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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을 때 보관해 둔 자기 옷을 받든지 다른 이가 입던 옷을 받든지 개의치 말아야 한다. [5,1]
☕ 수도자에게는 근본적으로 자기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전에 받았던 옷보다 못한 것을 받았다고 불평하거나, 자신은 다른 형제가 입는 옷과 같은 옷을 입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김으로써 이로 인해 너희 가운데 다툼과 불평이 생긴다면, 이것은 육체의 옷을 가지고 다투는 너희에게 마음의 거룩한 내적 옷이 얼마만큼 결여되어 있는지를 증명해 주는 것이다. [5,1]
☕ 믿음의 결핍은 불평으로 나타난다.
아무도 자신을 위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일을 공동체를 위해 할 것이며 자신을 위한 개인 일을 할 때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더 기쁘게 할 것이다. [5,2]
☕ 수도자는 자신이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랑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1코린 13,5)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은, 사랑은 개인의 것을 공동의 것보다 더 중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공동의 것을 개인의 것보다 더 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것보다 공동체의 일을 더 염려하는 그만큼 너희가 향상됨을 깨달아서, 영원히 남을 사랑이, 지나가 버릴 현세 생활의 필요에 쓰일 모든 것을 압도하도록 할 것이다. [5,2]
만일 누가 수도원에 사는 자기 자식이나 어떤 친척 관계에 있는 자에게 옷이나 그 외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무슨 물건을 주면, 몰래 받지 말고 공동소유로 하여 원장의 권한으로 필요한 사람에게 줄 수 있게 할 것이다. [5,3]
아우구스티누스는 각 개인이 입던 옷을 세탁 후에 받지 못하고 심지어 다른 이가 입던 더 못한 옷을 받게 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전에 입던 옷을 도로 받는 관례도 인정한다. 그런데 적어도 의복은 공동으로 보관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만은 어떠한 예외도 인정하지 않는다. (135쪽)
여기서 다시 나타난 그의 주된 관심은 그 정신이다. 즉, 우리는 복음적 청빈과 공유의 정신으로 수도생활을 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전에 받았던 옷보다 못한 것을 받았다고 불평하거나, 자신은 다른 형제가 입는 옷과 같은 옷을 입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김으로써 이로 인해 너희 가운데 다품과 불평이 생긴다면”, 복음적 가난의 정신이 사라져 버린 것이라고 그는 경고한다. (135쪽)
외부인이 주는 선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여기서 다시 청빈의 이상(理想)에 완전히 충실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우리가 선물로 받은 모든 것은 공동체에 속한다. 그러한 선물을 자기 것이라 주장할 수 없으며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는 것이 규칙서에 명시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장상들에게 양심적으로 넘겨주어야 하며, 장상들은 그것들을 공동으로 저장해 두었다가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때에 나누어 주어야 한다. (136쪽)
주교직에 있었던 그는 다른 이들과 똑같이 자신에게도 규율을 엄격히 적용하였다. 그는 한 설교에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도 필요한 것을 공동체의 공동 보관실에서 받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은 공동체의 재산으로서만 갖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따라서 내 지위에 더 어울린다고 여겨지는 선물을 나 홀로 사용하라는 뜻으로 내게 가져오는 것을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설교』 356, 13). (137쪽)
☕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 이전에 수도자였다.
