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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시학} 서문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역
1
과학철학의 근본적인 과제들에 전념하며 자신의 전사상을 형성해 온 철학자, 스스로 할 있는 한 단호히 현대 과학의 능동적 이성주의, 점증적 이성주의의 축을 따라온 철학자는, 만약 그가 시적 상상력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연구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의 그의 지식을 잊어버려야 하고 그의 모든 철학적 연구의 습관들을 버려야 한다. 이 경우,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은 중요하지 않으며, 사고의 연결과 축조의 오랜 노력, 주週가 가고 달이 가는 오랜 노력은 효과 없는 것이다. 오직 시적 이미지를 읽는 순간에 이미지에 現前, 현전해야 할 따름이다.----시의 철학이 있다면, 그 철학은 한 주된 시행을 접하여 한 고립된 이미지에 대한 전적인 찬동 가운데, 바로 말하자면 이미지의 새로움에서 오는 法悅 그 자체 가운데,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시적 이미지란 갑작스러운 정신의 융기, 부수적인 심리적 인과관계로는 잘 밝혀지지 않는 정신의 융기이다. 또한 일반적이고 조직된 어떤 것도 시의 철학에 기본이 될 수 없다. 원리라는 관념, ‘기본’이라는 관념은 여기서는 파괴적인 것일 것이다. 그것은 시 작품의 본질적인 現行性, 본질적인 정신적 새로움을 막아버릴 것이다. 오랫동안 다듬어져온 과학사상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경우에는 그것이 이미 실증된 과학적 생각들의 집적체에 새로운 생각이 통합되기를 요구하는 데 반해----설사 그 기존의 생각들의 집적체가 모든 현대 과학의 혁명들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새로운 생각에 의해 깊은 수정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할지라도----, 시의 철학은 다음과 같이 주장해야 한다----시적 행위는 과거를, 적어도 그것이 준비되고 나타나는 과정을 우리들이 따라가 볼 수 있는 그러한 가까운 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에 뒤이어 우리가 새로운 시적 이미지와, 무의식의 밑바닥에서 잠자고 있는 원형 사이의 관계에 언급해야 할 때에라도, 우리는 그 관계가 엄밀히 말해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도록 해야 될 것이다. 시적 이미지는 충동적인 힘에 예속되어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메아리가 아닌 것이다. 사정은 차라리 그 역이다. ----이미지의 번쩍임에 의해 먼 과거가 메아리들로 울리는 것이며, 그리고 그 메아리들이 얼마만큼의 깊이에까지 반향하며 사라져 가게 되는지 우리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의 새로움과 그의 약동 속에서 시적 이미지는 그 자체의 존재와 그 자체의 힘을 가진다. 그것은 하나의 직접적인 존재론에 속하는 것이며, 우리가 지금 연구의 노력을 기울이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존재론에 대해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적 이미지의 존재는 아주 흔한 경우 인과관계와는 반대 방향에서, 민코브스키가 그토록 세밀히 연구한 바 있는 울림이라는 것 가운데서, 올바르게 가늠된다고 생각된다. 이 울림 속에서 시적 이미지는 존재의 소리를 가질 것이다. 시인의 존재의 입구에서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이미지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민코브스키의 현상학식으로 그것의 울림을 체험해야 할 것이다.
시적 이미지가 인과관계를 벗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그 나름의 중대성을 가진 선언일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자와 정신분석가가 내세우는 이미지의 원인들은 결코, 새로운 이미지의 정녕 비예측적인 성격이나, 그리고 또 그것이 그것의 창조과정과는 무관한 타인의 영혼 가운데 불러일으키는 감응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시인은 나에게 그의 이미지의 과거를 알려주지 않으나, 그런데도 그의 이미지는 곧 나의 내부에 뿌리를 박는다. 특이한 이미지의 전달성은 커다란 존재론적인 의미를 가진다. 순간적이며 고립적이면서도 능동적인 행위에 의한 이 교감에 대해서 우리는 뒤에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이미지는 우리들을 선동하지만----뒤늦게----, 그러나 선동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은 아니다. 물론 심리적인 연구에 있어서 시인의 인격을 규명하기 위해 정신분석적인 방법에 주의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시인이 그의 생애에서 겪어야 했던 억업----특히 학대----을 가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적 행위, 그 느닷없이 떠오르는 이미지, 상상력 속에서 존재가 타오르는 그 불꽃은 그러한 조사를 벗어나는 것이다. 시적 이미지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밝혀보기 위해서는 필경 상상력의 현상학에 이르러야 한다. 상상력의 현상학이라는 말로써 우리가 뜻하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시적 이미지가 인간의 마음의, 영혼의, 존재의 직접적인 산물로서 의식에 떠오를 때, 이미지의 현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2
아마도 사람들은, 왜 우리가 이전까지의 관점을 바꾸어 이젠 이미지의 현상학적인 결정을 탐구하려고 하는지 물을지 모른다. 사실, 우리는 상상력에 관한 우리의 앞선 저작들에서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여러 직관적인 우주발생론들의 네 원리----물질의 4원소에 관한 이미지들을 연구하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과학철학자로서의 우리의 습관에 충실하게 우리는 이미지들을 일체의 개인적인 해석의 기도를 떠나서 고찰하려고 했던 것이다. 과학적인 조심성을 이점으로 가지고 있는 이 방법은 그러나 차츰차츰 내게 상상력의 형이상학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불충분한 것으로 여겨졌다. ‘조심스러운’ 태도라는 것은 그것만으로 이미 이미지의 직접적인 역동성을 따름을 거부하는 게 아니겠는가? 실상 우리는 그 ‘조심성’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가늠할 수 있기도 했다. 지적인 습관을 버린다는 것은 쉽게 선언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실행할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여성주의자에게는 한 조그만 일상의 드라마, 일종의 사고의 이중화, ----그것의 대상이 단순한 한 이미지라는 부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커다란 정신적인 울림을 불러오는 사고의 이중화인 것이다. 그러나 이 조그만 지적 드라마, 단순히 한 새로운 이미지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이 드라마는 바로 상상력의 현상학이 가지는 전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어떻게 때로 아주 특이한 한 이미지가 정신 전체의 응축인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또한 어떻게 한 특이한 시적 이미지의 나타남이라는 그 특이하고도 순간적인 사건이 이번에는 다른 영혼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어떠한 준비과정도 없이----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가? 그것도 상식의 모든 장벽들을, 변화 없는 안정에 행복스러워하는 모든 분별 있는 생각들을 넘어서서?
