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에서 군산을 거쳐 전주선교스테이션에 도착한 호남선교의 레전드 포사이드 선교사의 편지
1873년 미국 켄터키주 해로스버그에서 태어난 포사이드는 1894년 웨스터민스터칼리지를 졸업하고, 1898년 루이빌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인턴 과정을 마치고, 곧 바로 쿠바에서 벌어진 미국과 스페인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하였다. 전역한 후에 그는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 봉사를 하다가 켄터키주 렉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하였으나 선교를 열망하여 한국 선교를 자원하였다. 그는 1904년 9월에 남장로교 의료 선교사인 다니엘(Thomas H, Daniel), 놀런(Joseph W. Nolan) 박사와 함께 한국에 왔다.
그는 1904년 9월 5일에 차이나 익스프레스를 밴쿠버에서 출항하였고 1904년 9월 21일 S.S. 오하이오호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왔으며 부산에서 서울까지는 기차를 이용하였다. 서울에서 포사이드는 서울에서 맥커첸 선교사, 놀런 의료선교사와 함께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군산으로 내려왔고 군산에서 말을 타고 전주로 들어왔다.
1904년 10월 17일에 알렉산더 박사에게 쓴 편지는 이숙이 번역한 ⌜와일리 H.포사이드 선교 편지⌟ 36쪽에서 46쪽에서 부분적으로 발췌를 하였다.
1904년 10월 17일
전주, 한국
알렉산더 박사님께
서울에 도착한 뒤로 줄곧 박사님께 편지를 쓰고자 했지만, 아시다시피 한국에 처음 오자마자 여러 가지 일이 많았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과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아서 시간이 정신없이 흐르는 통에 편지 쓰기 등의 일은 뒤로 밀렸습니다.
…생략…
선교회는 전킨 부부를 전주로 보내기로 했고, 이로 인해 불 부인이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 부부를 군산으로, 그리고 저를 임시로 전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맥커첸 선교사(한국명, 마로덕 선교사. 그는 전주선교부에서 동부지역을 맡아서 순회하였고 완주군에 수많은 교회를 개척 설립하였다.), 놀런 박사님과 저까지 셋은 제물포에서 군산으로 가는 첫 배를 탔습니다. 마사냐라는 작은 일본 배였는데, 처음에는 갑판에서 자야 한다고 했지만, 3엔씩 주자 편의를 봐주었습니다.
목요일 오후 5시에 제물포를 떠나, (러일전쟁으로)난파된 러시아 선박 근처를 지나 해안에서 6~7마일 떨어진 섬 하나에 닿았습니다. 그날 밤 날씨가 거칠었으니, 마사냐를 탄 승객들의 상태가 어떠했을지 짐작하시겠지요. 아침 4시쯤 작은 섬 가까이 가서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정박했습니다. 이 폭풍으로 인해 금요일 오후 6시가 되어서야 군산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24시간의 여정이었습니다.
우리는 (군산선교부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곧 마사냐호와 폭풍은 잊히어졌습니다. 서울에서 이질에 걸린 불 선교사님은 아직 누워 계셨지만 좀 나아진 상태였습니다. 전킨 선교사 부부는 전주로 이사하느라 매우 분주하였습니다. 우리는 드류 선교사네 집에서 박사님이 쓰시던 방에서 잤습니다. 토요일에는 세 의사가 모여 의학적인 사안들을 검토하고 최대한 분담했습니다. 다니엘 선교사는 병원 장비를 새로 모두 구입하셨고요.
오선생(오긍선 박사, 남장로회 선교부가 키운 최초의 한국인 의사)은 박사님께 편지를 써서 모든 것(전킨 선교사의 전주선교부 발령을 의미한다.)을 중단시키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전킨 선교사를 매우 존경하는 것 같았습니다.
전킨 선교사는 여기에서 하루 이틀 정도 앓았는데 이삼일 후면 회복될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해리슨 선교사 댁에 있습니다. 호먼 선교사는 군산에서 다니엘 선교사 부부와 함께 지내며, 그 곳 학교(영명학교, 현재 군산제일고등학교 전신) 맡고 있습니다. 우리는 군산에서 전주까지 아주 좋은 여정을 가졌습니다.
