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문제가 풀리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았던 어느 날, 편의점에서 빼빼로를 샀다. 빼빼로를 먹으면서 예수님과 빼빼로의 차이를 생각해보았다. 성경은 예수님 안에서의 기쁨을 약속한다. 기분 좋아지려고 빼빼로를 먹는 것처럼 기쁘게 살고 싶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닐까?
먼저 성경에서의 기쁨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이 기쁨은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고 나에게 최선의 것을 예비하신다는 믿음에서 나오며 즐거움과 기대감, 그리고 안정을 준다. 감정과 상관없는 삶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성경의 기쁨은 행복과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는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키우시기 위해 노력하시는 부모님을 보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오히려 행복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 매 순간 내 뜻을 꺾어야 하고 내 시간과 돈을 바쳐야 하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또한 성경은 ‘예수님을 확신하라’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신의 존재와 예수님의 구원을 우리가 믿게 만들지 않으신다. 인간의 기술로 이것이 관측과 증명이 되는 날은 더 이상 선택의 기회가 없을 때일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때로는 불안한 일이기도 하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은 빼빼로에 연연하지 않는 것을 요구한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는 명령은 주님께서 우리를 기쁘시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인 동시에 괴롭고 불안해도 주님의 뜻대로 살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누가 빼빼로 먹는 기분을 내려고 빼빼로를 버리겠는가.
어쩌면 주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수님을 믿음에서 나오는 괴로움이 그 기쁨을 넘어선다면 탈선하고 싶기도 하다.
“삶은 경주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은 언제나 기쁩니다.” 빼빼로를 먹었던 날,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도 삶을 경주처럼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거운 여행처럼 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즐거우려다 보면 행복 즉 빼빼로와 같은 것들을 위해 뛰게 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뛰시며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그리스도인의 감정적인 기쁨 뒤에는 예수님을 기뻐하는 것 즉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괴로워도 멈추지 않는 삶이 있다. 감정이 목표가 된다면 기쁨은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빼빼로 먹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빼빼로가 아니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믿도록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정말 행복의 수단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항상 간격을 두며 말씀하시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의 기쁨을 가진 사람에게는 동행하시는 예수님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