그리하여 이와 같은 이미지의 통주관성은 그 본질에 있어서 다만 객관적인 참조의 연구습관만으로써는 이해될 수 없다고 내게는 생각되었다. 오직 현상학----즉 개인적인 의식 속에서의 이미지의 시발에 대한 고찰----만이 이미지의 주관성을 복원하고 이미지의 통주관성의 크기와 힘과 의미를 가늠하는 데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주관성, 통주관성은 한 번에 아주 결정될 수 없는 것이며, 시적 이미지란 사실 본질적으로 변용적인 것이다. 그것은 개념처럼 구성적인 것이 아니다. 아마도 시적 상상력의 변화작용을 이미지들의 세부적인 변용 가운데 드러낸다는 일은 힘든----비록 단조롭기는 할지라도----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 독자에게는, 잘못 이해되는 수가 너무나 흔한 현상학이라는 명칭을 지닌 학설을 원용하자고 하는 주장은 경청되지 않을 우려가 있다. 하지만 모든 학설을 떠나서 이 주장은 명확하다----. 시 독자에게 이 주장이 요구하는 것은, 이미지를 하나의 대상으로, 더, 더구나 하나의 대상의 대치물로는 여기지 말고 그것의 특수한 현실을 파악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증여적인 의식의 행위를 의식의 가장 덧없는 산물인 시적 이미지에 조직적으로 연결시켜야 한다. 시적 이미지의 차원에서 주체와 대상의 이원성은,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듯 서로 반사하며 끊임없이 활발하게 역류하고 되역류하는 상관관계로 어울어져 있다. 시인에 의한 시적 이미지의 창조의 이 영역에서는 현상학은, 이렇게 말해 볼 수 있다면, 미시적인 현상학인 것이다. 이 사실로 하여 이 현상학은 엄정히 기본적인 것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순수하나 순간적인 주체성과, 완전한 구성에까지 반드시 이르지는 않는 현실의, 이미지에 의한 이와 같은 결합 가운데, 현상학자는 수많은 경험의 영역을 발견한다. 그는, ‘중대한 결과를 불러오지 않는’ 단순한 관찰이기에----언제나 연관적인 사고이게 마련인 과학적인 사고의 경우에 있어서와는 달리-----살펴지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관찰의 덕을 입는다. 이미지는 그의 단순성 가운데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소박한 의식의 재산일 따름이다. 그 표현에 있어서 그것은 젊은 언어이다. 시인은 그의 이미지들의 새로움으로 하여 언제나 언어의 원천이 된다. 이미지의 현상학이 어떤 것인가를 아주 정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이미지란 사상에 앞서는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시란 정신의 현상학이 아니라 차라리 영혼의 현상학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몽상적인 의식에 관한 문헌자료를 모아야 할 것이다.
프랑스어 표현의 현대 철학은----더구나 심리학은----영혼과 정신이라는 두 말의 이원성을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프랑스어 표현의 현대철학과 심리학은 양자 모두, 독일철학에서는 그토록 많은, 정신과 영혼의 아주 명확한 구별을 전제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나 시의 철학이라면 어휘의 모든 힘을 받아들여야 하기에, 그것은 어떤 말이라도 단순화하지 말아야 하고, 어떤 말이라도 경직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철학에 있어서는 정신과 영혼은 동의어가 아니다. 그 두 말을 동의어로 다룬다면, 그로써 우리는 귀중한 텍스트들을 해독함을 스스로 금하게 될 것이며, 이미지들의 고고학이 제공하는 자료들을 왜곡하게 될 것이다. 영혼이라는 말은 불멸의 말이다. 어떤 시작품들에 있어서는 그것은 지울 수 없는 말이 되어 있다. 그것은 숨결의 말이다. 말의 음성적인 중요성은 그것만으로 시의 현상학자의 주의를 끌어야 한다. 시적으로 영혼이라는 말은 너무나 큰 신념으로써 발음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한 시작품 전체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에 대응하는 시적 영역은, 우리의 현상학적 탐구에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정신의 관할에 속하는 결정들, 지각의 세계의 법칙을 되따르는 결정들이 회화의 실현에는 전제되어 있는 것 같지만, 그러한 회화의 영역에 있어서도 영혼의 현상학은 한 작품이 나타내는 최초의 영혼의 참여를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알비에서의 죠르쥬 루오 작품 전람회를 위한 훌륭한 소개의 글에서 르네 위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루오가 어디를 통해 자기 작품에 대한 규정들을 부숴버리는지를 알아내려고 한다면......, 아마도 우리들은 이젠 다소 쓰이지 않게 된, 영혼이라는 말을 환기해야 하리라.” 그런 다음 르네 위그는, 루오의 작품들을 이해하고 느끼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작품들에 있어서 “일체의 것이 그 원천과 뜻을 얻는 중심점, 중핵, 원점으로 뛰어들어가야 하며, 바로 그때에 잊혀지고 배척되고 있는 말----영혼이라는 말이 다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그리고 영혼이야말로----루오의 그림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데----내적인 빛을, ‘내적 비전’이 그것을 알아서 번쩍이는 색깔들의 세계, 빛나는 태양의 세계로 번역해 내는 그러한 내적인 빛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루오의 그림을 사랑함으로써 이해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심리적인 측면에서 정녕 전망의 전도가 요구된다. 그는 외부세계의 빛의 반영이 아닌 내적인 빛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내적 비전이라든가 내적인 빛이라는 표현은 아마, 흔히 너무 쉽사리 주장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 말하고 있는 사람은 화가----바로 빛을 만들어내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어떤 광원에서 빛이 비쳐 나오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붉은 빛깔의 열정의 내밀한 뜻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림의 근원에는, 싸우고 있는 영혼이 있다. 야수파의 예술은 내부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림은 그러므로 영혼의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작품은 열정에 타는 영혼을 구원해 주어야 하는 법이다.
위의 르네 위그의 글은, 영혼의 현상학이라는 말을 함에 의미가 있다는 우리의 생각을 굳혀준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시란 영혼의 참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영혼에 연결된 의식은 정신의 현상들에 연결된 의식보다 더 휴식적이고 덜 의도적이다. 시 작품 가운데는, 지식에 이르는 길을 지나가지 않는 힘이 나타난다. 영감과 재능의 변증법은, 그 양자의 극점인 영혼과 정신을 살펴 볼 때에 밝혀진다. 우리의 견해로는, 시적 이미지의 현상을 그 다양한 뉘앙스들 가운데 연구하기 위해서는, 특히 시적 이미지의 발전과정을 몽상에서부터 이미지의 실현에 이르기까지 따라가 보기 위해서는, 영혼과 정신을 갈라봄이 필수적이다. 특히 우리는 다른 하나의 저서에서 시적인 몽상을 연구하려고 하는데, 그 연구는 바로 영혼의 현상학으로서 이루어질 것이다. 몽상이란 그것만으로는 아주 흔히 꿈과 혼동되는 정신적 차원이다. 그러나 시적인 몽상, 스스로를 즐길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영혼들에게도 시적인 즐거움을 마련해 주는 그러한 몽상인 경우에는, 그것은 이젠 잠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정신은 휴식할 수 있으나, 시적인 몽상 속에서의 영혼은 긴장 없이 휴식한 채로 맑게 깨어 활동한다. 완전하고 잘 조직된 한 편의 시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정신은 그것을, 실현에 앞서 창작계획 가운데 미리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하나의 시적 이미지의 경우에 있어서는 계획이란 없는 법이며, 하나의 영혼의 움직임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하나의 시적 이미지 가운데서 영혼은 거기에 현전하는 자신의 존재를 이야기 한다.
