를 처리하는 기능의 일부가 끝날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직 가능한 동안에 실용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지혜의 문제다. 동기부여와 가치관은 물론 능력이 변할 수 있으며 이전에 대단한 가치와 중요성이 있는 듯했던 것이 나중에는 시간과 노력의 낭비로 비칠수도 있다. 그래서 성공 빛 부와 같은 것들은 재미난 놀이가 되고 마침내 성가신 일, 그다음에는 방해가 된다. 이러한 관점의 변동은 의식진화의 귀결인데 의식의 진화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욕구/소유/추구에서 노력이 필요없는 끌어당김으로 이동했다.
앞선 상태들에 필요한 영적정보는 그것이 필요한 때를 위해 일찍이 배워서 저장해놓아야 한다. 앞선 정보를 일찍 듣는 것에 있을 수 있는 부정적인 면은 '나는 ~~에 대해 안다'는 지성의 오만한 추정이다. 정보를 '나는 ~~에 대해 들었다'로 보유하고 있는 편이 낫다.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그것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이 지점에서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참나 각성 및 깨달음에 대한 봉헌은 엄중하고 곧고 좁은 길이다. 그래서 진지한 헌신자는 학습가능한 기술로서 일반적으로 판매되고 제공되는 마술적이고 신비스런 불가사의 및 심령 현상들이 내면의 아이에게갖는 호기심과 매력을 우회할 것을 권고받는다. 그러한 것은 지체이며 부주의한 이들앞에 놓인 함정이기도 하다.
일관성
효율적인 영적노력은 열정의 발작이라기 보다는 '일관성과 끈기'의 귀결이다. 내면을 향한 영적노력에 더하여 사심없는 봉사인 '카르마 요가' 또한 의식의 진화에 도움이 된다.
영적진화의 속도는 개인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며 갑작스럽고 놀라운 도약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언젠가 올 수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 깨달음을 선택하는 이들의 운명은 깨달음이라는 것을 각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이들이 아니고서야 누가 깨달음을 추구하겠는가?
단지 영적 정화와 앎을 구하는 것만도 이미 커다란 선물이다. 내가 어떻게 하고 있지?라는 의구심을 갖는것은 부질없는데 왜냐하면 최상의 진실을 향한 봉헌과 헌신에 의해 이미 나침반이 놓였기 때문이다. 나아가는 속도는 느리게 보이고 때로는 힘겹게 느껴질수도 있지만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도약에 대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 최선이다. 길고도 무미건조한 좌절의 시기로 보이는 시간을 보낸 다음이라 해도 비관을 피하는 것이 현명한데 왜냐하면 그러한 시기는 중대한 변화를 예고하는 일이 많은 중대한 장애와 집착의 극복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좋습니까?
세상 속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지요. 세상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집착하지 않는 상호작용은 내면의 에고위치성들의 귀결인 습관적 방식과 태도를 드러냅니다. 남들이 동일한 환경에 대해 어떤식으로 관계 맺는지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우면서 교육적입니다. 사람은 다른 성격형을 가지고 실험해볼 수있는데 유연성을 가질때 내면의 미개발 자원을 발견하게 도비니다. 그것이 바로 고전적인 '마치 ~~인 것처럼' 실험입니다.
다른 태도와 성격형을 가지고 실험하는 것은 놀라운 내적발견으로 귀착되지요.
사람은 중요한 것과 피상적이고 덧없는 것을 실제로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의도가 기법과 학습방식을 공급해줍니다. 단순한 방법은 자신의 삶을 비디오로 빨리감기를 한것처럼 마음속으로 보는 것입니다. 테이프가 종말에 이를때 자동적으로 의문이 솟아납니다.
'어떤 가치있는 일이 행해졌는가?
사람은 무엇때문에 책임질 수 있기를 소망하는가?
세상의 매력은 끝이 없는 듯합니다.
