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에스라 제5강
울며 기도하며 자복할 때에
말씀 / 에스라 9,10장
요절 / 에스라 10:1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지난주일 말씀에서 우리는 에스라의 결심에 대해 배웠습니다.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결심을 기뻐하시고 에스라와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안전하게 올라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만들고자 노력합니다.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백성들에게 힘써 가르칩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에스라에게 닥친 일이 무엇입니까? 또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도착해 페르시아에서 가져온 예물들을 제사장에게 주고 먼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약 5개월이 지난 후, 백성의 지도자들이 에스라에게 찾아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줍니다. 9장 1절을 보십시오.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구약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가증한 일은 대개 우상 숭배와 성적 타락을 의미합니다. 백성의 몇몇 지도자들이 에스라에게 얘기해준 이스라엘 백성의 가증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방인들과 통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율법으로 금지했습니다. 신명기 7장 3,4절은 말씀합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이방인과의 통혼은 단순한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신앙 자체가 섞이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솔로몬입니다. 솔로몬 왕은 초기에는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방 여인들을 후궁과 첩으로 삼았습니다. 천명이나 되는 아내를 두게 되었습니다. 아내들의 영향으로 이스라엘 곳곳에는 이방 우상의 신전들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어느새 종교백화점이 되어버렸습니다. 솔로몬은 결국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돌아서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성과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나라가 분열되는 큰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후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문화를 부러워하고 그들의 우상을 들여와 섬기고, 이방인들과 결혼함으로, 나라가 망하게 되고 바벨론에 끌려가 70년 동안이나 포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또다시 이런 조상들의 죄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스라서 4장에서 배웠던 것처럼, 포로 귀환 1세대들은 성전을 재건할 때도 혼혈 민족으로 혼합주의 신앙을 가진 사마리아 사람들과 섞이지 않고자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스4:3)”라고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아무리 성전이 작고 초라할지라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의 손으로 성전을 짓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성전도 재건하고 신앙의 삶을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대략 80년 세월이 흐르자, 믿음의 순수성과 하나님께 대한 절대성이 점점 약화되었습니다. 포로귀환 2세대, 3세대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알지도 못했고, 조상들이 왜 바벨론 포로생활을 해야만 했는지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조상들의 우상숭배와 음란의 가증한 행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음에도 이제 그것은 먼 과거의 역사 속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자신들의 삶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시편 106편 35,36절을 보면, “그 이방 나라들과 섞여서 그들의 행위를 배우며 그들의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들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으로 귀환하여 살다보니 이방인들과의 사귐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은 그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방 여자들의 외적인 모습도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주변 이방인들을 보니, 그들도 나름 잘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높은 자리에 올라간 권력자도 있고, 돈 많은 재력가도 있었습니다. 그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 현실적으로 많은 유익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조금씩 타협하다 보니, 점차 섞이게 되었습니다. 이방여자, 외국인, 불신자들과 결혼한 것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 그들이 매개체가 되어 이방 우상을 섬기도록 만들고 여호와 신앙을 흔들기 때문에 그들과의 결혼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신앙의 가정을 세우는 데 있어 본이 되어야 할 지도자들과 고위 관료들이 이 죄악에 있어 더욱 으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스라는 어떻게 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에스라는 이 사실을 알고 기가 막혔습니다. ‘기가 막혔다’는 것은 한마디로 멘붕에 빠졌다는 말입니다. “아니,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충격적인 사실 앞에 자신의 속옷과 겉옷을 찢었습니다. 자신의 머리털과 수염을 쥐어뜯었습니다. 사실, 에스라 자신이 죄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자신의 죄 문제로 생각하고 가슴 아파한 것입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올라온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말씀을 제대로 연구하고 준행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가르쳐서 그들 신앙을 바로 잡아주고자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온 마음을 쏟아 백성들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기본 중에 기본인 신앙의 가정을 이루는 것부터 무너져 버렸으니 얼마나 당혹스럽고, 얼마나 영적인 분노가 치밀었을 것이며, 그런 백성들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이 에스라에게 몰려듭니다. 그들은 에스라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인 그들은 죄에 대해 민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 생활을 끝내고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조상들의 망령된 행실을 다시 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떠는 자들이 필요합니다. 이사야서 66장 2절은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 회개하고 두려워 떨며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돌보아 주십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에스라가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근심 중에 무릎을 꿇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에스라는 우리의 죄악이 많아 정수리, 머리끝까지 차고 넘친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의 죄라고 하지 않고 우리의 죄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깁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하고 간음하며 범죄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칼에 맞아 죽고, 포로로 사로잡혀 끌려가고, 노략질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페르시아 왕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성전도 다시 건축하게 도우셨습니다. 삶의 울타리, 정착할 땅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상숭배하고 간음하여 부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하나님은 그들이 너무나 불쌍해 자비를 베푸셨건만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또 같은 죄를 반복하고 있으니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시점인 느헤미야서 13장에도 보면, 똑같은 일이 또 발생합니다. 이를 보면, 사람에게는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결국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남은 자들을 통해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마다 죄 사함을 주시고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죄악이 반복되는 우리에게 예수님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갈 힘을 덧입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사람들과 통혼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길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떨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언약 백성으로서, 자신들을 구별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이방인들과 통혼하며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께 가증한 짓을 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믿음의 순결을 상실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 신자들을 신부로 표현합니다. 신부의 생명은 순결함입니다. 신부가 이 남자 저 남자와 놀아난다면 이는 음녀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부가 세상과 짝하여 쾌락과 탐욕에 무릎을 꿇는다면 이는 영적인 음녀이고, 간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그러하니 하나님 앞에 순결도 타협하고 변질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믿음의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믿음의 순결함을 생명처럼 여겨야 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에스라는 할 말 없는 죄인들임을 고백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을 간구합니다.
