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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는 측정될 수도 쪼갤 수도 없는 것이다. 더구나 루크레티우스에게는, 우리의 원자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욕망과 두려움과 미신, 이 셋을 벗어나게 하는 사유의 토대가 바로 원자였다. 그는 말한다. 인간의 삶을 내리누르는 종교의 무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넘치는 탐욕을 자연의 이치로써 이해하고 몰아내야 한다고. 그 자연의 이치가 바로 원자와 허공으로 이뤄진 우주다.
“자연은 거기로부터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사물들을 자라게 하고 키우며, 또한 같은 것들을 사멸하도록 다시 거기로 헤쳐 보내도다. 이것들은 우리가 이치를 설명함에 있어서, 재료라고, 사물이 될 생산적인 몸이라고 부르고, 사물의 씨앗이라고 지칭해 버릇하던 것이며, 같은 이것들을 첫 번째 알갱이라고 칭하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첫 번째 것인 이것들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기 때문이다.”(1:55-62)
이로부터 루크레티우스는 신을 설명하고, 영혼의 본성을 풀어내고, 죽음과 삶을 해명하고, 우리의 감각과 표상 작용을 밝히고, 벼락과 지진 같은 자연의 사건들을 스케치한다. 그것을 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지, 탐욕스럽게 집착하는 것들에 왜 매달릴 필요가 없는지를 풀어주면서. 결합하고 해체하는 원자들의 운동은 그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다. 원자는 영혼의 동요를 벗어나 지복에 이르게 하는 길잡이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세상이 원자로 되어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그걸 아는 일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과학은 원자의 크기를 알고 질량을 알고 그것을 쪼갰을 때 나오는 에너지의 가치를 알지만, 그 정보는 우리 생각이나 마음의 번뇌 한 조각도 바꿔주지 못한다. 원자는 측정된 물리량이고 공기처럼 당연한 팩트다.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고 쪼갤 수 있고 합칠 수도 있는 세상에 산다. 하지만 그 사실은 우리의 영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복은커녕 역으로 더 큰 동요를 불러올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사물을 통째로 잘못 보고 있던 것은 아닐까? 지금이야 원자가 있다고 책에 적혀 있고 그렇다고 배우니 그런 줄 알지만, 고대에는 실험될 수도 증명될 수도 없던 원자가 어떻게 탄생했던 걸까? 세계를 이해하는 수많은 설명들이 있었을 텐데, 그중에서 원자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었을까? 원자론을 채택하고 배운다는 것은 우주를 어떻게 이해해보려는 시도였을까? 또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으로서의 원자가 요청되었을 때, 거기에는 어떤 필요성이 있었고 그것은 어떤 생각들에 맞서는 것이었을까? atomos, 그것이 알고 싶다.
쪼갤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빈 곳이 있다
단순하지만 심오한 질문. 왜 원자가 있어야만 할까? 왜 확인도 할 수 없는데,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할까? 물질을 티끌보다도 더 작게, 무한히 분할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 왜 안 되는 걸까? 증발해 사라지는 먼지나 연기를 보면 실제로 그럴 법도 할 것 같은데 말이다. 루크레티우스는 간단하게 답한다. 어떤 것도 무한히 나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물이 그 최종적인 부분까지 필멸의 것이라면, 각각의 사물은 갑자기 눈앞에서 채여 가서 소멸할 테니까.”(1:217)
지금이야 거대한 입자가속기 실험으로부터 물질의 기본 입자가 쿼크와 렙톤이며 그 크기나 질량의 단위까지도 알려져 있지만, 고대인들에게 물질의 근원에 대한 논의는 그렇게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객관적 실험의 문제가 아니라 지성과 논리를 총동원하여 벌이는 사고실험이었다. 물질을 어디까지 나눌 수 있는가 하는 물음도 그 중심에 있었다. 가령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경주’로 유명한 엘레아 학파의 제논의 역설을 보자. 그는 물리적 질료를 무한히 분할 가능한 것으로 간주했다. 시간이나 공간이 그러하듯 존재하는 물질도 무한히 나뉠 수 있는 연속성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원자론의 창시자 데모크리토스는 여기에 차분히 대답했다. 사물을 무한히 쪼갤 수 있다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기하학적 점이 되거나, 무(無)로 소멸되어 버리거나, 어떤 다른 물체가 되거나, 비물질적인 형태일 것이다. 이 모든 결과를 따져보면, 처음에는 공간적인 연장을 갖고 있던 물체가 마지막에는 크기가 없는 부분들로 해체되어버리는 불합리한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있던 것이 ‘뿅’하고 사라져버리는 무한 분할의 이러한 귀결은, 그로부터 거꾸로 되돌아가서 물체를 다시 구성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루크레티우스의 표현대로 갑자기 눈앞에서 채여 가는 꼴이다. 이런 결론은 물질이 ‘존재’한다는, 즉 사라지지 않는다는 처음 가정과 모순된다.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쪼갤 수 없음이라는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어떤 것이든 사라지지 않는다, 자연은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부터 다시 만들며, 다른 것의 죽음으로 도움을 받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생겨나기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1:262)
