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9일 연중 제5주일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오.5,13-16)
Your light must shine before others,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glorify your heavenly Father.
말씀의 초대
참된 단식은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오갈 데 없는 떠돌이를 받아 주고, 헐벗은 이를 덮어 주며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이스라엘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며 상처가 아물리라(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의 신자들에게 자신의 지혜와 언변으로 그들을 설득하려 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그의 복음 선포는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고, 신자들의 믿음이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소금은 제맛을 잃으면 버려질 것이며,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추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의 착한 행실이 사람들을 비추어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해야 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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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아주 오래전에 일본의 작가 미쓰하라 유리의 『길』이라는 시집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짧고 쉬운 시들이 아름답고 뜻이 깊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권 사 두고 보좌 신부로서 사목지에서 만나는 청소년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간 절판되어 더 구할 수 없어서 아쉬웠는데, 최근 한 신자에게서 이 책을 선물받고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이 시집에는 ‘길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맨 처음 길을 걸은 사람 훌륭해/ 험한 길 처음으로 걸은 사람/ 이름을 외울 가치가 있을 만큼 훌륭해/ 그 오롯한 자세/ 정말 아름다워/ 허나 그 뒤이어/ 이름 따위 안 남을 줄 알면서도/ 꾸준히 길을 밟아 다지며 걸어간 이들의/ 소박한 걸음/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니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복음의 요구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자신과 가정을 돌보기에도 벅찬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가르침이 가슴 깊이 와 닿을 수 없는 이상일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위의 짧은 시가 노래하듯,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삶은 누구에게나 자기 나름의 처지에서 가능합니다. 어떤 이가 먼저 길을 내는 몫을 맡았다면 다른 이는 그 길을 걸어가고 따라가 줌으로써 그 길을 넓히고 다지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일들, 우리를 통해 하실 일들에 미리 제한을 두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도록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에 신뢰하고 감사하며 응답하는 것이 참행복의 길일 것입니다.
빛과 소금이 되려면
-조재형 신부-
어릴 때 선생님들께서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보시곤 했습니다. 그러면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유관순 누나 등을 말하곤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존경받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았으면 합니다.
존경받는 사람의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로는 그 사람의 직책이 있습니다.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그 직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그러한 직책이 일정한 부와 명예를 보장해주기도 합니다.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판사, 의사… 등이 있겠습니다.
둘째는 한 분야에서 오랜 정진 끝에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운동 분야에 이런 사람들이 있고, 학문을 연마하는 사람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으며, 요즘에는 예술과 컴퓨터 분야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 그러면서 일정한 경지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기도 합니다.
셋째로는 특정한 직책에 있지는 않고, 그렇다고 한 분야에서 입신의 경지에 이르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게 이런 사람들은 청렴하며, 희생과 봉사 정신이 뛰어나고, 남에 대한 배려가 크며,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은 겉으로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향기가 은은하면서도 멀리 퍼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분들 때문에 때로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지을 수 있으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조건에서 존경을 받아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신앙인들이 자신의 직분과 직책 때문에 존경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신앙인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경지에 이르러 존경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세 번째 이유로 존경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2000년 역사를 지닌 교회는 오늘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합니다. 그 빛과 소금은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들어간 교회의 건물 때문에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향기를 이웃에게 전하는 그런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그 이름값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희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참으로 아름다운 말입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덕담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초는 자신의 것을 다 태워서 빛을 비추어 줍니다. 소금은 모든 것을 주고 녹아야 맛을 냅니다.' 빛과 소금처럼 모든 것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내어주신 그리스도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삶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지방자치 단체장을 뽑는 선거가 있습니다. 여당과 야당은 선거를 준비하면서 국민들에게 새로운 공약을 준비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발전과 성장의 그늘에 가려서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의료, 교육, 육아, 주택'과 같은 부분에서 국민들을 위한 복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선택적 복지이든 보편적 복지이든 우리 사회가 발전과 성장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은 선진 국가를 향한 발걸음을 시작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는 더더욱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합니다. 각 지역에 있는 본당과 교회 시설들은 세상의 등대가 돼야 합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사랑의 빛을, 희망의 빛을, 믿음의 빛을 밝혀줘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등대지기가 돼야 합니다. 그 삶이 비록 외롭고 고단할지라도 우리는 기꺼이 소금이 되어 모든 것을 내주었던 제2의 이태석 신부가 돼야 합니다. 제2의 마더 데레사가 돼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복지, 희생이 없는 복지, 십자가 없는 복지는 포장은 예쁠지라도 알맹이가 없기 마련입니다. 구호는 멋질지라도 공허한 메아리가 되기 마련입니다.
