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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상식 팩트 체크] (46) 교무금은 십일조다?
'공소전'에서 유래한 신자들의 기금
전례력으로 한 해의 시작인 대림시기가 왔습니다. 대림시기하면 아무래도 성탄을 위한 여러 준비가 떠오르는데요. 우리가 준비해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교무금 책정입니다.
교무금은 ‘교회 유지를 위해 신자들이 의무적으로 교회에 내는 봉헌금’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신 분들은 교회 유지를 위해 의무적으로 납부하는 예물이라 하면 떠오르는 규정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바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수입의 10분의 1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규정인데요. 아브라함은 멜키체덱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줬고(창세 14,20 참조), 야곱도 하느님께 10분의 1을 바치겠다고 서원합니다(창세 28,22 참조). 이 전통은 구약성경에 십일조 규정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도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며 언급(루카 11,42 참조) 하시지요. 십일조는 사제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되곤 했습니다.
교회법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교회가 하느님 경배, 사도직과 애덕의 사업 및 교역자들의 합당한 생활비에 필요한 것을 구비하도록 교회의 필요를 지원할 의무가 있다”(222조 1항)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무금만이 이 활동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외국에는 교무금 제도가 없습니다. 유럽 국가에서는 ‘종교세’의 형태로, 미국 등의 나라는 기부금이나 주일헌금으로 교회 운영비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는 “신자들은 주교회의나 교구의 규정에 따라 교무금, 주일헌금, 기타 헌금과 모금 등으로 교회 운영 활동비를 부담해야 한다”(165조)고 밝히고 있는데요. 교무금만이 아니라 여러 헌금 등도 교회 운영을 위해 활용될 수 있습니다. 또 교회는 교회 운영비 외에도 2차 헌금이나 모금 등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성금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무금과 십일조가 동일하다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교무금은 우리 신앙선조들의 공소전(公所錢)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사제가 부족하던 시절, 공소에 모여 기도하던 신자들이 공소와 공소공동체 운영을 위해서 모았던 기금입니다. 이 전통이 1931년 ‘전조선지역 시노드’를 통해 교무금 제도로 정착됐습니다. 교무금이라는 제도에는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사제 없이도 신앙공동체를 꾸려나갔던 우리 신앙선조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던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무금 액수를 규정하지도 않고, 미납한 신자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갑작스런 사정이나 수입 감소로 교무금을 내지 못하는 이들을 배려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만 자신의 수입에 10분의 1에서 30분의 1 정도를 책정하자고 제안합니다. 적어도 한 달 중 하루의 수익은 하느님께 봉헌하자는 취지입니다.
다만 교무금은 수입을 기준으로 책정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쓰고 나서 남은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입 즉 하느님께 받은 것 중 일부를 봉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교회] 대림 제1주일이 안드레아 사도 축일(11.30)과 가까운 주일로 정해지는데,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대림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을 기념하는 주님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고, 세상의 시간이 끝날 때 ‘두 번째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전례주년과 전례력에 관한 일반규범 39항) 대림 시기의 시작일인 대림 제1주일은, 11월 30일이 주일이면 이날로 정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이날과 가장 가까운 주일로 정해집니다.(전례주년 40항) 11월 30일은 성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이며 대림 제1주일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요한 복음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이미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주님을 보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36)라고 외쳤을 때, 함께 있었던 두 명의 제자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 외침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 하룻밤을 묵은 뒤 그분을 메시아로 확신하였고, 형 베드로에게 ‘메시아를 만났다’(요한 1,41)고 소개하며 함께 제자가 됩니다.
이처럼 안드레아는 메시아가 언제 오실지 몰랐으나 분명히 오신다는 사실을 믿고 희망하고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메시아를 만났을 때 그 기쁨을 형제와 나누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열심히 그리고 기쁘게 기다리는 때”(전례주년 39항)인 대림 시기의 모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안드레아 사도 축일과 가까운 주일에 대림 시기를 시작하는 관습에 담겨 있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전례력으로 새해를 맞이하면서, 첫 번째 부르심을 받은 성 안드레아 사도와 같이 우리도 용기있게 응답하며(마태 4,18-20) 한 해를 시작합시다.
