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사람들은 전쟁에서 상대를 이기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해왔다. 그 중 하나는 ‘하늘을 뒤덮는 화살’형 전략이다. 영화 [300]에서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300명의 전사들 앞에 페르시아의 백만대군이 들이닥친다. 일단 양쪽의 전력 차이부터 상대가 안 되는 것이었지만, 페르시아왕 크세르크세스는 처음부터 힘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줄 생각이었는지 군사들로 하여금 일제히 화살을 퍼붓게 한다. 빛을 가릴 정도로 새까맣게 날아오는 화살 ‘비’는 충분히 위력적이다(물론 영화에서는 방패를 이용해 막아내지만).
하늘을 뒤덮는 화살 VS 강력한 한 방
이와 정반대의 전략도 있다. 이른바 ‘한 방’형 전략이다. 가장 위력이 강하고 가장 결정적인 ‘한 방’을 위해 모든 걸 투자하는 전략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 연구에 처음 착수한 것은 독일이었다. 연합군들과 거의 홀로 대적해야 했던 독일의 입장에서 전력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승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기들을 압도할 만한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록 연합군 편에 서 있던 미국이 먼저 핵무기를 개발하긴 했지만, 적어도 독일군의 예상은 맞았다. 그 핵무기 하나가 전쟁의 판도를 바꿔놓으리라는 예측 말이다.
난자는 ‘한 방’형 전략의 결과물이다. 사진은 정자에 둘러싸인 난자의 현미경 사진(400배)
정자의 전략 – 5000억 개의 화살
유성생식의 과정을 살펴보노라면 정자와 난자는 각자 이 두 가지 전략을 최적으로 발달시켜 온 것처럼 보인다. 앞서 말했지만, 정자의 번식 전략은 망설일 필요도 없이 ‘화살형’이다. 정확히 조준해서 활을 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화살을 공중에 무작위로 날려 확률 게임에 운을 맡기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는 매우 비효율적일 것 같은 전략이지만, 화살의 개수가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많고 적들이 특정 지역에만 몰려 있다면 꽤 좋은 전략이 될 수도 있다. 화살을 몇 개를 쓰든 적만 섬멸하면 승리는 우리 것일 테니까. 단, 이 경우는 조건이 따른다. 공중으로 날아간 화살은 수거되지 않으니 전투에 투입되는 자원은 잃어버려도 될 정도로 싸고 언제든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실패의 댓가가 크지 않아야 한다. 이 조건만 충족된다면 이는 더없이 훌륭한 전략이 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남성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춘기 이후의 남성은 평생토록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 중 가장 작은 축에 속하는 정자들을 쉼없이 만들어낸다. 임신과 출산과 수유 과정을 거의 전적으로 여성이 담당하는 생물학적 특성상, 남성이 생식에서 신경쓰는 것은 자신의 유전자가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 뿐이다. 확률은 아무리 낮아도 상관없다.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도 성공만 한다면 나머지 실패가 모두 보상되기 때문이다. 10만개의 화살 중, 99.997%의 화살이 땅바닥에 꽂힌다 해도 상관없다. 0.003%에 해당하는 300개의 화살만이 적에게 맞더라도 크세르크세스는 스파르타군을 완전히 섬멸하는 것이니까. 따라서 남성은 사춘기 이후 일생 동안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 중 가장 작은 축에 드는 정자를 쉼없이 생산해낸다. 한 명의 남성이 일생동안 생산하는 정자는 평균 5000억 개로 알려져 있다. 지구상의 인간 집단 전체를 100번은 탄생시킬 수의 정자가 겨우 한 사람 몸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난자의 전략 – 한 방에 몰아주기
하지만 난자는 이럴 수 없다. 여성의 경우를 살펴보자. 앞서 말했지만 여성은 임신과 출산과 수유의 전과정을 책임져야 하므로 남성처럼 무모한 전략은 쓸 수 없다. 가지고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이를 함부로 낭비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은 혼자서 연합군을 상대하는 독일의 심정으로 생식에 임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패에 대한 댓가가 크기 때문에 가능하면 실패하지 않기 위해 모든 능력과 자원을 탁월한 ‘한 방’에 거는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적 특성은 생식세포인 난자를 만들 때부터 드러난다. 난자는 정자와 마찬가지로 생식세포의 일종이므로 난모세포로부터 감수분열을 통해 형성된다.
