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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5월 24일 주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교회는 주님 부활 대축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 곧 부활 시기가 끝나는 날에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낸다. 성령 강림으로 인류 구원의 사명이 완성되었고, 이 구원의 신비는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교회와 함께 계속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에게 성령께서 강림하시어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이 완성되었음을 경축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용감하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여러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날을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탄생한 날로 본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저마다 받은 성령의 은사에 힘입어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기로 다짐합시다.
말씀의 초대
오순절에 성령이 내리자 사도들은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1-11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1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2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5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6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7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9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10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11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3ㄷ-7.12-13
형제 여러분,
3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7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23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순절에 사도들이 모여 있을 때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그들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 여러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람은 그 형체가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며 문을 잠가 놓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그리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20,22)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창세 2,7 참조).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의 숨, 성령을 불어넣으십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들은 더 이상 문을 잠그고 숨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어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도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사랑으로 위로하셨던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과 같이, 성령과 함께하면 사랑이 생겨나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로 만드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 같은 언어를 써도 마음이 통하지 않을 수 있지만, 성령의 언어는 분열을 넘어 일치로, 두려움을 넘어 사랑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오늘 우리 모두 성령의 손길을 느낍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룹시다.(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성령으로 인한 참 생명, 영적 생명, 종말론적 생명!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 세상 그 어떤 진귀한 선물보다도 값진 선물을 선사하십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건네는 과정이 특별합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요한 20,22)
여기서 ‘숨을 불어 넣는다.’는 표현은 아주 의미심장한 상징입니다. 창세기에 이런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 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생명을 주셨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냥 생명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입니다. 생명 유지의 본능에 따른 아무런 의식 없이 호흡하는 생명을 넘어, 죄로부터 해방된 인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사랑의 숨, 영혼의 숨을 쉬는 새로운 생명 말입니다.
하느님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 성령과 무관하게 살아가며, 그저 한 생명체로서의 숨만을 쉬는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엄청난 특권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작 한번 밖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 번이나 거듭 태어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 해도 과분한데, 세례를 통해 우리는 두 번째로 태어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상에서의 삶이 다하는 죽음의 순간, 또다시 영적으로 새출발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으로 인한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생명의 숨, 성령의 숨을 불어넣으시며 참 생명, 영적 생명, 종말론적 생명을 수여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요한 20장,22)
생명의 수여는 유다교 전통 안에서 죄의 용서와 늘 연결되었습니다. 죄는 죽음을 상징했으니까요. 죄의 용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기 위한 사다리였습니다. 죄의 용서는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말끔한 청산, 부서진 인생의 완전한 복구, 새 출발의 기점을 의미합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숨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진정 생명의 숨결, 성령의 숨결, 사랑의 숨결을 호흡하고 계신가요? 혹시라고 그저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한 거친 동물적 호흡만 숨 가쁘게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하루 우리들의 숨결, 호흡을 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의 호흡을 좀 더 길게 가져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사막의 교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매 순간 끊임없이 거듭되는 이 호흡을 좀 더 의식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숨을 들이마실 때, 이 세상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들이마신다고 생각하며 숨을 들이마십시다. 그리고 잠시 멈춘 다음 날숨을 내쉴 때는, 우리 내면의 죄와 죽음을 몰아낸다고 생각하며 호흡합시다. 내 안의 분노, 상처, 용서못하고 있는 사람들, 복수심, 중오심을 말끔히 몰아낸다고 생각하고 호흡합시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위대한 성인들의 기도방법이었습니다. 호흡만 길게 가져가며 잘 살펴도 아주 좋은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당 15분만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하찮게 여기지 마시고 진지하게 한번 반복해보시기 바랍니다. 보호자요 인도자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 삶, 새 생명을 다시 한번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율법의 “해야 해”, 그리스도의 “할 수 있어”, 성령의 “어 되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찬미 예수님! 부활의 기쁨과 성령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벽에 부딪힙니다. 성경은 분명히 "원수를 사랑하라",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는 '어떻게 그게 가능해?' 라는 비명이 터져 나옵니다.