[전례 일반과 미사의 Q&A] (20) 대림 시기에 대해서
대림 시기는 무엇인가요?
12월이 되면 길거리에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북적입니다. 그리고 북적이는 길거리에서 축제를 위한 화려한 장식을 어렵지 않게 마주하게 됩니다. 크리스마스는 종교인이든,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이들이든, 누구에게나 하나의 축제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세상의 화려함과는 달리 성탄을 준비하기 위해 차분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자고 초대합니다. 동시에 교회는 “성탄”의 준비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재림하실 구세주를 기다리자고 촉구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세상의 분위기와는 달리 더욱 차분하고 경건하게 성탄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림 시기는 두 가지의 시기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 시기는 대림 1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절망과 두려움에 빠진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절망을 희망으로, 두려움의 어둠을 희망의 빛으로 바꿔주시는 그분을 맞이하기 위한 묵상으로 초대합니다.
두 번째 시기는 12월 17일부터 12월 24일까지입니다. 이 시기는 구체적인 성탄을 준비하도록 초대합니다. 매일미사책을 보면 아시겠지만, 12월 16일까지는 “대림 제3주간 월요일”이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12월 17일부터는 “대림 0주간 0요일”이라는 표시가 사라지고 세상의 달력이 표시됩니다. 이는 대림 시기의 구분을 전례력으로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대림 시기의 전례적인 상징으로는 “대영광송을 바치지 않는 것(사순 시기처럼 대영광송을 바치지는 않지만 알렐루야는 노래합니다.)”, 제단에 “대림환”이 있습니다. 특별히 대림환에 관해서 설명해 드리자면, 대림환은 월계수나 전나무 또는 비슷한 나뭇잎으로 엮어 만든 화환에 네 개의 초로 장식한 것을 말합니다. 네 개의 촛불은 대림 시기 4주간 동안 차례로 켬으로써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탄생이 점점 다가옴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많은 신자분이 대림초의 순서에 대해서 묻곤 하시지만, 전례법적으로 정형화된 답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부분으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이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분심을 일으킬 수 있으니 만드는 방법, 초를 켜는 방법보다는 초를 켤 때마다 우리의 마음가짐을 주님께로 두는 것이 대림환이 갖는 목적성에 더욱 합당할 것입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며,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다음 구절을 기억하고 준비했으면 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4-5)”
[교회 상식 팩트 체크] (45) 제2경전은 외경(外經)이다?
동등한 권위 지닌 정경(正經)으로 인정
2005년 「성경」이 발행되기 전까지는 「공동번역 성서」를 썼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성경」과 목차가 조금 다른데요. 몇몇 성경들을 ‘제2경전’이라는 목록에 따로 모아둔 점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개신교 신자분들은 이 제2경전을 ‘외경'(外經)이라 부릅니다. 외경이라 하면, 한자로는 ‘성경(經)의 바깥(外)’이라는 의미인데요. 그렇다면 제2경전은 성경이 아닌 걸까요? 아니면 성경이더라도 조금 덜 중요한 성경인 걸까요?
제2경전은 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상·하권,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그리고 에스테르기 일부와 다니엘서 일부에 해당하는 성경입니다.
이 성경들은 구약성경에 해당하는데요. 초대 교회 시기에는 두 종류의 구약성경이 있었습니다.
먼저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히브리어로 된 성경과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칠십인역’이라 부르는 그리스어 번역본 성경이었습니다.
그리스어 성경을 ‘칠십인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경 번역에 얽힌 전설 때문입니다. 기원전 3세기 경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이스라엘에서 70명(혹은 72명)의 번역가를 선출해 구약성경을 번역했는데, 이들이 각각 번역한 성경들이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이 번역됐다는 전설입니다.
그런데 이 칠십인역에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없는 성경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제2경전이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히브리어를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편지나 복음서를 그리스어로 작성했습니다. 이때 구약성경도 인용했는데 대부분이 칠십인역이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어 생활권에 살았기 때문에 칠십인역이 구약성경의 기준이 됐고 제2경전을 성경으로 사용했습니다. 교부이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그리스도교 교양」 등의 책에서 성경 목록에 제2경전도 포함시켰습니다.