한 시인이 영혼의 현상학적인 문제를 다음과 같이 더할 수 없이 명료하게 제기했던 것은, 그런 의미에서였다. 피에르 쟝 쥬브는 이렇게 썼던 것이다. ---- “시란 하나의 형태를 낙성落成하는 영혼이다.” 영혼이 낙성한다. 이 경우 영혼은 근원적인 힘이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설사 그 ‘형태’가 알려져 있고, 인지되어 있는 것이며, ‘흔해 빠진’ 것을 가지고 만든 것일지라도, 그것은 내적인 시적 빛이 있기 전에는 단순히 정신의 한 대상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영혼이 찾아와서 그 형태를 낙성하고, 거기에서 살며, 기뻐하는 것이다. 위의 피에르 쟝 쥬브의 말은 그러므로 영혼의 현상학의 명료한 잠언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3
시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는 그것이 그토록 멀리 나아가려고, 그토록 깊이 내려가려고 하기에, 방법상의 의무로 하여 감정적인 반향의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감정적인 반향으로써 다소간 풍요롭게----그 풍요로움이 우리들 자신 속에 있든, 시 작품 속에 있든간에----예술 작품을 향수하는 것이다. 시에 대한 현상학이 감정적인 반향을 넘어서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현상학적인 두 자매어, 반향과 울림의 차이는 뚜렷해져야 한다. 반향은 세계 안에서의 우리들의 삶의 여러 상이한 측면으로 흩어지는 반면, 울림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의 존재의 심화에 이르게 한다. 반향 속에서 우리들이 시를 듣는다면, 울림 속에서는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 시를 말한다. 그때에 시는 우리들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울림은 말하자면 존재의 전환을 이룩한다. 이때에 시인의 존재는 마치 우리들 자신의 존재인 듯이 여겨진다. 그러므로 반향의 다양성은 존재 차원에 있어서의 울림의 통일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결 단순히 말하자면, 우리들은 여기서, 열정적인 시 독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한 느낌을 마주하고 있다----우리들이 읽고 있는 시 작품이 우리들 전체를 온통 사로잡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에 의한 존재의 파지把持는 명백한 현상학적인 표징을 지니고 있다. 한 시 작품의 표면적인 풍요로움과 내면적인 깊이는 언제나 자매적인 반향과 울림의 현상이다. 시 작품은 그것의 표면적인 풍요로움으로써 우리들 내면의 심층을 되일깨워 주는 듯이 여겨진다. 한 시 작품의 심리적인 작용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현상학적 분석의 두 축을 따라서, 정신의 표면적인 풍요로움과 영혼의 깊이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울림이라는 명칭은 파생된 말이지만, 그것은 물론----이것을 말할 필요가 있을까?----우리가 지금 그것을 연구하려고 하는 시적 상상력의 분야에서는 단순한 현상학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시적 창조가 독자의 영혼에 있어서까지 어떻게 정녕 깨어나는가를 단 하나의 시적 이미지의 울림으로써 규명하려는 것이다. 그의 새로움으로써 시적 이미지는 전언어 활동을 흔들어 시작되게 한다. 시적 이미지는 우리들을 말하는 존재의 원초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울림에 의해 우리들은 일체의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을 그 즉시 넘어섬으로써, 우리들 내부에 시적인 힘이 소박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울림이 있은 다음에야 우리들은 반향을, 감정적인 반응을, 우리들 자신의 과거가 회상됨을 느낄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는 표면을 흔들기에 앞서 깊은 내면을 건드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독자의 단순한 경험에서 진실이다. 시의 독서가 우리들에게 제공하는 그 이미지가, 다음 순간 정녕 바로 우리들 자신의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 뿌리를 내린다. 우리들은 그것을 받아들인 것인데, 그런데도 마치 우리들 자신이 그것을 창조할 수 있었으리라는, 마치 우리들 자신이 그것을 창조해야 했으리라는 인상에 눈뜨게 된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언어의 새로운 존재가 되고, 우리들이 그것이 표현하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들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표현의 생성인 동시에 우리들의 존재의 생성이기도 하다. 이 경우 표현이 바로 존재를 창조하는 것이다.
위의 마지막 말은 우리가 지금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존재론의 차원을 정의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반적인 주장으로서, 인간에게 있어서 특별히 인간적인 일체의 것은 로고스(말)라고 생각한다. 언어에 앞서 있는 영역에서라면 우리들은 사유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이 주장이 존재의 깊은 차원을 거부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사람들은 적어도, 우리가 시적 상상력에 대해서 계속해 나가고 있는 유형의 연구에 잘 맞춘 연구가설로서 그것을 우리에게 용인해 줘야 한다.
이리하여 로고스의 사건인 시적 이미지는 우리의 개인으로서는, 새롭게 하는 힘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이젠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려 한다. 비평가가가 취하는 객관적인 태도는 울림을 짓눌러 버리며, 원칙상, 원초적인 시적 현상이 시발해야 하는 그 깊은 차원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느낀다. 그런가 하면, 심리학자의 경우에는 그는 반향에만 사로잡혀서 계속 그의 감정만을 묘사하려고 한다. 또, 정신분석가로 말하자면, 착잡하게 얽힌 그의 해석들의 실타래를 풀려는 데에 골몰하여 울림을 잃어버리고 만다. 정신분석가는 그의 방법상 숙명적으로 이미지를 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는 이미지를 심리학자보다 더 깊이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야말로 그것을 이해할 따름이다. 정신분석가에게 있어서는 시적 이미지란 언제나 하나의 외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이미지를 해석함으로써 그는 그것을 시적 로고스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해 버린다. 그러므로 ‘번역가는 배신사 traduttore, traditore’라는 말을 이 경우보다 더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경우는 결코 없을 것이다.
