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군조선 건국기
환웅(桓雄)
단군신화는 1938년 조선총독부가 만든 용어다.
송호수 저『단군은 실존인물이었다』
환웅은 환인의 서자(庶子)다.
적장자가 아닌 아들을 서자라 한다.
서출의 의미는 조선조에서부터다.
아비의 위(位)를 계승하는 적장자를 제외하고 분가한 서자들에 의해 방계가 이루어지는데,
단군조선[고조선] 건국기는 환웅의 분가(分家)라기보다 이동의 역사를 은유하고 있다고 보아야한다.
민족의 이동에는 전란과 천재지변 등 인간사 숱한 우여곡절이 뒤따른다.
무슨 이유로 아비 환인의 땅을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 그 땅이 좋겠다는 환웅의 의지. 삼국유사 고조선기, 단기고사(檀奇古史)에는 환인, 환웅, 왕검을 세 부자지간으로 연결해놓았다. 그러나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환웅[단웅]이 세상을 다스린 지 무려 천년이라고 했고 [桓雄天王御世, 凡闕千歲] 환단고기 신시역대기에는 환웅의 시대를 18세 1,565년이라 했다. 倍達,桓雄定有天下之號也,其所都曰神市,後徙靑邱國,傳十八世,歷一千五百六十五年。 삼국유사에는 환웅이 1908세를 살았다고 했는데, 환웅을 일인(一人)으로 보기는 어렵고, 환단고기에 기대어 환웅의 시대라고 봄이 타당할 듯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환웅은 아버지 환인이 물려준 유산, 천부인(天符印)과 함께 무리 3천을 이끌고 길을 떠나,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이르렀다.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神壇樹下 [三國遺事 古朝鮮]
환웅(桓雄),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는 모두 곰을 의미한다.
환웅의 웅(雄)
웅(雄)은 웅(熊)으로, 동모이형(同母異形)이다.
본초강목, 웅(熊)은 웅(雄)이다.
本草綱目獸之二. 時珍曰, 熊者雄也。熊字篆文象
두 글자 모두 화마(火魔)의 울부짖음 ‘웅’에서 음을 따왔다.
화마가 들을 내달리는 형상이 웅(熊)이며, 화마가 하늘 높이 치솟는 형상이 웅(雄)이다.
웅비(雄飛)가 이것이다.
그러므로 웅(雄)은 새[鳥]의 조종(祖宗)이 된다.
‘雄, 鳥父也’[說文解字]
강희자전을 보면,
웅(雄)은 고문(古文)에서 동(赨)의 뜻으로 쓰였는데, 동(赨)은 동(彤)이다.
동(彤)은 ‘火威皃’로 동(炵)과 같다.
雄=赨=彤=炵 모두 ‘불이 활활 타오르는 형상’에서 취한 글자다.
나원(羅願)의 이아익(爾雅翼)에는, 웅(熊)의 수컷이 웅(雄)이라고 했다. 熊是其雄羆即熊之雌者羆為尤猛 [爾雅翼卷十九] 웅(熊)은 웅비(雄羆)를 말한다. 비(羆)는 웅(熊)의 암컷으로 더욱 용맹하다. 그러나 시경(詩經)과 여러 고문헌에서는 웅비(熊羆)를 남자다움의 최고 상징으로 기술하고 있다. 웅과 비는 남자의 표상이다. 維熊維羆 男子之祥 [詩·小雅] 웅비지력(熊羆之力)-웅비의 힘 웅비지사(熊羆之士)-웅비의 용사 세사웅비(勢似熊羆)-기세가 웅비와 같다
熊羆皆壯毅之物 屬陽 故書以喻不二心之臣 而詩以為男子之祥也 [本草綱目 獸之二]
웅(熊)과 비(羆)는 강인하고 용맹스러운 동물이며, 양(陽)에 속한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에는 두 마음을 지니지 않은 신하에 비유되며,
시경(詩經)에서는 남자의 표상으로 삼았다.
곰은 도망치거나 포기하는 대신 물러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싸우는 위험한 적. 때문에 곰은 존경과 추앙을 받았다. [곰, 몰락한 왕의 역사] 황제(黃帝)는 유웅씨(有雄氏)다. 유웅씨(有熊氏)라고도 한다. 요즘 중국에서 한국의 곰 토템까지 중화문화에 귀속된다고 우기는 명분이 바로 황제 유웅씨[곰] 때문이다. 그러나 곰 토템은 호칭으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다양하게 파급되고 전승된 곰 관련 언어와 문화의 문제이다. 게르만의 곰이 목요일을 만들고, 맥주‘Beer'로 자리잡았듯이. 유웅씨와 동시대에 자웅을 겨룬 인물이 치우(蚩尤)로, 환단고기 신시역대기에는 14세 자오지환웅이다. 十四世曰慈烏支桓雄 世稱蚩尤天王 徙都靑邱國 在位一百九年 壽一百五十一歲[桓檀古記 神市歷代記] 이중재 저『한民族史』에는 환웅의 시대를 25세 1,530년으로 잡고 있다. 치우는 19대 계파이며, 유웅씨는 20대 계파 환웅인데, 연대를 BC 2679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곰 타령을 하던 시대, 갑골문이 나오기도 전에 황제라는 호칭이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 힘센 곰이었을 것이고, 최강의 곰 자리를 두고-남겨진 스토리텔링에 의하면- 치우와 유웅씨는 73회나 격돌하게 된다. 그중 가장 유명한 싸움이 탁록지전(涿鹿之戰)이다. 곰들의 전쟁인데, 중요한 것은 이 시기 군장(君長)들의 명칭에 ‘웅’ 즉 곰이 붙었음을 알 수 있다. 카롤루스대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전설적인 왕 아서(King Arthur)는 중세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왕. 그는 켈트 출신이며 그의 이름은 곰과 일치한다. 아일랜드어에서 곰은 ‘art' 웨일스어에서는 ‘arth' … 힘과 용기의 화신인 곰은 동물의 왕일뿐만 아니라 왕의 동물이었다. 곰이자 왕인 아서의 사례처럼, 북유럽 어디를 가든지 곰은 지배자의 심벌이자 권력의 상징, 통치의 표상이었다. [곰, 몰락한 왕의 역사] 환단고기(桓檀古記)를 한국과 북한에서는 위서(僞書)로 규정지었다.
