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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 당시 종려주일에 해당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에 대해 그 자리에 있었던 수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환영하며 기뻐하며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종려주일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우리들에게 있어 이 날은 우리의 죄값을 대신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 날은 기쁨의 환영일이 아닌 “고통을 위한 환영일”, “죽음을 위한 환영일”입니다. 수많은 인파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며 환호하며 즐거워하지만 정작 그 의미를 알고 있고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모르는 유대백성들을 보며 가슴아팠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종려주일하면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까? 종려주일을 맞이한 우리들에게 이 날은 기쁨의 날입니까? 슬픔의 날입니까?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할 때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며 이 종려주일을 무의미하게 무감각하게 보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 그리고 이제 내일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 고난주간을 통해 정말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제대로 묵상하며 참 구원을 위한 고통, 참 천국을 위한 인내를 배우는 은혜의 날을 보내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예배시간 말씀전에 불렀던 찬송가 147장 『거기 너 서 있었는가 그 때에』라는 찬송은 흑인 영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찬송가입니다. 노예제라는 것이 존재했던 시대에 미국에서 살던 흑인들은 노예생활을 하며 고통을 당할 때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찬송을 부르면서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는 그 상황에 자신들을 대입시키며 자신들도 이 고통의 순간을 이겨내며 주님이 십자가앞에 나아갈 때 언젠가는 자신들도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을 기대하며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찬송의 가사처럼 지금 이 시간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내가 십자가에 박혀 죽어갈 그 때에 거기 너 나와 함께 같이 있었냐?”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려 죽어가시는 그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누구도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두려움을 떨면서 숨어서 자신의 몸을 보전하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했습니다. 근처에서라도 어떻게 되는 상황인지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비참하고 처절한 그 십자가를 그들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의 제자들과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이 십자가는 실패의 상징, 죽음의 상징,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뜻하는 헬라어는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입니다. 그 의미는 ‘불행한 나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 형벌은 원래 베니게, 카르타고, 이집트, 그리고 로마에서 사용한 사형 도구였습니다. 죄수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기 전에 먼저 채찍질을 당하였습니다. 엄청난 매질을 당한 후에 십자가에 매달려 온 몸의 피를 다 쏟아내고 죽을 때까지 매달려 있다가 서서히 죽어가게 만드는 사형도구였습니다. 이런 조롱의 상징, 멸시의 상징, 실패를 보여주는 십자가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재조명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드러내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또한 갈라디이서 6장 14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십자가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 사도 바울은 왜 이렇게 강조할까요?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지셨던 십자가가 단지 그 당시 죄인을 처형하는 사형수단이 아닌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복음의 의미가 있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 또한 붙잡고 살아가야 할 십자가를 발견하고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의 의미와 고난을 느끼며 이 고난 이후에 우리가 맞이하는 부활 영광의 순간까지 주님과 함께 인생의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함께 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여주시는 지혜, 세상에는 자신의 지혜대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9,20절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가 가지게 되는 지혜중에 좋은 지혜와 나쁜 지혜가 있습니다. 좋은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로 구원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좋은 지혜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시는 ‘말씀을 통한 지혜’도 좋은 지혜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에서 지혜있는 사람이 말을 잘 하고 사람들을 잘 설득하며 언변의 기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바울이 말하는 지혜속에서 말의 지혜는 나쁜 지혜인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에 있어 ‘말의 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복음의 장애물로 인식합니다. 하나님은 지혜자의 지혜, 총명한 자의 총명을 가려 버리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 율법학자로부터 지식을 배우며 그 지혜를 터득하여 율법학자의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랍비들의 지혜나 헬라 철학자의 지혜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지혜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지혜롭다 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자랑합니다. 