어두울수록 빛나는 작은 빛
-김인식신부-
신학생 시절, 산청으로 신앙학교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하루 일정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잠시 산책을 했습니다. 외진 곳이라 주위에 어떤 불빛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반딧불이를 보았습니다. 캄캄한 어둠속이었기에 반딧불이의 작은 초록색 불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참을 그 불빛을 보며 서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불빛에서 점점 그 빛이 비치는 주위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빛은 주변이 얼마나 어두운가에 따라서 그 밝기가 결정됩니다. 빛이 밝은 곳에서 작은 불빛은 밝아 보이지 않지만, 빛이 없거나 많지 않은 곳에서는 작은 빛이라도 밝게 보입니다. 그래서 어 두울수록 빛은 더 밝아 보이고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어둠이 작은 빛을 삼키는 듯 느껴지는 공간에서도 빛은 그 고유의 모습을 잃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강해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작은 것, 적은 것, 낮은 것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큰 것, 많은 것, 높을 것을 향한 길을 걸어갑니다. 그렇게 커지고 많아지고 높아지는 것이 나의 삶을 밝혀 준다고 생각합 니다. 사실 세상은 그러합니다. 경제적인 여유를 찾으려 하고, 부와 권력과 명예가 가져다주 는 기쁨을 찾습니다. 그 기쁨이 밝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큰 나무 아래 더 큰 그늘이 만들어지는 만큼 양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법 은 더 큰 불평등과 어둠을 만들어 냅니다. 커지기 위해 남이 작아져야 하고, 많아지기 위해 남 의 것을 빼앗아야 하고, 높아지려고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합니다. 그래서 작고 적고 낮은 사람 들은 점점 더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빛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우리 신앙인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달라야 합 니다. 마치 거대한 어둠이 우리의 빛을 삼키려는 듯 느껴질 때도 빛으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빛은 더욱 빛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둠에 맞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분이 우리 교회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오늘 우리에게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공석신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 맛을 잃는다.’는 동사는 그리스어원문에 ‘어리석어진다.’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서에 같은 동사를 찾아보면, 실천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6)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인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인은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여 삶이 제 맛을 내게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도 말했습니다.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 세상을 밝히는 빛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제자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실천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소금과 빛, 이 두 개의 단어로 복음서는 신앙인이 세상에서 할 역할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소금은 자기 스스로를 지키지 않고, 용해되어 음식의 맛을 바꾸어 놓습니다. 빛은 자기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고, 스스로를 불태워 주변의 어둠을 쫓아내고, 보이지 않던 현실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신앙인을 소금과 빛에 비유한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소모하여,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실천을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서의 ‘행복 선언’에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소금과 빛으로 있기 위해 요구되는 실천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 행복 선언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선언은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목말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선언이 의미하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이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행복선언들은 지켜야 할 계명도 아니고, 수양해야 할 덕목(德目)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언자적 선언이며 권고입니다. 신앙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일하시게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무시하고 무엇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같은 계명을 지키고, 같은 덕목을 수련하여 획일적으로 살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피조물과 다양한 생명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하신 일입니다. 획일성을 강요하면, 인간 생명은 위축되고 창의력도 말살됩니다.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유롭게 또 다양하게 살 것을 원하셔서 자유로운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 위에 군림하지 않고, 숨어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가 자유로운 실천으로 소금과 빛이 되어 은혜롭게 살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자유롭게 사셨습니다. 그분은 주어진 각본대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유대교가 요구하던 계명 준수에 얽매여 살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당신의 창의력으로 다양하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만나면, 병고를 덜어주고, 죄인이라 낙인찍힌 이를 만나면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율법을 못 지켜, 혹은 직업이 세리라 소외당한 이들을 만나면, 그분은 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기쁨이고 해방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당부하신 말씀도 기쁜 소식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며 죄를 용서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실천하신 바를 제자들도 실천하여 사람들을 살맛나게 하는 소금이 되고, 사람들이 진실을 보게 하는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는 먼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재물을 자기 삶의 보람으로 삼지 못 하는 사람입니다. 재물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지만, 그것을 많이 가지겠다는 마음은 강박관념이 되어 사람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그런 욕심에 사로잡히면, 재물을 마치 인생의 목적인 양 그것을 위해 삽니다. 복음은 그런 욕심의 강박관념에서 해방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복음서는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에 고통과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신앙인은 그런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겪는 아픔을 함께 겪으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복음서는 또한 온유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무슨 일에든,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이웃의 생각을 알아듣기 위해 온유하게 경청하고, 이웃과 더불어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복음서는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인생이기에 신앙인은 자기도 이웃에게 베푸는 노력을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의로움은 하느님이 베푸셨기에 우리도 베푸는 데에 있습니다. 복음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욕심 없는 사람입니다.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은 자기를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신앙인은 자기를 기준으로 주변을 보지 않습니다.
잘 먹고 잘 살며, 자기 품위를 유지할 수 있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한 몸 편하게 살 수 있어서 사람의 도리를 다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웃보다 더 강하고 더 높아서 성공한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함께 계신 하느님이 자기의 삶 안에 살아 계시게 사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소금과 같이 스스로를 긍정하지 않고 내어주어서,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섬김을 세상이 맛보게 합니다. 신앙인은 빛과 같이 자신을 소모하여, 욕심의 어둠을 사라지게 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보게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께 기도하여 자기의 소원을 성취하려 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자유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에게서 참다운 자유를 배워 새롭게 실천합니다. 우리의 실천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혹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사랑과 보살핌과 용서가 사람들의 삶의 맛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과 보살핌과 용서가 우리로 하여금 이웃을 보게 하는 새로운 빛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소금과 빛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행복선언에 뒤이어 예수님은 설교를 듣는 이들이 지녀야 할 태도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길거리에 내던져져 사람들의 발에 차이는 한심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원래 소금은 맛이 변하지 않는 식품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맛을 잃다니…? 예로부터 이스라엘에서는 움막 형태의 화덕을 만들고, 내벽에 소금을 입혀 복사열을 사용해 빵을 구워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지나 내벽의 소금을 벗겨내면 짠맛이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실생활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다인에게 ‘산 위의 도시’란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산성(山城)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바꾸어보면 ‘산 위의 도시’란 사람들의 눈에 쉽게 노출된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도 실생활을 반영합니다. 유다인의 가옥은 창문이 아주 작아 무척 답답했습니다. 사막 지대에서 모래와 먼지를 막으려면 당연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등불을 끌 때는 바닥에 내려놓고 됫박을 덮었는데, 이는 안 그래도 답답한 방안에 그을음까지 들어차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등불을 막 켰다면 반드시 ‘등경 위에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같이 당시의 실생활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로써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친밀하게 비추어보고 교훈 삼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자, 산 위의 도시이자, 등경이다”라는 말씀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자세, 혹은 교회의 역할을 암시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둠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에게는 언제나 빛으로 삼아야 할 모델이 필요한데, 바로 그리스도인이 그런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1고린 2,1-5에서 바오로는 자기가 고린토 교회를 방문했을 때 가졌던 마음자세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은 오직 하느님의 성령과 능력을 드러내려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고린토 교우들의 믿음도 자신과 같아야 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는 ‘유식한 말’이나 ‘인간의 지혜’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인 이사 58,7-10에 보면 “너의 빛이 어둠에 떠올라 너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오리라”(10절)가 나옵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시적 감흥까지 듬뿍 배어 나오는 구절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지중해 세계에는 이른바 유토피아 사상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비단 플라톤 외에도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등이 있었고, 유다 땅에서는 에세네파의 쿰란 수도원이 유토피아를 추구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는 수도회들이 유토피아, 즉 신앙인들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크고 작은 수도회들을 보면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얻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수도회에 제한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전체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 곧 세상이 보고 따라야 하는 대조사회(對照社會)여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 역시 세상의 빛이어야 합니다. 만일 그 역할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포기한 셈이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어둠이다.” 예수님의 불호령! 생각만 해도 추워집니다.