그러나 기원전(BC)의 일을 누가 알고 누가 재단할 것인가.
애초부터 역사냐 아니냐는 논쟁자체가 우스운 것이다.
유럽에서는 이런류의 책을 사가(Saga)로 분류했다.
상고대를 다룬 정사(正史)라도 시비를 걸자면 사가(Saga)일 수밖에 없다.
문자 이전의 세계를
국가가 주도하여 짜깁기를 했으면 역사가 되는 것이고,
개인이 저서 했으면 ‘믿기 어렵다’가 된다.
『桓檀古記』임승국 번역본은『한단고기』이다.
환웅의 아비는 환인인데, 환인(桓因)은 하느님의 가차다.
‘하늘’ ‘크다’ ‘광명’의 뜻이 두루 합쳐졌다고 桓을 ‘한’으로 표기한 듯하다.
그러나 환(桓)의 원형은, 신목(神木)을 지키는 곰이다.
환웅의 환(桓)
상서 주서(尙書周書)에서, 주무왕(周武王)은 목야(牧野)의 결전을 앞두고 전사들에게 외친다.
…환환(桓桓)하기가 범 같고, 비휴 같고, 웅(熊) 같고 비(羆)와 같아라.
王曰…尚桓桓如虎如𧴀如熊如羆【尙書周書卷十牧誓】
‘용맹하다’의 뜻으로 桓이 쓰였다.
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https://ctext.org/zh] 에 올려진 상서정의(尙書正義)에는 桓이 으로 표기
되어 있다.
尙書正義
은 무(武)의 모습이며, 위엄이며, 의지이다.
剛彊理直曰武 [逸周書]
굳센 의지와 강인한 힘으로 굽은 것을 바로잡는 것이 무(武)다.
무(武)의 표현이 환(桓)인데,
송본(宋本) 광운(廣韻)에는 ‘훤훤(狟狟)’으로 표기되어 있고
狟. 大犬也,周書曰‘尚狟狟’ [廣韻]
설문해자주에는 ‘狟狟’의 가차가 ‘桓桓’이라고 했다.
叚狟狟為桓桓 [說文解字注]
강희자전에 의하면,
원래 주서(周書)에는 ‘狟狟’인데,
강희자전을 편찬할 당시에는 ‘桓桓’으로 기록되어있다고 했다.
引書尚狟狟。按今周書牧誓作桓桓 [康熙字典. 狟]
운회(韻會)와 집운(集韻)에 狟은 원래 貆이며, 맥(貉) 류라고 했다.
貆,通作狟。狢類 [韻會]
許元切 音萱 本作貆 貉類 [集韻]
‘허’와 ‘원’의 반절음. 음은 훤. 맥류.
한서고제기(漢書高帝紀) 안사고(顔師古)의 주에 의하면, 맥(貉)은 동북방에 있다.
삼한(三韓)은 모두 맥족이다.
漢書高帝紀 顏注云 貉在東北方三韓之屬皆貉類也。
그런데 훤(貆)은 맥(貉)에 속하고, 맥은 치(豸)에 속한다.
東方貉从豸 [說文解字·羊部]
치(豸)는 맹수가 사냥감을 향해 질풍처럼 빠르게 달려갈 때의 꿈틀거리는 등뼈를 형상화했다.
獸長𦟝 行豸豸然 欲有所司殺形 [說文]
그러므로 부수명이 ‘발 없는[無足謂之豸]‘인데,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맹수가 질풍처럼 달려 사냥감을 찢어발기는 모습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먹이를 죽이기 직전의 살의(殺意)를 담은[欲有所司殺形] 질풍처럼 빠른 움직임[行豸豸然].
그것이 치(豸)다.
그러므로 치(豸)는 해(解)를 뜻한다.
치우(蚩尤)의 ‘치’가 원래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생사여탈의 법(法)을 주관하는 자.
[뒤에 ‘치우와 해치(해태)’ 편으로 분리하여 상세히 기술하고자 한다]
『상서』주서에 쓰인 ‘환(桓)’의 연결어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상서정의에서 환(桓)은 무모(武貌)라 했다.
그런데 무(武)의 근원은 치(豸)다.
둘 다 압도적인 힘을 바탕으로 한, 완전 정복이다.
武. 斷也
豸. 解也.
그러므로 굽은 것을 바르게 할 수 있다.
剛彊理直曰武 [逸周書]
獬豸 能別曲直 故以爲冠. 法冠 或謂之獬豸冠 [後漢書·輿服志]
환(桓)의 부수는 나무 목(木)변으로, 나무가 중심이다.