문제는 고린도 교회조차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고 자신에게 세례를 준 사람을 자랑하며 그 자신들의 은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 그들이 살던 고린도라는 사회의 분위기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라는 지역은 헬라철학의 영향을 크게 받는 도시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하지만 사실 세상의 철학, 헬라의 가치관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당시 헬라 세계를 지배하는 대표적 철학사조는 필로소피아라고 불리는 가치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필로소피아라는 단어의 의미는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지혜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지혜를 추구하며 지혜를 인정받으면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지혜를 발견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철학적 사고를 하며 논쟁을 벌이며 철학적 논쟁을 통해 지식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철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피타고라스가 “나는 단지 지혜를 사랑할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헬라철학은 지혜를 숭상하며 자기 생각대로 논쟁하며 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온갖 말들을 쏟아내면서 점점 궤변적인 변론이 팽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은 궤변론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헬라철학의 영향이 고린도 교회에도 미쳤는데 여기에 아볼로파가 앞장섰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8,19절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사도 바울은 나쁜 지혜인 세상 지혜가 세상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리고, 그 ‘세상 지혜’의 공허한 어리석음을 밝혀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지혜가 공허하고 어리석다’ 말한다고 해서 그게 너무나 멍청하고 둔해서 상대하기 아주 쉬운 상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세상 지혜는 결코 간과할 대상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세상 지혜’는 십자가에 담긴 능력을 헛되게 할 만큼 크게 위력적입니다. ‘세상 지혜’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복음의 핵심을 교묘하게 공격하는 적의 정체를 밝히는 일입니다. ‘세상 지혜’를 판별하여 분리시키는 데에 실패한다면 우리들의 진리와 구원의 복음은 하찮고 공허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지혜와 총명은 존중받고, 가치가 있고, 그것을 얻으려고 많은 시간과 대가를 치릅니다. 특히 고린도에서 지혜와 총명은 더욱 선망의 대상이고, 귀중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고린도라는 그 시대 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게 귀중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지혜와 총명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마치 돈으로 영생 주시는 구원을 살 수 없고, 어떤 사람들이 우러러볼 만한 직업을 가지게 되어도 그 직업이 우리를 구원해줄 수 없고, 최첨단 AI로봇을 만들어도 구원받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혜자라도, 선비라도, 가장 뛰어난 언변술을 가진 사람이라도 십자가 앞에서는 미련한 것에 불과합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헬라인은 최고의 지성인을 자처하고 이를 인정받게 하는 것이 지혜였습니다. 그들의 스승들인 철학자들의 지혜는 모든 민족들을 무지에서 해방시키고 지혜의 빛 아래 살게 하는 구원과도 같았습니다. 이러한 지혜에 대한 자부심은 모든 나라와 민족을 지배할 명분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지혜를 통해 그들은 오히려 그들의 인간의 존재에 대해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했습니다. 참다운 구원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떤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는 세상에서 똑똑한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있다고 자신하십니까?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과 대화할 때도 절대 주눅들지 않고 말로써 싸워 이길 자신이 있다고 생각해서 나는 지혜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수 있다면 정말 우리가 진짜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드십니까? 그렇게 따지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가르치는 예수님은 완전한 실패자,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고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십자가는 절대 구원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아닌 정말 하나님 주시는 참된 지혜, 거룩한 지혜, 세상의 모든 사상을 부숴뜨리는 지혜를 지닌 십자가를 발견하고 십자가 지혜를 덧입고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의 지혜가 아닌 예수님의 지혜, 십자가의 지혜를 배우시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여주시는 지혜, 둘째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십자가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기록된 ‘십자가의 도’라는 단어를 원문인 헬라어로 살펴보면 ‘ Ὁ λόγος γὰρ ὁ τοῦ σταυροῦ.(호 로고스 가르 호 투 스타우루)’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악과 죄의 결과에 대하여 십자가로 개입하셔서 구원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고린도에 익숙한 지혜자들, 즉 철학적 사고를 추구하는 지식층들의 기본 사고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들은 말이 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서로 논쟁하며 상대가 더 이상 뭔 말을 하지 못하면 자신의 지식이 더 강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의 지혜 σοφίᾳ λόγου(소피아 로구)’를 강조했습니다. 세상의 지혜자들에게 ‘복음은 어리석은 자들의 미련한 주장’에 불과하였습니다. 로마시대 모든 사람들이 알기에 십자가는 가장 수치스럽고, 잔인하며, 고통스러운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한 ‘예수’라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는 주장은 듣는 사람들에게 결코 복음이 아니라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의 허튼소리로 들렸던 것입니다. 수치와 모욕의 상징이며 사형틀로 쓰이는 십자가가 구원의 표식이라는 말은 ‘지혜’를 추구하던 헬라인들에게 그 어떤 말보다도 어리석기만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치욕스러운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와 곤경에 처해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십니다. 믿고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는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참된 지혜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23절을 다시 같이 읽겠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자신의 신학적인 관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찬송가 268장은 십자가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노래하고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 눈 보다 더 희게 맑히는 것 보혈의 능력, 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무시와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에서 처참하고 흘리셨지만 그 보혈의 피는 능력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능력을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외에 결코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죄 사함의 능력과 구원함의 능력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분명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무슨 구원자이냐?”