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한 날들이 지나갔다.
구월 말엔 벌초행사로 대 가족이 모였고 시월 초하루엔 시어머님 제사였고
이어서 추석을 보내고 나니 머리가 얼얼하다.
북적대던 식구들이 다 떠나고 나니 시원하기도 하고 물 지난 자리처럼 허전하기도 하다.
정리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나는 아침부터 뭔가 음모를 꾸미는 사람처럼 마음이 분주하다. 어딘가로 떠나서 바람을 맞고 와야 겟다.. 가을이 왔는데 어디만치 왔는지 가을의 바람을 맞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질 것만 같다.
열차시간표를 쳐다보며 가방을 챙겨든다. 11시 13분 진영 역 출발 북천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하동 북천 코스모스 축제.
17일간 열린 그 행사가 오늘이 마지막 날이란다.친구들과 가기로 날 잡다가 그만 펑크가 나 버렸는데 나 혼자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은 날, 안성맞춤인 장소 같았다.
5분 연착 을 해서 달랑 4량뿐인 순천행 미니 기차가 도착했다.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니 너무나 편안하다.
기차는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달린다. 중간 중간 작은 간이역에 손님들이 한두 명 내리고 역사는 졸다가 꾸뻑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평화롭고 조용하다.
한국의 가을 들판은 어딜 가나 누런 황금색이다. 밭에 심은 콩이나 깨, 고추 같은 것도 대부분 같은 색이다. 늘 보는 그림이라 편안하지만 조금은 지루하기도 하다. 뭐 좀 색다를 그림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는데 냇가에 지천으로 피어난 갈대가 눈짓으로 인사를 한다.
기차가 원북 이라는 역에 조용히 멎고 승객 두 명이 내렸다. 아마도 무인역인지 내린 손님 한 사람이 차표를 꽃밭에 던지고 나간다. 역사 안에 차표 버리는 곳도 없을까. 기차가 또 평촌 이라는 조그만 역에 기만이 멈추고 승객 서 너 명이 내리는데 그 중 번듯하게 양복을 입은 신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는 철길 옆의 향나무아래에서 소변을 보는게 아닌가? 내가 이렇게 보고 있는데 뒤통수도 안 가려운지. 옆에 하얀 실 유카 꽃도 껑충한 고개를 쳐들고 보고 있는데 .
이런 모든 풍경들이 오래전 고향가는 기찻길 풍경처럼 시간을 뒤로 돌려놓는것 같다.
한 시간 넘게 달려서 진주 역에 닿았다. 드디어 역 같은 기분이 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또 탄다. 보퉁이를 안은 나이 드신 할머니께서 핸드폰으로 어딘가에 연락을 한다. 참 좋은 세상이다. 우리 시어머님도 살아 계셨으면 밭에서 일 하시다가 조금만 새참이 늦어도 핸드폰으로 닦달을 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두 시간 넘게 걸려서 북천 역에 도착했다. 외가닥 철길 옆으로 코스모스가 가득하다. 참 낭만적인 풍경이라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러고 자세히 보니 기차의 열기로 꽃들이 죄다 시름시름 시들고 있었다. 나처럼 낭만적인 풍경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꽃들이 너무 혹사를 당하는 게 아닐까 싶다. 코스모스 숲길을 헤치며 기차도 조심스럽게 달리긴 하지만 .
논에 벼 대신 코스모스를 심고 메밀을 심었다. 소득이 보잘것없는 벽촌을 관광사업으로 탈바꿈 시킨 사람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북천 강의 물은 깨끗했고 주변이 온통 코스모스 꽃물결이다.
너무 많은 꽃이 한자리에 무더기로 모여 있으니 오히려 코스모스의 가녀리고 청순한 느낌이 반감 된다고나 할 까.
그러나 오랫동안 벼가 차지했던 자리를 꽃이 대신 자리잡고 수확하는 번거로움도 없이 눈으로 보면서 농민의 살림을 살찌워 주니 농업이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 셈이다. 수세미와 조롱박 터널이 볼 만 했다. 일 년 동안 가꾸어서 소담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탄생시켰다. 터널 안에 시화전도 열리고 있어서 더 멋있었다. 마지막 날이라 차들이 붐비고 늘어선 음식점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메밀로 만든 음식이 많았다. 많이들 사 먹고 가시유...
메밀국수로 늦은 점심을 먹고 이리저리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인터넷에 무수히 올라와 있는 사진들을 미리 본 터라 사진이 실물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늘씬한 금발의 서양여자 두 명이 손을 잡고 걷고 있고, 팔을 낀 젊은 친구들은 마냥 즐거운 표정들이다. 나는 혼자 그냥 무심하게 걸엇다. 바람은 불지 않고 날씨도 뜨거웠다. 가을비 라도 가늘게 뿌려준다면 하고 내멋대로 욕심을 내어 본다.
두 시간 정도로 한바퀴 돌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대에 만족하지 못한 시간이었지만 그런데로 좋은시간 이었다고 생각가하기로 하자..세시 반 기차인데 자리가 없어서 입석이고 그것도 창원까지 가서 갈아타야 한다. 직행은 다섯 시 반에 있다고 하니 하는 수 없이 입석표를 샀다. 구석진 자리에 보자기를 깔고 앉으니 이런 내 꼴이 참으로 우습기 그지없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가당찮은 객기 같은 이 용기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이 나의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되고 있다는 것. 시원찮은 글 나부랭이도 쓸 수 있는 원천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차는 다시 느릿느릿 움직인다. 단선철로라 몇 정거장을 지나면 상대방에서 오는 열차를 기다려서 다시 출발을 한다. 몇 분 연착을 하겠다고 안내방송을 해도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도 없다.
창밖의 풍경들은 갈 때 보았으니 궁금하지도 않기에 아예 신발을 벗고 눈을 감았다.이런 생고생.을 그래도 안 하는 것 보다는 낫다고 자신을 위로 한다 .
내일부터 또 일상에 매달려야 하는 내 삶에 오늘의 여행이 에너지 보충이 되었기를 바라면서 바닥에서 전해져 오는 열차의 흔들림을 그냥 즐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