木변에서 분리된, 선(亘)은 상하로 빙빙 돌면서 무언가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象亘回形 上下所求物也 [說文解字]
잠을 자지 않고 밤낮으로 나무를 지킨다는, 불식(不息)의 뜻이 있다.
亘古不息者 [中和集卷一]
환(桓)의 금문(金文)은 나뭇가지 사이를 선회하는 곰이다.
회(回)는 곰의 꼬리를 상형화한 것이다.
[곰의 꼬리가 지금은 뭉툭하다. 그러나 설문을 보면 상고대의 큰곰은 꼬리가 길었던 것으로 보인다.] 환(桓)은 웅상(雄常)의 단수(檀樹)와 그 수호 부족인 훤(狟․貆)이 합쳐진 의미라고 보아야한다. 환(桓)은 신목(神木)을 지키는 곰, 왕인 동시에 최고의 전사(戰士)다.
신목은 왕(王)의 나무로,
은주(殷周) 시대에는 사목(社木)이 된다.
신목과 환(桓)의 관계는 프레이저의『황금가지』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거룩한 숲속에는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그 둘레를 종일토록 내내 깊은 밤중에도 무시무시한 사람의 그림자가 배회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의 손에는 언제나 칼집에서 빼어 든 칼이 있었고,
그는 언제 적의 습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듯이 조심하여 방심하지 않고 자신의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가 경계하고 있는 자는 조만간에 그를 죽이고,
그를 대신하여 사제직을 맡게 되어 있었다.
이것이 성소의 규칙이었다.
후보자는 사제를 죽임으로써만 그 사제직을 계승할 수 있었고,
사제가 되면 자기보다 더 강한 자로부터 살해될 때까지 그 직을 보존할 수 있었다.
…
그가 누리는 지위는 사제직과 함께 왕의 칭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환웅(桓雄)은 신단수(神檀樹)를 지키는 가장 용맹한 곰이다.
신단수
단(檀)에 관해 자전을 찾아보면 나무이름으로 나온다.
백단(白檀) 또는 백단수(白檀樹)에서, 백(白)이 누락되고 단목 혹은 단수라 한다.
규원사화 단군기를 보면, 백달임금 혹은 박달임금의 한자명이 단군이라고 되어있다.
백야(白夜)가 환한 밤이듯이, 백은 희다 또는 밝음으로 풀이되어 백단은 박달이 되고, 박달은 배달이
된 듯하다.
황해도 백천(百川)을 배천이라 하는 이치다.
단(檀)은 나무의 단(亶)으로, 단(亶)은 ‘믿음을 드러내다’의 뜻이다.
그래서 각종 제의(祭儀)에 먼저 단을 마련하는 것이다.
제를 올리던 웅상(雄常)의 신목(神木)을 단목(檀木)이라 했을 것이다.
동서양 곰토템 관련 연구서들을 읽어보면 신목(神木) 숭배에는 별도의 제단이 없고 신목 자체가 제단의
구실을 했다.
신목 앞에서 제를 올리고, 제물은 그 나무에 걸쳐놓거나 올려놓는 방식이다.
신목과 제단의 합성어를 단(檀)이라고 봐야한다.
곰토템이 강한 아무르 일대의 퉁구스족, 일본 아이누족 모두 한결같다.
황금가지에서도 역시 똑같은 기술을 한다.
그 나무에 제물동물의 가죽이 매달려 있는…
숭배자들은 그 나무 앞에 모이고, 사제는 그것에 기도를 올렸다.
그 나무뿌리에 제물동물이 바쳐지고,
그 나뭇가지는 설교단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황금가지 제9장 제1절 수목정령]
그러나 누천년이 흐른 뒤에는 그 의미를 잃고 특정 ‘나무[木]’라고만 자전에 새겨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박달나무’라는 수종을 정해놓은 바람에
다른 나무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의 박달나무는 검은 회색인데, 백단(白檀) 또는 백단수(白檀樹)라는 의미가 무색하다.
박달을 광명개천(光明開天)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으로만 여기다보니 정작 중요한 것을 빠뜨렸다.
나무의 색이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
이 산(山)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백석(白石:1912~1996)의 시「白樺」의 일부인데, 그는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이었다.
자작나무는 추운지방의 나무다.
지금 남한에 자라고 있는 자작나무는 모두 이식종(利殖種)이다.
자작나무를 백화(白樺) 또는 백단수(白檀樹)라 하는데, 박달나무가 백단(白檀)이다.
유럽이 참나무로 뒤덮여있던 때, 유라시아 북방은 자작나무숲 지대였다.
유럽의 갈색곰이 참나무 숲에서 살았기에 신목은 참나무가 되었다.
유라시아 북방의 검은 큰곰은 자작나무숲이 그의 서식지였다.
북위 40도를 기점으로 북방의 최강자.
그리고 자작나무는 큰곰의 서식지와 일치하는 북방의 나무다.
혹독한 일교차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위해 복사열 반사작용으로 표피를 흰색으로 둘렀다.
북으로 올라갈수록 흰빛이 더욱 선명하다.
자작나무를 화(華)라 한다.
지금은 나무의 꽃을 통칭하는 의미가 되고 자작나무는 화(樺)로 표기되지만,
화(華)의 상형은 자작나무다.
박달나무는 희고, 밝고 환한 화(華)나무를 지칭한다.
화(華)는 자작나무요, 화(花)는 화(華)의 간략이다.