오늘 요한 복음의 첫머리는 이 답답한 한계를 시원하게 뚫어주는 놀라운 구원 공식을 선포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다그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그 명령을 들을수록 우리는 더 작아지고, '나는 할 수 없어'라며 기가 죽습니다. 율법은 길을 알려주지만, 그 길을 갈 힘은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진리'와 '은총'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차원 이동의 4단계 공식과 같습니다.
첫째, 율법의 "해야 한다"는 강박을 만납니다.
둘째,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나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정체성을 입습니다.
셋째, 내 힘으로는 안 됨을 고백하고 성령의 '은총'을 청하여 마침내 "어, 되네?"라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넷째, 그때 내 영혼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 원리는 우리가 어릴 적 '두 발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의 경험 속에 아주 선명하게 담겨 있습니다. 처음 두 발 자전거를 타면 쓰러질 것 같은 공포에 휩싸입니다. "넘어지지 말고 똑바로 타야 한다!" 이것이 율법의 "해야 한다"입니다. 아무리 머리로 알아도 내 힘으로는 자꾸만 옆으로 쓰러집니다. 할 수 없다는 절망이 밀려옵니다. 그때 아빠가 뒤에서 자전거 안장을 꽉 잡아줍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아빠가 잡고 있어. 너는 아빠 아들이니까 혼자서도 달릴 수 있어. 앞만 보고 페달을 밟아봐!"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할 수 있다"는 '진리(정체성)'입니다. 아빠의 말(진리)을 믿고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기 시작합니다. 아이는 여전히 자기가 페달을 밟아 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밀어주고 중심을 잡아주는 아빠의 헌신적인 힘이 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아빠의 밀어주는 힘이 바로 성령의 '은총'입니다.
그렇게 비틀거리며 페달을 밟다가,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아빠는 저 멀리 서서 박수를 치고 있습니다. 아빠가 손을 놓았는데도 자전거가 쌩쌩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아이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기막힌 탄성이 무엇입니까?
"어? 되네! 내가 혼자 두 발 자전거를 타고 있네!" 이 "어, 되네?"의 순간, 걷기만 하던 아이의 세상은 두 바퀴로 세상을 가르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합니다. 쓰러질까 두려웠던 공포는 사라지고, 바람을 가르는 짜릿한 '평화와 기쁨'만이 남습니다. 자전거 타기라는 율법(해야 한다)이 아빠의 진리(할 수 있다)와 은총(밀어주는 힘)을 만나 기쁨의 춤이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신앙의 퀀텀 점프(Quantum Leap)를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지옥 속에서 생생하게 겪어낸 한 여인이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레지스탕스였던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과 그녀의 언니 벳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코리는 언니 벳시가 잔인한 간수들의 학대로 끔찍하게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1947년, 코리는 뮌헨의 한 예배당에서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에 대해 강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강연이 끝났을 때, 그녀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언니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바로 그 옛 나치 간수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당신의 메시지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개했습니다. 예수님이 제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당신의 입으로 직접 용서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성경은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율법)고 명령합니다. 코리는 자신이 예수님의 진리 안에 있어 용서할 수 있 존재(진리)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할 수 있다"는 정체성은 가졌지만, 원수가 손을 내민 순간 그녀의 핏속은 차갑게 얼어붙었고 도저히 손을 내밀 수 없었습니다. 율법과 진리만으로는 도저히 내 뜻대로 안 되는 인간의 한계에 부딪힌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침묵 속에서 간절히 성령의 힘을 청했습니다. "주님, 저는 용서할 힘이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없으니, 당신의 성령을 부어주시어 당신의 사랑으로 용서하게 해주십시오!"
코리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움(은총)을 청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내 어깨에서부터 팔을 타고 알 수 없는 따뜻한 전류 같은 것이 흘러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내 손이 기계처럼 움직여 간수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때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나의 형제여,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녀의 입에서 "어, 이게 되네? 내가 원수의 손을 잡고 있네!"라는 영적인 탄성이 터져 나온 순간입니다. 두 손이 맞잡힌 순간, 내 영혼을 짓누르던 증오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압도적인 평화가 밀려왔습니다. (출처: 코리 텐 붐, 『주는 나의 피난처』).
