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을 일깨우는 두 사건
성경을 읽다 보면 가끔 당황스러운 장면을 만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창37장과 창39장은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가는 사건과 그의 애굽 생활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유다와 다말의 사건(창38장)이 끼어든다. 요셉의 사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 사건이 왜 끼어들게 되었는지 어리둥절하게 된다.
여기에는 필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사건의 공통점을 종이에 적어보았다.
1. 둘 다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사건이다.
2. 두 사건에 돈(재물)거래가 있었다.
3. 둘 다 가족 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다
4. 두 사건 모두 하나님께 죄지은 사건이다.
5. 둘 다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 요셉은 우물 구덩이에서 살아나왔고, 다말은 불륜으로 돌에 처형당할 뻔했다가 살아났다.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5번에 초점을 맞추어 성경을 다시 정독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옷에 염소의 피를 묻힌 후 아버지에게 가져가서 “아버지 아들의 옷인지 청하건대 보소서”라고 했다(창37:32). 다말도 돌에 처형당하러 끌려나가면서 시아버지인 유다에게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인지 청하건대 보소서”라고 했다(창38:25).
“청하건대 보소서”의 히브리어는 “하케르 나(הַכֶּר־נָ֗א)”이다. “청하건대 보소서”라는 뜻도 있지만, “기도하고 구별해보세요”라는 뜻도 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기고는 아버지한테 가서는 “이 옷이 요셉의 옷인지 아닌지 기도하고 구별해보세요”라고 했다. 전형적으로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에 속아 넘어간 야곱은 요셉의 피 묻은 옷을 붙들고는 여러 날(יָמִים רַבִּים)을 통곡했다.
다말도 처형당하러 끌려가면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인지 기도하고 구별해보세요”라고 했다. 그것을 본 유다는 “그녀는 나보다 옳도다”라며 즉석에서 자신의 과오를 시인했다. 두 사건은 인간의 양심에 대한 극적인 대비를 보여준다.
창37장은 이렇게 끝난다.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창38장을 건너뛴 후 창39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어지는가?
그런데 창38장에 나오는 유다와 관련된 사건들은 최소한 20년 이상 걸린 사건으로 창37장과 창39장 사이에 끼어들어 갈 수 없다. 따라서 창38장은 다른 곳에 기록되어 있다가 옮겨진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언제, 누구에 의해 옮겨진 것일까?
北 이스라엘과 南 유다 왕국이 망했던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사회적인 윤리가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실을 제일 먼저 깨우친 사람들은 제사장들이었다.
그들은 이를 회복하기 위해 먼저 성경을 정리하고, 상형문자인 히브리어 문자를 읽고 쓰기 쉬운 사각 모양의 문자로 바꾸었으며, 회당을 지어 자신들과 2세들을 위한 신앙교육에 힘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유대인 아이들은 6세가 되면 무조건 회당에 나가 랍비로부터 토라를 배워야 했다. 의무교육이 시행된 것이다.
바벨론 포로 기간 중 제사장들이 성경을 정리하면서 다른 곳에 기록되어 있던 유다와 다말의 사건을 요셉의 사건 사이에 배치하도록 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했던 이유는 두 사건을 비교함으로써 2세들이 어느 길로 가는 것이 옳은지를 깨우쳐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p.s.
창37:32에서 개정개역 성경은 “청하건대(נָא)”를 빠뜨리고 “보소서”라고만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