매력은 세상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투사된 에고의 가치를 반영하고 에고만족이라는 보상에 대한 기대를 반영합니다. 실상에서 기쁨은 내면에서 솟아나며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실상에서 영적성취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행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행위는 맥락, 장, 의도의 통합의 자동적 귀결입니다. 모든 행위는 사실상 자연발생적이고 카르마적 성향을 반영하며 표현에 유리하거나 유리하지 않을 수 있는 국소적인 조건들을 반영합니다. 행위를 비 개인화하기 위해서는 '나'라고 불리는 분리되고 독립된 작인이 있다는 신념을 놓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 단 하나 '사람이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최대한의 잠재력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과에 대한 책임이 아닌 노력할 책임이 있다는 것은 12단계 프로그램의 에고를 억제하는 기본적인 금언입니다.
존재는 그것 자체가 보상입니다. 결과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는 잠재성을 실현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욱 만족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실행자체를 위한 실행의 탁월함과 정렬되게 됩니다. 일체의 존재는 이미 매 순간 가능한 최대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유위의 무위는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혹은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며 '완성에서 완성으로 그리고 완전에서 완전으로' 가는 것입니다. 전부는 그 정체가 정확히 그것의 의미임으로 말미암아 완벽하며 일체의 의미는 그것의 존재입니다. 완벽한 씨앗은 완벽한 눈, 그다음에 완벽한 싹, 그 다음에 완벽한 꽃, 그다음에 완벽하게 시든 꽃으로 출현함을 통해 변형되고 변태됩니다. 모든 형상은 매 순간 완벽하게 있는 그것일 뿐입니다.
창조는 완벽하게 이것에서 완벽하게 저것으로 이동합니다. 상상속에서가 아니라면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다. 일체가 이미 있어야 할 바로 그대로 있습니다. 근사한 낡고 찌그러진 쓰레기통은 고물처럼 보여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근사한 낡은 고물 쓰레기통이 아닐 것입니다.
시간 그 자체가 환상인가요?
창조는 출현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에고의 지각에게 변화로 해석됩니다. 목격된 것은 잠재성의 현실로서의 나타남이고 이것은 되고 있음으로 맥락화됩니다. 에고는 시간궤도를 얹어 놓는데 이것은 투사이지요. 오직 계속되는 앎이 있을 뿐입니다. 시간은 정신적 구조물이며 연쇄에 대한 설명을 개념화하려는 시도입니다. 연쇄는 그 자체가 관찰자의 개념화이며 정신작용입니다. 진짜 실상은 마음에게 이해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에고가 붕괴할때 시간은 사라지고 모든 현상은 느린 움직임안에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랑블루(700)의 슬로모션 장면에서 나타나듯이...
06. 경험자
마음은 안팎에서 동시에 데이터의 처리장치로서 활동한다. 처리시스템은 대략 1만분의 1초안에 작동하는데 그 사이에 감정이 입혀져 있고 중요성에 대한 평가가 분류되어 있는 생각, 관념, 이미지들을 동시에선별하고 처리한다.
현상과 현상의 경험사이에는 1만분의 1초의 지체가 있다. 의식의 진화와 더불어 이 필터는 갑자기 사라지는데 이렇게 될때 심오한 변형이 일어나며 그 속에서 일체는 깊이, 질감, 색채에서 빛나고 밝아지게 된다. 일체는 지각되고 해석되는 대신 그 자체를 편집되지 않은 채로 제출한다.
뇌기능과 생리 - 우세반구를 포함하는 뇌의 생리와 동역학
처리장치/경험자 에고가 갖는 문제는 단지 그 구성만이 아니라 그것의 우세함이기도 한데 이는 오직 영적 에너지의 유입에 의해서만 감소된다. 쿤달리니 영적 에너지가 시작되면서 진화상 최초로 오직 에너지로만 구성된 에테르뇌가 발달한다.
에고의 결정적인 중심초점 즉 에고의 결정적 요소는 무엇입니까?