고 세상 사람들이 말할 때 우리는 “그 십자가의 피만이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죄없으신 예수님을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갚아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십자가는 무능력의 상징일 것이고 처참한 죽음의 상징일 것입니다. 헬라인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논리, 쓸모없는 가치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삼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4,25절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헬라인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자로 부르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러 구원하신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당시 지식층이라고 자부했던 그리고 세상의 지혜를 소유했다라고 자랑했던 유대 랍비나 철학자의 지혜로운 언변이 아닌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었던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게 하셨고 그들을 통해 인생이 변화되도록 만드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구원을 얻는 지혜를 분명히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뭔가를 해서 구원을 얻고 내가 뭔가를 찾아내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지혜, 세상의 철학, 세상의 종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뭔가를 찾아 득도하고 자기 스스로 뭔가를 위해 노력해서 이익을 얻고 자기 스스로 뭔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서 어느 위치에 이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으로 얻어질 것은 세상의 지식, 세상의 지혜이지 영원한 지혜가 될 수 없고 완전한 구원을 이룰 수 없고 참 생명은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미련하다’ ‘멍청하다’ ‘무식하다’고 욕하며 무시한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의 그 길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예수님만이 참 생명이라는 사실, 예수님만이 참 구원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여주시는 지혜, 십자가를 발견하면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의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스스로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땅에서 수많은 지식이 퍼져있고 이제 과학이 발달해서 온 우주의 세계까지 정보로 통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초테크노피아의 시대가 왔습니다. 온갖 인터넷정보와 AI를 통한 각종 지식을 순식간에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가 창업한 인공지능 기업 OPEN AI가 지난해 11월 30일 인간과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지능형 채팅로봇서비스(챗봇)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서비스를 일명 챗 GPT(Chat GPT)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인공지능이 인간이 각종 데이터를 입력시켜주면 그것을 다른 서비스를 받는 사람이 찾아내어 정보를 얻는 개념이었다면 이 챗 GPT라는 서비스는 1750억 개의 매개변수를 이용해 인공지능로봇 자체가 필요한 정보를 찾아 요약하고 학습하고 각종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인공지능이라고 합니다. 즉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는 명령도 이 인공지능이 자기 스스로 판단해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을 찾기보다 스스로 뭔가를 추구하며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이 인간의 최첨단 세계로 만들어가서 영적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만들어가고 구원이나 내세는 가치없는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돈과 지위를 삶의 능력으로 삼고 온갖 지식과 처세술을 삶의 지혜로 삼습니다. 그들이 손가락질하는 십자가, 곧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한 능력인 것입니다. 점점 이 시대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멸시하며 세상의 지식을 믿고 세상의 과학과 철학을 믿고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성공의 길이라고 강조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멸시당하고 참 종교인 기독교는 환란을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도 우리의 확고한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저와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이런 철학과 과학이 발달하고 온갖 세상의 지식이 난무하며 인공지능이 스스로 학습하며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시대에 인간이 각종 정보를 통해 세상의 지혜를 찾아가는 이런 시대가 되면 될수록 인간의 죄성은 더 커지고 정말 인간의 존재의미는 퇴색해지고 결국 무기력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무가치한 인간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시대 우리가 붙들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도퇴되고 세상에서는 무식하다고 손가락질 받을 것 같아서 이 세상의 지식을 따라가시겠습니까? 어쩌면 이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속에서 우리가 진정 의지해야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후서 12장 10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2023년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쫓아가는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세상에서 우리를 멸시하고 무시하고 우리의 신앙에 대해 미련하다고 욕하고 십자가의 삶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부질없는 짓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손가락질 할 때 오히려 이런 세상속에서, 우리의 삶속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삶을 철저히 신앙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철저한 신앙생활속에 말씀대로, 복음대로 살아갈 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겨낼 수 있는 수준의 상대가 아닌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지혜와 지식으로 이 세상을 이기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인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런 어마어마한 세상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앞에, 우리 예수님앞에, 우리 성령님앞에서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 주 예수님, 우리 성령은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 예수님의 사랑,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힘입어 세상에서 십자가의 영광을 보여주며 십자가의 승리를 보여주는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