우리들의 삶의 내용은?
-최영철신부-
오늘 복음의 주제는 빛이다. 우리는 빛이 지닌 자연적 또는 상징적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빛과 같이 빛나는 삶을 원하며 바라고 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우리 모두에게 빛, 세상의 빛이 되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사실 성서는 예수님의 추종자를 빛의 아들이라 했고 예수님과 반대되는 세속을 따르는 이들을 어둠의 자식들이라 칭하고 있다. 빛과 어둠은 하느님과 사탄, 선과 악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사실 세상과 우리 안에는 이 두 요소가 엇갈려 공존하면서 싸우고 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서있는가? 빛이 되라 명하신 성서 말씀은 이 시간 우리 각자에게 진지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는 빛이 되고, 빛의 편에 서있어야 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빛이 되지 못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고 갈등이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때문에 하느님의 지혜보다 세상의 지혜를 앞세운 고린토의 신자들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빛이 서있는 그 자리를 파악하고,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아야 한다.
지난 몇 주간 계속 강조되었던 가치는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다. 그렇다! 빛이 바로 예수님이며, 참된 지혜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신앙인이란 모름지기 그분의 삶, 그분의 가치를 선택하여 그분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을 뜻한다. 따라서 빛의 주제는 결국 예수님은 누구인가로 귀결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온몸으로 껴안음으로써 우리 모두의 빛이 되셨다.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 되실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우리에게 은총의 선물, 곧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다. 따라서 빛이 되라는 것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예수를 닮는 삶을 뜻한다.
우리는 무미건조한 일상의 삶 속에서도 빛의 의미를 되새기며 힘과 용기를 내야한다. 모두가 예언자일 수는 없더라도, 모두가 순교자일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결코 잠들거나 무뎌지고 미지근한 사람이어서는 결코 안된다.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빛의 편에 서 있지 않다면 그것은 분명 어둠 편에 속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미사 중에 또 성체를 모신다. 성체는 빛의 삶을 다짐케 하는 음식이며 어둠과 부패를 막는 영생의 약이다. 이 미사로써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어 내야 한다. (선포와 봉사에서)
소금처럼 빛처럼 희망을 주는 교회를 이루자
-신현만신부-
지난 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첫번째 설교를 하시며 행복론을 선포하셨다. 오늘 복음은 그 행복론에 맞춰 살아야 할 행동지침으로 소금과 빛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소금은 우리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면서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짠맛을 내고 식욕을 주는 소금은 부패방지 및 소독용으로 긴요하다. 즉 소금은 생명을 보존하게 하며 생명의 부패를 막아 준다. 소금은 자신의 몸이 없어짐으로 그 구실을 한다. 빛은 꼭 있어야 할 가장 귀중한 것이지만 역시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밝게 해주어 생명을 있게 하고 키워주며 사물을 알게하고 우리를 인도한다. 그러나 가로막는 것이 앞에 있다면 그 역할은 포기된다.
세상의 부패와 어둠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고자 오신 예수님은 당신의 모습이 소금과 빛과 같은 것이며 우리 각자와 교회가 그런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점을 강변하신다. 생명을 존재하게 하고 생명의 부패를 막으며 맛과 희망을 주는 소금과 빛의 모습은 바로 행복을 알고 지켜가는 길이며 교회의 몫이며 사명인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이들은 지치고 맛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호소한다. 부패한 사회 안에서 잘못된 문화와 가치관의 혼란 등은 서로를 불안과 좌절로 몰아가기도 한다. 이런 현상이 초래되는 것은 결국 세상의 소금과 빛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나. 바로 나 그리고 우리 곧 교회가 그 역할을 해내야 한다. 사실 역사 안에서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 그 역할을 했고 지금도 삶의 현장 곳곳에서 소금처럼 빛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부패의 현장에 턱없이 소금이 부족하며, 어둠을 온전히 몰아내기에 너무 빈약하게 빛이 남아있을 뿐이다. 소금과 빛은 자신이 없어지고 내어줌으로 그 역할을 다한다. 우리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된다는 것은 내어주는 가난한 마음이어야 한다. 살 맛없는 세상에 맛을 주고 어둠의 현장 안에 빛과 희망을 주려는 가난한 마음의 의지가 실천되어야 한다.
이사야 예언자도 독서의 말씀에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 않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너희 빛이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 이제 주님의 제자로 자신을 인식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본연의 사명을 깨닫고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 하도록 쇄신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의 부패를 탓하기보다는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어야 하고 어둠의 세력을 한탄하기보다는 희망의 빛을 주는 모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소금처럼 없어져 버릴 각오가 따라야 한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교회의 모습이라면 등불을 됫박으로 덮는 격이며 그 안에서 세상의 이치와 같은 불편함이 있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이고 만다.
안일함과 비만증에 허덕이는 교회는 예수님의 선포를 외면하는 잘못을 범한다. 내어주는 교회, 생명과 희망을 주는 교회, 부패를 막아 줄 교회의 모습을 가꾸기 위해 우리는 다시 한번 소금과 빛으로 거듭 나야 할 사명을 일깨워야 할 것이다.
소금과 빛
-이용화신부-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빛’으로, 우리에게‘빛의 자녀’임을 한 순간도 잃지 말라고 촉구한다. 성서에서 ‘빛’이라는 단어는 ‘어둠’이라는 단어와 반대의 개념으로, 상징적으로 ‘빛’은 긍정적이고 선한 것을 대변한다면 ‘어둠’은 부정적이고 악한 것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선(빛)하고 악(어둠)하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성서는 선과 악의 판단의 기준을 ‘세상적’인 것이 아닌 지혜이신 ‘주님’께 두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적인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어리석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역설적으로 ‘빛의 자녀’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라는 말씀이다.