에스라의 이 같은 기도는 모세의 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앞에서 절하면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우리의 신이라며 먹고 마시고 뛰놀았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이런 그들을 다 죽이고자 하셨습니다. 이때 모세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32:32) 하나님은 이 같은 모세의 기도를 받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진노를 멈추셨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 백성들을 보며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채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a)
오늘날도 참으로 필요한 것은 이 시대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생각하고 자신의 생명을 걸고 부르짖는 목자의 중보기도입니다. 우리 시대의 죄 문제는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그 심각성을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인본주의,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 무신론, 세상 쾌락과 탐욕의 죄악된 문화가 누룩처럼 퍼져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마저도 별 문제의식 없이 죄악 된 세상 문화와 섞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치열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합리화하고 타협합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에스라와 같은 참회와 눈물의 기도입니다. 누구의 죄가 더 크네, 누구 책임이네를 말하기보다 다 우리의 잘못이고, 나의 죄 문제임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울며 자복하며 회개할 때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크신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목자의 마음, 부모의 마음으로 나아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각 가정과 우리의 교회와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이 나라 가운데 영적 각성과 회복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10장 1절을 읽겠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에스라가 앞장서서 엎드려 울며 죄를 자복하며 기도하자, 백성들도 마음에 큰 찔림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자신들의 죄 문제로 인해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눈물로 중보기도 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도자들은 무관심하거나, 자기들부터 앞장서서 이방인들과 통혼하며 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이 문제를 하나님 편에서 심각하게 바라보며 가슴을 찢고 애통해하며 회개 기도를 했습니다. 이런 에스라의 기도가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큰 무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통회하며 자복한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스가냐가 나아와 앞장서서 회개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스가냐는 1차 포로 귀환 때 이스라엘로 돌아온 엘람의 후손입니다(스2:7). 그에게도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변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하였다고 분명히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하지만 그는 절망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주님의 뜻에 따라 이방인 아내와 자녀들을 내보내겠다고 결단했습니다. 이로서 하나님과 새롭게 언약을 세우고 하나님의 율법을 확실히 지키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결단한다는 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아무리 이방 여자이지만 그래도 결혼해서 정들고 같이 살고 있는 아내를 내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일까요?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신앙을 굳게 지키겠다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또 스가냐는 에스라의 영적 각성 운동에 적극 힘을 실어주고 동역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그는 이번에 이 죄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결코 죄의 누룩을 제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동역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를 볼 때, 스가냐 자신도 이방 여인과 통혼해 살고 있긴 하지만, 계속해서 걸림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에스라가 분명하게 회개하도록 도왔기 때문에, 스가냐 자신도 결단하고, 더 나아가 에스라의 영적 각성 운동을 돕겠다고 자원하며 나선 것입니다.
에스라가 일어나 말합니다. 10,11절을 읽겠습니다.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어떤 면에서는 이 같은 조치가 너무 냉혹한 처벌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너무 율법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미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고, 어떤 사람들은 자식까지 낳았는데, 이들을 내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큰 고통이 따릅니다. 힘든 만큼 현실적인 타협안이 나올 법도 합니다. “기왕 엎질러진 물이니 이미 결혼한 사람들은 봐주고 다음부터나 잘하자.” 그러나 에스라는 거룩한 공동체에 죄악을 제거하되 철저하게 제거하고자 합니다. 죄악의 싹은 도려내지 않으면 우후죽순처럼 또다시 퍼집니다. 이스라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믿음의 순결을 잃어버리고 이방인의 혼합주의 신앙에 빠져 다시 이방 우상을 숭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출애굽시켜 세우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과 같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중차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라는 이런 강력한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라는 책에도 보면, 로마제국 멸망 원인 중 하나가 ‘가정의 붕괴’라고 했습니다. 로마 사회가 너무나 타락하고 성 윤리가 무너졌는데 누구도 감히 이 문제를 지적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위에서 아래까지 다 썩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에스라의 분명한 방향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2절을 읽겠습니다.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에게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마땅히 행하겠습니다.” 이를 볼 때 그들이 마음으로부터 회개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종족별로 조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그들이 조사한 결과, 110명이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다 이방 여인들을 내보내기로 결단합니다. 18-44절에서는 그들의 명단까지 공개합니다. 사실, 죄를 짓기는 쉽지만 죄를 회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단하고 끊어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죄를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들은 죄를 회개하고 끊어내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합니다.
오늘 본문을 지금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자녀가 이방 여자 곧 불신자와 결혼했다고 그 여자와 이혼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자식들을 쫓아내라고 했다가는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방 여자를 쫓아내라는 것은 에스라 당시 신정일치 시대, 곧 그 당시의 종교법이 바로 실정법이었던 시대의 특수성에 비추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13,14절에서 말합니다.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불신자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 가정을 지켜 불신자 배우자가 믿는 자가 되도록 선한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분들은 믿음의 사람과 멍에를 같이 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칫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신앙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족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삶입니까?
또 오늘 말씀은 현재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 끊어내야 할 이방 여인과 같은 요소가 무엇인가를 돌아보도록 깨우쳐 줍니다. 이방 여인의 요소는 나와 하나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이 시대의 물질적이고 인본적이고 쾌락적인 풍조가 이방 여자입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헌신을 거부하게 하고 약하게 만드는 비성경적인 가치관들이 바로 이방 여자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방 여자의 요소들을 단호하게 내쫓고,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 마음 첫 자리에 모시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각종 죄악과 우상들을 끊어내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