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시마 이야기(1)/靑石 전성훈
섬 아닌 육지로 전남 해남이 우리나라 땅끝이라면, 기다란 섬나라 일본 열도 땅끝은 규슈 남단 가고시마(鹿児島)이다. TV를 통해서 이 지역 경관을 보면서 언젠가는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곳이다. 가고시마의 검은 모래에 누워 찜질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적도 있다. 사전투표로 귀중한 한 표를 행사하고 가고시마를 찾아서 선거 날 아침에 출발한다.
4월 10일 첫째 날, 인천공항 2터미널이 아침부터 이렇게 사람이 많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키오스(KIOS)를 통해서 항공권을 발급받고 출국 수속을 하는데 사람이 많아서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출국 절차를 마치고 김밥 한 줄로 아침을 해결하고 약을 먹었다. 09시 20분 인천공항을 출발한 대한항공 KE785는 정확히 10시 40분경 가고시마 공항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섬의 모습은 우리나라 산천과 다름이 없고, 입국 절차도 좌우 집게손가락으로 지문을 찍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가고시마 하늘은 맑고 공기가 너무나 산뜻하다. 미세먼지로 답답한 서울의 공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지방 도시라서 공항도 아담하고 한적하다. 공항을 빠져나와 가고시마 중앙역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탄다. 요금은 1400엔으로 우리 동네 인천공항 리무진 버스 요금 18,000원에 비하면 싼 편이다. 셔틀버스 안에는 좌석마다 멀미하는 사람을 위해서 비닐 주머니가 준비되어있다. 우리나라 또는 다른 나라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보지 못했던 모습이라 생소하면서도, 고객을 배려하는 버스회사의 자세가 마음이 든다. 몇 번에 걸친 일본 여행에서 느낀 것처럼, 한가한 듯한 일본 지방 도시의 모습은 늘 여유로워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런 곳에 살면 그다지 근심 걱정이 없을 것 같다. 여행객으로 주마간산 격으로 바라보기에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를 것이다. 가고시마 중앙역 셔틀버스 터미널에 내려, 걸어서 3분 정도 거리에 있는 TOYOKO INN호텔에 도착하여, 방 배정을 받고 로비에 짐을 맡기고 시내 관광에 나선다. 관광안내소에 들러 이틀 공통이용권을 구매한다. 시내버스, 시내 관광버스, 노면전차(Tram), 사쿠라지마 페리를 온종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교통권으로 여행객에는 아주 편리하고 유용한 승차권이다. 버스와 트램은 내릴 때 승차권을 보여주면 된다. 가고시마 첫 번째 관광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인 [센간엔(仙巖園) 및 쇼코슈세이칸(尙古集成館)] 지역이다. 이곳의 번주(다이묘)가 선구적으로 근대화, 공업화를 꾀한 지역이다. 센간엔은 사쓰마 번주(藩主) 시마즈가(家)의 별저(別邸)로 정원에서 바라보는 긴코만(錦江灣)과 건너편 사쿠라지마(櫻島)을 바라보는 운치는 그야말로 한 폭의 멋진 풍경화다. 느긋하게 걷고 구경하며 사진을 찍는다. 저녁을 먹으려고 시내를 기웃거렸는데 확 눈에 들어오는 곳이 없다. 40분 정도 천천히 거리를 걸으면서 찾아낸 음식점이 저녁과 함께 술 한잔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생선회와 초밥, 냉두부, 신선한 물오징어 튀김과 김밥을 안주로 맥주와 일본 사케를 마시며 함께한 일행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첫날이라서 그런지 조금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와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 눈을 감으며 하루 일정을 되돌아본다. 열쇠 카드를 벽에 걸린 카드 투입구에 넣으면 방에 불이 들어오고 T.V도 자동으로 켜진다. 1인실 방은 두 사람이 누워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제법 널따란 침대에 벽에는 큰 거울이 걸리고, 기다란 테이블, 작은 냉장고, 소형금고, 조명등까지 비치되어 있다. 적당한 가격의 숙소가 아주 마음에 든다. T.V를 끄려고 리모컨을 찾는데 보이지 않아서 그냥 비상등 역할도 할 겸, 밤새도록 소리가 나지 않는 T.V를 켜 놓은 채 잠을 청한다.
4월 11일 둘째 날, 호텔 아침 식사를 하면서 함께한 분에게 리모컨 이야기를 했더니 거실 테이블에 있다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찾아보니 리모컨이 테이블 한 모퉁이에 얌전하게 놓여있다. 그 순간에 다시 한번 깨달은 게 있다. 평소 사물이나 사람을 대하는 자세이다. 보고 싶은 것, 관심 있는 분야에는 남보다 더 시선을 주면서 그렇지 않은 대상에는 정말로 무심한 편이다. 테이블 위에 있는 리모컨을 분명히 보았을 텐데 전혀 생각이 안 난다. 가고시마 선착장에서 24시간 연중무휴로 운행하는 사쿠라지마행 페리를 타고 안개 낀 사쿠라지마를 찾아간다. 약 15분 정도 지나서 사쿠라지마 선착장에 도착한다. ‘시쿠라지마 긴코만’ 지질공원으로 알려진, 화산과 바다가 준 은혜로운 섬인 사쿠라지마는 지금도 화산이 활동 중이다. 자연재해보다는 혜택이 더 많기에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연에 생명을 빼앗기면서도 자연과 함께 사는 이곳 사람들의 용기와 인내심에 나도 모르게 존경심이 생긴다. 사쿠라지마 일주도로 36km 중 1.5km 정도 걸어가는 동안에 화산재 냄새가 코끝에 진동한다. 유황 냄새 같은데 견디지 못할 정도로 심하지는 않다. 사쿠라지마 쇼와분화구는 높이가 1000m가 넘는 곳으로 지난 3월 중순에도 분화구가 넘쳐났던 활화산이다. 섬 둘레를 도는 버스를 타고 이곳저곳을 구경한다. 바람이 많이 불고 종일 날씨가 흐렸지만 여행하기에는 그만이다. 친절한 운전기사분과 사진을 함께 찍고, 흘러나온 화산재로 황폐해진 지역을 잘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에서 멋진 자세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다. 주위에는 서양인 관광객과 약간의 일본인이 보일 뿐 중국인과 우리나라 사람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가고시마로 되돌아와서 수족관에 들려 돌고래쇼와 해양생물 구경을 하면서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수족관 시설은 우리나라와 별반 다름이 없고,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 모습이 많이 보인다. 저녁은 흑돼지 샤브샤브 집에서 먹었는데 미리 말해주지 않으면 소고기인지 돼지고기인지 구별이 안 된다. 일본 소주 한 잔 주문하니 유리컵에 따라 내온다. 마치 양칫물 받는 컵처럼 투박하고 운치가 없어 보여 작은 잔을 부탁하여 조금씩 덜어서 마신다. 음식점을 나와 숙소로 걸어가는 길에 가고시마 중앙역 앞에서 시음회를 여는 삿포로 흑맥주 시음장에 들려서 무료 맥주 한 잔 마신다. 총선 결과가 알려진 서울 소식을 들으면서 쓴웃음을 짓는다. 세상은 돌고 도는데 사람들은 세월을 기다리는 만큼 서로를 기다리지 못하는 것 같다. (2024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