복음에서 복음사가인 마태오는 산상설교의 계속으로 ‘소금과 빛’이 되라는 예수님의 교훈을 전하고 있다. 마태오는 이 교훈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정체성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소금’의 정체성은 짠맛을 내야 하는 것으로, 소금이 변질되어 그 맛을 잃어버린다면 아무러한 쓸모가 없듯이, 신자들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맛(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빛’의 정체성은 어둠을 밝혀야 하는 것으로, 빛이 어둠을 밝히기를 꺼려한다면 아무러한 의미가 없듯이,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악)을 밝혀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라는 것은 세상적인 어둠을 피하여 자신을 감추는 어리석은 행위가 아닌, 세상 속에서 희망이 되라는 구체적인 말씀이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은 참된 제사란 이웃을 위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굶주린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떠돌이들을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혀주는 행위를 할 때만이 진정한 빛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빛’이 되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행위와 연관된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외면당하고, 쫓기고 갇히기도 했을 때 자신에게 힘이 되어준 분은 오로지 ‘주님’ 한 분이었으며, 자신의 능력이 아닌 오로지 주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 삶이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성서는 상징어인 ‘소금과 빛’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진정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계십니까?” 주님이 세례를 받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라는 말씀을 들려준 것은 역설적으로 ‘소금과 빛’으로 머물지 말고 세상에 ‘희망’이 되라는 말씀이다. ‘맹물’은 오래두면 썩어 버리지만 그 곳에 4%의 소금만 있어도 그 물을 썩지 않는다. 나는 ‘맹물’을 썩지 않기 위한 4%의 소금에 해당될까? 주님은 오늘도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 세상에 의인(義人)을 찾고 계신다.
세상의 빛과 소금
-고준석신부-
미국의 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토니 캄폴로 박사가 95세 이상 된 사람 50명에게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가?”에 대하여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 조사에 응한 사람 대부분이 다음과 같은 답을 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날마다 반성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런 되새김 없이 무심코 흘려보낸 시간들, 그 시간들이 얼마나 아까운가를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
다. 사실 지나온 하루를 돌아보며 자신을 반성하고 더 나은 내일을 계획하는 삶은 하루하루를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용기 있는 삶”을 살겠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눈앞의 이익을 좇아 양심을 버리고 불의와 타협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세상을 살면서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어 외면하며 산 날들이 인생의 막바지에 와서 뼈아픈 상처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죽은 후에도 무언가 남는 삶”을 살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목표를 세우고 꿈을 꾸며 힘들게 달려 왔지만 그게 다 물거품처럼 없어지고 마는 허망한 것들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 가치 있는 것들을 꿈꾸며 살겠다는 말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날마다 반성하는 삶”, “용기있는 삶”, “무언가 남는”, 즉 “참된 가치를 추구”하며 살겠다는 이들의 대답에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소금은 값싸고 흔한 것이지만 음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 필수물이 바로 소금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물도 부패를 막고, 맛을 내는 소금이 없으면 모두 다 외면해 버립니다. 세상에서 바로 이 소금의 역할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빛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흔한 것이지만 우리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빛입니다. 빛이 있어야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있고, 빛이 있어야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둔 세상을 환히 밝히고 차갑게 얼어붙은 세상을 따뜻이 녹이는 역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절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커다란 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을 날마다 반성하고 새로움을 향해 나아간다면,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쁨의 씨를 뿌리고 선을 행할 용기를 갖는다면, 그리고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참된 진리를 추구한다면, 이러한 사람들은 이미 어떠한 말이나 행동이 없더라도 이미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__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임숙희-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우리 마음 안에 오시어 세상의 소금과 빛인 우리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는 지성과 그에 따라 살고자 하는 갈망을 주십시오.
세밀한 독서?(Lectio) 산에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참행복?(마태 5,?3???12)?에 귀기울이던 군중을 예수님은 직접 “너희”?(13.?14.?16절)?라고 친근하게 부르시며 그분 때문에 세상 사람들한테 모욕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첫째, 제자들은 소금입니다.(13절) 소금은 자신이 가진 고유한 짠맛으로 음식이 변질되는 것을 막고, 음식에 맛을 줍니다. 이런 역할을 해야 하는 소금이 ‘제 맛을 잃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세상 (g?)’?이라는 말과 관련시켜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은 제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행복선언을 듣기는 했으나, 그것을 음미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기쁜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는 세상 사람들한테 외면당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복음의 맛을 전해주지 못하는 제자들은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7,?26)?과 같습니다. 그들은 외부의 혼란과 박해를 조금만 받아도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복선언 안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헌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받아 그 위에 삶의 토대를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세상의 소금’?이 됩니다. 세상에 비전을 주고, 변화된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둘째, 제자들은 세상의 빛입니다.(14절) 소금처럼 자신은 죽어가면서 세상 안으로 스며들어갈 때, 제자들은 비로소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빛과 소금으로서 제자들의 정체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과 “등불”?(5,?14ㄴ???15)?에서 구체적으로 설명 됩니다. 산 위에 있는 고을은 성경 안에서 자주 복음화라는 공통적인 주제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예루살렘 도성은 모든 사람이 주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밀려드는 “주님의 산”?입니다.(이사 2,?2???3) 마태오에 따르면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과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사는 사람들한테 빛으로 떠오르시는 분입니다.(4,?12???17 참조) ‘등불’?은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과 비슷한 이미지입니다. 팔레스티나의 등불은 흙으로 만들어진 조그맣고 단순한 그릇입니다. 가운데 있는 심지 밑에 기름이 있는데, 이 심지에 불이 켜지면 등불은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방 안의 어둠을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은 등불이지 빛 자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에 의해서만 빛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빛 자체이신 ‘그분 안에서’ 현실을 해석하고, 판단하고, 식별하는 빛을 받으며, 다시 하느님의 딸과 아들로 태어납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 삶의 성공 여부가 예수님과의 내밀한 일치 여부에 달려있음을 알게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제자들은 그들이 하는 ‘착한 행실’?로써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궁극 목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찬양받기 위해서입니다.?(16절) ‘착한 행실’?은 인간적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삶 자체가 ‘하느님의 뜻’, 그분이 원하시는 것에 완전히 열려있어야 하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 58장 7???10절과 화답송인 시편 112편은 우리한테 하느님 뜻에 따라 일상을 살아가는 의로운 사람들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자인 하느님을 닮아가며 소외된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자세입니다. 그들은 언제, 얼마만큼 수확을 거둘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눈물로 뿌린 씨앗을 기쁨으로 거두리라는 희망으로 사방에 씨앗을 뿌립니다. 이 의인들한테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 자비의 빛이 흘러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하느님의 ‘의로움’?과 ‘자비’?를 드러내는 ‘착한 행실’?을 통해, 그들이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서 타락한 세상 안에서 별처럼 빛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이제 더 이상 율법이 기록된 책갈피나 성전에서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서 드러납니다.