용서할 수 없다고 느끼면 아직 예수님(진리)을 온전히 만나지 못한 것이고, 용서해야 함을 알면서도 용서하지 못해 괴롭다면 아직 성령님(은총)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코리는 진리와 은총이 결합되어 차원을 이동하는 기쁨을 온몸으로 증명했습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서 38장에는 이 위대한 차원 이동과 구원의 원리를 보여주는 기막힌 알레고리가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 깊은 진흙 우물 속에 던져집니다. 물은 없고 진창만 있는 그 깊고 어두운 똥통 같은 구덩이에서 예레미야는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에벳멜렉이라는 내시가 임금의 허락을 받고 우물 위로 나타납니다. 에벳멜렉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하지만 구원자가 나를 찾아왔다고 해서 저절로 똥통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습니다. 차원 이동을 위한 절대적인 두 가지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에벳멜렉은 예레미야에게 밧줄을 던져줍니다. 그리고 낡은 헝겊과 헌 옷 조각들을 밧줄에 묶어 던지며 이렇게 외칩니다. "이 낡은 헝겊과 옷 조각들을 겨드랑이와 밧줄 사이에 대십시오." (예레 38,12).
왜 헝겊을 먼저 대라고 했을까요? 예레미야는 진흙탕 속에서 무거운 뻘을 잔뜩 뒤집어쓴 상태였습니다. 그 상태에서 까끌까끌한 밧줄만 겨드랑이에 끼우고 위에서 당기면, 피부가 다 찢어져 고통스러워 밧줄을 놓치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를 위로 끌어올려 주는 이 밧줄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너는 똥통에 있을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처럼 용서하며 하늘로 올라갈 존재다" 라는 정체성의 믿음, 즉 "할 수 있다"는 자존감을 줍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진리(밧줄)만으로는 찢어지는 고통(분노와 억울함) 때문에 원수를 끝까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낡은 헝겊입니다. 헝겊은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너덜너덜하게 찢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즉 성령을 통해 부어지는 '은총'입니다. 은총은 내 마음에 부드러운 보호막이 되어 끝까지 밧줄을 놓지 않게 만들고 마침내 "어, 되네?" 하며 위로 솟구치게 만듭니다. 예수님(에벳멜렉)을 만났어도, 진리의 밧줄(내가 하느님이라는 믿음)과 은총의 헝겊(성령의 평화)을 만나지 못하면 결코 차원 이동은 완료되지 않습니다. (출처: 『주석 성경』 예레미야서 38장)
저 육중한 비행기가 하늘로 날 수 있을까요? 비행기니까 날아야만 합니다. 우리도 용서해야만 합니다. 할 수 있다고 믿어야 조종간을 잡을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달리게 되고 정말 그 큰 쇳덩어리가 뜨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는 연료가 없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연료가 성령님입니다.
하늘을 날 때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어, 되네?!” 이 기쁨으로 사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브루클린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보통 주일미사에 80명 정도 나왔습니다. 미사에 100명이 넘으면 아이스크림을 사드리겠다고 했습니다. 1년에 두 번 정도 100명이 넘었습니다. 성탄 때와 부활 때입니다. 저는 기분 좋게 아이스크림을 사드렸습니다. 2024년 2월 11일에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왔습니다. 주일미사에 700명이 조금 넘었습니다. 저는 1,000명이 넘으면 점심을 사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00명이 넘게 더 나올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작년에 곧잘 800명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올해에는 900명이 넘을 때가 두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부활 미사 때입니다. 성당은 물론 성당 밖의 복도에도 의자를 놓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했을 때입니다. 밤새 고기를 잡지 못했는데 예수님 말씀을 따라서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졌더니 고기가 그물에 가득 잡혔습니다. 그물이 무거워서 들지 못할 정도였고, 나중에 확인하니 153마리였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이번 부활 미사에 1,155명이 왔습니다. 저도 놀랐고, 교우들도 많이 놀랐습니다. 저는 약속대로 점심을 사드렸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름대로 미사에 1,155명이 참례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지리적인 이유입니다. 텍사스는 미국에서 이주를 많이 오는 주가 되었습니다. 날씨가 좋고, 세금 혜택이 있고, 상대적으로 뉴욕이나 LA 보다는 물가가 저렴한 편입니다. 타주나 한국에서 전입해 오는 교우들이 많은 편입니다. 둘째는 성당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9년 전인 2017년에 지금 자리로 옮겨서 신축했습니다. 다운타운에 있을 때는 성당이 작았고, 주차 공간이 협소했습니다. 벨리 뷰에 있을 때는 물류창고를 매입해서 사용했습니다. 교우들도 당시 성당을 ‘창고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어빙에 새로 지은 성당은 넓은 주차 공간, 다양한 용도의 교리실과 친교실, 농구장, 어린이 놀이터, 야외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성당도 밝은 분위로 아름답습니다. 공동체의 땀과 눈물로 세워진 성당은 아름답고, 쾌척합니다. 고속도로 옆이라 교통이 편리합니다.