아무것도 무(無)에서 생겨나지 않고, 아무것도 무로 사라지지 않는다. 루크레티우스는 이 두 개의 대전제로부터 원자의 존재를 끌어낸다. 우주 전체로 봤을 때 무엇도 새로 덧붙거나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면, 무한히 큰 우주라도 그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사물들은 그 안에서 어떻게 무언가가 되어가며 존재하는 걸까? 즉 어떻게 이것이 저것으로 ‘변화’하는 걸까? 가령 빗방울들은 무엇으로 흩어지며 새싹들은 무엇을 얻어 자라나는가? 무가 아니라면, 모이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무엇으로 흩어지는가?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작지만 결코 무로 사라지지 않는 최소의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더 이상 쪼갤 수 있는 사물의 최종적 보루가 있어, 그 알갱이들이 여기서 저기로 이것에서 저것으로 자리바꿈하고 있는 우주. 루크레티우스는 바람, 열, 소리, 습기 등을 예로 들면서 말한다.
“사물들 가운데 있으나 보이지 않는다고 그대가 인정해야만 하는 바의 물체들을 받아들이라”(1:270)
우선, 사물들의 변화를 일으키는 기본 단위로서의 원자가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아니, 그보다 어떤 것이 변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루크레티우스는 선배들의 사유를 받아들여 멋지게 활용했지만, 초창기 원자론자들은 더 근본적이고 갑갑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었다. 그중 가장 커다란 벽은 ‘세상의 모든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一者)’ 개념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물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있는 것으로서의 사물이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는가? 이를테면 공기가 물이나 불로 바뀐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변화한다는 것은 '있지 않은 것으로 됨'을 뜻한다. 그러나 있는 것을 있지 않다고 말함은 단연 진실이 아니다. 있는 것은 있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있지 않다는 것’은 존재로부터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땐 그것은 더 이상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거드리, <희랍 철학 입문>, 종로서적, 62쪽)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언뜻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이 논리대로라면 그 어떤 변화나 운동도 불가능하다. 있는 것의 ‘변화’는 곧 있지 않은 무언가 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그것은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따라서 변화는 불가능하다. 그럼 지금 우리에게 보이고 느껴지는 이 변화들과 운동들은 다 뭔가? 허구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우리가 감각하고 상상하는 모든 것은 백퍼센트 환영이다. 진짜 존재하는 것은 하나로 꽉 짜인 불변 부동의 일자이며 그것은 오로지 이성으로만 사유할 수 있다. 감각이 우리를 속이고 있을 뿐이다! 어처구니없게 들리지만 당시 이 논리는 반박하기 어려웠고 꽤나 지배적이어서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엘레아 학파라는 집단을 만들었다. 원자론자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바로 이 논리, 실재하는 것의 생성이나 파멸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를 돌파하려는 시도에서 떠오른 것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 완고한 일자로부터 운동과 변화를 구출할 수 있을까?
원자론자들의 과제는 엘레아 학파의 ‘존재’의 논리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그것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아무리 지성이 중요해도 우리의 모든 감각과 느낌과 경험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의 감각을 무시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존재하는 세계와 운동하는 세계를 함께 설명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 작업에 있어서 사실상 원자보다 더 중요하고 정교하고 우선적으로 논의되었던 사안은 빈 공간, 즉 허공의 문제였다. 허공의 존재야말로 원자론의 시작점이었다.
잠깐, 허공? 널린 게 허공인데 굳이 그 존재를 주장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조금 애매하다. 허공이 ‘있나’? 그러니까, 기체도 빛도 열도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 있나? 우리는 원자 하나 없는 진공에도 미세한 에너지의 흐름이 있다고 배운다. 그렇다면 어디든 뭔가가 채워져 있다는 셈인데, 그럼 운동이란 게 어떻게 가능한가? 즉 공간이 ‘있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면, 또 다른 ‘있는 것’인 사물들은 그곳을 통과하여 여기서 저기로 이동할 수 없지 않겠는가?