에고는 한점, 경험자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경험자는 쾌락을 구하고 이득을 통해 생존을 구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경험자는 '얻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경험자의 기능은 쾌락을 얻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자에게 의존하는 일을 포기할 때 사람은 행복의 근원이 자기자신의 존재라는 것과 참나의 각성이 행복 그 자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07. 면도날의 끝
진정으로 몰두한 내적인 영적수행의 9가지 중심요소들
1) 흐트러짐없이 초점을 맞추는 훈련 - 몰두
2) 모든 욕망과 두려움을 신에게 내맡기고자 하는 자발성 - 신에 내맡김
3) 어려움이 초월될때까지 일시적 괴로움을 견디고자 하는 자발성 - 끈기
4) 지속성과 주의깊음 - 끈기, 일관성
5) 참여자/경험자로서의 자기이익에서 목격자/관찰자의 이익으로의 이동 - 놓아버림, 신에 내맡김
6) 관찰대상에 대한 시비분별과 의견을 포기하려는 자발성 - 의견을 갖는 허영 놓아버림
7) 장의 내용보다는 장(맥락)과 동일시하는 것 - 신에 내맡김
8) 깨달음이 목표, 욕구 혹은 희망사항이 아닌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확고하고 자신있게 나아가는 것 : 깨달음이 이익이라는 관념을 거부하는 것 : 그리고 깨달음이란 결정과 의도의 귀결이자 카르마와 신성한 은총 양자의 결과인 헌신적 봉헌의 귀결로서 일어나는 상태임을 이해하는 것
9) 깨달음을 향한 노력이나 그러한 노력의 목적지에 대한 미화 혹은 과장을 피하는 것과 헌신 그 자체를 위한 헌신에 의지하는 것 - 신에 내맡김
면도날의 끝 : 파도의 물마루위에 머무르기
목격자/관찰자는 관상적인 균형의 자세다. 현상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사람은 현상을 경험하려는 욕망 혹은 경험함 자체의 경험에서 단물을 짜내려는 욕망을 끊임없이 내맡겨야 한다.
현상의 매력
경험자는 투사된 가치로 인해 일시적 현상들의 매혹과 매력에 빠져든다. ... 일시적인 목격된 현상들의 내용은 의의나 가치를 갖는 것으로 미화되고 또 특별해지게 된다. .. 대개는 지나가는 현상에서 가능한 모든 가공적 보상을 뽑아내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유익하다. 던져야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게 지금 어떤 가치가 있는가?'
목격된 현상의 일시적, 선형적 내용의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 또한 대개는 불과 몇초만에 잊히게 된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눈깜박임 현상.. 뇌/마음은 눈이 깜빡일때마다 자동적으로 시각적 앎을 차단한다. 그 결과 보통의 생애에서 총 9일가량이 시각적 망각속에서 지나간다.
하지만 사람은 중요한 관찰결과나 경험을 놓치지 않을까요?
중요하고 귀중한 것은 편집을 가리킵니다. 취사선택하지 않을때 전부가 동등한 가치를 갖는데 왜냐하면 근원은 본유적 존재 그 자체의 귀결로서 내면에서 나오기 때문이지요. 전부가 똑같이 완벽하며 존재하는전부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완벽함은 저절로 빛을 발합니다. 가치를 투사하는 일을 거절할때 전부는 그 존재 및 창조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동등한 가치를 갖게 됩니다.
08. 전부임대 무
공
부정의 길을 따르면 몰두하는 헌신자는 공/무의 현상과 마주칠 수 있다. 이것은 대략 850수준에서 일어난다.
신성의 전부임
결정적인 의식측정수준을 통해 전시대에 걸친 축소할 수 없고 확인 가능한 신성의 본유적 성질들을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1) 신성은 비선형적이고 불편부당하고 시비분별이 없으며 편파성이나 취사선택하는 편애를 넘어서 있다.
2) 신성은 변덕스럽거나 분별하지 않으며 추정적인 인간 감정들의 한계에 종속되지 않는다. 신성한 사랑은 태양과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이다. 한계는 에고의 귀결이다.
3) 신의 정의는 신성의 전능과 전지의 자동적 귀결이다. 신은 행하거나 작용하거나 원인이 되지 않고 그저 있을 뿐이다. 신성의 성질은 무한한 힘의 장으로서 방사되는데 그 무한한 힘의 장에 의해 존재하는 전부는 있는 그리고 되어 있는 것에 따라 자동적으로 정렬된다. 각각의 영혼/영은 이렇듯 그 고유한 운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수준을 향해 끌려가는데 그것은 마치 바다속의 코르크나 전자기장속의 쇳가루의 움직임과 같다.