묵상?(Meditatio) 주님, 우리는 깨지기 쉽고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불이 꺼져버릴 수 있는 등불입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우리 안에 있는 불빛이 꺼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 안에 있는 이 빛은 사람들의 신앙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힘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Oratio)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로 큰 즐거움을 삼는 이?!?(시편 112,?1)
어제 아침 장례미사를 다녀왔습니다. 예전에 청년성서모임을 통해서 알게 된 어떤 형제님의 장례미사였지요. 40대 초반의 나이.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많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주님 곁으로 갑작스럽게 떠났습니다. 이 갑작스러운 소식을 듣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평소에 특별한 지병을 앓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뜻밖의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아무튼 놀라움과 함께 이 갑작스런 이별에 슬픔을 안고 장례미사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 미사에 많은 신부님들이 오신 것입니다. 모두 8분의 신부님께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셨고, 또한 이 형제님을 기억하는 많은 청년들이 슬피 울며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신부님들과 많은 청년들이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이 형제님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형제님께서 살아 있을 때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서공부와 성령기도회를 통해 주님께 더욱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노력했고, 더불어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범적인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더욱 더 이 이별을 아쉬움과 큰 슬픔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형제님이 참 잘 사셨구나.’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리고 제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도 말씀하시듯이,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만을 위해 살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빛과 소금이 되는 모습으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나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의 모습으로써 ‘참 잘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긍정적인 답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만 기억할 뿐, 실제로는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만을 간직하며 정 반대의 모습으로 살아왔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신앙의 기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몸으로 직접 그 사랑을 실천하여 진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나중에 주님 앞에 떳떳하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말만 하는 신앙이 아닌, 빛과 소금의 모습을 직접 살아가는 실천하는 신앙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씀하시지요. 즉, 나눔과 사랑을 실천할 때에 우리가 주님을 부르면 대답해주시고, 우리가 부르짖을 때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빛과 소금’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 하면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빛과 소금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새기며 살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나의 삶에서 철저하게 실천하도록 합시다. 이러한 모습으로 살다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참 잘 살았다.”라고 칭찬해주시며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큰 상으로 주실 것입니다.
인간은 먼지처럼 소박해져야만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마하트마 간디).
짜게 하고 밝게 하라
-남상근 신부-
감추고자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것이 세상에 있답니다. 감기가 그렇다지요. 기침이 나오고 콧물이 흐릅니다. 열꽃이 피어납니다. 감기 걸리면 증세가 바깥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숨길 수 없답니다. 소금과 빛이라는 사명이 믿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패를 막아 내고, 어둠을 몰아내는 일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이지요. 소금과 빛이 가진 공통 속성은 퍼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적은 양의 소금이 녹게 되면 물 전체가 짜게 됩니다. 한 자루의 초가 태워지면 방 전체가 밝아지게 됩니다. 소수에 지나지 않아도 믿음의 그리스도인이 자리하면 전체가 변화되고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녹지 않고 타지 않는 까닭입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무너진 가정을 일으킵니다. 한 사람의 기도가 흩어진 공동체를 다시 모읍니다. 한 사람의 희생이 사회 전체를 흔들어 각성시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여, 정화하고 조명하는 구원의 일을 계속하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빛이라시네
-김찬선신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여라.”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듣는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 기분은 어떠십니까? 기분이 좋으십니까? 우쭐한 마음이 듭니까? 이렇듯 나를 인정해주시는 주님을 위해 한 몸 불사를 만큼 벅찹니까? 아니면 너무 부담스러워 피하고 싶습니까?
조금이라도 겸손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얼마간 나이를 먹은 사람이라면 꽤 부담스럽고 내가 이런 소리를 들을 만한지 자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세상의 빛입니까? 우리가 진정 세상의 빛이기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우리가 빛이기를 주님께서 바라시고 사람들도 우리가 빛이기를 바라지만 정녕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그런 빛이 못됩니다. 먼저 제 마음 안에 자주 빛이 없고 어둡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처럼 제 마음의 어둠을 밝혀달라고 기도하는 처지입니다. 그리고 착한 행실로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기보다는 악행으로 정녕 주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의 신원을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빛의 자녀임을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본래 빛의 자녀임을 망각하고 살아온 우리로 하여금 빛의 자녀가 아니면 어둠의 자식이냐고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어둠의 자식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고,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두 번 째로 주님은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가 될 것이냐, 어둠의 자식이 될 것이냐? 본래 빛의 자녀임을 망각하고, 아니 빛의 자녀임을 모르는 체하며 계속 어둠의 자식으로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지금이라도 빛의 자녀로 살아갈 것이냐고 물으시고 빛의 자녀가 되라고 결단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빛의 자녀가 되라고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빛의 자녀가 되라고 촉구하시기는 하지만 우리를 윽박지르는 분이 아니십니다. 빛의 자녀인데 왜 빛의 자녀답게 살지 않느냐, 이제부터는 빛의 자녀답게 살라고 무조건 다그치는 분이 아니십니다. 현저히 떨어져있는 우리의 빛으로서의 자존감을 일깨우면서 동시에 자신감을 가지고 한 걸음서부터 시작하라고 격려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빛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큰 빛이 아니라 작은 빛임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아니, 스스로는 빛이 아닌 반사하는 빛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빛이고 우리는 그 빛을 받아 비추는 빛입니다. 그러니 단지 교만해서건 너무 자신이 없어서건 그 빛을 거부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리고 “당신의 빛으로 어둠에 주저 앉아있는 저를 비추어주시고, 저에겐 진정 아무런 선이 없사오나 당신의 선을 베푸시며, 당신의 선으로 제가 착한 일을 하여 당신 얼굴 빛내게 하소서.”하고 기도하며 실천하면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양승국신부-
<육개장과 설렁탕, 그리고 찐계란>
언젠가 제가 지독한 위장병에 걸려서 고생하던 때였습니다. 담당의사께서는 제게 음식을 짜고 맵게 먹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당장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저는 어쩔 수 없이 의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동안 소금이나 고춧가루가 거의 들어있지 않은 음식만 먹게 되었습니다.