그는 인간의 나약함을 잘 알고 있었다. 사도적 재산 공유의 생활을 서약하고 그래서 상당히 많은 재산을 포기했을 터이지만 나중에는 하찮은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그는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바로 앞에서 인용한 설교에서 신도들에게 오직 공동체를 위해서만 선물을 하도록 권한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선물이 있으면 모든 형제들을 위해 하십시오. 여러분이 마음으로 원하는 만큼 하십시오. 여러분이 공동체에 선물한 것에서 모든 수도 형제들이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봉헌함에 넣어 주시면 우리 모두는 서로 나누어 가지게 될 것입니다"(『설교』356,13). (137쪽)
☕ 평신도들도 성직자, 수도자가 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염원하고 있는 재산 공유는, 각자가 전체의 공익만을 추구하는 사심 없는 사랑의 정신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가 각기 청빈을 충실히 실천하게 될 때 비로소 모든 이기적인 다툼이 사라지게 되며, 공동체와 우리의 사도직 임무 또는 자선 활동에 사랑의 마음으로 오로지 헌신하게 될 것이다. (137쪽)
창조주께서 친히 우리 인간 본성의 일부분인 자기 사랑(自愛)을 만들어 주셨다. "인간 정신은 … 매 순간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끔 만들어졌다”(『삼위일체론』 14,14,18)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였다. 그런데 원죄로 인해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이 자기 사랑이 정도(正道)를 벗어나 방황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것은 이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기 본위의 사랑이 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 자기중심주의는 다른 이의 괴로움이나 그들의 절실한 관심사와 요구들을 못 본 체한다. 그 도가 지나치게 되면 모든 생각과 의향과 행위의 초점을 오직 자신에게만 맞추게 된다. (138쪽)
☕ 자기만을 사랑하는 지나친 이기주의는 하느님 뜻에 맞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규칙서에서 인간의 이 왜곡된 자기 사랑을 극복하기 위해, "사랑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1 코린 13,5)라고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적 삶의 이상을 제시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로는, 그리스도적 사랑의 이 기본적인 자세는 우리가 공동체의 형제나 자매들에게 기쁘고 사심 없이 봉사하는 데 전력함으로써 매일의 일상생활 안에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위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일을 공동체를 위해 할 것이며 자신을 위한 개인 일을 할 때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더 기쁘게 할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138-9쪽)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가르침은 모든 자기중심주의와의 싸움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는 우리가 오직 “한마음 한뜻"이 되기를 바라며, 그래서 "몸은 여러 개 있을지라도 뜻이 여러 개 있어서는 안 되며, 몸은 여러 개 있을지라도 마음이 여러 개 있어서는 안 된다"(『시편 주해』 132,6). 우리는 수도 공동체를 위해서 사심 없이 살아야 하며 공동체의 관심사와 임무를 점차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아 가야 한다. (139쪽)
우리는 공동체와 함께 더 깊이 느끼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 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체가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이냐?"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여기에도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 들입니다"라고 하신 코린토 후서 9장 6절의 말씀이 적용된다: 많이 주는 사람은 대신 많이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공동체에 사심 없이 헌신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것"(필리 2,21)에 헌신하는 것이다(『수도자들의 노동』 25,32 참조). (139-140쪽)
"그러므로 개인의 것보다 공동체의 일을 더 염려하는 그만큼 너희가 향상됨을 깨달으라.” 이것은 확실히 대담한 선언이다.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완덕을 향한 우리의 내적 상태의 명확한 표지이며, 선을 향한 발전의
확실한 기준이라는 것이다. (140쪽)
☕ 공동체를 향한 관심은 완덕의 표시다.
수도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은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의미한다. 공동체에서 자신의 명예나 이득을 추구하지 않고 공동체를 위해 참으로 성실하게 헌신하는 사람들은 자기 이웃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명백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규칙서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사랑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1코린 13,5)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은, 사랑은 개인의 것을 공동의 것보다 더 중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공동의 것을 개인의 것보다 더 증히 여긴다는 뜻이다.” (140쪽)
“참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 안에서 하느님 외에 다른 무엇을 사랑하겠습니까?”(『요한 복음 주석』 65,2). 만일 그가 이 말씀을 우리 수도자들에게 적용했더라면 아마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참으로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 외에 다른 무엇을 사랑하겠는가? 수도 공동체에 대한 희생적인 관심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 사랑이 순수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141쪽)
아우구스티누스는 규칙서에서 그리스도적 완덕에로 나아가는 확실한 길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어떤 특별한 공적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매일의 생활에서 소박한 성실성이 요구된다. 힘든 고행의 일들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계속 봉사하는 사랑이 필요하다. 물론 이 확실한 길에서 하느님의 은총만이 부여할 수 있는 끈기 있는 선한 의지와 희생정신이 필요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 말씀이 여기에서도 적용된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다”(『그리스도교 교양』 IV,18,35). (141쪽)
☕ 매일의 생활에 성실할 때 완덕에 이르게 된다.