4) 신성은 낮은 힘을 훨씬 넘어서 있는 무한한 힘의 고유한 성질로 말미암아 절대적 지배권이다. 낮은 힘은 위치성과 통제의 도구이며 유한한다. 힘은 무한한 세기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힘을 구할 필요가 없는 신성한 참나로서의 힘의 근원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5) 신성의 막강함과 전적인 현존 내에서 존재하는 전부는 스스로를 정렬시킨다. 이 조정은 영적 선택의 귀결이다. 자유는 신성의 정의에 고유하다.
6) 의식의 무한한 장으로 표현된 신성의 전지와 전능은 실상을 가능성의 전단계에 걸쳐 확인해주는 의식연구 측정기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생각, 행위, 결정이 시간과 장소 너머에 있는 의식의 무한한 장에 각인된다. 이 각인에 의해 정의가 보증된다.
영적진화 및 특별함의 문제
때로 개인적 에고의 한계들이 초월되지만 에고는 영리하며 영적개념들을 통합시켜서 '영적에고'를 창조하여 생존하려고 한다. 영적에고는 남보다 우월하다거나 보다 순수하다고 느끼는 것으로 그리고 자신이 더 높게 측정된다는 것으로 그 자체를 과시할 수도 있다. 때로 에고의 허영은 영적으로 여겨지고자 하는 소망이다. 영적 허영의 또 다른 덫은 지적허영심인데 이것은 종교적, 영적 단체 및 그러한 단체들의 역사적 진화의 세푸에 관한 대량의 정보와 데이터의 축적으로 표시된다. 하지만 영적진실에 관하여 아는 것은 영적 진실을 아는 것과 같지 않으며 하물며 그것이 '되는'것과는 전혀 다르다.
09. 대담
'유머는 맥락의 변동에서 비롯되는데 이를 통해 어리석음은 스스로 드러냅니다. 유머는 또한 위치성들과대립합니다. 자신을 조롱하거나 남들이 그렇게 하도록 돕는 것은 갈등과 스트레스를 덜어 줍니다. 유머는 치료적이며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줍니다. 유머는 또한 두려움, 분노 혹은 원한을 최소화시키지요'
10. 영성과 세계
금욕주의
이것은 다양한 시기에 유익한 수행이고 이를 통해 사람은 감각과의 분리 그리고 쾌락과 느낌에 대한 끝없는 추구와의 분리를 성취한다.
절연
진정한 절연이 온전히 의미하는 바는 에고의 보상자체와 절연하는 것이고 자기와 몸, 감정 혹은 마음과의 동일시를 절연하는 것이다. .. 절연을 통해 사람은 물리적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고도 세상에 투여한 감정적 에너지와 관심을 거둘 수 있다.
'지상의 삶은 선한 카르마를 쌓은 것은 물론 부정적인 카르마를 해소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카르마적 기회를 제공합니다'
세상사는 사람의 의식수준에 걸맞게 지각되고 해석된다. 그러므로 세상은 비극적이고 슬프고 비참하게 혹은 두렵게 나타날 수 있고 이와 반대로 유혹적이고 흥미진진하며 도전적으로 비칠수도 있다. 500대 후반에서는 세상이 연민과 더불어 조망되고 아름다움으로 비친다. 600대에서 세상은 평화롭게 보인다.
인간 삶은 의식진화의 기회이며 깨달음에 도달할 수있는 커다란 영적기회다. 인간 삶은 생명의 선물의 표현이며 그것을 통해 사람은 결국 참나를 각성할 수 있다. 영적 노력은 그 자체가 저 생명의 선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삶의 부침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모든 삶의 부침에 선물이 숨어있습니다. 때로 그것은 과거에 남에게 가한 고통을 취소할 기회입니다. 때로 고통은 저항으로 인한 것이며 에고의 개인적 의지의 귀결이므로 신에 내맡김이 필요합니다. 전반적으로 겸손한 태도가 도움이 되며 내맡김을 통해 숨어있는 선물이 드러납니다.
