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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0일부터 28일까지 북경, 태원, 핑야오, 연안, 적성 등 지방을 여행다녀왔습니다.
중여동에 시우담님형님이 혼자 다니는게 심심하다고 하셔서 같이 다닌 것이고
그 형님이 제 여행경비를 다 부담해주시는 덕분에 돈도 않들고 많은걸 구경하고 왔습니다.
며칠동안 본거를 몇글자 적어봅니다.
북경 가기 3일전에 시우담형님이 갑짜기 쪽지를 보내주시면서 여행 같이 하자고 하셔서 19일날 밤
항주에서 롼쭤(푹신한 좌석)를 13시간 타고 북경에 올라갔다. 형님은 21일날 도착하셔서 저는
하루 앞당겨 가서 관광을 좀 하고 싶었다. 부끄럽지만 중국에서 태여나서도 북경 관광은 처음이다.
북경은 20일날 아침 7시반에 도착했다. 인터넷에 올려진 지도에 나온 유스호스텔로 가려고
지하철을 타려고 했는데 북경역 지하철은 임시로 폐쇄해버렸는데 언제 다시 운행한다는 말은 없다.
그래서 다음역까지 걸어가는데 무거운 짐 끌고 20분은 걸은 것 같다. 걸어가면서 느낀게 북경건물들은
상해 건물과 비교해 높지는 않은데 땅을 차지한 면적은 상당히 넓고 도로도 아주 넓은 편이다.
거리도 생각보다는 깨끗한 편이다.
지도를 보고 또보고 찾아온 유스호스텔인데 약간 실망이다. 로비는 사진과 비슷하게 고풍스러운데
방안이나 복도 및 화장실에 청소를 자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지저분하다. 어차피 하루라서 참고
묵었는데 다음에는 다시는 이집에 묵을 일이 없을 것이다. 참고로 이름은 雍和유스호스텔이다.
짐을 풀어놓고 천안문광장으로 가는 길에 말로만 듣던 선풍기 돌아가는 지하철을 타보게 됐다.
북경 지하철 요금이 2~5원이였는데 제가 갔을 때는 어딜 가나 모두 2원이였다.
올림픽 기간에 차량정체를 줄일려고 대중교통비를 내려서 시민들보고 많이 사용하길 권하는 것이다.
천안문 광장에 나갔는데 웬 경찰이 그리 많은데 당장 테러행위가 있는 것 같은 분위기다.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서 치안을 유지하기 나온 모양인데 케리어 끌고 다니는 사람은 가방을
한번 검사 시켜야 한다.
사진을 2장 찍고 왕푸징 거리를 거쳐 고궁 뒷쪽에 경산공원에 갔는데 왕푸징 거리는 정말 실망이다.
상해에서는 남경로가 中華第一街(중국에서 제일의 거리)라고 하는데 저는 북경에 왕푸징 거리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설마 남경로가 제일이겠냐 그래도 수도인 북경에 왕푸징거리가 최고겠지 하고
생각을 하군 했는데 이번에 왕푸징을 직접 보고 남경로의 중화제일가란 말을 믿게 됐다. 왕푸징에
상가들도 별로 없고 사람도 적고 유명한 먹거리 골목도 항주에 청하방보다 중류가 적은 편이다.
게다가 상가에 종업원들은 팔에 빨간천을 매고 일을 하는데 천에 찍힌 글자 보면 치안관리
자원봉사자인데 왠지 문화대혁명에 홍위병 같아보인다.
시간이 별로 없는 관계로 자금성에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뒷쪽에 있는 경산공원에 산에 올라가서
높은데서 바라보기로 했는데 안개가 좀 껴서 뿌옇게 잘 보이지도 않는다. 입장료는 놀라운 2원이다.ㅋ
21일날은 북경공항에 가서 시우담형님을 만나고 바로 밤기차 타고 태원으로 이동했다.
22일날 아침에 일찍 태원에 도착했는데 역앞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버스를 타고 핑야오로 이동했다.
근데 탄 버스가 터미널에서 정기 운행하는게 아니라 기차역 앞에서 개인이 운행하는거라서 핑야오
시내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근처 고속도로에서 내리라는 것이다. 여기는 고속도로에서 버스를
타고 내리는 일이 흔한 일인 것 같다. 고속도로에서 내려서 뚫린 철조망으로 나와서 택시를 타고
시내로 이동해야만 한다.
핑야오(平遙)는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사으로 등록된 고성(古城)이다.
중국에 최초에 은행가들이 많이 있었던 곳으로 청나라때는 금융중심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 지역이 건조하고 물이 적어서 먼데 나가 사업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금융중심지로 된 것이다.
옛날에 개인단체들이 무기를 들고 귀족들의 귀중품들을 운송해주고 거액의 운송료를
받는 사업이 있었는데 그때는 이런 민간조직을 ?局(삐야오쥐)라고 불렀다.
전국 각지에서 찾아와서 의뢰하고 많은 돈을 주었지만 종종 이유로 안전하게 목적지에
운송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때마침 핑야오에 안료(顔料) 장사를 하는 집이 있었는데 전국 각지에 분점이 있었다.
