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9;30, 김포송정역에서 친구C를 만나 강화행3000번 직행버스에 올랐다. 코로나19사회적 거리두기일상에서 불안한 외출이지만 우린 그 지겨운 일상탈출구로 강화보문사행에 나서기로 했다. 순전히 C가 나를 배려한 외출인 셈이다. 달포 전 임진각나들이에 이은 두 번째라 참으로 고마웠다. 서울서 C와 동행나들이를 한다는 생각 꿈도 안 꿨기에 감회가 뭉클했다. 고향 불알친구는 급변하는 세월 한 구석에 어릴 적의 순정을 갈무리했다가 몇 십 년 만에 해후해도 곧장 순정한 동심의 지기(知己)가 된다.
사리탑과오백나한
C는 다방면에서 나보단 어른스러웠다. 나의 행운이라. 코로나19 생활속 격리는 버스좌석도 한 사람씩 띄어 앉았다. 마스크 한 채 말 없는 침묵여행을 약속 한 듯싶었다. 내가 C와 중앙통로를 사이에 두고 얘기를 나누자 여차 없이 페널티가 날아들었다. 공공장소에서의 묵언은 코로나사회의 불문율수칙이 됐다. 버스는 한 시간여를 달려 강화버스터미널, 다시 군내버스로 1시간여를 침묵 하다 보문사주차장에 닿았다. KTX로 서울~부산가는 시간이다. 김포~강화도~석모도를 잇는 다리개통으로 이만큼이나마 단축됨이다.
마애관음보살전 전망대서 조망한 서해의 대송도와 소송도가 해무 속에 그림이 됐다
옛날 나룻배시절엔 뱃사공이 곧 시간이었다. 보문사일주문을 들어서자 쓰러지는 노송이 쇠막대기에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다. 300살의 소나무가 짊어진 보문사의 역사무개가 얼마나 무거운가를 웅변하나 싶었다.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 이젠 700살 넘은 은행나무가 당당하게 하늘로 치뻗고 침묵의 웅변을 한다. 병자호란 때 용케 살아남은 질곡의 트라우마는 행목(杏木)의 입을 닫게 했는지 모른다. 몽골군이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인조는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강화도로 피난시킨다.
마애관세음보살. 영험하여 치성들이면 소원성취 한단다
수 백 명의 양민이 따르는 피난행렬은 한양출발한지 만 사흘만에 겨우 강화도 앞에 도착했다. 허나 도강할 나룻배가 태부족이라 우왕좌왕 아수라장이 됐다. 강화도로 안전도강을 선도할 강화검찰사 김경징이 몇 척 안 되는 나룻배에 지네 가솔(家率)들과 가재도구를 먼저 실어 보낸 후였다. 뒤쫓던 오랑캐가 들이닥치자 피난행렬은 갯벌로 뛰어들었다. 김포-강화의 강폭은 600~800m 정도지만 물살이 거세고 갯벌이 질퍽진창이라 도강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강은 참혹한 도살장 아니면 노예로 끌려가는 생지옥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보문사 입구와 일주문
635년(선덕여왕4) 4월,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에서 그물질을 하다 돌덩이 22개를 건져 올린다. 재수 옴 붙는다고 두털대며 돌을 바다에 던지고 다시 그물질을 하자 그 돌덩이는 고기 대신 또 올라오는 게 아닌가. 그날 밤, 어부는 괴이한 꿈을 꾼다. 노승이 나타나 힐책을 하면서 낼 바다에 나가 그 돌멩이 22개를 다시 건져 올려 낙가산으로 옮기라고 당부까지했다. 어부는 귀신에 홀린 듯이 돌멩이를 옮기는데 석굴 앞에 당도하자 발길이 떨어지질 안했다. 그래 석굴에 단(壇)을 만들고 돌멩이를 앉히니 돌은 나한석조들로 둔갑하는 거였다.