거의 매 끼니를 멀건 흰죽에다 시금치, 백김치, 콩나물무침 등등. 정말이지 그것보다 더 큰 고역은 다시 또 없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저는 소금의 소중함이랄까 위력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때 저는 육개장의 그 얼큰하고 개운한 맛, 설렁탕의 그 은은한 맛, 그 기본은 다름이 아니라 소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금을 치지 않고 찐계란을 드셔보셨습니까. 소금 없는 찐계란은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나 다름없습니다. 얼마나 먹기가 팍팍하고 또 무의미한지? 소금은 음식 가운데 녹아 스며들어 절대 보이지는 않지만 조미료 중의 조미료입니다. 모든 음식에는 일단 소금이 들어가야 제 맛이 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의 소금"은 바로 그리스도인 한 명 한 명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금인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녹아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로 인해 기뻐하고 신명나는 삶을 살아가도록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한 몸 바쳐"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과 이웃을 위한 희생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본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신장 하나를 만성신부전증 환자에게 떼어준 40대 여자 분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동아일보 제 25026호 사회면). "세상 모든 사람이 2개의 신장을 가진 것은 힘들 때 서로 나눠주라는 의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실천에 옮기고 싶었습니다"라며 그분은 "사랑의 신장 기증 릴레이"의 첫 주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신장을 이식 받은 손모씨의 아내는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자신의 신장 하나를 다른 환자에게 기증하였고, 그 환자의 남편 역시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신장 하나를 다른 환자에게 내놓았습니다. 이렇게 한 천사의 선행은 세 가정에 새 생명을 주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늘이 기뻐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실천한 그 부인은 온전히 세상 한가운데로 녹아 스며든 소금이었습니다. 세상에 희망을 던져준 의인이었습니다.
소금이 일상의 기쁨이자 세상의 희망이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자 희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소유하고 있는 휴대폰은 2002년도에 구입을 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상당히 좋은 휴대폰이었지요. 특히 획기적인 기술이라고 불렸던 GPS 기능이 들어있는 것이기에 상당히 비싼 값을 치루고 구입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제 휴대폰을 보고는 하나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 이제 휴대폰 바꾸실 때가 된 것 같아요.”
하긴 요즘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휴대폰을 보면 정말로 신기합니다. 사진을 찍지 않나, 또 음악을 듣는 분들도 계십니다. 휴대폰을 열어보면 화려한 글씨와 깨끗한 음악소리, 그리고 그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보기도 하고 동영상, 심지어는 텔레비전도 볼 수 있는 기능까지도 함께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 요즘의 휴대폰에 비해서, 저의 휴대폰은 액정화면의 한가운데가 시커멓게 변해서 글씨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제게 문자 보내시는 분, 사실 그동안 보이지 않아서 무슨 내용인지 몰랐던 적이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또 전화를 하려고 하면, 숫자 키가 잘 눌러지지 않아서 아예 포기할 때도 많았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권유도 있고 해서 바꿀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달, 휴대폰 이용요금을 보고는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휴대폰 이용요금이 늘 2만 원대이거든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5만 원 이상의 휴대폰 요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글자가 잘 보이지 않으니 문자를 보내는 일이 없고, 숫자 키가 눌러지지 않아 전화 걸 일도 그리 많지 않으니 이용요금이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사실 생각해보면 요즘 휴대폰은 휴대폰 같지 않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광고만 봐도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통화 음질이 어쩌고저쩌고 했는데, 요즘 광고의 내용은 카메라 광고 같기도 하고, 또 MP3플레이어 광고 같기도 합니다. 바로 본래의 목적보다는 부가적인 목적이 주(主)가 된 것은 아닐까 싶네요.
휴대폰은 전화만 잘 되면 그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통화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휴대폰의 기능을 훌륭히 하는 것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휴대폰은 자신의 주(主) 목적에 가장 충실(물론 전화를 거는 것보다는 받는 쪽에 더 충실하지만)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본래의 목적이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요. 빛과 소금이 되라고.......
소금은 짠 맛을 내야지 소금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금이 짠 맛을 내지 못한다면, 또 짜지 않고 달다면 어떨까요? 또한 빛은 밝음을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밝지않고 어둡다면 그것을 가지고 빛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역시 이렇게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유용한 것을 주는 빛과 소금의 모습처럼, 우리 역시 본래의 목적에 충실함으로써 이 세상 안에서 가장 유용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본래의 목적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토록 강조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입니다. 따라서 내가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다른 것들을 더욱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가요?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내 창조 목적에 걸맞게 살고 있나요? 이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빛과 소금이…….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
조셉 G. 돈더스
우리는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이 구절은 너무나 유명한 말이면서도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크리스챤들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말한다.
"우리는 소금이다. 우리는 빛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소금이 얼마나 하챦은 물질인지 모르는 듯싶다. 성서에 등장하는 오직 한 사람, 그녀라면 진정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나는 소금이다!" 그녀는 소돔과 고모라를 되돌아본 순간 소금으로 변한 롯의 아내다. 그녀는 100퍼센트 소금으로 변했는데, 이를 보고 잘된 일이라고 기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이다.