한번은 다른 사업을 하는 사람이 물건을 팔고는 그 많은 돈을 갖고 오기가 힘들고 안전하지
않아서 안료가게 지방분점에 돈을 주고 안료가게에서 종이에 써준 증명을 갖고 핑야오에
본점에 와서 현금을 찾았는데 이번 계기로 이 가게는 안료장사를 그만두고 르성창(日昇昌)이란
간판을 세워 피야오하오(票號) 사업을 시작했는데 피야오하는 현재로 말하면 은행이다.
퍄오하오가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서 송금서비스를 시작해서 대출서비스도 했던 것이다.
19세기 중반에는 피야오하오 사업이 제일 번창할 때 였는데 전국에 피야오하오 사업을 하는
집이 총 40여개였는데 그중에 핑야오에만 22개나 있었다고 한다.
현재 핑야오에 가면 日昇昌 피야오하와 삐야오쥐 등 박물관이나 기념관을 구경할 수 있는데
120원짜리 패키지 입장권을 끊어야 한다.
따오샤오미엔(刀削面)핑야오에 유명한 먹거리로 칼로 깎은 면이란 뜻이다.
면발이 너무 굵어서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위에 야채는 맛있는 샹차이다.
지엔즈(剪紙) 역시 핑야오의 전통적인 수공예품이다.
여기저기 구석구석 구경했는데 이상하게도 핑야오에는 가로수가 한그루도 않보인다. 건조해서
그런지 나무도 없고 물도 없어서 모기도 없고 밤에는 너무 시원해서 창문 열고 잤는데 좀 추웠다.
시우담 형님 말로는 핑야오가 리쟝이나 봉황에 비해 덜 상업화 되고 건물 보존이 잘 되있다고 하신다.
23일에는 핑야오고성에서 1시간반 거리에 있는 왕쟈따위엔(王家大院 이하 왕가대원)을 구경했다.
왕가대원은 청나라 때 두 왕씨 형제가 살던 집인데 방이 무려 1118칸이나 있다고 한다.
사진에 나오는 건물들은 전체 건물에 3분에1뿐이다.
사진을 보시다 싶이 이건 개인집이 아니라 완전 하나의 마을이다.
집이 하도 커서 반만 보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해야만 했다.
다음 목적지는 중국에서 두번째로 큰 폭포 호구(壺口)폭포인데 교통편이 여러모로 불편하고
차표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일단 태원으로 돌아가서 다른 코스를 준비하기로 했다.
태원역에 도착해서 3시간짜리 호텔방을 잡아 인터넷을 하고 목적지를 연안으로 바꿨다.
근데 연안으로 가려면 버스로 가면 거리상 가깝지만 고속도로가 개통되지 않아 오래
걸릴거 같아서 일단 기차 타고 서안에 가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태원에서 서안 가는 기차는 밤 12시에 완행열차였는데 에어컨도 않나오는 기차다.
그래도 저는 더위를 덜 타는 편이라서 잘 잤는데 땀을 잘 흘리는 형님은 잠을 설쳤다.
서안은 24일 10시에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기차역 앞에 있는 버스터미널 가서 연안 가는
버스를 타려니까 없다면서 저기 산푸완터미널 가서 타라고 하는데 택시가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전기자전거 택시를 한사람 한대씩 타고 산푸완터미널 갔더니 여기서는 운행하지
않는다면서 또가서 동부터미널 가랜다. 이리가라 저리가라 하는 서안이 마음에 않든다.
연안에 도착해서 지도를 샀는데 지형이 참 이상하게 Y자 모양으로 되있다.
전체 인구가 200만정도로 연안 시내에는 30만명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다.
연안은 예전에 홍군들의 대장정 종점으로 혁명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지금도 관광지는 대부분이 공산당XX기념과 누구누구 살았던 집 뿐이다.
연안을 찾은 이유는 혁명의 흔적을 찾으려는게 아니라 야오뚱(窯洞) 때문이다.
야오뚱은 산에 동굴을 파서 만든 집인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기 때문에
저렴하고 실용적인 건축물이다. 있다가 밑에서 사진을 볼 수 있다.
서안에서 점심도 제대로 못먹고 바로 연안으로 온 바람에 도착하자마자 음식점을 찾아야 했다.
근데 연안은 작은 도시에 불구하고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어서 활기가 넘친다.
여기가 농사도 잘 되는 땅도 아닌데 뭘로 먹고 사는지 소비도 비싸고 참 재미 있는 도시다.
24일에는 도시 근처에 있는 마을에 가서 야오뚱을 보기로 했다.
원하던 야오뚱이 많은 마을을 찾지 못했지만 시내랑 그리 멀지 않은 자오웬이란 마을에서
야오뚱을 몇개 찾았다. 처음 들린 집은 할아버지 혼자 사시는 집인데 어렵게 사시는것 같다.