오전 9시쯤 떠나 오후 7시쯤 도착했지요. 날씨도 맑고, 10월의 좋은 날씨였고, 길 상태도 매우 양호하였습니다. 길 중가쯤에서 점심을 먹으며 쉬고 있는 오웬 여사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테이트 선교사 부부를 방문했다가 목포로 되돌아가기 위해 오웬 박사를 만나러 군산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녀와 함께 언덕 위 큰 소나무 아래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한국 소년들이 즐겁게 재잘대는 소리들과 함께 우리는 작은 개울(전주천)을 건너고 언덕(현재 실로암병원 일대의 선교 스테이션)을 올라 전주의 테이트 선교사 집에 도착했습니다. 따뜻한 환영과 훌륭한 저녁 식사를 대접 받았습니다.
하루 종일 즐거운 날이었습니다.
지급품들과 대부분의 물품이 놀런 선교사와 제게로 왔습니다. 전킨 선교사의 부인이 물품들을 잘 보관해서 박사님(알렉산더 박사로 의료선교사로 군산에 왔으나 부친의 사망으로 곧 바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의료 선교장비는 고스란히 남았고 그것을 후임 선교사들이 나누어 사용하였다.)의 물품 상태가 좋았습니다. 드류(전킨 선교사와 함께 최초로 군산에 도착한 의료 선교사로 도중에 신병의 문제로 귀국하였다. 그가 남겨놓은 장비들도 후임 선교사들이 사용하였다.)선교사의 물품은 상태가 좋진 않았지만, 일부는 사용이 가능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좋은 장비를 얻었습니다. 어느 쪽 선교지에도 현미경은 없었지만, 우리는 그런 실험적 작업을 할 시간도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인 장비를 가져왔으며, 대부분 수술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장비는 있습니다.
군산에서 다니엘 박사가 한 아이의 다리에서 부러진 바늘 조각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습니다. 전주에서 저도 몇 건의 수술을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진료를 보는 건 아니지만요. 전킨 선교사는 군산을 떠나기 싫어했지만, 선교부는 그의 건강을 고려해 전주로 옮기기를 권했습니다. 이곳에서는 (군산에서처럼) 순회 전도가 적기 때문이지요. 군산에서 그의 작별 설교는 매우 감동적이었고, 그는 감정이 북받쳐 말을 잇지 못했으며, 많은 한국 교우들도 울었습니다. 여성들의 흐느낌이 교회 전체에 퍼졌습니다.
전주는 정말 좋은 곳이며, 군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 몇 주간 날씨도 매우 좋았고, 저는 한국에 깊은 인상을 받고 있으며, 이번 겨울에 열심히 사역할 계획입니다.
한국어 공부도 이미 시작했습니다. 놀런 박사는 오늘 아침 목포로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전라도 내륙 쪽으로 들어가 전주에 임시 숙소를 짓거나 마련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저희를 잠깐 방문하러 들렀습니다. 현재 맥커첸 선교사와 저는 잉골드(예수병원 설립자, 테이트 선교사의 부인) 박사님의 집에 임시로 살고 있습니다.
어젯밤 마을에서 큰 소란이 있어 내려가 봤더니, 언덕 바로 아래 있던 집들이 무너져 안에서 자고 있던 한국인들이 심하게 다쳤는데 뼈는 부러지지 않았습니다. 집은 완전히 무너졌고, 우리는 그들을 최선을 다해 치료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일이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테이트 선교사와 맥커첸 선교사는 곧 시골 전도여행을 떠날 예정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10리 가량 떨어져 있는 배당마을에 폐결핵 환자를 보러 다녀왔습니다. 그들은 아주 고마워했습니다.
…생략…
이 나라와 이 사역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한국인들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될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게일 선교사님과 박별 인사를 하는데 그는 “당신은 한국인을 점점 더 좋아하게 될 거예요.”라고 말했답니다.