병자의 건강에 필요하면 목욕하는 것을 전혀 금하지 말아야 하며, 병자는 의사의 권고를 불평 없이 이행해야 한다. 비록 병자가 이를 원하지 않더라도 원장은 그의 건강에 필요한 것을 명령하여 이행하도록 할 것이다. 만일 그에게 유익하지 않은 듯한데도 그가 원하면, 그의 청을 들어주지 말아야 한다. 사실 사람은 종종 해로운 것이라도 기분만 좋으면 유익한 줄로 여기기 때문이다. [5,5]
만일 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몸의 고통이 있어 아프다고 하면 하느님의 종인 그의 말을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좋아하는 치료가 그 병의 치료에 유익한지 확실치 않으면 의사와 상의할 것이다. [5,6]
목욕하러 가거나 필요에 의해 어느 곳에 가든지 간에 적어도 두세 사람 이상 함께 가야 한다. 어느 곳에 외출할 필요가 있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서는 안 되고 원장이 명령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야 한다.
[5,7]
그는 사람의 외모를 등한시하는 것을 하나의 수도 이상처럼 여기던 그 당시 수도생활의 비정상적인 부류를 신랄하게 배격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적 수덕의 정신은 단정치 못한 외모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와 정반대다! 영혼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몸과 옷의 단정함과 청결에서 드러날 수 있고 또 드러나야 한다. (143쪽)
☕ 영혼의 아름다움은 몸의 단정함으로 드러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전기 작가인 포시디우스는, 성인 자신이 이런 일들에 항상 중용을 지켰다고 전한다: “그의 의복과 신발 그리고 그의 침구 역시 검소하였지만 신분에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즉,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소홀하지도 않았다. … 왜냐하면 이런 것들에 있어서 사람들은 흔히 한쪽 극단이나 다른 쪽 극단, 즉 그것들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너무 소홀히 하는 극단으로 가기 때문이다”(『전기』 22,1), (144쪽)
☕ 극단은 언제나 문제를 낳는다. 지나친 엄격주의가 이단으로 떨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육체의 건강 관리에 있어서 미련할 정도의 무관심과 지나친 염려 사이의 중도를 따르기를 바란다. 그 자신이 약한 체질로 가끔 아팠으므로, 이런 체험이 그로 하여금 규칙서에서 아프고 허약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이게 하였다. (144쪽)
목욕을 하러 갈 때처럼 수도원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때에는 아무도 혼자 가서는 안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공중목욕탕들이 호색(好色) 장소가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무지한 자들의 교화』 16,25 참조). 초기 로마인들은 공중목욕탕에서 질서를 잘 지켰지만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 와서는 규율이 해이해져서 종종 문란하고 부도덕한 장소가 되곤 하였다. (145쪽)
재무실이나 피복실이나 도서실의 책임자들은 자기 형제들에게 불평 없이 봉사할 것이다. [5,9]
그는 수도원 안에 직책을 맡고 있는 모든 이에게 다음과 같이 간략하지만 기본적인 지침을 준다: ‘자기 형제들에게 불평 없이 봉사할 것이다.” 사랑에서 나온 봉사 정신이 그들의 모든 일에서 나타나야 한다. 수도원 안에 있는 모든 부서는 공동체에 봉사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그런 자세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불평 없이", 즉 열심히, 친절하게 그리고 기쁘게 맡은 일을 수행할 때 드러나게 된다. 이 원칙은 본인에게 별로 달갑지 않은 부서나 소임에서도 적용된다. 이러한 태도로 소임에 임할 때,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앞에서 제시한 지침, 즉 “개인의 것을 공동의 것보다 더 중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공동의 것을 개인의 것보다 더 중히 여긴다"(규칙 5,2)는 지침을 따르는 것이다. (147쪽)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며 그리스도의 종들의 종”(『서간』 217)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개인의 것보다 공동선을 더 중히 여겼으며, 주교가 된 후에 자기에게 맡겨진 힘겨운 직무들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148쪽)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사심 없이 봉사함으로써 우리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결국 이 봉사하는 사랑이 수도자로서의 우리 활동의 가치를 결정짓는다. (148쪽)
☕ 사랑이 봉사의 가치를 결정짓는다.
첫댓글 사랑에서 나온 봉사 정신이 그들의 모든 일에서 나타나야 한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