①백의(白衣)의 근원
②화랑(花郞)의 꽃, 천지화(天指花)
백의(白衣)의 근원
백의는 화피(華皮)로부터 - 웅상포(雄常布)라 했다
옷 의(衣)의 상형은 좌임(左袵) - 한족(漢族)은 우임, 우리옷의 시원이 좌임이다
우리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이다.
조선 민족이 백의를 숭상함은 아득한 옛날로부터 그러한 것으로서
수천 년 전의 부여 사람과 그 뒤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의 역대 왕조에서도 한결같이 흰옷을 입었다.
최남선(崔南善)『조선상식문답』
정도가 심했던 모양인지 백의금지령까지.
13세기 후반 고려 충렬왕 때 백의금지령이 내렸으나 잘 시행되지 않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태조 7년, 태종 원년, 세종 7년, 연산군 11년과 12년, 인조 26년, 현종 11·12·17년, 숙종 2년과 17년, 그리고 영조 때 여러 차례 거듭 백의금지령이 내렸으나 똑같은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러나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어디에서 백의(白衣)가 근원되었는지 밝혀놓은 곳은 없다.
아득한 고래로부터 입어왔다는 사실만 있을 뿐이다.
나라의 금지령보다 여자들이 먼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흰 옷은 숱한 손길을 필요로
한다.
만만찮은 관리는 논외로 하더라도, 노란 포(布)가 흰색으로 만들어지기까지의 탈색과정은 고도의 작업이다.
그러한 노고를 감수하면서도 흰옷을 고집했다는 것은 피의 부름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밥으로 배를 채워야만 포만감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 영혼의 일부가 되어버린 쌀 문화는 ‘쌀이냐 빵이냐’의 선택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먹거리를 구하는 과정애서 야생벼를 발견했고, 먹고 경작하는 과정이 반복되다보니 쌀이 주식이 되었다. 주변 식물로 배를 채워야했던 본능의 확대가 특정문화를 만든 것이다. 만약 야생밀이 동일한 기후조건에서 야생벼보다 더 잘 자라고 더 많은 수확을 내었다면 우린 지금 유럽 에서처럼 빵을 먹고 있을 것이다.
백의(白衣)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몸을 가리는 본능으로 옷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옷의 형태와 색감의 선택은 아주 먼 후대의 일이다.
백의(白衣)는 자연에 놓여있는 색과 질을 그대로 취할 수밖에 없던 시대의 소산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
야한다.
그리고 마침내 타민족과 뚜렷이 구별되는 고유문화의 형태,
백의민족으로 발전되어 우리영혼의 색이 되어버린 자연적 조건에 눈을 돌려야한다.
세계 어느 민족의 복식사를 보더라도 초기는 ‘천(穿)’과 착(着)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천(穿)은 머리구멍을 뚫는다는 뜻인데, 짐승가죽이나 직물에 구멍을 뚫어 목을 꿰는 형식이다. 지금도 중국어의 ‘옷을 입다’는 ‘穿衣服(chuān yīfú)’을 쓴다. 옷을 입을 거면 입든가. ‘要穿衣服的话 好好穿’ [네이버어학사전] 문헌상으로는 좌임(左袵)과 우임(右衽)을 논하지만, ‘천 구멍에 머리를 들이밀다’라는 의복의 역사를 무의식적인 언어습관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의 기모노는 한자로 ‘착물(着物)’이다.
몸에 천을 둘둘 감다는 뜻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옷을 입다’의 표현에 착(着)이 들어간다.
이 역시 일본의 복식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대물림된 언어습관이다.
의복역사로 볼 때, 한푸[漢服:중국옷]나 기모노를 같은 근원에 두고 있다.
재단하지 않은 옷감을 통짜로 사용해 옷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원래 위아래 한 벌인 통옷에서 발전했으며, 기모노와 마찬가지로 마름질(천을 자르는 일)하지 않고 바느
질한다.
더 쉽게 말하자면 각 부분을 조각조각 잘라서 잇지 않고 천을 그대로 활용하여 만든다.
[출처/나무위키. 한푸]
짐승의 가죽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직물이 완성된 후의 제작방법이므로, 직물 이전의 옷 의(衣)에 대한
상형으로 보기에는 부적합하다.
문헌상으로는 황제(黃帝) 때 호조(胡曹)가 옷을 처음 만들었다고 되어있으나,
이름만 있을 뿐 무엇으로 어떻게라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世本] 胡曹作衣。黃帝時人
옷 의(衣)는 저고리를 상형하고 있다.
이를 복식용어로 전개합임형(前開合袵型)이라 한다.
앞섶이 좌우로 나누어지고, 여밈의 방식에 따라 좌임 또는 우임이라 한다.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이 좌임(左袵)이요, 오른쪽으로 여미는 것이 우임(右衽)이다.
좌임이 되면 오른쪽이 왼쪽을 덮게 되므로 옷깃의 방향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른다.
우임은 좌임의 반대다.
그런데 상형을 보면 좌임(左袵)이다.
좌임(左袵)으로 옷을 입던 민족이 글자를 만든 것이다.
아래 사진은 무용총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전통복식인데 옷 의(衣)의 상형과 일치한다.
옷 의(衣)에 관한 자전을 보면, 자형(字形)을 연구하던 학자들이 벽에 부딪혔다는 것이 드러난다.
설문해자를 보면, 두 사람이 엎어져 있는 모습을 상형했다고 되어있다.