새로운 시적 이미지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들은 그것의 상관주의적 가치를 느낀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열광을 이번에는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그 이미지를 다시 말하리라는 것을 안다. 한 영혼에서 다른 영혼으로 전달된다는 사실에서 고찰될 때, 우리들은 시적 이미지가 그것의 원인을 알려고 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벗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심리학처럼 좀스럽게 인과적인 학설들이나 정신분석처럼 심하게 인과적 학설들이 詩性의 존재론을 규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시적 이미지란 아무 것도 그것을 마련하지 못하는 것이며, 문학에서 말하는 교양이라든가 심리학에서 말하는 지각의 경험은 더, 더구나 그리하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시적 이미지의 본질적인 새로움은 말하는 존재의 창조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 창조성에 의해 상상적인 의식은 아주 단순하게 그러나 아주 순수하게 하나의 기원이 되게 된다. 상상력의 연구에 있어서 시적 상상력의 현상학이 애써야 할 일은 바로, 여러 다양한 시적 이미지들의 이와 같은 기원적인 가치를 드러내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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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우리의 연구를 순수한 상상력에서 출발하여, 그 원초에서 파악된 시적 이미지에 국한시킴으로써, 우리는 여러 이미지들의 모임으로서의 시 작품의 作詩의 문제는 밀쳐 놓으려고 한다. 이 작시에 있어서, 아마도 완전한 현상학이 고찰해야 할 작품 구성의 요인들인 다소간 오래된 문화와 한 시기의 문학적 이상을 결합하는, 심리적으로 복잡한 요소들이 개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범위가 넓은 연구계획은, 우리가 지금 펴 보이려고 하는 단연코 기본적인 현상학적 관찰의 순수성을 해칠지 모른다. 참된 현상학자란 철저히 겸손함을 의무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읽고 있는 이미지의 차원에서 독자를 시인으로 만드는, 독서의 현상학적인 힘에 의존한다는 사실도 이미 그것만으로 일말의 오만을 보이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으로는, 한 작품 전체에 미치는 완전하고도 조직된 창조력을 되찾고 되살 독서의 힘을 우리 개인이 맡는다는 것은 더구나 겸손치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정신분석가들이 그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듯이 한 작가의 작품들 전체를 굽어 볼, 종합적인 현상학에 이른다는 것은 우리는 더, 더구나 희망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현상학적으로 ‘울릴’ 수 있는 것은 개별적인 이미지들의 차원에서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일말의 오만, 그 작은 오만, 그 단순한 독서의 오만, 독서의 고독 속에서 키워지는 그 오만이야말로 우리가 그것의 단순성을 지킬 때, 부인할 수 없는 현상학적 표지를 지니는 것이다. 이 경우 현상학자는 문학비평가와 공통적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흔히 주목된 바 있지만, 문학비평가란 자기가 만들 수 없을 작품에 대해서, 심지어는 손쉽게 비난하는 것으로 알 수 있지만, 자기가 만들고 싶지 않을 작품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인 것이다. 문학비평가는 필연적으로 엄격한 독자일 수밖에 없다. 너무나 흔히 쓰임으로 해서 이젠 정치가들의 어휘 속에까지 들어가 있을 정도로 빛을 잃어버린 어떤 콤플렉스를 마치 장갑의 손가락인 양 쉽사리 뒤집어 보이며 문학비평가와 수사학 교수는 무엇이나 알고 무엇이나 판단함으로써, 즐겨 우월 심플렉스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해도 좋으리라. 우리로 말하자면 행복한 독서에 빠져서, 많은 열광을 수반한 조그만 독서의 오만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에 드는 것만을 읽고 또 읽는다. 오만이란 여느 경우에 있어서는 우리의 전 정신을 짓누르는 육중한 감정으로 발전하게 되는 데 반해, 행복스런 이미지에 대한 찬동에서 태어나는 그 일말의 오만은 조심스럽고 은밀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오만은 단순한 독자인 우리 내부에, 우리 자신을 위하여, 오직 우리 자신만을 위하여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제 집에서만 으스대는 오만이다. 우리가 시를 읽으며 시인이 되고 싶은 유혹을 되살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독서에 다소 열광적인 독자라면 누구나 독서로써, 작가가 되고 싶은 욕망을 키우고 또 억누르는 법이다. 읽은 페이지가 너무 아름다울 때에는 겸손이 그 욕망을 억누르지만, 그러나 그 욕망은 다시 태어나게 마련이다. 어쨌든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을 되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그 좋아하는 책이 자기 자신에게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쟝 피에르 리샤르가 쓴 훌륭한 저서 {시와 깊이}에는, 특히 보들레르와 베를렌느에 관한 두 논문이 들어 있는데, 보들레르가 돋보인다. 왜냐하면 그 자신의 말로, 바로 보들레르의 작품이 그에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두 논문 사이의 어조의 차이는 크다. 베를렌느는 보들레르와 달리 저자의 전적인 현상학적인 찬동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그런 법이다. 공감의 밑바닥에까지 이르게 되는 독서의 경우에는, 그것을 표현하는 말에 있어서마저 ‘향수자’라고 표현된다. 요한 파울 리히터는 그의 소설 {거인}에서 주인공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그는 위인들에 대한 찬사를, 마치 그 자신이 그 칭송의 대상이기나 한 듯한 기쁨을 느끼며 읽었다.” 어쨌든 독서의 공감은 찬탄과 붙어다니는 법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다소간 찬탄할 수 있으나, 한 시적 이미지에서 현상학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치솟는 성실한 열정, 작으나마 치솟는 찬탄이 언제나 필요하다. 비평적 성찰은 약간만 하기만 해도, 정신을 그에 뒤이어 나타나게 함으로써 이 찬탄의 치솟음을 막아버리고, 그로써 상상력의 원초성이 파괴되어 버리고 만다. 관조적인 태도의 피동성을 넘어서는 이와 같은 찬탄 가운데, 마치 독자가 작가의 환영이기라도 한 것처럼 읽는 기쁨은 쓰는 기쁨의 반영인듯 여겨진다. 적어도 독자는 베르그송이 창조의 표징으로 생각했던 그 창조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경우 창조는 문장이라는 가는 줄을 따라, 표현의 순간적인 삶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시적 표현은 생명의 필연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면서도, 그러면서도 삶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다. 잘 말함은 잘 삶의 한 요소이다. 시적 이미지는 언어의 떠오름이며, 언제나 의미하는 언어보다 약간 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 작품을 읽으며 그것을 살 때, 우리들은 삶에 이로운 떠오름의 경험을 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조그만 범위의 떠오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그 떠오름들은 되풀이 되는 것이다. 시는 언어를 떠오름의 상태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떠오름의 상태에서는 삶은 그것의 발랄함으로써 지적된다. 실용적인 언어의 통상적인 선을 빠져나오는 그 언어의 도약들은 축소판의 생의 도약들인 것이다. 수단으로서의 언어라는 주장을 버리고 실재로서의 언어라는 주장을 선택할 축소 베르그송주의는, 시 가운데 언어의 전적으로 현행적인 삶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수세기에 걸친 한 언어의 발전 가운데 나타나는 말들의 삶에 대한 고찰이 있다면, 시적 이미지는 그 옆에, 수학자의 표현을 빌어서 말해 일종의 그 발전의 미분을 우리들에게 제시한다. 위대한 한 시행은 그것이 속하는 언어의 영혼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잊혀진 이미지들을 다시 일깨워 놓는다. 그리고 동시에 말의 예측불가능성을 인가한다. 말을 예측불가능한 것으로 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자유를 닦는 게 아니겠는가? 시적 상상력은 표현에 대한 검열을 무시해 버리는 데 얼마나 큰 매력을 느끼는가!