셋째는 ‘새 신자 분과’입니다. 성전이 신축되면서 전임 신부님은 ‘새 신자 분과’를 만들었습니다. 새 신자 분과는 미사 때마다 매의 눈으로 새로 온 교우들을 파악합니다. 새로 온 교우들의 정보를 컴퓨터에 정리해 놓습니다. 구역장에게 연락해 주고, 1달 동안은 미사 후에 함께 식사하면서 본당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주택 마련, 자녀 교육, 직업 안내, 취미 활동까지 도움을 줍니다. 2 달에 한 번은 새 신자들을 교중 미사 때 소개하고, 선물을 줍니다. 1년에 한 번은 새 신자를 위한 ‘친교 모임’을 갖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고,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본당의 새 신자 분과 위원들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새 신자들을 위해서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낚시꾼은 잡은 물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새 신자 분과 위원들은 전입해 온 새 신자들을 위해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넷째는 본당의 분위기입니다. 내년이면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설립 초기 교우들은 씨를 뿌렸습니다. 사제를 모셔 왔고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사랑의 물을 주었고, 영성의 거름을 주었습니다. 몇 번 어려움이 있었지만, 성령의 이끄심으로 잘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비가 온 뒤에 땅은 더욱 단단해지듯이, 공동체는 신앙 안에서 친교와 화합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른 한인 공동체는 고령화되는 추세인데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젊은 층이 상대적으로 많은 허리가 두꺼운 성당입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한국학교’도 전교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150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글과 한국 문화를 배우려고 성당에 옵니다. 본당 교우의 자녀도 있지만, 지역의 주민 자녀도 옵니다. 자연스럽게 성당을 접한 아이들과 부모는 신앙인이 되기도 합니다. 3년 전에 서울 대교구에서 파견된 부주임 신부님도 있습니다. 신부님은 영어 미사를 담당하고, 청소년 사목을 전담합니다. 신부님은 청소년들에게 영적인 거름을 듬뿍 주고 있습니다. 다된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듯이, 저도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던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의 친교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늘은 ‘견진성사’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성령의 은사를 하나씩 뽑았습니다. 저는 ‘굳셈’을 뽑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뽑은 성령의 은사가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열매 맺어 언젠가 2,000명이 미사 참례하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오늘의 축일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 대성당 봉헌 축일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인 자녀들과 모든 신자들의 신심 때문에 성인의 유해를 잘 보존하기 위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9 세는 프란치스꼬가 죽은지 2년이 지난 후인 1228년 3월 성인을 위한 무덤 성당을 짓도록 명하였으며, 엘리야 수사에게 공사의 책임을 맡기면서 1228 년 6 월 16 일 성인이 새로 묻히게 될 대 성전의 머릿돌을 축성하였다.
1230 년 5 월 25일 성인의 유해는 장엄하게 새로운 대성전으로 옮겨졌다. 인노첸시오 4 세가 이 성전을 축성하였다.