하지만 제2경전은 히브리어 성경이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논란이 있었습니다. 원래 없던 성경을 후에 만들어낸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었지요. 특히 개신교가 갈라질 당시 개신교는 이 의혹을 내세우며 제2경전을 외경으로 보고 성경에서 제외했습니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1546년 트리엔트공의회에서 「수용해야 할 성경과 성전에 관한 교령」으로 교회가 오래 전부터 성경으로 받아들여 온 제2경전을 포함한 신·구약성경을 정경(正經)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1947년에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사해 인근 쿰란동굴에서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에 쓰인 히브리어 구약성경 사본들이 발견된 것인데요. 이때 발견된 성경 중에는 그동안 토빗기나 집회서 같은 제2경전들도 있었습니다. 제2경전도 히브리어에서 번역된 성경이라는 것이 밝혀진 순간이었습니다.
제2경전은 외경이 아니라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정경입니다. 그렇기에 미사 전례 중에도 제2경전 역시 봉독됩니다. 교리면에서도 제2경전에는 천사, 연옥 등 교회의 여러 교리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제‘2’경전이라 불린다고 중요도도 두 번째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다.
[건강한 법] 사랑과 일치 그리고 친교의 나눔인 ‘평화의 인사’
미사 때 가장 목소리가 크고 밝게 느껴지는 부분은 아마도 파견의 응답인 “하느님 감사합니다!”이며, 그 외 한 곳을 더 선택한다면, 그것은 “평화를 빕니다!”일 것입니다. 이때만큼은 모든 신자의 얼굴에 미소와 생기가 가득합니다. 이처럼 분위기를 돋우는 ‘평화의 인사’를 미사 시작 때 한다면 좋을 텐데, 왜 주님의 기도 후에 나누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우리는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것일까요?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제자들에게 ‘제단에 예물을 바치는 것보다 형제들과 화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참조 : 마태 5,23-24). 이러한 이유로 초대 교회는 이 예식을 예물봉헌 전에 실행하였습니다. 동방교회는 지금도 이 전통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방교회에서는 대 그레고리오 교황(540-604)에 의해 평화 예식이 지금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이유는 평화 예식이 주님의 기도에서 나타나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청원의 확장이며, 영성체를 위한 준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의 기도를 영성체를 위한 합당한 마음의 준비라고 받아들였던 것처럼, 우리가 영성체로 주님과 일치하려면 우선 서로 용서하며 화해하여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평화 예식은 주님의 기도 다음에 자리하여 우리의 영성체를 직접적으로 준비시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셨던 평화 인사를, 사제는 교우들에게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하며 주님이 주신 평화를 그대로 전합니다. 교우들도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말하며 사제에게도 같은 평화를 전합니다. 이어서 사제는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라고 말하며 평화 인사를 권합니다. 교우들은 “평화를 빕니다.”라고 외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여기서 나누는 ‘평화’는 싸움이나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느끼는 평화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구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얻은 평화이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치와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평화입니다. 그리고 이 평화는 가벼운 절이나 악수 및 포옹 등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합니다. 한국에서는 “평화의 인사로 가벼운 절을 한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82항)라고 정하였습니다. 따라서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이 평화가 단순한 인사나 안부를 묻고 나누는 시간이 아니라, 사랑과 일치 그리고 친교의 표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자리에 없지만, 여러분에게 화해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그 사람을 생각하며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것도 좋습니다.
[기도하는 교회] 연중시기 마지막 주일인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교황 비오 11세는 1925년 교서 「첫째의 것」(Quas Primas)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Domini Nostri Iesu Christi Regis) 축일을 제정했습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나고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존경심은 사라지고 세상에 대한 교회의 권리는 거부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초래된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으로부터 그리스도와 그분의 거룩한 계명을 몰아냈기 때문이며, 세상이 주님의 통치 아래에 있지 않는 한 국가 간의 항구한 평화와 미래의 희망은 없을 것입니다.(Quas Primas 1항)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께서 임금이심을 인식할 때 사회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평화와 조화라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Quas Primas 19항)
이후 교황 바오로 6세는 1969년 자의교서 「파스카 신비」(Mysterii Paschalis)를 통해 이 전례일의 명칭을 현재와 같이 바꾸었으며, 10월 마지막 주일에 ‘축일’로 지내던 것을, 교회의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 직전 주일이자 연중시기 마지막 주일로 옮겨 ‘대축일’로 지내도록 했습니다.
