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5월 정신에 역행하고 있다”
벌써 강산이 세 번 변했다. 아이폰 세대에게는 낯설겠지만, 한때 횃불을 들어 어둠을 밝힌 적이 있었다. 1980년 5월18일. 빛고을 사람들은 민주주의 횃불을 들었다. 10일간의 항쟁. 5월27일 접수당한 건 도청이 아니라 이 나라의 민주주의였다. 신군부의 군홧발에 횃불은 꺼졌다. 그러나 ‘5·18 정신’은 1980년대 내내 화인이 되어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았고, 그 불씨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타올랐다.
30돌을 맞은 5·18이 다시 민주주의를 돌아보게 한다. 너무나 당연시해오던 민주주의가 뒷걸음질 치고 있다. 4대강은 파헤쳐지고, 광장은 차단되고 촛불을 드는 것도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세상. 그래서 촛불 대신 아이폰 촛불을 들어야 하는 오늘, 5·18 정신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 1980년 서울발 ‘민주화의 봄’은, 그 놈의 봄은 하필 ‘빛고을’ 광주에 ‘핏빛’으로 남하했다. 5월16일 전남대 교수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계엄사령부는 일요일이던 5월18일 자정을 기해 광주 전남대와 조선대에 ‘공수부대’를 배치했다. 그러나 그날 오전 10시,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 앉은 학생 200~300여 명은 구호를 외쳐댔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계엄군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잦아들지 않는 학생들의 구호에 공수부대 책임자는 “돌격, 앞으로”라고 명령했고, 곧이어 학생들은 군홧발에 짓이겨 나가 떨어졌다.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들이 흘린 핏값은 5·18 민주화 운동의 ‘발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훗날 리영희 선생은 광주의 핏빛 봄을 이렇게 정의했다. “1980년 5월 18일은 그 오랜 과거의 역사와 그 이후 역사를 가르는 시대 구분의 분기점이 되었다. 이 5월을 기해서 광주는 남한 지도에 표시된 작은 도시 명으로서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동시대적 세계의 한 이념(理念)이 되었다"(<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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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장일호 박만규 전남대 민주인권평화센터 소장 | 수많은 주검 위에 피어난 ‘5월 광주’는 시대의 아픔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계속 됐고, 이는 전남대 안에 ‘5·18 연구소’를 열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1996년 12월10일 설립된 5·18 연구소는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학문적 탐색과 민주주의 발전 및 인권 향상에 기여하기 위해 매년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해오고 있다. 또한 연구 논문집 등을 발간하는 한편, 2006년에는 5·18 ‘너머’를 고민하기 위해 연구소 이름을 민주인권평화센터로 바꾸기도 했다.
5·18 서른 돌을 맞은 민주인권평화센터는 분주했다. 30주년을 맞아 각종 포럼과 심포지엄을 민주인권평화센터 주관으로 열기 때문이다. 민주인권평화센터 소장을 맡아 행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박만규 교수(57, 전남대 역사교육과)는 “5·18 민주화 운동의 30주년은 프랑스 혁명처럼 큰 의미로 남을 것인지, 축소되고 간신히 기억되는 수준으로만 남을 것인지 그 갈림길에 서 있다”라고 말했다. 5월11일 박 교수를 1980년에 5·18 신호탄을 쏘아올린 전남대 교정에서 만났다.
5·18 민주화 운동이 있은 지 어느덧 30주년이 되었다. 매년 해오던 학술 심포지엄을 30주년 덕에 더 다양하게 준비하고 있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한철이지 뭐(웃음). 여전히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서울내기인 나 역시 한때 5월 광주를 ‘폭도’ ‘무질서’ 같은 부정적인 단어로 기억했었다.
한국 민주화의 첫장을 연 것은 4·19 혁명이지만, 그 후 우리 국민은 오랜 군부 독재를 경험했다. 그런 군부를 끝장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 5·18이었다. 비록 열흘 만에 진압됐지만, 5공화국 신군부의 ‘살육’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5월 광주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지키려 생명을 내걸었다. 지난 30년은 그들의 핏값으로 제도를 완성하는 시간이었다. 민주주의를 간단히 말하면 인권의 제도화 아닌가.
민주인권평화센터가 주목하고 있는 5·18과 광주의 ‘가치’는 무엇인가. 30년 전 광주 시민들은 시민군을 편성해 수많은 무기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건의 강력사건이 없었다는 것은 단적으로 도덕성을 보여준 사례다. 1980년 광주의 5월은 공포와 유혈로 정의되지만, 한편으로는 ‘김밥(주먹밥)’과 ‘헌혈’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해방 광주’는 인류가 소망하고 지향해야 할 자치 공동체의 모델이다. ‘반독재’와 ‘민주화’를 부르짖은 본질이 바로 그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더 관심 갖고 공부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은 5·18이 어느 길로 갈지 갈림길에 선 중요한 시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스 혁명처럼 의미가 더욱 확대될지, 축소되고 간신히 기억되는 수준으로 갈지 갈림길에 서 있다.
5·18이 갈림길에 서 있다고 보는 이유는? 1980년 5월18일 이후, 광주의 5월은 한국 민주화의 지렛대 역할을 해왔다. 1987년 6월 항쟁의 원동력도 광주민주항쟁이었다. 1997년에는 5·18이 국가 공인 민주화 운동이 됐다. 그 과정을 견인해온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 10년의 핵심은 ‘국민이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등장하면서 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 국민들이 검찰·경찰·국정원 등 권력 기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곤봉과 군화가 아닌 다양한 방법으로 국민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있다. 남북 관계는 경색되고, 양극화는 날로 심해지고 있다. 이는 ‘5월 정신’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후퇴할수록 5·18의 의미와 역할이 부각되지 않겠나라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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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기념재단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은 1980년 5월 광주를 순식간에 공포로 몰아넣었다. | 지난 4월12일 광주를 방문한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가 5·18 당시 미국 정부 기밀문서 공개를 언급했다. 당시 광주 사람들은 (작전권을 갖고 있는) 미국이 살육은 막아 줄 것이라 간절히 기대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신군부의 총알과 대검이 일반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국민을 죽인 것이다. 문서 내용이 어느 선까지 공개될지 모르지만, 당시 미국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또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최종 발포 명령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2010년, 전남대의 봄은 평화로웠다. 우거진 녹음은 저마다 푸르렀고, 환한 햇살은 교정 곳곳에 골고루 쏟아져 내렸다. 교정을 거니는 학생들은 ‘그대, 흩어진 꽃잎을 다시 금남로로!’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올려다보다가 무심히 그대로 지나쳐 갔다. 교문 앞에는 1980년 5월 빼곡했던 학생과 군인 대신 5·18 30주년 '행사'를 알리는 플래카드만이 나부끼고 있었다.
이른바 5월 단체들이 관변화되고, 5·18 행사 또한 ‘의무 방어전’하는 느낌도 든다. 5·18이 ‘사태’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는 30년 세월 속에서 단체들의 역할이 변한 게 사실이다. 단체 내부에서도 자신들의 성격과 방향을 놓고 ‘교통정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남대에서는 매학기 ‘5·18과 민주 인권’이라는 교양과목을 개설해 수업하고 있다. ‘실업자 양성소’라 불리는 대학, 철학이나 가치에 관심을 두기 힘든 조건이지만 강의 때마다 교실이 가득 차고 있다.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젊은이들이 최소한 이런 노력이라도 했으면 싶다. 장애를 갖지 않은 사람이 장애인을 이해하기 위해 장애 체험을 하듯, 우리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서 민주주의 '이전' 역사를 살펴보는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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