여러 세기를 통하여 이 프란치스칸 건축물은 온 세상의 수많은 순례자들의 목적지가 되어왔다.
베네딕도 14세는 이 성 프란치스코 성당을 대성당(patriarchal basilica)과 교황 기도소(papal chapel)로 지정하였다.
요한 23 세는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을 위한 준비 기간 동안 이 성당에 순례하였다.
성당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무덤을 본 딴 양식으로 성인의 유해를 담은 관을 중심으로 성당을 지었다.
성당은 겉의 모양뿐만 아니라 성당이 지닌 의미 또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살아 생전 프란치스꼬는 당시에 ’지옥의 언덕’이라 불리던 곳을 자신이 무덤으로 선택하였다.
이곳은 중세가 지날 때까지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집행하던 장소로 도시의 성 벽 밖에 위치해 있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한 장소는 도시밖에 위치 "해골산"(마태 27,32; 마르 15,21; 요한 19,17)이라고 불렀듯이,아씨시 역시 교수대가 있던 언덕은 도시의 서쪽에 위치한 성 벽 밖에 있었던 것이다.
프란치스꼬는 백성들에게는 형벌이 이루어져 혐오감을 주는 곳이지만,복음으로 회심한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 이곳은 그가 본받아야 할 전형인 그리스도의 수난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곳이 되었다.
오직 성인의 뜻만이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엘리야 수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었고,처형장을 도시의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함으로서 아씨시의 서쪽 언덕 위에 대성당을 지었던 것이다.그러므로 성 프란치스꼬의 무덤은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 성당과 유사하다.
1230년에 무덤과 아래층 성당의 형태가 완성되자 바로 성인의 유해를 모셔올 계획에 따라 5월 25일에 이장하였으며,아래층과 위층으로 된 2층 구조의 이 대성당은 1253년 5월 25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장엄하게 축성되었다.
여러 세기를 통하여 이 대성당을 온 세상의 수 많은 순례자들의 목적지가 되어 왔다.
보존하기 위해 지은 성 프란치스꼬 대성당입니다.
1228년 6월 17일, 성인의 시성식 다음날, 교황 그레고리 9세의 축성으로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성인의 유해는 1230년 5월 25일, 지금은 산타 글라라 대성당에 포함되어 있는 성 죠르지오 성당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요안나 (Jane)
신분 : 신약인물, 예수의 제자, 부인
활동지역 :
활동연도 : +1세기경
같은이름 :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는 ’야훼께서 은혜를 주신다’란 뜻이다.
헤로데 안티파스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돕던 사람이다(루가 8:3).
또한 그녀는 부활절 아침에 예수의 빈 무덤을 찾았던 세 부인 중의 한 사람이다(루가 24:10).
루가 8:3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다른 여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 루가 24:10
그 여자들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요안나와 또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다른 여자들도 그들과 함께 이 모든 일을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성 도나시아노 (Donatian)
활동년도 : +289/304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낭트(Nantes)
같은 이름 : 도나시아누스, 도나씨아노, 도나씨아누스, 도나씨안, 도나티아노, 도나티아누스, 도나티안
막시미아누스 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의 프랑스 낭트에 성 도나티아누스(Donatianus, 또는 도나시아노)라는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그는 유명한 로만 갈로(Roman-Gallo) 집안 아들이자 열심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박해가 한창 진행되던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 성 로가티아누스(Rogatianus)가 동생의 표양과 신심에 감동되어 세례받기를 원하였으나, 주교가 피신하였기 때문에 세례성사를 받지 못하였다.
이 무렵 황제는 유피테르(Jupiter)와 아폴로(Apollo) 신상에 제사 바치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체포하라는 칙서를 내리고 잡히는 대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집정관이 낭트에 도착할 즈음에 성 도나티아누스가 체포되었다. 그는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투옥되었는데, 그를 따라서 성 로가티아누스도 신앙 때문에 감옥에 들어왔다. 동생은 형이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터이라 그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결국 성 로가티아누스는 피로 인한 혈세를 받게 되었다. 두 형제는 집정관 앞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마침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 두 형제 순교자들은 ‘낭트 사람’으로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