[說文解字ㆍ衣部]
衣:依也。上曰衣, 下曰裳。象覆二人之形。凡衣之屬皆从衣。
다른 학자들의 설명 또한 서로 베끼기처럼 엇비슷하다.
[白虎通]衣者, 隱也。
[釋名]衣, 依也。人所以依以庇寒暑也。
[玉篇] 所以形軀依也。
[類篇]象覆二人之形。
백호통. 숨는 것이다.
석명. 의지하는 것이다. 사람이 추위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의지하는 방법이다.
옥편. 몸을 의지하는 형상이다.
유편. 두 사람을 엎어놓은 형태를 상형한 것이다.
모두 ‘옷의 효과’를 설명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穿衣服(chuān yīfú)의 언어문화로,
옷 의(衣)의 근원을 찾기란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자작나무[華]를 봇나무라 한다.
자전을 보면 화(華)를 보(布)라 했다.
봇나무가 포목(布木)이다.
포목점은 자작나무로 시작된 우리민족 집단무의식의 언어적 표현이다.
여자는 왼쪽가슴에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고, 남자는 오른손에 칼을 들고 적을 방어한다.
유럽의 옷 기본형태는 이에 연유되어 현재에까지 이른다.
여복은 좌임으로, 남복(男服)은 우임으로 단추를 꿴다.
활을 든 자와 아이를 안은 여자의, 무게중심과 시선은 동일하다.
옷 의(衣)의 상형이 좌임인 까닭은, 활을 중시하는 민족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유로이 놓인 손의 역할로 옷의 방향이 결정된다.
문화는 집단 무의식의 표현이다.
신라로부터 내 존재까지 연결되는 DNA의 개수는 1억을 헤아린다고 한다.
나와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이렇게 대를 이어 전승되고 공유되는 무의식의 조합.
역사서보다 더 분명한 역사는 몸에 각인된 흔적이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말.
그 중에 포목점(布木店)이 있었다.
기성복이 대중화되기 전 각종 옷감을 파는 가게였다. 어머니들은 그곳에서 천을 끊어다가 식구들의 옷을
해 입혔다.
자작나무의 우리말 표기는 봇나무인데, 포목(布木)이 떠올랐다.
가위 바위 보. 보자기. 보따리. 이불보. 보부상. 봇짐…
이러한 말에 쓰이는 보는 모두 포(布)의 의미였다. 가리고 싸는 역할을 하는 천이다.
자전에서 布를 검색해보면, 발음이 ‘보’로 되어있다.
[唐韻][集韻][韻會][正韻] 博故切,音抪。
‘박’과 ‘고’의 반절음으로 소리는 抪.
抪는 현재 포로 발음하지만, 당운을 보면 ‘보’와 ‘호’의 반절음 ‘보’로 발음된다.
【唐韻】普胡切[박호절]
【集韻】滂模切[방모절],𠀤音鋪[고음:보]。
한자발음은 세속을 따른다는 말이 있다.
현재 세간에서 유통되는 음을 정음(正音)으로 한다는 원칙이다.
숭례문은 원래 종례문인데, 그에 알은 체하는 신하와 정조 사이의 우스개소리가 있다.
-전하, 신은 종례문으로 가겠습니다
-경은 종례문으로 가시오. 과인은 숭례문으로 가리다.
포(布)에 대한 자전을 보면, 강희자전의 시점까지 발음이 모두 ‘보(布)’로 되어있다.
우리나라 한한대사전 세 종류를 뒤졌더니 모두 발음이 ‘포’다. 현재의 발음만 표기한 까닭이다.
그런데 자전에서 화(華)를 검색해보면 당나라 때까지 華가 ‘부[布]’로 발음되어진 듯하다.
《詩》如常棣之華,顏如舜華,維常之華,𠀤叶車韻。隰有荷華,叶下都韻。黍稷方華,叶下途韻,
凡七見,皆讀敷。
又《唐韻古音》亦音敷。郭璞曰. 江東謂華爲敷。陸德明曰:古讀華如敷,不獨江東也
시경(詩經)에 나오는 7개의 華는 발음이 모두 ‘부’다.
또한 당운고음(唐韻古音)에도 발음이 ‘부’다.
곽박이 말하기를, 강동에서는 화를 부라고 말한다.
육덕명이 말하기를, 고대에 화를 부로 읽은 것은 비단 강동만이 아니다.
화(華)의 정음(正音)은 ‘화’다
당운에서는 ‘호’와 ‘화’의 반절음인 ‘화’
집운에서는 ‘호’와 ‘과’의 반절음으로 음은 ‘화(划)’로 되어있다.
[唐韻]戸花切
[集韻]胡瓜切,𠀤音划。
그럼에도 당나라 무렵까지도 화(華)를 ‘부’로 발음했다고 한다.
포(布)의 중국어발음이 ‘부’다.
布 [bù]
위에서 발음으로 인용한 부(敷)에는 특정한 뜻이 없고, 발음표기의 문자다.
위의 기록은 초기 한자음의 형성과정을 보여준다.
말이 곧 문자의 음이었다.
봇나무니까 華는 보[부]였다. 너는 너[女]였다[논어].
삼국지위서동이전에 백포대몌(白布大袂)가 나오는데, 몌는 요즘은 쓰지 않는 글자로, 바지를 매다의
몌로 썼다.
한자의 고어로 들어가면 갈수록 한글과 가깝다는 한문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문자보다 말이 먼저였던 시대를 거치며 한자는 뜻글자로 정립되어간 듯한데, 그 말이 한글이다.