옛날, 作詩法들은 작시의 허용되는 파격들을 규정해 놓았었다. 그러나 현대시는 자유를 바로 언어의 본체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해 놓았다. 그제서는 시는 하나의 자유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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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고립된 한 시적 이미지의 차원에서도, 단순히 시행에 지나지 않는 표현의 생성 가운데에서도, 현상학적인 울림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의 더할 수 없는 단순성 가운데서 현상학적 울림은 우리들에게 우리말에 대한 완전한 구사력을 준다. 우리들은 정녕 여기에서 반짝이는 반사적인 의식의 미세한 현상을 마주하고 있다. 시적 이미지란 정녕 한결 작은 책임을 요구하는 정신적인 사건이다. 감각적인 현실의 영역에서 그것에 정당성을 찾아준다는 것과, 시 작품의 작시에 있어서 그것의 위치와 역할을 규명한다는 것은, 그 다음에나 생각해야 할 두 가지 일인 것이다. 시적 상상력에 대한 최초의 현상학적 탐구에 있어서는 고립된 이미지, 그것을 전개시키는 문장, 시적 이미지가 빛나고 있는 시행, 때로는 연 등이, 말하자면 장속분석 같은 것으로 연구해야 할 언어적 공간을 형성한다. J. B 퐁탈리스가 미셸 레리스를 우리들에게, “말들의 회랑을 돌아다니는 고독한 답사자”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인 것이다. 퐁탈리스의 이 표현은 독서로 체험된 말들의 단순한 충동이 돌아다니는 그 섬유 같은 언어적 공간을 잘 가리켜 보이고 있다. 개념적 언어의 원자상의 조직은 고정의 이유와, 중심적인 응축의 힘을 요구하는 법이다. 그러나 시행은 언제나 움직임을 가지며, 이미지는 시행의 선 속에 살며시 끼어들어 상상력을 이끌고 간다. 그것은 마치 상상력이 신경섬유를 만들어 늘이는 것과도 같다. 퐁탈리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표현의 현상학을 위한 아주 확실한 지표의 하나로서 기억해 둘 만한 말이다----“말하는 사람은 그 사람 전체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말하는 사람은 그 사람 전체가 하나의 시적 이미지 안에 들어가 있다고 말함도 이젠 역설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기에 전적으로 스스로를 던져 넣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지의 시적 공간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주 분명히 말해, 시적 이미지는 우리들이 직접 산 언어에 의한 가장 단순한 경험의 하나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우리가 제의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을 의식의 기원으로서 고찰한다면, 그것은 정녕 현상학의 소관 영역에 드는 것이다.
사실 현상학에 관한 ‘가름침’을 주어야 한다면, 우리들은 아마도 시적 현상에서 가장 명료하고도 가장 기본적인 교육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간행된 한 저서에서 J. H. 반 덴 베르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시인들과 화가들은 타고난 현상학자들이다.” 그리고, 사물들이 우리들에게 ‘말하며’ 그로써----만약 우리들이 그 사물들의 언어에 전적인 가치를 준다면----우리들은 그 사물들과 접촉을 가지는 것이라는 것을 주목하면서, 반 덴 베르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들은 성찰로써는 해결의 희망이 없는 문제들의 해결을 계속해 살고 있는 것이다.” 네델란드의 박식한 현상학자인 반 덴 베르그의 이러한 말들로써, 철학자는 말하는 존재에 중심을 둔 연구를 함에 있어서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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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시적 이미지들의 경우에 있어서 순수한 승화, 아무 것도 승화하지 않는 승화, 열정의 짐을 덜어버리고 욕망의 충동에서 해방된 그러한 승화의 영역을 분리해낼 수 있다면, 아마 정신분석적 연구에 대해 현상학의 입장이 정확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첨단의 시적 이미지에 승화의 절대상태를 부여함으로써 우리는 단순한 하나의 뉘앙스에 큰 내기를 거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시는 이와 같은 절대적인 승화의 수많은 증거들을 제공해 주고 있는 듯이 우리에게는 여겨진다. 우리들은 그러한 증거들을 이 책의 여기저기에서 빈번히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증거들이 심리학자나 정신분석가에게 주어졌을 때, 그들은 시적 이미지에서 단순한 장난, 덧없는 장난, 전혀 공허한 장난밖에 보지 않는다. 이 경우 바로 이미지는 그들에게는 의미 없는 것이다. 욕정적인 의미, 심리적인 의미, 정신분석적인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이미지들이 바로 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머리에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시가, ----분출하듯 솟아나온 많고 많은 이미지들, 그것들로 하여 창조적인 상상력이 제 자신의 영역에 자리잡는 그 많고 많은 이미지들을 가지고 시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미지의 삶 가운데 우리들이 들어가 있으면서, 그것에 앞서 있는 그것의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현상학자가 보기에는 심리주의의 만성적인 징후이다. 그렇게 하지 말고 반대로 시적 이미지를 그것의 존재 가운데서 파악하기로 하자. 언어 위에, 통상적인 언어 위로 떠올라 나타나는 이미지가 시적 의식을 남김없이 삼켜버리기 때문에, 시적 이미지와 더불어 시적 의식이 너무나 새로운 언어를 말하기 때문에, 이젠 과거와 현재의 상관관계를 살펴본다는 것이 유용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의미와 감각과 감정에 있어서의 너무나 엄청난 단절의 예들을 제시할 터이므로, 시적 이미지는 새로운 존재의 지배 밑에 놓여 있는 것이라는 우리의 주장을 사람들은 용인해 줘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존재란 행복한 인간이다.
말에 있어서 행복하니 따라서 실제 있어서는 불행한 인간이라고 정신분석가는 곧 반박할 것이다. 정신분석가에게는 승화란 바로 보상이 측면적인 도피이듯이, 수직적인 보상, 위를 향한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곧 정신분석가는 이미지의 존재론적 연구를 떠나버린다. 그는 한 인간의 역사를 시시콜콜히 파내어, 그 시인의 내밀한 괴로움들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꽃을 두엄거름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현상학자는 그토록 멀리 가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미지가 바로 눈앞에 있으며, 말이, 시인의 말이 그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제공하는 말의 행복, 시인의 생애의 드라마마저 뛰어넘는 그 말의 행복을 체험하기 위해 시인의 괴로움들을 살아보아야 할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시에 있어서 승화란, 세속적으로 불행한 영혼의 심리를 굽어보듯이 그 위로 솟아올라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시는 그것이 어떤 드라마틱한 생애를 그려 보이도록 된 것일지라도, 그것에 고유한 행복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것과 같은 순수한 승화는 방법상 드라마틱한 점이 없지 않은데, 왜냐하면 말할 나위 없이 현상학자는 정신분석이 그토록 오랫동안 연구해 온 고전적인 승화과정의 깊은 심리적인 현실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삶을 반영하지 않는 이미지들, 삶이 마련하는 게 아니라 시인이 창조하는 이미지들을 현상학적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시인이 살지 않았던 것을 사는 것이며 언어의 개방성에 몸을 여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러한 경험을 많지 않은 시 작품들에서 얻게 될 것이다. 예컨대 피에르 쟝 쥬브의 어떤 시편들, 피에르 쟝 쥬브의 책들보다 더 정신분석적인 사색에서 밑거름을 얻은 작품도 없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시는 때때로 너무나 멀리, 높이 솟구치는 불꽃들로 타오르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불꽃들이 시작된 최초의 아궁이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시는 끊임없이 그의 원천을 넘어서며, 기쁨과 슬픔 속에서 더 멀리 나아가 작품들을 빚어냄으로써 더 자유롭게 있는 것이다”고 그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또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내가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지면 질수록, 시적 탐험은 더욱더 통어統御되고 우연적인 원인에서 멀어지고 순수한 언어형태로 인도되는 것이었다.” 