교회는 전례주년의 마지막 주일을 지내면서, 억압과 착취의 왕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마태 20,28) 그리스도왕을 섬기며 살았는지 되돌아봅니다. 아울러 천상교회를 향해 순례 중인 지상교회의 최종 목적지이자 유일한 종착지는 천상과 지상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합니다.
[교회 상식 팩트 체크] (44) 미사의 공식 신경은 사도 신경이 아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공식
우리는 주일미사마다 신앙의 핵심을 표현한 신앙고백문, 신경(信經)을 바치며 우리 신앙을 고백합니다. 신경이라 하면 먼저 ‘사도 신경’을 떠올리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사도 신경을 외우고, 또 많은 본당에서 미사 중 사도 신경을 바치곤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참 친숙한 신경입니다. 그런데 미사의 공식 신경은 따로 있다는 사실 아시나요? 바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입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통해 결정된 교회의 공식 신경입니다. 사도 신경과 비교해 보셨다면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더 ‘길다’는 점을 발견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냥 긴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곰곰이 살펴보신다면 다른 내용들은 대체로 비슷한 반면, ‘예수님’과 ‘성령님’에 관한 내용이 특별히 더 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공의회인 니케아공의회와 그 다음 열린 콘스탄티노폴리스공의회가 열릴 당시에는 예수님과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케아공의회에서는 예수님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점을, 콘스탄티노폴리스공의회에서는 성령님이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는 주님이라는 점을 천명하면서 우리의 신앙,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분명히 고백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믿음은 가톨릭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의 믿음이기에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다른 그리스도교들에서도 고백하는 신경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이렇듯 “초기의 두 세계 공의회에서 나온 신경”인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큰 권위를 가진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95항) 우리 신앙선조들이 사용하던 「천주성교공과」의 미사경의 경우에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만 수록돼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미사 경본에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대신에, 특히 사순 시기와 부활 시기에는, 이른바 사도 신경 곧 로마교회의 세례 신경을 바칠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신경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신경은 사도들의 신앙을 충실히 요약한 신경인데요, 사도들의 숫자처럼 12가지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사도좌가 있고 그곳에서 공적인 결정을 내렸던 로마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신경”이라고 사도 신경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95항) 사도 신경 역시 오랜 역사 속에서 교회에 내려온 중요한 신경입니다.
그러니 미사 중 사도 신경을 사용하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미사의 공식 신앙고백문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라는 점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교회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단지 길다는 이유로 사도 신경을 선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합니다.(‘새 미사전례서 총지침(2002)에 따른 간추린 미사전례지침’)
[전례력 돋보기] “저회를 위하여 벌어주소서.” -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11월은 전례력의 마지막 달이자 바쁘게 달려온 한 해가 저물어 가는 계절입니다. 자연스레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마무리, 마지막, 그리고 죽음을 떠올리게 되는 이 11월에 교회는 위령 성월을 지냅니다. 한 달 내내 먼저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기리는 시기이지만 11월의 첫날과 둘째 날은 더욱 특별합니다. 바로 ‘모든 성인 대축일’과 ‘위령의 날’을 지내게 되는데, 이 날들을 통해 천국에 있는 성인, 단련을 받는 연옥 영혼, 그리고 아직 지상 여정길을 걷는 우리가 연결되어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를 청하는 아름다운 ‘성인들의 통공(通功)’ 교리가 가장 명확하게, 그리고 가장 간절하게 드러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달에는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순교자 공경에서 성인 공경으로