오늘 저녁엔 풀 베는 낫에 발목 근처를 깊이 벤 사람을 봤습니다. 그의 상처 안에 풀잎과 먼지가 잔뜩 채워져 있었고, 발이 퉁퉁 부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제가 풀잎과 먼지를 털어내고 뜨거운 물로 깨끗이 씻은 후, 새 붕대를 감아 주었더니 훨씬 나졌고 그는 매우 안도하면서 진심으로 감사해 하였습니다. 그는 또 다른 질환으로 제가 치료하고 있는 환자 중의 한 명입니다. 이 사역에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기쁨이 있으며, 이 사역이 가능하게 된 건 박사님 덕분입니다.
해리슨 선교사가 오늘 군산에서 전주로 왔습니다. 서울에서 연례회의 후 평양에도 다녀왔다고 하네요. 불(Bull) 선교사는 좋아지고 있지만 다니엘 박사 말에 의하면 아직도 모르핀을 써야할 정도라고 합니다.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테이트 선교사와 맥커첸 선교사는 전도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서울에 있을 때 에비슨 박사의 새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40개의 병상과 진료소, 세탁소, 부엌 등이 완비된 시설이었습니다. 좋은 수술실고 갖추었습니다. 필라델피아의 세브란스 씨가 후원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28,000엔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필라델피아에서 허스트 박사도 에비슨 박사를 돕기 위해 막 도착했습니다.
내년 봄에는 평양에 있는 웰스 박사의 병원도 방문하고자 합니다. 전킨 선교사가 군산으로 어던 의사를 모셔올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올라가는데 저더러 함께 가자고 합니다.
…생략…
쓸 말이 너무 많아 어디서 멈춰야 할지 모르겠지만, 여기에서 멈추고 다음을 기약해야겠습니다. 박사님 가족과 폴 박사 가족에게 따뜻한 인사를 전합니다.
진심을 담아
W.H. 포사이드 드림
에필로그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였던 한 사람이 우리 곁을 지나갔다. 그는 갔으나 그의 흔적이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군산, 전주, 목포, 광주 등지에. 우리는 그가 남긴 편지와 이 땅에 남긴 사역을 통해서 그를 느낄 수 있다.
군산의 삼일 만세시위가 3월 5일에 남장로회 군산선교부가 구암에 세운 영명학교에서 시작되었고 군산 야구의 전통 또한 군산선교부에서 시작되었다.
군산 최초의 선교사인 전킨 선교사와 언제 어디서나 한국의 아이들과 허물없이 어울려 놀았던 포사이드 선교사가 군산 야구의 역사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대로 된 방망이나 공이 없이 엉성하게 만든 방망이와 공으로 게임을 가르치며 함께 어울려 노는 선교사들과 어린이들! 뙤약볕 아래서 땀 흘리며 던지고 치고 달리는 아이들과 선교사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고 그들이 외치는 고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름답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군산상고의 야구가 역전의 드라마를 만들어 내면서 얼마나 우리를 감동시켰던가! 처음에는 선교사들과 아이들의 놀이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국민의 스포츠가 된 야구에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줄 몰랐다. 포사이드 선교사나 전킨 선교사가 군산의 야구 소식을 들으면 참으로 행복해 할 것이다.
아이들과 야구게임을 하면서 행복했을 선교사님들의 얼굴을 그려본다. 그분들이 선교 현장에서 맛본 지상의 행복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기를 비우고 낮은 곳으로 내려온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었을 것이다.
2028년은 포사이드 서거 110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에서 당한 테러와 한국에서 얻은 풍토병으로 45세에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 분을 추모하는 모임이 있길 바란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랑의, 사랑에 의한, 사랑을 위한 삶을 살았던 포사이드 선교사를 기념하며 그처럼 용감하게 사랑의 길을 걷는 자들이 많아지길 빈다.
2025년 10월 2일 목요일, 축시
우담초라하니
참고 문헌
*와일리 H. 포사이드 저, 이숙 역 ⌜와일리 H. 포사이드 선교편지⌟, 보고사, 2025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편집 ⌜내한 선교사 총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