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론은 처음에는 일부 강경파인 군국주의자들의 주장으로 시작 되었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서서히 구체화 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1884년 갑신정변 실
패 이후에는 조선에 호의적인 부류들도 정한론에 동조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외무성의 사다 하쿠보가 써낸 '조선국교제시말 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
1872년에 하나부사 요시모토 라는 일본의 외무대신이 군함을 이끌고 부산
에 왔지만 조선은 일본의 사신이 군함을 이끌고 온 것에 대해 문제를 삼고
응대하지 않았다. 수개월을 체류하며 버텼지만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었을
뿐더러 조선은 부산 등지에서 일본 상인들의 밀무역 행위를 철저하게 단속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일본 정부를 자극하게 되었고 일본 강경파들의 정한
론 주장이 더욱 거세어지게 되었다.

정한론을 끝까지 주장한 일본의 강경파 사이고 다카모리
특히 이들 가운데 사이고 다카모리는 스스로 무력 침공을 책임지고 도맡겠
다고 까지 했다. 하지만 때마침 해외 여러나라를 둘러보고 귀국한 이와쿠라
도모미가 이끄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해외 순례 보고와 함께 국가의 내실을
우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앞서 정한론이 다시 제동이 걸렸다. 이렇게 여론이
갈리는 등 내홍이 심해진 일본은 정한론을 주장하던 강경파 대부분이 밀려
나게 되었다. 이때 밀려난 사이고 다카모리 등은 1874년 ' 사가의 난' 부터
1877년의 '세이난 전쟁'까지 메이지 유신 정권에 끈질긴 무력 저항을 했다.

이와쿠라 사절단. 오른쪽부터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이와쿠라 도모미, 야마구치 나오요시, 기도 다카요시
이렇듯 주춤했던 정한론은 1880년대에 들어서며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되는
데 일본내에서 비교적 온건했던 부류들 조차 강경하게 정한론을 주장하는 사
건을 맞게된다. 1880년 이후 비교적 온건하게 조선의 개혁을 돕자고 했던 일
본의 온건파인 후쿠자와 유키치 등은 그들이 기대했던 조선에서의 '갑신정
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김옥균 등 정변의 관련자들이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
게 되자 이에 격분해 조선의 멸망을 부르짓기 시작했다.

김옥균의 목을 잘라 거리에 걸어 놓고있다.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 쓰여진 글귀가 보인다.
평소에 온건주의자를 자처했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격분하는 이유는 있었다.
지지신보(時事新報) 발행인이기도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갑신정변 직전 일본
을 방문한 조선인 청년인 김옥균, 서재필, 윤치호, 유길준 등에게 부국 강
병론과 신분제도, 문벌특권층의 타파 등을 역설하며 이들을 통한 조선의 개
혁을 크게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옥균 등 이들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기
대와는 달리 이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결국 3일 천하로 막을 내리는 실패를
하게 된 것이다.

개화파 김옥균
실제로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터지자 병력을 지원하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반대로 무산이 되었지만 그많
큼 조선의 개화파 활동에 애착이 컸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
서는 피의 징벌이 일었고 조선의 개화파 인사들이 가혹한 형벌과 처단으로
죽음을 당하게 되자 더 이상 조선은 개화가 어렵다고 판단, 기대감을 상실하
며 조선에 대한 경멸과 증오감 만을 키웠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문명 개화론을 선도하며 일본의 '위대한 스승'으로 불리고 만엔권의 모델이기도 하다.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로 후쿠자와 유키치의 정한론에 대한 자신의 논리는 보
다 확고하고 명확해졌다. 자신이 발행하는 지지신보의 사설에 그가 올린 글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그의 생각을 알 수 가 있다.
"조선의 인민을 위하여 조선은 멸망하여야 한다. 인민의 생명도 재산도 지켜
주지 못하고 독립국가로써 자존심도 지키지 못하는 그런 나라는 멸망하는 것
만이 조선 백성들을 속박에서 풀어줄 수 있는 지름길이다."

아오야마의 외인 묘지에 있는 김옥균의 묘와 비석에는 박영효가 비문을 짓고 이준용이 글씨를 썼으며
유길준이 돌에 직접 조각을 하였다. 사진은 유길준.
김옥균의 '부관참시' 는 외국 기자들을 통하여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외국으
로 보도가 되었고 "조선인들은 반문명적인 야만인들이며 이와같은 조선인들
의 비인도적인 테러행위와 인명 경시 현상을 방치해야 되는가!" 라는 목소리
가 일본 내부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일본의 지식인들은 김옥균 추
도회 또는 김옥균 기념회, 김옥균 연구회 등을 조직하여 연일 추모 모임을 가
지며 조선 정부의 야만성을 성토하며 정한론의 여론을 조성하였다.

1910년 8월 22일 매국노 이완용과 일본의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한일병탄 조약체결을 했다.
이렇게 1910년 조선이 '한국병탄'이 되기까지 일본은 줄기차게 정한론을 내
세우며 군과 관, 민이 조직적이고도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하여 결국 한국
을 식민지화하는데 성공을 했다. 그야말로 한국병탄은 일본의 군,관,민이 합
동으로 일궈낸 일본의 업적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일본은 일본 교
과서의 역사 왜곡 논란에서 자주 지적되는데, 그들은 정한론과 자유민권운동
을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으며 마치 자신들이 조선의 구세주인양 말도 않되게
어이없는 미화를 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황태자 영친왕 이은과 함께 찍은 사진.
나라가 어렵고 힘들때 지혜롭게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없는 지도자의 무능함도
문제이지만 이걸 무슨 입신양명의 기회라고 외세에 빌붙어 나라를 팔아먹고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나라의 고위 관리들의 부패도 큰 문제였다.
당리당략에 지우쳐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크나큰 위기에도 바로 보지 못하
는 서로 헐뜯기나 하는 썪어빠진 정치가 존재하는 이상 이 나라는 아직 온전
하다고 볼 수가 없다. 일본의 입맛을 다시게 했던 과거의 정한론이 다시는 발
생하지 않도록 묵은지는 이땅의 지도자나 정치인들에게 진정한 애국의 마음
으로 굳게 다질 것을 간곡히 바라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