'세계의 실제 목적은 완벽하며 오직 신만이 그것을 완전히 알고 있다고 가정하십시오. 세계를 전체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하지만 영적성장 및 의식의 진화를 위한 최적의 기회를 제공하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십시오. 세상은 깨달음의 학교이자 신성의 드러남인데 여기서 의식/앎은 그 근원을 향해 다시 깨어납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세상과 신에게 봉사합니다'
11. 여러스승과 가르침들
보통의 마음은 선형적이고 이원적이며 감정화된 지각 및 한계들을 수반하며 태양빛을 가리는 하늘의 구름과 같다. 그래서 구름을 걷어내는 방법은 명백한 장애물 코스를 뛰어넘는데 성공한 스승에 의해 명확해질 수 있다.
12. 헌신자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신의 실재는 얼마나 사실인가?
혹은 신이 하나의 신념체계에 부과한 것인가?
내향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쟁점을 생의 초기부터 파고드는 경향이 있는 반면 외향적인 사람들은 종교적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본질적 문제들을 나중으로 미루거나 혹은 개인적인 삶의 비극이나 파국의 귀결로서 탐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과 종교가 진실이나 실재가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요?
사람들은 그 자체의 보상덕분에 선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연구에 의하면 종교적인 개인과 가족들은 건강, 행복, 수명, 학교성적, 사회적 성공 및 면역체계와 같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큰 이로움이 있음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개인의 측정된 의식수준이 평균적으로 한 생에 5점에서 10점 높아지는 반면 구도자에게 그 속도는 훨씬 빨라져 아주 갑작스럽게 큰 도약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잠재성과 가능한 결말에 대해미리 준비해야 한다.
경험자는 에너지를 소모하며 그 결과 인간은 에너지의 재생 및 기능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수면을 필요로 한다. 명상과 관상에서 초월해야 하는 것은 경험자의 집중이다. 경험자는 신기한 일과 흥미로운 데이터를 갈망하고 에고는 감정의 서커스를 지속적으로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그러한 것에 대해 열심히 반응한다. 경험자의 우회에 있어 삶이라는 변화무쌍한 멜로드라마에의 관여와 참여는 유혹적이다.
진지한 영적제자들이 매력넘치는 편향된 길, 종파, 가르침에 붙들려서 영적 환상의 무익한 추구에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는 일이 종종 있다. 이렇게 하면서 수년 수십년 혹은 심지어 여러생을 통째로 흘려보낼 수도 있는데 이는 때로 후회나 쓰디쓴 실망으로 끝난다.
그래서 열정보다는 봉헌(신에 내맡김)이 온전성의 보다 중요한 지표다.
13장. 에고 자기와의 동일시의 초월
이 주제는 모든 영적노력의 핵심이다. 에고/자기와의 동일시의 취소는 영적진화의 일차적 초점이며 역사상 가장 박식한 정신들조차 그 앞에서 좌절한 난제다.
문제의 핵심은 이미 현상들의 국소화의 선형성과 동일시된 에고/마음 처리기능의 성질들과의 그릇된 동일시다. 이것은 육체로서의 생명의 경험의 물질적 현실과 관련을 갖는 자연적 귀결이다. 일차적 문제는 주관성의 실제적 근원에 대한 오인 그리고 그것이 비국소적이라기 보다는 국소적이라는 추정이다.
에고 메커니즘의 해체는 에고의 진화상의 기원과 장구한 세월에 걸친 에고의 발전에 대한 이해에 의해 촉진되는데 에고의 발전에 대해서는 0000에 언급(클릭클릭)되어 있다.
생명에너지는 의식의 장에서 나온 광휘인데 이는 창조로서 물질성 안에 나타나는 신성의 현존모드이다. 깨달음의 능력은 참나로서의 내재된 신성인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의식의 귀결일 뿐이다.