봇나무는 불에 탈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고 하여 자작나무라 한다지만,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타는
나무가 어디 한 둘일까.
자작나무의 유래를 뒤졌으나 그 말만 돌고 돌 뿐이었다.
네이버지식in에, 자작나무는 탈 때 절대 자작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답변 하나가 올라와있긴 하다.
자작나무로는 불을 때보지 않았지만, 어릴 때 시골에서 불을 지피던 것이 일상이었는데 장작류는 ‘탁, 탁,
타닥타닥’ 육중한 소리를 내고, 잔가지는 ‘자작, 자작’ 하는 가벼운 소리를 낸다.
나무의 무게감에 따라 탈 때 나는 소리가 달라진다. 소나무 껍질도 탈 때 역시 자작거리는 소리를 낸다.
시경(詩經)의 혼례가 중에 ‘작작기부(灼灼其華)’라는 구절이 있다.
華의 음은 ‘부’라는 음주(音注)가 달려있다.
灼灼其華《註》音敷。[詩·本音]
과도기의 음운 형태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는데, 뜻은 꽃이 활짝 피다로 넘어갔건만 발음은 여전히
봇나무의 부[布]다.
꽃이 활짝 핀 모습을 ‘작작(灼灼)하다’로 표현했다.
桃之夭夭 물오른 복숭아나무
灼灼其華 꽃이 환하게 피었구나.
여기의 작작(灼灼)은 환(晥), 또는 환(睆)의 의미인데, 천지를 가득 채우다의 뜻이다.
자작나무의 유래가 이에 근원된 것이 아닌가하는 개인적인 추측이다.
불이 타오르듯 환하게 세상을 밝히는 나무.
華而晥。謹照原文晥改睆。[禮·檀弓]
백천(百川)을 배천으로 발음하듯, 작작(灼灼)이 자작으로 변한 듯하다.
헐벗은 인간들에게 살길을 열어주는 것은 옷을 입히는 것이다.
보시(布施)가 곧 홍익인간의 기본 바탕이다. 자작하게 타오르는 봇나무의 열매는 보(布)다.
봄여름에 화피(華皮)는 꽃을 피우듯 저절로 일어난다.
봇껍질은 희고 빤빤하고 단단하여 기와보다도 오래 간다하며, 사람이 죽어 봇껍질로 싸서 묻으면 만 년이
가도 해골이 흩어지는 일이 없다고 한다.
[김구선생의 백범일지 중]
자작나무 수피의 두깨는 0.1~0.2㎜, 한 그루에 10∼12장의 얇은 껍질이 겹겹이 붙어 있으며, 유지(油紙)와 같아 벗겨내기가 쉽다.
피낭에 송진 같은 것이 들어있어 불이 잘 붙는다[其皮裹松脂].
기름기를 머금고 있어 습기에 강하고 질기며, 가운데가 일어나지만 사방으로 터지거나 갈라지지는 않는다.
華,中裂之,不四拆也。[禮·曲禮]
자작나무의 특징은 가로 획[一]과 같은 무늬에 있다. 이 무늬로 인해 수피가 횡으로 일어난다.
흰 백(白)의 상형이 이 나무의 무늬와 같다.
서(西)를 백(白)이라 하고, 서악(西岳)을 화산(華山)이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전에서 자작나무 화(樺)를 검색해보면, 화(樺)는 화(華)의 속자(俗字)라고 되어있다.
司馬上林賦字作華。師古曰.華卽今之樺。皮貼弓者。莊子華冠,亦謂樺皮為冠也。樺者俗字也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상림부(上林賦)에는 화(華)로 되어있다.
당 태종 때의 안사고(顔師古)는 말한다.
화(華)는 지금의 화(樺)다.
수피는 활[弓]에 붙인다.
장자(莊子)는 화관(華冠)을 썼는데, 화피(樺皮)로 만든 관을 말한다.
화(樺)는 속자(俗字)다.
화(華)가 후일 환하게 빛나다 등의 뜻으로 많이 쓰이게 되자, 자작나무에 나무 목(木)변을 보태 구별한
것이다.
화의 상형인데, 고문에는 䔢가 쓰였다.
𠂹는 꽃잎이 펼쳐져있는 모습을 상형한 것이고, 亏는 꽃받침을 상형했다고 되어있으나[𠂹.象華葉垂敷之形,亏象蔕萼也],
이는 화(華)가 꽃의 의미가 된 이후 그에 맞추어 글자를 풀이한 것으로 보인다.
자작나무로 보았을 때, 수피가 거듭거듭 일어나는 모습이다.
亏는 우(于)의 고자(古字)인데, 于는 往이요, 爲와 같다고 했다[于猶爲也].
광운(廣韻)에는 풀이 무성한 것이요, 그 색(色)이라 했다.
《廣韻·下平聲·麻·華》華:草盛也,色也。《說文》作𦾓 榮也
화(華)는 자작나무의 색(色)에 무게를 실은 듯하다.
북방의 자작나무는 우리나라와 달리 눈부신 흰빛이다. 일교차가 클수록 흰색은 더욱 선명하다.
몸체에 겹겹이 두르고 있던 흰 비단을 한 폭 한 폭 펼쳐내며 천지를 흰빛으로 가득 채우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몇 아름드리 흰 몸체에서 내뿜는 그 웅혼한 존재감. 눈부신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초월자의 위엄이었을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인간들의 영혼을 흔들었을 것인데,
고대 신(神)들이 모두 흰옷을 입고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지금 보이는 자작나무는 수명이 길어야 수십 년이 고작이다.
