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178)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157) - 요한일서 강론(1)
요한일서 강론(1) - 1장 1-4절
요한 사도는 어떤 사람이었는데 성령의 역사로 어떻게 변했나?
요한 사도는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우뢰의 아들이라고 별명을 지을 정도로(막3:17) 흥분을 잘하고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화를 낸 것이다.(눅9:54-55) 사람들의 유불리 시스템에서는 사랑과 증오가 똑같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유리하면 사랑하고 불리하면 증오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무관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처절한 운명이다. 유불리 계산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휼의 대상이다.
권력욕도 많아서 요한의 엄마가 자기 아들들을 주의 좌우편에 앉혀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한편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품 안에서 질문을 하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사랑스러운 모습으로서의 요한으로 나온다. 이처럼 증오심과 사랑스러운 모습의 양면성을 가진 요한이었다.
그랬던 요한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한 후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던 사마리아인들을 향해 예수님에게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저들을 멸할까요?(눅9:54-55) 하며 흥분했던 요한이 성령이 임한 후에는 사마리아로 가서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했다.(행8:14-17) 이것은 극적인 전환이다. 유블리 계산 시스템이 깨지고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과 확산을 위한 계산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좋은 진주를 사는 진주 장사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요한에게 증오의 측면의 단점은 사라지고 사랑스러운 모습의 장점은 극대화된 것이다.
요한은 살아 있는 동안 반복적으로 형제를 사랑하자고 주장해서 사람들이 불만을 나타낼 정도로 사랑을 극도로 강조하는 사도였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극한적으로 채워진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요일4:16,8)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요일4:7) 반복적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인간의 사랑이 제거되면서 인간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신성으로서의 사랑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사랑이 임해야 한다는 것을 계속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며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은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내가 개인적으로 하는 사랑이다. 그래서 내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이다. 그러나 요한 사도가 말한 사랑은 함께 나누는 사랑이며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결과는 하나 됨이며 목표는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나에게 유리하니까 하는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증오하는 사람으로 갈라진다. 그런 사랑은 이방인도 한다는 것이다.(마5:46-47)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하나가 되는 사랑이다.(마5:48)
성경에는 예정론적인 말씀도 있고(요17:9) 만인구원론적인 말씀도 있다.(요3:16)
예수님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 하셨는데 그들은 노아의 홍수 때 물로 심판을 받은 자들이었다.(벧전3:19) 그리고 예수님은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셔서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기를 원하셨다.(벧전4:6)
사도 바울은 음행하는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세상으로 보내줌) 이는 육신을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고전5:5)
마귀의 자녀는 유불리 계산을 하며 사는 정상적인 인간을 말한다. 예수님은 마귀의 자녀를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요일3:8-10)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죄인 중에 첫 번째로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동역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는 것이다. 성령의 강림과 충만이 택하신 자들에게 먼저 임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게 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요한에게 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예정론이 옳으냐 만인구원론이 옳으냐 하는 논쟁은 무의미하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이 땅에서 행복한 하나 된 삶을 살다가 완벽한 하나 된 삶으로 옮겨가나,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이 땅에서 처참한 혼자 된 삶을 살다가 낯선 행복한 하나 된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것이다.
결론은 내세의 일은 신경도 쓰지 말고 이 땅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클레로스의 행복한 삶을 살게 해 주는 열매 맺는 일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과 요한 사도의 비교
사도 바울은 피스티스(신실함)를 강조했고 요한은 아가페(사랑)를 강조했다. 강조한 목적은 동일하게 하나 됨, 즉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님의 집이 건축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신실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신실한 자와는 함께 할 수 없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이다. 반면에 요한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서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둘 다 하나 됨이 목표이다. 저들이 하나 되게 해 달라는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드린 처절한 기도가 의미하는 바이다. 사랑의 전제 조건은 모두가 신실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강조점이 다른 것이다.
사도 요한도 예수님의 피스티스를 이야기했고 (예수님의 피스티스를 굳게 붙잡고 있는 자들, 계14:12), 사도 바울도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예레미아 언약의 핵심인 한 마음을 주시는 것이 아브라함 언약의 본질이며 하나 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피스티스가 와서 모두가 신실해져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와서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게 되어서 하나 된 하나님의 집이 형성되는 것이 것이다. 이것이 각자 도생하는 인간에게는 유일한 답이다.
사도 바울은 종교주의, 영지주의, 도덕주의의 유혹을 경계했다. 요한도 영지주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을 강조했다.
이 유혹들은 각자 자기가 소중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을 받는다는 것이며, 당신이 초월적인 존재,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며, 당신이 도덕적인 인간, 고귀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은 하나 된 공동체의 진리를 주장했으나 그런 유혹들은 각자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 됨은 무너진다. 하나 됨을 지키느냐 깨뜨리느냐로 전선이 명확히 구분된다.
영적 전쟁은 혼자 됨을 강조하는 자들로부터 하나 됨을 지켜내는 것이다.(요일2:13)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의 하나 됨이 확산되어 나가는 것이 영적 전쟁이다. 사도들은 일관 되게 하나 됨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고 일관 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논리와 사도 요한의 논리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 된 생명들이라는 것이 전제된 것(1~4)
사도 요한은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은 서로 사랑하는 생명, 하나 된 생명들일 때만 유의미한 것이다. 코이노니아를 친교나 사귐, 교제로 번역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코이노니아란 하나 된 마음, 관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이렇게 그대들에게 전하는 것은 그대들도 우리와 하나 된 마음(코이노니아)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니 우리의 하나 된 마음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하나 된 마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기쁨 가운데 자원해서 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요일3:18) 이것은 야고보 사도의 주장과 동일하다. 사랑을 행함이 없으면 너희 안에는 하나님이 없고 마귀의 자녀라는 것이다.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도 바울도 율법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롬2:13) 그런데 율법을 실천했으나 서로 미워하며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다음 단계가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한 것이다. 선을 행하지 않으니까 의인이 아니라는 것이다.(롬3:10-12) 그리스도의 피스티스가 오지 않은 자들의 율법의 의로운 행위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은 자들이 된 다음에 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에 의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최후 심판에서 이 땅에서의 행실이 기록된 생명책을 놓고 심판하신다는 것도 거기서 커트라인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때 생명수를 또 주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행위를 놓고 심판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게 하나 되어 살았느냐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따지시는 것이다. 하나 되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의로운 삶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 악한 삶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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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기도는 정진호 집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