소금 그 자체는 쓸모가 없다. 소금만 놓고 본다면 그만큼 쓸모 없고, 다루기 힘들고, 식용에 적합치 못한 것은 없으리라. 소금만 가지고는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다. 배고파 굶어 죽더라도 소금을 먹을 수는 없다. 갈증으로 목이 타더라도 소금을 마실 수는 없다. 그리하면 상황은 더 악화될 뿐이다. 소금 그 자체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소금은 땅을 불모지로 만든다. 소금은 생명을 앗아간다. 소금은 사체를 보존한다. 소금은 무겁다. 소금은 무익하다.
오늘의 복음을 통해 예수께서 지적하신 대로, 소금은 다른 것과 섞였을 때만이 비로소 유익하게 쓰인다.
우리는 소금이 아니라, 땅의 소금이다. 우리는 땅과 섞여야만 한다. 우리는 주변의 물질들과 섞여야만 한다.
만약에 크리스챤들이 "나는 땅의 소금이다" 라고 생각하거나 말한다면, 이들은 정작 인간사의 요리 냄비에 던져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들은 인간사의 냄비에 똑바로 서 있어서는 안 된다. 이들은 그런 냄비 속에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런 냄비 속에서 다른 물질들과 섞여야만 한다. 이들은 삶아져야 하고 끓는 과정을 거치면서 실제로 녹아 없어져야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럼으로써 가장 훌륭한 맛, 입에 꼭 들어맞는 맛을 내어야 한다.
땅의 소금인 크리스챤들은 이따금 특별한 일을 하도록 부름받기도 하지만, 모두가 그런 특별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 크리스챤들이 마침내는 여러 단체 가운데 하나에 가입할 수도 있지만, 모두가 단체에 가입할 필요는 없다. 크리스챤들은 기도를 꼭 해야 하겠지만, 모두가 기도 모임에 참여할 필요는 없다. 설사 아주 유익한 일이더라도, 모두가 사회 사업을 운영하거나 직접 참여할 필요는 없다. 땅의 소금인 크리스챤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인간의 현실에서 - 이 세상에서, 이 삶 속에서, 이 거리에서, 이 고을에서, 이 도시에서, 이 나라에서, 온 세상에서 - 맛을 내는 사람, 맛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소금이 다른 것과 섞이지 않는 한, 소금은 대단히 짜고, 쓰고, 자극적이고, 얼얼하고, 해롭고, 맛이 독하다. 만약에 소금이 다른 것과 섞이지 않고 혼자서도 쓰일 수 있다면, 소금에 찌든 타올로 사람들의 엉덩이를 후려치기 위해서나 쓰일 터이다. 이렇게 쓰인 소금이라면 인간의 살 속에 박혀 평생토록 고통이나 줄 따름이다.
소금만으로는 살 수 없거니와 해롭기까지 하다.
또 예수께서는 우리가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거듭해서 많은 크리스챤들은 열심히 자기네가 빛이라고 외쳐 댈 터이다.
이들은 마치 빈방에서 혹은 됫박 밑에서 타 들어가는 촛불처럼, 빛을 가로막은 채 자신의 빛을 봄낸다.
빛만으로는 역시 쓸모 없다. 빛만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빛만으로 여러분은 사물을 분간하지 못한다. 빛만으로는 잘못을 캐내기 위해 고문당하는 이의 눈앞에 일부러 들이대는 빛과 다를 바 없다. 빛만으로는 해롭다.
빛은 그 자체보다 다른 사물을,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보게 할 때 유용하다. 빛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상응할 때, 우리를 통해서 유익하게 쓰인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우리는 사물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고, 가능성들을 비추어야 한며, 이 세상을 밝게 비추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임무요 우리의 사명이다. 세례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활초를 통해서 빛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으시오!" 마찬가지로 그런 이유 때문에 옛날 세례식 때는 사람들이 소금을 먹었다.
우리는 소금이 되어야 하지만, 섞이지 않는 소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빛이 되어야 하지만, 비추지 않는 빛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예수를 본받는 삶을 살고 행동한다면, 그 때 우리는 다른 이에게 위로가 될 터이며, 우리는 그들에게 구원이, 희망이, 즐거움이 되리라.
그런 소금과 빛을 여러분은 - 고맙게도 - 이 세상 도처에서, 이 나라 도처에서, 이 마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은 예수의 영과 부딪치자 변화되었다(시편 112, 4-8을 보라).
그는 어질고 자비롭고 올바른 사람이라
어둠 속의 빛처럼, 정직한 사람을 비춘다.
인정이 많고 동정 어려 남에게 꾸어 주며,
모든 일을 양심으로 처리한다.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겠고
영원히 의로운 사람으로 기억되리라.
야훼를 믿으므로 그 마음이 든든하여
불행이 온다 해도 겁내지 아니한다.
확신이 섰으니 두려울 것 없고
마침내 원수들이 망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
그는 너그러워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니,
그 의로운 행실은 영원히 기억되고,
사람들이 그 영광스런 모습을 우러르리라.
-상지종신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양승국신부-
<소금의 위력>
언젠가 제가 지독한 위장병에 걸려서 고생하던 때였습니다. 담당 의사는 제게 음식을 짜고 맵게 먹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당장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저는 어쩔 수 없이 그분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동안 소금이나 고춧가루가 거의 들어 있지 않은 심심한 음식만 먹게 됐습니다.
거의 매 끼니를 멀건 흰죽에다 시금치, 콩나물무침 등, 자극성이 전혀 없는 반찬들만 먹었는데 정말이지 그것보다 더 큰 고역은 없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저는 소금의 소중함이랄까 위력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때 저는 육개장의 그 얼큰하고 개운한 맛, 설렁탕의 그 은은한 맛, 그 기본은 다름이 아니라 소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소금을 치지 않고 찐 계란을 드셔본 적이 있으십니까? 소금 없이 찐 계란은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했습니다. 얼마나 먹기가 팍팍한지 모릅니다. 소금은 음식에 녹아 스며들어 전혀 보이지는 않지만 조미료 중 조미료입니다. 모든 음식에는 소금이 들어가야 제 맛이 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올곧고 청렴한 삶을 통해서 악과 부패에서 세상을 정화시키는 사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꽃이나 열매이기보다는 뿌리이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사람들을 향한 한줄기 구원의 빛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덤프트럭 운전기사였던 남편 부주의로 풍비박산이 난 한 가정을 알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가난을 딛고 일어서겠다는 지나친 욕심이 불행의 발단이었습니다. 하루를 쉬었어야 했는데….