피에르 쟝 쥬브는 정신분석이 밝혀낸 원인들을 우연적인 원인들로 치부하기를 받아들일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쨌든, ‘순수한 언어형태’의 영역에서는 정신분석가의 원인들을 가지고 시적 이미지를 그것의 새로움 가운데 예언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기껏해야 자유에 이르는 ‘우연적인 계기’들이 될 따름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시는----지금 우리들이 처해 있는 시적 시대에서는----그것에만 고유한 ‘느닷없는 놀라움’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시적 이미지들은 예측불가능한 것이다. 문학비평가들이란 모두 이 시적 이미지의 예측불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명확한 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데, 바로 이 예측불가능성이야말로 통상적인 심리적 설명안을 뒤엎어버리는 것이다. 시인 자신 그 점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시는 특히 그것의 현금現今의 놀랄 만한 노력 가운데서는, 어떤 미지의 것에 홀려 본질적으로 생성에 몸을 연 주의깊은 사유에만 대응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뒤에 가서----“그제서는 시인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시인이란 아는 자, 즉 초월하는 자, 그리고 그가 아는 것을 명명하는 자이다.” 그리고 마침내----“절대적인 창조가 없다면, 시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시는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시는 더 열정에 섞여 있고, 더 심리화되어 있다. 그러나 시의 경우, 드문 것, 예외적인 것이 통상적인 것을 규칙으로 확립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을 반박하고 새로운 체제를 세운다. 절대적인 승화의영역이 없다면----그것이 아무리 제한되고 높이 있는 것일지라도, 비록 심리학자나 정신분석가들에게는 다다를 수 없는 것으로 보일지라도(그리고 어쨌든 그들은 순수한 시를 연구하지는 말아야 할 사람들이다)----우리들은 시의 정확한 극성을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단절의 면을 정확히 결정하는데 있어서 주저함이 없을 수는 없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시를 흐리게 하는 혼돈된 열정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높이에서부터 순수한 승화에 접하게 되는 시의 높이는 아마도 모든 영혼들에게 있어서 같은 수준에 위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정신분석가가 연구하는 승화와 시의 현상학자가 연구하는 승화를 분리해야 함은 방법상의 필연성이다. 정신분석가는 물론 시인들의 인간적인 성품을 연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열정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음으로 해서 그는 시적 이미지들을 그것들의 頂上的인 현실 가운데 연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사실 C. G. 융이 이 점을 아주 분명히 말해 둔 바가 있다.----정신분석의 습관을 따르다가는 “관심은 예술작품에서 떨어져 나가, 작품에 앞서 있는 심리적인 원인들의 풀 수 없는 혼돈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시인은 임상의 한 케이스, 성적 병리심리의 확정된 한 번호를 달고 있는 예가 되어 버린다. 이리하여 예술작품의 정신분석은 그 대상에서 멀어져서, 조금도 예술가에게 특별하지 않고 특히 그의 예술에 중요성이 없는, 일반적인 인간적 영역으로 논의를 옮겨 버렸던 것이다.”
오직 지금 문제되고 있는 논의를 요약해 보이려는 의도에서만이므로, 독자들은 잠깐 동안 우리에게 논쟁적인 태도를----논쟁은 우리의 습관에 거의 없는 것이지만----허용해 주기 바란다.
시선을 너무 높이 치켜든 구두장이에게 어느 로마인이 이렇게 말했었다.
구두장이여, 신발보다 높이는 보지 말게.
순수한 승화를 문제삼는 경우에, 시의 고유한 존재를 규명해야 할 경우에 현상학자는 정신분석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지 않으랴?
둘 중 어느 하나를 넘어서 정신분석을 하지는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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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 하나의 예술이 자립적이 될 때에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그리되면 그 출발을 현상학의 입장에서 고찰함이 바람직하다. 원칙상 현상학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움을 마주하는 것이다. 심지어 전문적인 수련의 흔적을 지니게 마련인 회화 같은 예술에 있어서도 위대한 성공들은 그러한 수련과는 관계 없는 것이다. 화가 라피크의 작품들을 연구하면서 쟝 레스퀴르는 바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넓은 교앙과 공간의 모든 역동적인 표현에 대한 지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들을 우정 적용하고 있거나 그것들로써 창작의 비결을 만들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즉 지식은 동시에 그 지식의 망각에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非知識이란 무지가 아니라 앎의 초월이라는 어려운 행위이다. 이러한 대가를 치룸으로써 한 작품은 매 순간, 그것의 창조를 자유의 훈련이 되게 하는, 말하자면 순수한 始作과도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더할 수 없이 중요한 텍스트인데, 왜냐하면 그 내용은 곧바로 詩性의 현상학으로 전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에 있어서 비지식은 하나의 근본적인 조건이다. 시인에게 전문적인 수련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지들을 결합하는 부차적인 일에 있어서이다. 이미지의 삶은 전적으로 그것의 번개 같은 치솟음 속에, 이미지가 감수성의 모든 여건들의 초월이라는 그 사실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러므로, 작품은 삶 위롤 너무나 느닷없는 융기를 일으키는 것이어서 삶이 그것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쟝 레스퀴르는 라피크에 대해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라피크는 창조행위에 대해서, 그것이 그에게 삶에못지 않게 느닷없는 놀라움을 제공해 주기를 요구한다.” 그제서는 예술은 삶의 배가가 되며, 우리들의 의식을 자극하여 졸지 않게 하는 놀라움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의 경쟁이 된다. 라피크 자신은 이렇게 쓰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오퇴이으의 경마장에서 말들이 내(川)를 건너뛰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내가 실제로 본 그 경마가 내게 가져다 준 것에 못지 않은---비록 다른 종류의 것일지라도----비예측적인 것을 나의 그 그림이 내게 가져다 주기를 기대한다. 이미 과거에 속하는 광경을 정확하게 재현한다는 것은 일순도 문제될 수 없다. 재현하는 게 아니라 나로서는 그 광경을 전적으로 되살아야, 이번에는 새롭고 회화적인 방식으로 되살아야 하며, 그리함으로써 새로운 충격의 가능성을 나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 그리고 레스퀴르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예술가는, 그가 사는 것처럼 창조하지 않는다. 창조하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이리하여 현대 화가는 이젠 이미지를 감각적인 현실의 단순한 대치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프루스트는 엘스티르가 그린 장미들에 대해서, 그 꽃들이 “그 화가가 마치 창의력 있는 원예가인 양 만들어낸 장미의 신종이며, 그것으로써 그는 장미과를 더 풍부하게 한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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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심리학에서는 시적 이미지를 거의 다루지 않는데, 흔히 그것을 단순한 메타포와 혼동한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이미지라는 말은 심리학자들의 저서에서 크게 혼돈되어 쓰이고 있다. ----이미지를 본다고도 하고, 이미지를 재현한다고도 하고, 이미지를 기억 속에 간직한다고도 한다. 상상력의 직접적인 산물이라는 것 이외에는 이미지는 무엇이나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저서 {물질과 기억}에서 이미지의 관념은 아주 큰 외연을 가지고 쓰이고 있는데, 그렇지만 이미지를 재현하는 게 아니라 산출하는 창조적 상상력은 오직 한 번 언급되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상상력의 이 산출은 대단찮은 자유의 활동으로 남아 있는 셈이고, 그 활동은 베르그송 철학이 밝히고 있는 위대한 자유로운 행위들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 짧은 大文에서 베르그송은 {환상의 장난}을 예로 들고 있다. 