이 집은 세번째로 방문한 집인데 너무 순박하고 친절한 분들이라 차도 얻어 마시고
점심때에 갔기에 어머니는 점심을 먹었느냐 자꾸 물어보고 먹었다는데도 않먹었으면 죽이라도
끓여주시겠다 하고 아들은 슬그머니 나갔다 오더니 살구를 따오고 먹으라는 것이다.
가을부터는 고등학교에 갈 학생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과일을 따다주는게 너무 고맙다.
헤여지면서 돈을 좀 드릴려고 하는데 어머니는 결코 않받는다면서 다음에 대추가 익었을 때
꼭 오라고 하는데 정말 다시한번 찾아가야겠다. 기념사진도 같이 찍었는데 나중에 사진과
함께 식구들한테 여러가지 선물을 보내드릴 생각이다.
오후에는 연안의 상징이라는 보탑이 세워진 보탑산에 올라갔다. 호텔에서 쉬었다 올라가려는데
갑짜기 소나기에 우박까지 내렸는데 다행이 지나가는 비라 금방 그치고 등산 할수 있었다.
산에 올라가니까 때마침 뭔가 촬영중이다. 국~민~당이 연안을 점령해서 보탑산에서 승리했다고
소리 지르는 장면인데 연기가 하나같이 어슬프다. 이 더운 날에 두꺼운 군복을 입고 참 고생이다.
연안을 떠나는 날 작은 산에 올라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광장에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궁금해서 기다려봤는데 범죄자들을 공개적으로 판결하는 것이다. 마약범도 있고 살인범도 있다.
젊은 여자는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얼굴을 보여야 하니
좀 불쌍한기도 한데 제가 뭔가 당했다면 생각이 다를 것이다.
26일 밤에는 다시 서안으로 돌아가 북경으로 가는 밤기차를 탔다.
북경에 도착해서 여행이 끝나는게 아니라 98년도에 장예모감독이 찍은 영화 "一個都不能少"(하나도
빠져서는 않된다"의 촬영지를 가야 하는데 그 마을이 북경 북쪽으로 200km 떨어진 곳에 있어서
어쩔수 없이 북경으로 들어가서 하북성 북부지방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다.
적성(赤城/츠청)이란 작은 도시에 도착해서 렌트카를 빌려 비포장도로로 한참 가서야 마을에 도착했다.
一個都不能少란 영화는 저도 본 적이 없는데 듣기로는 98년도에 찍었는데 한국에서 개봉한 적은
없지만 99년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종영작이라고 한다. 영화 내용은 대충 이렇다.
어느 가난한 시골마을에 총 학생 9명?의 초등학교가 있는데 선생님 한분이 수십년동안 모든 학생을
가리치는데 한번은 선생님 어머니가 아프셔서 병원에 가서 한달동안 돌봐드려야 되는데
학생들을 그냥 버리고 갈 수 없어서 중학교 1학년생 학생을 데려와 가르치라고 한다.
그리고 애들 한명도 빠지면 안된다 말을 하고 갔지만 그중에 제일 가난한 집에 학생은 학교를
그만두고 대도시로 가서 돈벌러 떠났는데 중학생 임시교사는 교장의 말씀이 생각나서
애들 데리고 학교를 떠난 학생을 찾으러 가는 이야기다.
영화내용은 약간 꾸민것도 있겠지만 배우는 없이 다 현지 학생과 그 선생님이 주연이다.
그리고 이날 찾아간 날 확인한 결과 선생님이 7명의 학생을 가리치는건 사실이다.
저 위에 사진이 전에 영화에 나온 그 학교라고 하는데 영화촬영 끝나고 옆에 새 건물을
지어줬기에 원래건물은 현재 양우리가 됐다.
이 마을에 다녀와서 지금 그 영화를 15일만에 겨우 다운받았는데
어느 나라에서 더빙을 했는지 도데체 뭔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애들이랑 놀다가 떠나면서 기념사진을 한장 찍었는데 이거 또한 인화해서 사진을 보내면서
학용품을 사서 같이 보내줄 생각이다. 키큰 애는 다른데서 공부하는 중학생이고 앞에 두 어린
학생은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다. 참고로 학교 이름은 水泉希望小學이다.
전국에 어디가나 시골에 가면 希望小學가 있는데 이런 학교는 정부에서 지어준 학교가 아니라
개인이나 기업이 기부해서 지어준 사설 학교다.
학교와 교장 및 일부 학생들을 만나고 적성 시내로 돌아가 호텔을 잡는데 시내에는 외국인이
잘 수 있는 호텔이 없어서 온천에 있는 호텔에서만 자야 했다. 온천에 호텔도 외국인 투숙이
처음인지 여권 복사할 수가 없어 한참 후에 경찰이 와서 직접 확인하고 가고 만다.
다음날 북경으로 돌아가는 버스가 중간에 두번이나 멈춰서 경찰의 검문을 받아야 했다.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서 안전을 위해 검문이 많아진 것이다.
북경에 도착해 한식당에 가서 10일만에 김치를 먹고 항주행 기차타고 돌아왔다.
여기까지 여행기고 서안과 가까운 화산과 호구공원을 볼겸 그 순박한 가족을 다시 보러 갈것입니다.
<출처 : 중국여행 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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