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에는 거의 백양사에 다닌다. 대부분 모든 사람들은 성당, 교회, 절 같은 종교시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데 나는 성격상 지정되고 통제된 장소에서의 거부감 때문에 종교 생활을 못한다. 자유롭고 싶은 특성 때문에 조금이라도 억압받는다는 느낌을 받기 싫어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친구가 줄어드는 것도 한 이유지만 그러니 별 수 없이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다. 오늘은 누구라도 좀 같이 가고 싶어 손 전화를 들었다. 성당1명 교회2명 3명의 친구는 제외하고 나머지 친지들 중 골라 5명에게 통화해보았으나 모두에게 퇴자 당하고 혼자 나섰다. 다들 갈 곳이 있고 바쁘게 산다면 다행이다. 기대했던 마지막 친구 하나가 버스가 얼른 안 와서 열차 출발 시간에 맞추기 어려우니 혼자 다녀오라고 전화가 왔다.
‘다시는 내가 먼저 전화 하나봐라’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무궁화열차 9시44분 7호차33석으로 찾아가다가 71석에 앉아 충전기를 꺼내 태블릿PC에 꽂았다. 노는 시간이 아까워 유튜브 강의를 듣고자 채널을 고른다. 평소에 좋아하는 역사 강의다. 설민석과 배기성의 역사 강의는 들을 만하다. 본인들이 잘 정리하여 시청자가 알아듣기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는 입담에 호감을 갖게 된다. 오늘의 강의주제는 제주 4.3이다. 설민석 강의를 30분정도 들었고 이어서 정규재TV로도 들었다. 똑같은 주제였지만 깊이와 맛은 달랐다. 보이는 것만 보고 맛을 가미한 상품성 강의와 보이지 않은 곳까지 다시 말하면 사건의 배경과 전후의 동기와 결과 등 역사적 판단을 가미한 학술적 가치가 느껴지는 강의는 후자 정규재 강의였다.
상품성강의의 달인 설민석 강의에서는 남로당과 좌익이라는 인식이 별로 느낄 수 없었고 현재 제주도민 대부분들이 흥분하고 있는 민간인학살 책임자 역사의 비극에 중점을 둔 것 같이 들렸고 정규재는 선배어른답게 전후역사부터 짚고 넘어간다. 일제말 일본유학생들 뿐만 아니라 지식인 60%이상이 사회주의 환상에 젖어 있었고 제주도에도 이미 남로당계열의 건준위 조직이 자리를 잡았고 5,10선거를 반대하여 민중봉기를 일으켜 전국으로 확산 시키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불가피 군대를 투입하다보니 희생자가 많이 나왔는데 국가권력에 맞서 싸우겠다는 민중봉기는 필연코 대량의 희생자가 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좌파사상의 김대중 좌파정권이 특별법을 만들어 제주4.3은 새롭게 조명을 받게 되기 시작, 차기 노무현 정권 때는 처음으로 대통령이 공식 사죄를 했고 국고를 들여 어마어마하고 호화로운 추모공원을 조성하기에 이른다. 마무리된 과거의 역사 사건이 뒤집힐 때는 피해 당사자에만 명예회복이나 보상조치가 이뤄진 게 아니다. 엄청난 후유증이 뒤따른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필히 응징코자 상대에게 지나치게 승자의 지위를 확인시키려 하는 속성이 있다. 오직 조국과 민족의 앞날을 위해 국익 우선차원으로 적정선에서 상호양보하고 후일 역사의 교훈으로 넘기자고 합의하면 좋겠지만 그런 성숙한 판단에 합의하기에는 보통사람들의 수준이 많이 미흡하다.
다음으로 젊은 여자의 유튜브 강의를 들어보았다. 아직도 매듭 짓지 못한 제주 4.3은 우파의 주장이 많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진실을 바르게 알고 가자는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대한민국 건국 전에 조직된 남로당의 사주로 폭동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지서 12곳과 경찰관과 우익인사들이 습격당해 27명의 사망자가 나오니까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토벌대를 투입하니까 산속으로 숨어갔고, 양민들은 해안가로 내려오라 선무활동을 했으나 듣지 않고 산속으로 숨은 그들을 무차별 사살했으며 분명 지금까지 조사된 공식희생자는 14,235명(당시 제주도민의 인구는 281,000명)으로 나와 있고 그중 방화, 살인, 폭도로 확인된 1,300명은 추모공원에 묻힐 자격이 없는데 그들 유가족들의 입김이 오히려 훨씬 세다고 한다.
그런 내용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는 말에 전 제주도 지사를 지내신 신OO씨는 유튜브 대담에서 현재 생존자들이 있으니까 마을로 다니며 그들에게 물어보면 아주 쉽게 확인된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은 진압이 아니라 교전이었고 게릴라전이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제주4.3의 내용을 묻는 CNN기자의 질문에 ‘공산당의 폭동에 대한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자가 많이 나왔다’고 답했는데 아태재단 측에서 그런말 한적 없다. 무고죄로 고소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명백한 폭동이고 반란이고 게릴라전이었는데 현재의 진행상황을 보고 있으면 항쟁의 역사로 몰아가는 것 같다고 한다. '진실은 연착하는 기차다’, 진실은 "진실을 묻어둔 화합은 오래 못 간다" 남아공의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의 말이라고 한다.
제주4,3을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1948년4월3일 사건이 발발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할 목적으로 4개월12일간 무장폭력으로 항적하였고 그러나 동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건국되었다. 반란은 8년 7개월 17일 동안 항적하였고 1957년 4월2일 마지막 공비 오원권이 생포되므로서 제주 4,3은 완전 종결되었다고 한다.
유사한 사건으로 광주 5.18이 있다. 사건을 보는 시각이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보자면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흥분하는 측과 사건의 배경과 원인 결과의 파장까지를 분석해보는 이성적 지식층은 다르다. 전자는 지나치게 피해사실만을 강조하고 후자는 이성적으로 깊이 생각하고 연구반성 한다. 대부분이 전자에 해당하는 이들은 감성에 치우쳐 자칫 선전선동에 취약하여 행동으로 번지고 또 다른 사건을 저지를 수도 있다. 항간에 떠도는 말로 제주 4.3희생자는 3만 명이라고 하고 3.1절 기념대회 하던 날 관덕정 앞에서 기마병의 말발굽에 치인 어린이는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녔던 동창생의 말에 의하면 백혈병으로 죽었는데 마치 그날 말발에 치어 죽은 것처럼 묘사되고 있으며, 누군가 죽창으로 말의 항문을 찌르니까 순간적으로 말이 놀라 뛰는 바람에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첫댓글 남로당 제주도당은 5,10선거를 반대하고 지하선거를 통하여 김달삼(실명이승진)을 대표로 선출 주모자급 6명이 공산당 해주대회에 참석 52,350표로 당선보고를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는 명백히 대한민국 정부에대한 반란이라고 말한다. 10월13일 김달삼의 후임으로 이덕구가 선전포고를 했고 이승만 정부는10월17일 계엄령을 선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