그러나 김구 선생이 압록강변 일대를 여행하던 1895년 무렵만 해도 엄청나게 굵은 몇 아름드리나무들이
즐비하여 그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그 나무들이 자작나무라고 한번 상상해보자.
자작나무일 수도 있다.
‘온통 자작나무다’라는 백석의 시처럼. 흰색의 농도로 집지은 햇수를 헤아리는 백범의 일지처럼.
통화는 압록강 연변의 다른 현청과 마찬가지로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서 관사와 성루의 서까래가 아직
흰빛을 잃지 아니했다.
나무 하나를 벤 그루 위에 7,8명이 모여 앉아 밥을 먹고,
통나무로 곡식 넣을 통을 파느라 장정 하나가 통 속에 들어가 도끼질을 하고,
이 산봉우리의 나무가 쓰러져 저 산봉우리에 걸쳐져 있어 일행은 그 나무를 다리삼아 계곡을 건넜다.
[백범 일지 중]
태고 때에는 분명 이 나무들보다 더 우람한 나무들로 자작나무숲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색(色)만 인간을 감탄시켰던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었던 근본 질료이기도 했다.
0.1~0.2㎜의 흰 수피는 인간을 동물과 구별지은 문화혁명의 결정적 매개였다.
번성하게 일어나는 문화의 상징이 되고,
순(舜)의 이름을 중화(重華)라 한 것도 모두 그 시발점이 자작나무 수피였기 때문이다.
桓族[환족]은 神市時代[신시시대]로부터 이미 農藝[농예]와 牧畜[목축]을 業[업]하였으나…
衣服[의복]은 從古[종고]로 皮卉[피훼]를 幷用[병용]하니,
대개 冬[동]에는 貂[초], 豹[표]의 皮[피](곧 소위 文皮[문피])와
夏[하]에는 雄常[웅상]의 布[포]를 着用[착용]하였으며,
최남선 저「계고차존(稽古箚存)」
[박민우 저『환단원류사』中 인용]
환족(桓族)은 겨울에는 담비나 표범의 무늬가 있는 가죽옷을 입고, 여름에는 웅상포(雄常布)를 입었다.
신단수를 웅상이라 했으며, 포목(布木)이 웅상이다.
봇나무는 자작나무로 포목의 옛말이다.
검색을 해보면 포목(布木)이란 말을 유독 우리민족만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웅상포에 대하여 뒷북치는 기록도 있다.
肅愼氏 有樹 名雒常 若中國有聖帝代立 則其木生皮可衣 [晉書東夷傳]
숙신의 나라에 나무가 있는데 낙상이라 한다.
만약 중원의 황제(黃帝)처럼 뛰어난 군장[帝]이 있어 위(位)에 올랐다면, 그 나무의 생피로 옷을 지었을
것이다.
전국시대 진(秦) 때 저서되었다는 세본(世本)에는 황제 때 옷을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伯余作衣裳‧ 高誘注曰, 伯余,黃帝臣
胡曹作衣. 宋衷注曰. 黃帝臣。
胡曹作冕。宋衷注曰. 黃帝臣也。
於則作屝履。宋衷曰. 黃帝臣,草曰屝,麻曰履。
황제 때 백여(伯余)가 의상(衣裳)을 만들었다.
황제 때 호조(胡曹)가 의(衣)를 만들었다.
황제 때 호조가 면류관을 만들었다.
황제 때 어측(於則)이 신발[屝履)을 만들었다.
청(淸) 뇌학기(雷學淇)의 교집세본(校輯世本)을 보면,
황제 때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기보다 의복에 관한 제도를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五經要義云大古之時未有布帛 食獸肉而衣其皮 先知五別而未知蔽後
此即謂神農以前也
오경요의(五經要義)에 이르기를,
태고 때에 포백(布帛)이나, 짐승을 잡아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는지는 모르겠다.
먼저 오륜(五倫)을 알고 그 후에 몸을 가리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신농씨(神農氏) 이전을 말한다.
이런 의복사는 뒤로 돌리고, 중요한 것은 웅상의 생피로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다는 기술이다.
낙상(雒常)은 사학계에서 웅상(雄常)의 오류로 본다.
산해경에 숙신씨는 백민(白民)의 북(北)에 있는데, 나무가 있어 이름을 웅상(雄常)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肅愼氏在白民北 有樹名曰雄常.
『欽定滿洲源流考』를 보면 ‘豁山 漢語紙也’라 하여, 豁山(Hoošan)은 종이를 뜻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雄常 즉, 雒常은 종이를 나타내는 Hoošan을 漢字로 表記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記錄인 듯하다.
특히 Hoošan은 질겨서 가죽과 같았다고 하는데, 당시 肅愼의 社會에 文字가 없었기 때문에 글을 적는
데에는 쓰이지 못하고, 그 껍질을 벗겨 가벼운 옷을 지어 입는데 쓰여진 듯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진서(晉書) 동이전(東夷傳)의 주51
웅상포는 자연 그대로는 희고 빤빤하며 질겨서 가죽과 같다.
더구나 송진과 같은 기름기를 머금고 있어 자연 그대로 옷으로 만들어 입기에는 부적절하다.
수피의 안면은 갈색을 띠고 있다.
이 역시 마포나 아마포처럼 바래는 작업이 선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포(布)류가 대부분 그렇기도 하다.