그제서는 여러가지 이미지들은 “정신이 자연과 더불어 취하는, 그 이미지들 수만큼의 자유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 복수의 자유들은 존재를 참여시키지 못하며, 언어를 증가시키지 못하고 언어를 그것의 유용성에 의한 역할에서 빠져나오게 하지 못한다. 그 자유들은 정녕 ‘장난들’이다. 이 경우 상상력은 또한, 추억을 무지개빛깔로 거의 채색하지도 못한다. 그 詩化된 기억의 영역에 있어서 베르그송은 정녕 프루스트에게 미치지 못한다. 정신이 자연과 더불어 취하는 자유들은 참으로 정신의 본성을 가리켜 보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상상력을 인간 본성의 아주 중요한 힘의 하나로 생각하기를 제의한다. 물론, 상상력이 이미지를 산출하는 능력이라고 말함은 조금도 사태를 진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동의어 반복은 적어도 이미지를 기억과 같은 것으로 여김을 막는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상상력은 그것의 생동하는 활동에 있어서 우리들을 과거와 현실에서 동시에 떼어낸다. 그것은 미래로 열려 있는 것이다. 과거가 가르쳐 주는 현실의 기능----이것을드러내는 것은 고전적 심리학인데----에 우리는, 이 또한 긍정적인 비현실의 기능----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앞선 저서들에서 밝히려고 노력했지만----을 덧붙여야 한다. 비현실의 기능쪽이 온전치 못하면, 창조적인 정신활동은 얽매이게 된다. 상상함이 없이 어찌 예견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시적 상상력의 문제들을 한결 단순히 다룰 때, 인간의 정신활동의 그 두 기능----현실의 기능과 비현실의 기능을 협동하게 하지 않고서는 시에서 정신적인 이득을 얻을 수 없다. 현실과 비현실을 한데 짜서 의미와 시의 이중활동으로 언어를 역동화하는 시 작품에 의해, 정녕 하나의 리듬분석 요법이라고 할 것이 우리들에게 제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에 있어서 상상하는 존재의 참여는 너무나 큰 것이어서, 그는 이윽고 동사 ‘적응하다’의 단순한 주어가 아니게끔 된다. 실제적인 조건은 더 이상 결정하는 요소가 될 수 없게끔 된다. 시와 더불어 상상력은, 바로 비현실의 기능이 자동성 가운데 잠들어 있는 존재를 매혹하고 불안하게 하러 오는----그 존재를 언제나 깨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두 기능의 접경지대에 자리잡는 것이다. 우리들이 순수한 승화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면, 자동성 가운데서도 가장 교활한 자동성, 언어의 자동성도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순수한 승화의 이 정상에서 바라본다면, 재현하는 상상력은 더 이상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요한 파울 리히터는 이렇게 쓰지 않았던가?
----“재현하는 상상력은 산출하는 상상력의 산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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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써 우리는 아마도 너무 길다고 할 철학적인 머리말을 통해, 이 저서 및 아직 쓰려고 하는 가냘픈 희망을 못 버리고 있는 몇몇 다른 저서들에서 우리가 검증하려고 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주장들을 요약했다. 이 저서에 있어서 우리의 연구분야는 명확히 한정되어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사실 우리는 아주 단순한 어떤 이미지들, 행복한 공간의 이미지들을 검토하려고 한다. 우리의 연구는 이러한 방향을 취함으로써 ‘장소애호’라는 명칭을 가질 만한 그런 연구가 될 것이다. 그것은 소유하는 공간, 적대적인 힘에서 방어되는 공간, 사랑받는 공간, 이러한 공간들의 인간적인 가치를 규명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 이유들이 흔히 아주 다양하지만, 그리고 시적 뉘앙스들이 지니는 차이들이 있지만, 어쨌든 그것들은 예찬되는 공간들이다. 그것들의 보호적인 가치----그것은 실제적인 것일 수 있지만----에 또한 여러 상상된 가치들이 덧붙게 되는데, 그 상상된 가치들이 미구에 지배적인 가치들이 된다. 상상력에 의해 파악된 공간은 기하학자의 측정과 숙고에 내맡겨지는 무관한 공간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 공간을 우리들이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의 실제성에서 사는 게 아니라 우리들 상상력의 모든 편파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특히 그것은 거의 언제나 우리들을 매혹한다. 그것은 존재를 보호하는 그것의 경계선 안에, 존재를 응축한다. 밖의 적대로움과 안의 내밀함의 상호작용은 이미지의 영역에서는 균형된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적대적 공간들은 이 저서에서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그 증오와 투쟁의 공간들은 열화 같은 물질들, 묵시록의 이미지들에 의거함으로써만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우리는 우리를 매혹하는 이미지들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지에 관한 한, 매혹함과 물리침은 반대되는 경험을 이루는 게 아닌 것으로 금방 나타난다. 반대되는 것은 두 말일 따름이다. 電氣나 磁氣를 연구하면서도 우리들은 索引과 拒否를 대칭적으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 있어서는 (+), (-) 기호를 바꾸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이미지는 안정된 생각, 특히 확정된 생각에는 거의 적응하지 못한다. 상상력은 끊임없이 상상하고, 새로운 이미지들로써 스스로를 풍요롭게 한다. 우리가 탐구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상상되는 존재의 풍요로움인 것이다.
이제 이 저서를 이루는 장들의 순서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내밀함의 이미지들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우리는 집의 시학의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많은 의문들이 있다. 잊혀지지 않는 과거를 되돌아볼 때면, 어떻게 은밀한 방, 없어진 방들이 居所로 나타나는가?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휴식은 그것에 최적한 상황을 발견하는가? 어떻게 잠시 동안의 은신처, 우연적인 피난처들이 때로 우리들의 내밀함의 몽상에서, 어떤 객관적인 근거도 없는 가치들을 얻게 되는가? 집의 이미지에서 우리는 정녕 하나의 심리적 통합의 원리를 가지게 된다. 기술심리학, 심층심리학, 정신분석 그리고 현상학은 집의 이미지에서 통합된 학설을 이룰 수 있겠는데, 그것을 우리는 장소분석이라는 명칭으로 지칭하기로 한다. 더할 수 없이 다양한 여러 이론적 지평들의 어느 것에서 출발하여 고찰하더라도, 집의 이미지는 우리들의 내밀한 존재의 지형도가 되는 듯이 여겨진다. 인간의 영혼을 그 심층에서 연구하는 심리학자의 일의 복잡함이 어떠한가를 가늠케 하기 위해 C. G. 융은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생각해 보기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한 건물을 찾아내고 그것의 구조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것의 위층은 19세기에 건조된 것이고, 아래층은 16세기의 것이며, 그리고 건물을 더 세밀히 조사해본 결과는 그것이 2세기에 이루어진 탑을 개축한 것임을 보여준다. 지하실 속에서 우리는 로마시대에 이루어진 기초공사를 발견하고, 지하실 밑에는 잡동사니로 가득찬 동굴이 하나 있는데, 그 잡동사니의 상층부에는 규석硅石으로 만든 용구들이, 그 하층부에는 빙하시대의 동물들의 잔해殘骸들이 발견된다. 우리들의 영혼의 구조는 거의 이와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그 비유가 그토록 쉽게 전개되어 나간다는 바로 그 사실만을 봐도, 집을 인간의 영혼에 대한 분석도구로 생각함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 ‘도구’의 도움으로 우리들은 그냥 우리들 집 안에서 몽상에 잠기며, 우리들 자신 안에서 동굴의 안온을 되찾게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들 영혼의 탑은 영원히 허물어져 버렸는가? 우리들은 영원히, 그 유명한 6음절 半詩句처럼 말하자면, ‘탑이 허물어진’ 존재들인가? 우리들의 추억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잊어버린 것들도 ‘숙박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무의식은 ‘숙박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영혼은 居所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집들’을, ‘방들’을 회상하면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 안에 ‘머무르기’를 배우는 것이다. 따라서 곧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집의 이미지는 두 방향으로 작용한다. 우리들이 집 안에 있다면, 마찬가지로 집 또한 우리들 안에 있다. 집의 이미지와 이와 같은 두 방향의 움직임은 너무나 오감(往來)이 많아서, 집의 이미지의 가치들을 묘사하는 데 우리는 긴 두 장이 필요했다.