초세기부터 교회는 순교자의 순교일을 마감된 지상의 삶 대신 하늘나라에서 새로 태어나는 탄생일, 곧 천상 탄일(Dies Natalis)로 기념하여 왔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공경에 대한 증언은 156년경으로 추정되는 터키(현, 튀르키예) 스미르나 지역의 주교였던 폴리카르푸스의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백부장은 유다인들의 완고함을 알아채고, 폴리카르푸스의 시신을 가운데에 놓고 그들의 관습에 따라 화장하였습니다. 그 뒤 우리는 보석보다 더 귀하고 금보다 더 값진 그의 유골들을 모아 적당한 곳에 묻었습니다. 우리는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차 가능한 한 그곳에 모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전에 투쟁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앞으로 순교할 사람들이 단련하고 준비하도록, 그가 순교한 날을 기념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폴리카르푸스,『편지와 순교록』, 18,1-3)
스미르나의 신자들은 이교인 관습으로 불태워진 폴리카르푸스의 유해를 특별한 존경과 함께 적당한 곳에 모시고 자주 그곳에 모였으며 특별히 그의 순교일을 기념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순교자 공경은 한 순교자의 무덤 주변에서 시작되어 지역적인 성격을 띄었었지만 점차 순교자가 증가하고 그 명성이 다른 지역에 전파되면서 동서방 교회를 가릴 것 없이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순교자들과 그들의 기념일을 기록한 달력이 등장하였고, 순교자의 무덤과 거리가 먼 곳에서도 그를 기리기 위해 유해의 일부를 모시고 공경하는 관습도 생겨났습니다. 나아가 공경하는 이들의 범위도 점차 확대되어 신앙을 지키다 살해 당한 이들 뿐만 아니라 고초를 겪거나 유배를 간 이들도 포함하게 되었고, 박해가 끝나고 순교할 기회가 없어지자 순교자에 부합하는 신심 깊은 이, 곧 위대한 주교나 수도자, 그리고 동정녀, 금욕을 실천하는 이 등 성덕이 뛰어난 신자들도 공경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순교자와 성인 공경은 초대 교회에서 이미 자리잡은 성모님과 사도들의 공경에 더해 신자들의 신심 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런 대중 신심을 반영하듯, 보니파시오 4세 교황(재위 608-615)은 609년에 로마 시내의 이교 신전이었던 판테온(Pantheon, 모든 신들의 신전)을 ‘순교자들의 성모 성당(Santa Maria ad Martyres)’이라는 이름으로 성모님과 모든 순교자에게 봉헌하였습니다. 모든 이교신을 기리던 장소에서 이제 모든 성인을 기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 성전 봉헌을 통해 특정한 성인 뿐 아니라 천국의 모든 성인을 함께 기리는 전통이 공식화되었습니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그레고리오 3세 교황(재위 731-741)이 성 베드로 대성당 내에 모든 성인을 기리는 경당을 봉헌하면서 그 기념일을 11월 1일로 정했고, 이후 그레고리오 4세 교황(재위 827-844)이 이 축일을 서방 교회가 모두 기념토록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인 대축일은 그 역사가 천년도 넘은 아주 전통 깊은 대축일이며 그만큼 교회가 일찍부터 성인들을 뜨겁게 공경했음을 증언합니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모든 성인 대축일에서 기리는 성인은 천국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모든 이를 말합니다. 이들은 더이상 우리가 그분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이미 천상 행복을 누리는 분들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순교자들은 이미 그들이 겪은 고난으로 인해 완전함에 도달하였기에 더이상 정화가 필요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우리들의 변호인이 된 것이라 가르칩니다.(「설교」 285,5참조)
이런 관점에서 모든 성인 대축일의 의미도 분명해집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에 성인들의 공덕을 기리고 칭송하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이 축제의 핵심은 그러한 모범적인 믿음의 삶의 결과 행복하게 예수님 결에 머무시는 성인들이 우리와 동떨어져 있지 않고 일치되어 있음을 기억하는데 있습니다. 나아가 이날은 성인들이 지상의 험난한 나그네 길을 걷는 우리가 각자 겪는 어려움을 잘 받아들이고 천국의 행복에 다다를 수 있도록 우리의 보호자, 변호인, 전구자가 되어 주심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며 더욱 간절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하고 그분들의 기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와 더 친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천상의 성인들의 전구와 형제적 배려로 우리의 연약함이 많은 도움을 받기 때문입니다.(「교회헌장」 49항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