삼베나 모시 역시 옷감으로 매만지기 전에는 노란빛을 띠고, 껄끄러워 그냥 입기에는 부적절하다.
베틀에서 내린 포를 잿물에 삶고, 흐르는 물에 흰색이 나올 때까지 바래고 또 바랜다.
그때서야 부드러운 천으로 변한다.
웅상포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전에서 포(布)를 검색해보면, 포(布)를 천(泉)이라 했다.
衞文公大布之衣。又泉也。[左傳·閔二年]
掌邦布之出入。《註》布,泉也。其藏曰泉,其行曰布 [周禮·天官·外府]
포(布)는 천(泉)이다.
간직하고 있으면 천이요, 유통이 될 때는 포라 한다.
천(泉)은 백(白)과 물(水)의 조합이다.
웅상포를 물에 담가 천으로 만드는 것이다..
천을 만드는 물이 천(泉)이다.
지금은 천(泉)을 수원(水源)의 의미로 보지만, 방안에 편히 앉아 붓을 놀리는 학자들의 견해일 뿐이다.
처음 글자가 만들어질 때는 의식주와 관련된 가장 현실적인 의미전달 부호였다.
형이상학적인 글자는 제일 나중에 만들어졌다.
제(帝) 역시 지금은 황제의 의미로 치장되어 있지만, 상형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샤먼의 형상이다.
제사장과 제(帝)의 출발선은 같다.
천[布]으로 시(市)가 이루어지고 유통의 수단이 되자, 전(錢)으로 변화했다.
천(泉)의 본음은 ‘젼’이다.
[唐韻]疾緣切(질연절)[ 集韻][韻會]從緣切(종연절) [正韻]才緣切(재연절)
동음(同音)은 동의(同意) 확장이다.
포가 곧 돈이었다[전(泉)=전(錢)].
泉. 又錢別名。[廣韻]
泉,或作錢。[地官·泉府註]
산해경의 서산경을 보면 화산(華山)을 전래지산(錢來之山)으로 비유했는데, 이때의 전(錢)은 전(泉)이다
華山之首,曰錢來之山,[山海經·西山經]
화산은 서산(西山)의 머리다. 천[布]이 이른 산, 전래지산(錢來之山)이라 한다.
화산의 봉우리는 흰 암반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자작나무에 비유하여 화산이라하고, 흰 천을 휘감은듯하다고 하여 전(錢)을 썼다
이걸 벗겨 아랫도리를 가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천이 되고 저고리가 되기까지는 어쩌면 수백 년이 흘렀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에서 어머니로 전승되며 기술의 축적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마침내 좌임의 저고리를 만들 수 있기까지의 그 시간을 우리는 추측하지 못한다.
포(布)를 자유자재로 다루던 그 흔적만이 한복 마름질에 남아있다.
조각의 미학으로 이루어진 저고리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웅상포를 이어붙이던 아득한 상고대의 어머니
들이 떠오른다.
한복 마름질은 그때로부터 전승되어왔을 것이다.
‘이어붙이다’를 무심코 쓰고 나니 ‘천을 이어붙이다’라는 말로 연결된다.
그 당시 있었던 바늘이라야 동물뼈를 갈아 만든 것. 천을 바느질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모양은 바늘로 잇고, 나머지는 풀로 붙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풀이 풀인 것은 풀에서 풀을 찾았다는 뜻일 것이다.
집에서 어머니들이 만들던 포의(布衣) 류는 습관적으로 풀을 먹인다. 이음매에는 찬찬하게 풀을 먹인다.
‘풀 먹이다’는 ‘풀 붙이다’와 상통된다.
어머니가 만들어 남긴 오래된 한복상의를 들여다보았더니, 바느질하기 껄끄러운 곳은 풀을 먹여 붙인
곳이 눈에 띄었다.
정교한 바늘의 발달로 후대에는 풀 먹이다가 ‘옷의 빳빳함’으로 대변되었지만,
본질은 ‘붙이기’였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풀을 먹여야 입성이 완성되는 것으로 여기는,
백의(白衣)를 입었던 마지막 세대-우리 어머니들.
우리는 그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백의(白衣)를 입고 언제 자작나무숲을 떠났는지,
어디를 거쳐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추측만 구구할 뿐이다.
반만년을 넘긴 시간의 바람이 바람조차 쓸어간 자리에 무엇이 남아있을까.
간혹 기이한 얘기만 떠돌 뿐이었다.
帛似帛,布似布,華山有之。[爾雅.釋草]
흰 비단이라면 흰 비단 같고, 포(布)라면 포 같은 것이 화산(華山)에 있었다.
[참고문헌]
∙ 일연(一然)『삼국유사(三國遺事)』
∙ 계연수(桂延壽)『환단고기(桓檀古記)』
∙ 북애노인(北崖老人)『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 이중재(李重宰)『한民族史』
∙ 이시진(李時珍)『본초강목(本草綱目)』
∙ 나원(羅願)『이아익(爾雅翼)』
∙ 강희자전(康熙字典)
∙ 미셀 파스투로『곰, 몰락한 왕의 역사』
∙『尙書』
∙『漢書』
∙『說文解字』
∙『康熙字典』
∙프레이저『황금가지』
∙김구 선생『백범일지』1983년. 교문사
∙박민우 저『환단원류사』2015년. 환단서림
∙정재서 역주『산해경』1985년. 민음사
[웹]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나무위키, 백의민족
∙나무위키, 한푸
∙네이버, 어학사전
∙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https://ctext.org/zh]
(노성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