에고자기의 해체
일단 에고의 진화상의 구조와 기능이 이해되면 에고의 해체는 일시적이고 덧없고 무상한 것보다는 실재하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내적 결정으로 촉진된다. 사람이 영적길을 선택했을때 이제는 다른 전반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보통의 인생을 어떻게 해치고 나갈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솟아난다. 결과적으로 대개는 보통의 삶을 먼저 버릴 필요는 없고 그것을 재맥락화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보다 효과적인 형태의 절연은 세상에 대한 가치의 투사 및 세상에 대한 과대평가를 포기하는 것이다. 마음의 활동 및 그 끝없는 작용들의 유혹을 거절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궁극적인 절연이다.
연구, 집중, 주의는 초점을 좁히고 내용과 세부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관상은 전반적 장과 정렬되고 의의, 의미, 가치의 맥락화와 정렬된다.
영적기법으로서의 자기탐구
이것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할 것을 권고한 라마나 마하르시가 선호한 가르침이었다. 이 질문의 목적은 경험자에서 앎의 근원 그 자체로 직접 주의를 돌리고 그래서 자기에서 참나에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더 이로울 수 있다. 무엇이란 비개인적이며 보편적인 에너지와 쉽게 정렬되는 반면 누구란 개인 및 선형성과 정렬되기 때문이다.
14장. 깨달음 : 참나의 현존
의식수준이 초월되면서 경험함의 성질은 앞서 묘사한 것과같은 방식으로 전환된다. 세계와 주관적 자기는 점차로 더욱 온건해지고 연민과 사랑이 넘치게 된다. 500대 후반에서 쿤달리니 에너지의 흐름은 관찰과 주관적 경험을 내적기쁨의 수준들까지 변형시키기 시작했고 세상은 한층 더 아름답고 경이롭게 보인다. 전부의 완벽함이 빛을 발한다. 이것은 기쁨만이 아니라 결국에는 세속적 기능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형언할 수 없는 황홀경으로 이끈다. 그러한 경이로운 상태까지 신에게 내맡겨질때 그것은 그 경이속의 황홀경을 넘어서기조차 하는 충만한 멎어있음, 침묵, 평화로 대체된다.
헌신자가 부정의 길을 따르고 있었다면 그 다음에 출현할 수 있는 궁극적 실상으로서 공의 드높은 환상이다. 공은 인지되는데 거기에 사랑이 없을 경우에는 거부되어야 한다. ... 최후의 문을 통과하는 일은 매우 드문데 그 한가지 이유는 준비부족, 확신의 부족 그리고 최후의 강도높은 의심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큰 발전이 있을때마다 오라나 에테르체에 국한된 일시적인 내적 고통이 촉발되는 듯 했습니다.
깨달음을 구하는 이들은 모두 유용한 확인된 진실, 지식 그리고 이용가능한 격려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영적노력은 사전 경고없이 예기치 못한 큰 도약을 가져올 수 있지요. 그런 정보를 사전에 알아두는 것은 크나큰 지혜입니다.
15. 의식의 점진적 상태들
주관적으로 진보하기 위해 필요한 전부는 '인내심, 기도, 과정에 대한 믿음, 그리고 저항의 내맡김'이다.
중대한 이행은 개념적 사고를 버릴때 그리고 경험함에 대한 흥미나 에고/자기의 경험자 가장자리 및 그 처리기능들과의 동일시가 더불어 포기될때 일어난다. 선형적 개념들과 이미지 너머에는 처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에고/마음은 생각한다. 장(의식)은 안다. 그리고 참나는 있다'
태어나는 순간에 사람의 수명은 정해져 있다. 그래서 헌신자는 에고/마음 경험자가 투사한 세계의 가치보다는 신에게 자신의 생명을 내맡기는 사람이다.
첫댓글 행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행위는 맥락, 장, 의도의 통합의 자동적 귀결입니다. 모든 행위는 사실상 자연발생적이고 카르마적 성향을 반영하며 표현에 유리하거나 유리하지 않을 수 있는 국소적인 조건들을 반영합니다. 행위를 비 개인화하기 위해서는 '나'라고 불리는 분리되고 독립된 작인이 있다는 신념을 놓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 단 하나 '사람이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최대한의 잠재력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과에 대한 책임이 아닌 노력할 책임이 있다는 것은 12단계 프로그램의 에고를 억제하는 기본적인 금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