난자 형성 과정. 감수 분열의 결과 생성되는 난자는 단 하나 뿐이다. 참고로 사람의 경우 제1극체는 다른 동물과 달리 대개는 분열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모세포의 감수 분열을 통해 최종적으로 4개의 정자가 만들어지는 것과는 달리, 난자를 만들어내는 난모세포는 감수분열 과정을 거친 뒤에도 단 하나의 난자만을 만들어낸다. 이는 난자가 형성되는 과정의 세포 분열은 일반적인 세포분열과는 달리 세포가 똑같이 분열되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의 세포분열에서는 염색체 뿐 아니라 세포질까지도 균등하게 나뉘어진다. 하지만 난모세포는 분열 과정에서 하나의 딸세포에만 세포질을 거의 모두 몰아준다. 이 때 만들어지는 제2 난모세포는 제1 난모세포로부터 거의 모든 것을 받게 되고, 소외된 나머지 하나는 극체(polar body)가 되어 따로 독립되지도 못한 채 장차 난자가 될 세포의 곁다리에 잠시 존재하다가 퇴화된다.
즉, 난모세포가 감수분열 1단계를 거치게 되면 제2 난모세포 1개와 제1 극체 1개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제2 난모세포는 배란된 뒤, 정자를 만나 수정되면 제2 극체가 만들어지며 감수분열이 완성되고 수정란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난모세포는 감수분열 동안 단지 하나의 난자만 만들어낸다. 처음부터 될 성 부른 세포 하나만 골라 모든 것을 몰아주는 것이다.
하나의 난자는 엄청난 오디션의 경쟁을 뚫고 만들어진다
난자의 이런 ‘몰아주기’ 전략은 난자가 생성되기 더 오래전부터 시작된다. 실제로 여자아이는 태어날 때 난소에 약 200만개의 난모세포를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여자아이가 자라 초경을 할 즈음이면 난소에는 겨우 4만개의 난모세포만이 남는다. 나머지는 모두 퇴화하는 것이다. 난자를 만들기 이전의 난모세포 수준에서도 철저한 심사(?)를 거쳐 가능성 있는 것들만을 솎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요행히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사춘기까지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아직 오디션이 끝난 것은 아니다. 여성은 생리주기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난모세포만을 분열시켜 난자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난자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허락받는 난모세포는 겨우 400여개 정도이다. 난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도 다시 100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겨우 하나의 난자를 만들어낼 기회를 부여받는다.
난자는 경쟁과 솎아내기를 통해서 형성된다. 정자를 주입하는 난자 아래에 난자가 되지 못한 극체가 보인다.
이렇듯 치열한 경쟁과 솎아내기를 통해 형성된 난자는 승리자의 위용에 걸맞는 모습을 자랑한다. 가장 작은 세포인 정자와는 반대로 난자는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 중 가장 큰 축에 속하는 세포로 크기가 0.5mm 정도 되기 때문에 맨눈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다. 커다란 난자의 내부는 장차 배아로 자라기 위해 필요한 물질이 그득 든 세포질이 들어차 있고, 표면은 투명대(zona pellucida)라는 질기고 투명한 껍질로 둘러싸여 있어서 내부를 보호한다. 이 투명대는 때로 너무 단단하고 질겨서 정자와의 수정을 방해하거나, 배아가 자궁 내부에 착상하는 것을 막기도 할 정도지만, 그만큼 충실히 난자를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래저래 난자는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촉망받는 유망주와 같은 환경에서 형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