피로 누적은 졸음운전과 중앙선 침범으로 이어졌고, 9시 뉴스에서 자주 듣는 표현인 '마주 오는 승용차와 정면충돌'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모든 책임을 지고 '담장 안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사고 충격으로 평소에도 병약했던 아내는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 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딱한 신세가 됐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동네에는 딱한 사람 보면 밤잠을 못 이루는 ‘해결사 수녀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수녀님은 즉시 3단계에 걸친 조치를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셨습니다.
제1단계로 수녀님은 근처 종합병원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사람 사무실로 돌격해 들어가셔서 그 자리에서 '오늘 즉시 입원'이라는 담판을 지으셨습니다. 제2단계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당장 아이들 받아들일 자리가 없다고, 보육사들 의견도 좀 들어봐야 한다”고 사정을 설명해도 막무가내셨습니다. 기어이 아이들을 제게 맡겨놓고 휑하니 달아나 버리셨습니다. 일단 큰불을 끄고 한숨을 돌리신 수녀님은 제3단계로 신자들을 이끌고 남편이 수감돼 있는 교도소로 향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의와 낙담으로 거의 폐인이 되어가고 있는 그 남편에게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솔직히 수녀님의 지나친 ‘밀어붙이기’식 일처리 방식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수녀님을 존경하게 됐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처럼 안타까워하며,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려는 그 마음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수녀님은 사고로 암흑의 한 가운데 놓여 있던 그 가정에 진정 ‘한줄기 구원의 빛’이셨습니다.
세상의 빛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들
-조욱현신부-
오늘 전례의 주제는 ‘빛’이다. 그러나 이 ‘빛’의 의미는 연중 제3주일의 ‘빛’과는 다른
의미이다. 3주일의 ‘빛’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지만, 오늘의 전례에서는 ‘세상의
빛’이 그분의 제자들로 나타나고 있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영시켜 세상에서 그분의 정체를 계속 이어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기 때문에 언행의 일치를 요청하게 될 것이다.
복음: 마태 5,13-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지난 주일의 산상수훈의 내용을 확대하는 것이다.
마태오는 오늘의 말씀을 산상수훈에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마음으로 가난하고’, ‘온유하고’, ‘자비롭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신자들이 바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
‘행복한’ 사람들의 생활은 ‘새로운 실체’ 즉 이미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빛으로 변화된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빛으로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너희는 세상의 빛이다”(13-14절).
그리스도인의 본성을 ‘소금’과 ‘빛’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소금’이란 일반적으로 ‘지혜’를 뜻한다. 그런데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는
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러므로 소금과 빛의 개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 이 관계는 기능적인 ‘상대성’에 찾아야 한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고, 음식물을 썩지 않도록 보존하고,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예수께서도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13절)이라고 하셨다.
복음에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였다. 이 땅의 개념은 세상(14절)과 일치하는 말로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커다란 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평범한
행동들을 통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면 이 행위가 모든 것에 새 ‘맛’을 주는 것이
아닐까?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쁨의 씨를 뿌리고 선과 이해의 향기를 뿜어내는
신자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맛’과 ‘의욕’을 갖게 해줄 것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아무데도 쓸데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
이다”(13절). 그런데 천연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릴 수 있겠는가? 자연의 영역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비극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그들 안에
구원의 ‘맛’과 그 맛을 전파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빛’의 상징적 개념도 알아들을 수 있다. 이 빛의 비유는 ‘산 위에’ 있는 마을의 비유
(14절)와 등경 위에 얹어 비추게 하는(15절) 등불로 설명하고 있다.
빛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으려면 빛 자체로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어야 생명과 기쁨, 움직이고 행동하는 자유를 얻게될 것이다.
빛의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 빛과 같이 온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산 위에 있는 마을’(14절)에 시선을
모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16절)고
결론을 내리고 계시다. 즉 행실을 통한 증거를 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실’은 산상수훈의 정신에 따르는 행실을 말한다.
즉 가난,온유,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 중에도 평온을 잃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오늘 복음은 교회의 선교사명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소금’과 ‘빛’이라는 존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교회가 세상에 봉사하고 또한 그 자체의 생명력과 사랑의 증거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빛’ 자체를 자신의 모습을 통해 세상에 비추어
줄 수 있고 교회가 ‘구원의 보편적 성사’(교회 1.48)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제1독서: 이사 58,7-10: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
1독서도 ‘행실’에 의한 증거를 강조하고 있다.
의식주의를 벗어나서 사랑의 실천의 우위성을 강조한다.
즉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베푸는 ‘자비의 행위’ 이것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이다. 그 행위는 새벽 동이 트는 것과 같이 시작되어 대낮
같이 밝아 온다고 말하고 있다. 즉 사랑은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사랑이 폭발하고 입증되고 받아들여지고 확신을 주게 될 때, 그 사랑은 모든
사람을 뜨겁게 하고 비추어주는 불꽃이 되며 또한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게 된다.
교회가 지나치게 제도화되거나 의식주의적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즉 다른 사람을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사랑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사랑의 교회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며, 세상이 바라는 교회의 모습일
것이다. 이 때에 교회는 ‘그의 빛이 어둠에 떠올라 그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지게
될 것이다’(10절).
제2독서: 1고린 2,1-5: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심오한 진리
이러한 교회의 사랑에 대한 소명을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선포하는 메시지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면 된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나는 유식한 말이나 지혜를 가지고
하느님의 그 심오한 진리를 전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1-2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그것이 무상으로 베풀어진 사랑의 선포이며,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선포이며, 그 ‘나약하고’ ‘무기력한’ 행위로부터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1고린 2,4) 세상에 증거해야 할 가장 큰 ‘빛’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으로써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때,
교회는 진정 산 위에 있는 마을과 같이, 온 집안의 식구들을 비추는 등경 위의
등불과 같이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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