나한전과 멧돌
석굴사원의 전설이다. 몽골의 도륙에 몸서리치던 쪼잔한 인조는 몽골의 2차 침입땐 피난처로 남한산성을 택했던 것이다. 안전할 거란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끌려나와 몽골 칸에게 ‘삼두고배(三頭叩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군신의 예)란 치욕을 당했던 것이다. 피난행렬이 강화해협의 탁류와 갯벌이란 생지옥을 향해 사흘 동안 죽음의 행군을 했던 그 길을 C와 나는 세 시간에 석모도보문사까지 왔으니 기뻐서 깨춤이라도 춰야 할 판인 거다
극락보전 후면단청과 삼성각 옆 처마선이 아름답다
돌투성이 산자락 모퉁이로 물이 돌아 흐른다하여 석모도(席毛島)라 했는데 애초엔 북쪽의 송가도(松家島), 남쪽의 매음도(煤音島), 어유정도(魚遊井島) 사이에 바다 갯골을 바닷물이 흐르고 있었다. 1706년, 숙종이 대대적인 성토`간척사업을 벌려 돌모퉁이의 평야를 만들었다. 강화도의 질펀한 평야는 몽골의 1차침입 때 포위당해 아사한 트라우마가 낳은 외양간수선이었지 싶다. 석굴전마당의 600여살 먹은 향나무는 비천하려는 용트림자태다. 웅장하고 멋있는 고목이 신령스럽게 보였다.
마애관세음보살전을 향하는 700계단
향나무 뒤쪽 급경사계단은 오색연등터널이다. 그 된비알계단 700개를 올라서야 영험하다는 마애관음보살상을 알현 참배할 수 있다. 높이9.2m, 폭3.3m의 마애석불좌상은 거대한 눈썹바위를 천정 삼았고, 눈썹바위는 낙가산(235m)정상을 지붕 만들었다. 장관이라.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승려인 이화응(李華應)과 보문사 주지 배선주가 눈썹바위에 관음보살을 새긴 역사다. 엷은 안개이불 덮고 오수를 즐기는 서해바다는 대송도와 소송도를 보초병 세운 채다.
눈썹바위
풍경이, 한 폭의 묵화가 불토의 이상향을 보여주나 싶었다. 마애관음보살상은 인자하고, 호탕하고, 근엄하고, 해학스럽달까? 보면 볼수록 표정이 오묘하다. 좌측에는 비명(碑銘)이 있으며, 불상 앞에는 소규모의 석등이 있다. 이 석불과 석굴에서 기도를 하면 회임한다고 회자된다. 그래 아낙들이 기도삼매경에 빠져있다. 신앙의 불가사이를 나는 좀체 수긍하려 들지 않는다. 글면서도 신앙의 힘으로 이루어진 기적 같은 일들에 감탄과 경외감으로 주눅 들다시피 하곤 한다.
마애보살전 앞 휴게전망대.
천연의 거대한 눈썹바위를 지붕삼고 서해를 바라보는 마애보살자리의 우듬지는 불상봉이다. 불상봉은 석모도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해명산(327m)과 상봉산(316m), 낙가산과 등산로로 이어진다. 멋진 경관을 즐기려는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단다. 나도 언제 이 코스를 완주할 테다. 글고 석모도에 11번바람길이 생겼단다. 석모도 선착장에서 남쪽 해안을 따라 매음리 선착장을 통과하여 어류정항, 민머루해변, 어류정낚시터, 그리고 보문사 입구까지의 총 16km의 구간이란다. 11번 석모도 바람길 트레킹이 내 머리속에 벌써 펼쳐지고 있다.
천인대와 오백나한
보문사는 남해의 보리암, 낙산의 홍련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이다. 2009년, 길이40m, 폭5m의 거암 천인대(千人臺)에 오백나한을 조각한다. 서역(西域)의 고승이 이 천인대에 불상을 모시고 날아왔다는 창건설화가 구전된 곳이다. 더는 이 바위에 1,000명이 앉을 수 있어 설법장소로도 사용되었단다. 전신사리가 봉안된 33관음보탑을 중앙에 두고 오백나한이 감싸는 형상을 하고 있는 천인대에서 나는 다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오백나한상은 모습과 표정이 모두 달라 각각의 개성적인 모습을 자유분방하게 나타내고 있어서다.
범종각과 600살의 은행나무
우리는 요사체 툇마루에 앉아 눈썹바윌 뉘였대는 7월의 햇살에 눈 팔면서 지난 수 십 년간의 삶의 단편들을 교환하기도 했다. 나이 들어 나누는 추억담은 자못 감동적이다. 진정한 추억을 공유하는 우정은 삶의 비타민이 된다. 그래서 젊었을 때 자랑할 만한 많은 추억거리 삶을 살아야 함이다. C의 젊은 날은 그래 보였다. 진정한 노력파였다.
600살 향나무의 용트림
천의 얼굴 500나한상 중에 C를 닮은 나한과 나를 빼박은 나한은 어디에 있는지 다음에 찾아보고 싶었다. C가 동행해 준 오늘은 진정 뿌듯한 하루였다. C가 <숲길의 기쁨을 좇는 행복>출간을 축하`구매해 줘 난 <남김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한 권을 선물했다.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2020.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