인간들의 집에 대한 이 두 장 다음에, 우리는 사물들의 집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련의 이미지들을 연구했다. ----서랍, 상자, 장롱. 그것들의 자물쇠 밑에는 얼마나 많은 심리가 숨어 있는 것일까! 그것들은 말하자면 숨겨진 것의 미학이라고나 할 것을 지니고 있다. 바로 지금부터 숨겨진 것의 현상학을 시작하자면, 다음과 같은 예비적인 고찰 하나로 충분할 것이다.----비어 있는 서랍은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생각할 수만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아는 것에 앞서 상상하는 것을, 검증하는 것에 앞서 꿈꾸는 것을 묘사해야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모든 장롱들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때로 사물들을 연구한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들은 다만 어떤 유형의 몽상들에 잠기기만 한다. 우리가 새집과 조개껍질----척추동물과 무척추 동물의 그 두 은신처----에 바친 두 장은, 실제의 대상에 거의 제한받지 않는 상상력의 활동을 개진한다. 4원소에 관한 상상력을 그토록 오랫동안 사색했던 우리로서는, 시인들을 따라 나무 위의 새집 속으로 들어가는가, 동물의 동굴인 조개껍질 속으로 들어가는가에 따라서 수많은 공기의 몽상들을, 물의 몽상들을 되살았던 것이다.
우리가 살지 못하는 그러한 장소들에 살려는 몽상들을 따라가 본 다음, 우리는 언제나 그 이미지들을 살기 위해서는 새집이나 조개껍질 속에서처럼 우리 자신을 아주 작게 해야 하는 그러한 이미지들을 고찰했다. 사실, 우리들은 바로 우리들 집 안에서, 우리들이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 좋아해 하는 골방들이나 구석들을 발견하지 않는가? 웅크리고 앉는다는 것은 ‘.....에 산다’는 동사의 현상학에 속하는 것이다. 웅크리고 앉을 줄 아는 사람만이 열렬하게 자기 居所에서 살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들은 우리들이 즐겨 털어놓지 않는 이미지들과 추억들을 우리들 안에 한 모음 소복이 가지고 있다. 만약 정신분석가가 이 웅크리고 앉음의 이미지들을 체계화하려고 한다면, 그는 아마도 우리에게 수많은 자료들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문학적인 자료들 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위대한 작가들의 힘으로 그 심리적인 자료들의 문학적인 품위를 얻게 된 것이었을 때에 우리 자신 놀라워하며, 구석의 이미지에 대해 짧은 한 장을 썼다.
내밀한 공간들에 바쳐진 이상의 모든 장들 다음에, 우리는 공간의 시학에 있어서 큼과 작음의 변증법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외부공간에 있어서 상상력이 어떻게 관념의 도움 없이 거의 자연적으로 크기의 상대성을 즐기는가를 살펴보려고 했다. 이 큼과 작음의 변증법을 우리는 세미細微와 무한無限을 테마로 하여 묘사했다. 이 두 장은, 그렇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반대되는 게 아니다. 양자의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큼과 작음은 객관적으로 파악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큼과 작음을 이미지의 투사投射의 두 극으로 다루었을 따름이다. 다른 책들에서, 특히 무한의 경우, 우리는 자연의 웅장한 광경들 앞에서의 시인들의 명상을 특징지어 보려고 노력한 바 있다. 여기서는 이미지의 움직임에 대한 한결 더 내밀한 참여가 문제될 것이다. 예컨대 어떤 시 작품들을 따라가 보면서, 무한의 인상은 우리들 자신 안에 있는 것이며, 반드시 하나의 대상에 관계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러 우리는 충분히 많은 양의 이미지들을 이미 모은 셈이이므로, 이미지들에 그것들의 존재적인 가치를 주면서 우리 나름으로 안과 밖의 변증법을 세워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 안과 밖의 변증법은 열린 상태와 닫힌 상태의 변증법으로 반향되게 한다.
그 안과 밖의 변증법에 대한 장과 아주 가까운 내용을 가진 것이, ‘원의 현상학’이라는 제목의 그 다음 장이다. 이 장을 쓰면서 우리가 이겨내야 했던 어려움은, 일체의 기하학적으로 자명한 사실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둥금의 내밀함이라고나 표현할 그런 것에서 출발해야 했다. 우리는 사상가들과 시인들에게서, 단순한 메타포가 아닌----우리로서는 이것이 본질적인 점인데----, 이 직접적인 둥금의 이미지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장에서, 메타포의 主知性을 폭로하고 따라서 다시 한 번 순수한 상상력의 고유한 활동을 드러낼 새로운 기회를 가질 것이다.
우리의 복안으로는, 암암리에 형이상학으로 가득 차 있는 이 마지막 두 장은, 우리가 또 쓰려고 하는 다른 하나의 저서와 관계를 지어 주게끔 되어 있다. 그 책은 우리가 최근 3년 동안 소르본느에서 한 많은 공개강의들을 압축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책을 쓸 힘이 있을까? 호의에 찬 청중들에게 자유롭게 건네는 말과, 책을 쓸 때에 필요한 엄격성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다. 말로 하는 가르침에 있어서는 가르치는 즐거움에 들떠서 때로 말 자체가 생각을 하게도 된다. 그러나 책을 쓸 때에는 그래도 사색을 해야 하는 것이다.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의 서문은 {몽상의 시학}의 서문 못지 않게 대단히 뛰어나고 아름다운 글이겠지만, 편집자는 이 서문의 글을 읽으면서, 이 글을 번역한 번역자의 문장 솜씨에 대단히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현의 글과 곽광수의 글의 차이는 어른과 어린 아이의 차이와도 같으며, 그것은 곽광수의 한국어 문장 실력이 형편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곽광수 역의 {공간의 시학}(민음사, 1990년)이며, 독자 여러분들 꼭 이 책을 구입해서 정독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