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火)
임 우 희
집을 나선다. 바람에 흙냄새가 난다. 비가 올 기세다. 휴일이라 산을 좀 걸어볼 요량으로 가까운 산으로 향한다. 신은 차에 두고 바짓단은 한번 접고 우산을 들고 산을 오른다. 잠시 뒤 비가 우산 위로 후두득 후두들 소리를 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단비다. 좀 많이 내리기를 바랐지만, 사방이 훤해진다. 먼지가 잘 만큼 비가 왔다.
뉴스에서는 울진, 삼척지구에서 난 불이 213시간 만에 주불은 진화되었다고 한다. 서울 면적의 삼 분의 일 가량을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다. 오랜 세월 가꾼 산림이 우리 인간의 부주의로 엄청난 재난을 계속 일으키고 있어 안타깝다.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면 가치들이 무리 지어 깍깍거린다. 까치는 꼭 사람들 가까이 살며 마음을 설레게 하기도 한다.
신혼 시절 생각이 떠오른다. 당시 막내 시동생이 초등학교 5학년이고 위로 둘 시동생과 시누이와 함께 살았다. 부부 모임을 다녀왔을 때다. 겨울밤에 따뜻한 비닐 방바닥에 있는 개미를 성냥을 켜서 계속 잡다가 그만 불을 내고 말았다. 가내공업으로 원단이 쌓여 있는 방이었다. 그 원단에 옮겨붙었는데 넷이서 불은 껐는데 원단 더미가 쓸 수 없게 되어버렸다. 너무 놀라서 창백한 동생들은 나무랄 수도 없었다. 심하게 다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당시 내 마음속은 심하게 흔들리기도 했다. 맏며느리로 살아야 하는 책임감이 늘 버거웠다. 변변찮은 살림살이가 불이 나서 다 버려야 하니 큰 걱정을 했다. 그 순간 친정아버지에게 맡겨둔 비상금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무도 모르게 시골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이틀 후 아버지는 큰 황소 한 마리 판 돈을 첫차로 오셔셔 가져다주시고 바로 가셨다. 맡겨둔 돈 보다 훨씬 큰 금액을 바로 주셨지만 내 부모에게는 당연하게 받았다. 그 큰돈이 원단을 큰 트럭으로 사 올 수 있었다. 아버지가 주신 큰 사랑이 다시 살림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세월 잊고 살았는데 왜 이제야 생각이 날까? 만 날 수도 없는 멀고 먼 하늘에 계신다.
불이 난 후엔 집을 비울 땐 전 가족이 같이 갔다. 심지어 친정에 갈 때도 다 같이 가곤 했다. 우리 가족이 가면 친정 부모님은 음식을 많이 준비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모님을 힘들게 한 딸이었다. 팔 남매의 맡며느리 책임을 결국 부모님도 함께 감당하신 셈이다. 그래도 불이 나고 난 후 일거리가 감담을 못 할 정도로 바빴다. 3년 가까이 일이 많아 직원도 많고 하니 일속에 푹 묻혀 살았다. 봉제 종류 일은 해본 적이 없으니 도울 수도 없었다. 그냥 세 끼 식사를 열심히 해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2달 후 대식구가 살면서 공장을 운영할 만한 집을 구할 수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집을 마련했다. 한옥 전체를 공장으로 개조했다. 겨우 방 두 개만 쓰도록 하고 나머지는 다 일할 공간으로 사용했다. 한창 일에 탄력이 붙고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날이었다. 공장 중앙에 연탄난로를 직원이 갈고 있는데 불이 발갛게 붙은 연탄 장이 겹쳐 떨어지는 바람에 또 불이 나고 말았다. 직원들이 큰 원단으로 덮어 끄려고 했지만, 더 크게 번졌다. 공장 식구 전체가 우왕좌왕 설쳤지만, 불길은 점점 더해갔다. 그 순간 결혼 때 엄마가 만들어주신 솜이불을 꺼내서 풍덩풍덩 물을 적신 후 내가 불을 덮쳤다. 불은 기세가 꺾이고 하얀 연기를 내며 꺼지기 시작했다. 그 실크 꽃 이불은 시꺼멓게 타고 내 몰골도 형편없이 망가져서 그 와중에도 모두 웃고 있었다.
그 후로 우리는 재난에 철저하게 준비하게 되었다. 언제나 소화기를 준비해둔다. 우리 집안은 불 이야기만 나오면 그 사건을 얘기한다. 이 세상엔 공짜는 없다. 경험 덕분에 더 세밀하게 대비해서 걱정을 줄일 수 있었다. 어렸던 시동생들도 철저하게 보험을 비롯한 재난과 건강에 대한 대비를 잘하고 있다. 지난해 아파트에 누수가 발생했을 때도 준비해둔 보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
인간에겐 뒤돌아 다시 점검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지금은 시스템적으로 대비만 잘해 놓으면 큰 걱정은 줄일 수 있다.
올해는 산불이나 화재가 역대 최다라고 한다. 대부분 부주의나 철저히 대비하지 않아서 발생한 인재다. 울진의 큰불도 지나가는 차량에서 버린 담뱃불일 가능성이 크고, 강릉 옥계의 산불도 토치(캠핑 때 불을 쉽게 붙이는 도구)로 낸 불이라고 한다. 그 지역 주민들의 생계 수단인 송이버섯은 이제 살아있는 동안은 어렵다고 한다. 소나무와 송이는 공생관계라고 한다. 송이버섯 균은 불에 약해서 불이 스쳐만 가도 다 망가진다고 한다. 또한 소나무도 송이가 있으므로 더 싱싱하게 자랄 수 있다고 한다. 대대로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하고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자원이 일순간에 재가 되어 버렸으니 그분들의 잃어버린 수 많은 것들을 누가 보상할 수 있을까?
노부부의 멍한 눈망울엔 눈물만이 흘러내린다. 소 우리에 소는 등에 털이 새까맣게 타 있다. 우리의 허파 역할을 해주는 산천은 숯덩이가 되었다. 우리 민족은 어려울 때 강했다. 지금 전국 많은 사람들이 몸과 마음으로 돕고 있다. 봄 가뭄을 해소하는 이 비가 단비가 되어 검은 산하를 골고루 씻어주는 신의 한 수가 되기를 바란다.
첫댓글 솜이불에 물을 적신 아이디어 굿!!
재산을 건졌으니 큰 다행.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김성문선생님,
부지런한 댓글 고맙습니다.
글을 쓰니 옛 기억들이
살아나서 의미가 됩니다..^^
봄이면 겨우내 잠들었던 모든 생명이 깨어나 너무도 흥분되는데 그놈의 산불이 꼭 따라붙어 정말 천불이 납니다. 불이 이롭기도 하지만 늘 조심 또 조심해야 함을 이 시기에 적절하게 올려주신 것 같습니다.
조샘,
반갑습니다.
지금 비도 오고 눈도 오고
자연이 돕지 않으면
우리 인간은 살아갈 수
없음을 또 알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