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서는 형이 죽으면 그 아우가 형의 부인 즉 형수(兄嫂)와 결혼을 할 수 있는 관습이 있었다.
지금으로 보면 도덕적인 指彈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원래 취지는 아마도 남겨진 형의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보인다.
고구려 왕실 역사상 이 제도를 십분 활용(?)하여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왕후로서 대를 이어 권력을 유지한 유일한 사람이 ‘우왕후’ 다.
그래서 우왕후는 고구려 시대 여성 중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형사취수제’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제도였는데, 왕후라는 자리를 놓치기 싫어서 형인 고국천왕의 왕후였다가,
고국천왕이 승하하자 동생인 산상왕과 재혼하여 다시 왕후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도 고국천왕에게 미안했는지, 죽은 뒤 자신의 능은 고국천왕 곁이 아닌 산상왕 옆에 묻어달라고 했다.
아마도 ‘형사취수제’로 왕후 자리를 지킨 것이 당시에도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서기 160년~165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보이는 왕후 우씨는, 고국천왕(180년~197년) 2년 2월에 고국천왕의 왕후가 되었다.
제나부(提那部)의 수장인 우소(于素)의 딸이라고 전해진다. 고국천왕 12년 9월, 왕후의 친척인 ‘어비류와 좌가려’가 권력을 濫用하자,
고국천왕이 이들에게 압력을 가했고, 이들은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왕후 우씨의 가문은 상당히 권력을 탐했던 것으로 보이고, 고국천왕에 의하여 친정 집안이 권력에서 배제되자, 우씨는 마음 속으로 고국천왕에게 원한을 가졌을 수도 있다.
이 후, 고국천왕은 '안류나 을파소' 등의 현명한 신하들을 등용하여, 고구려 백성들에 대한 선정을 베풀었고 민심을 얻었다.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진대법’을 실시한 사람이 바로 을파소이다.
197년 5월 고국천왕이 사망하자마자, 왕후 우씨는 왕의 사망 사실을 숨기고 첫째 동생 ‘발기’의 집을 찾아가 고국천왕 이후의 정국에 대하여 의논하려 하였다.
아마도 자신의 거취와 권력유지가 더 급선무였으리라.
그러나 발기는 차기 왕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역모(逆謀) 될 수 있는 사안이기에 상식적으로 고국천왕 사후 정국에 대해 논의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졌을 것이다.
또한, 왕위계승 서열 1위인 자신이 국왕이 되었을 때 권력욕 많은 형수가 거북스러운 존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컸던 탓에 야밤에 찾아온 형수와 이야기하길 거부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