데모크리토스의 전략은 '있다'라는 말을 아주 세심하게 구분하는 것이었다. 즉 물질적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물질성과 상관없이 실재한다는 것을 구분했다. 그는 허공이 존재도 없는 곳임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 비어있음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만질 수 있는 것은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아직 차지되지 않은 공간, 만질 수 없는 여백이 있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즉 허공은 텅 비어 있는 자리로서 물질성이 없는 비존재자인 것은 맞지만, 비존재가 반드시 실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틈새 논리! 데모크리토스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풍부한 예를 든다(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비교될 정도의 박학자였다). 가령 삼각형이나 원 같은 기하학적 형상들은 비물질적이지만 실재하지 않는 건 아니듯, 연장 속성을 갖지 않는 허공 또한 실재할 수 있다. 또 우리는 잿가루 더미에 물이 스며드는 것을 본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 논리도 “창고에 빈 공간이 있다”와 같은 말을 허용하지 않는가? 따라서 비록 비존재자일지라도, 허공은 존재자 못지않게 ‘있는 것’이다. 이것이 확정되면 드디어 빈틈없이 하나를 이루는 ‘존재’를 깨는 일이 가능해진다. 마치 한 덩어리였던 성벽이 무수한 틈새를 가진 벽돌들의 집합체가 되는 것처럼.
“비존재자(비어 있는 것)은 존재자(꽉 차있는 것)를 나누고, 지극히 작아서 보이지 않는 무수한 존재자들을 만들어낸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는 엘레아학파가 ‘존재’에 부여한 속성들을 이 존재자에게 부여한다. 이 존재자들 역시 꽉 차 있고,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다. (...) [그들은] 무수히 많은 존재자들 역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분해할 수 없다고 했고, 따라서 이 존재자들을 원자, 즉 쪼갤 수 없는 것이라고 불렀다.”(콘스탄틴 밤바카스, <철학의 탄생>, 알마, 421쪽)
허공은 일자를 일자‘들’로 만든다. 그것이 원자다. 일자와 똑같이 원자도 영원하고 불변하고 쪼갤 수 없다. 단, 무수히 많다는 것만이 차이다. 원자들은 허공을 통과해 여기서 저기로 움직일 수 있다. 허공의 존재를 명시함으로써, 원자론자들은 파르메니데스가 내세운 ‘존재’의 조건들을 위배하지 않으면서 원자들이 운동하는 우주를 그릴 수 있었다. 원자론의 우주에서는 허공과 원자, 이 둘만이 불변하고 영원하다. 나머지 모두는 그 둘이 어떻게 섞이느냐에 따라 다르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우연적 성질”이다. 허공은 원자들의 무대이고, 그 위에서 불멸하는 존재자들이 섞이면서 필멸하는 사물들을 빚는다. “그것들은 만일 빈 공간이 없었다면, 쉼 없는 움직임을 빼앗겨 잃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그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생겨나 있질 못했을 것이다. 도처에 물질들이 에워싸인 채 정지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1:342) 아무것도 없는 것인 허공이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있게 하는 것이다!
원자는 이렇게 탄생했다. 불멸하는 이상 세계를 깨부수고, 필멸하는 사물들의 생성을 옹호하면서! 허공 속 원자들의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뭔가가 만들어지고 또 스러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만남도 헤어짐도, 태어남과 죽음도 마찬가지다. 모인 것은 반드시 흩어지고, 커진 것은 반드시 줄어든다. 세계는 그렇게 흘러왔고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어떤 사건에도, 일어난 것 너머의 의미나 목적이 없다.
그러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물었다. 그래, 세계가 원자들의 운동이라 해보자. 그럼 그 운동은 어떻게 시작했지? 그는 원자론자들이 운동의 최초 원인을 따지는 문제를 “경솔하게 건너뛰어 버렸다”고 질책했다. 아마도 사물들의 ‘원형’이나 ‘제1원인’으로서의 신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에 골이 났으리라.
이에 루크레티우스는 답한다. 원자들의 운동에는 시간상의 시작이 없다. 그런 운동에 있어서 논리적 단계를 입증할 필요가 어딨겠는가? “만일 원자들이 처음에는 운동하지 않다가 갑자기 운동하기 시작했다면, 이렇게 갑자기 운동하게 된 원인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운동이 영원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이 운동의 원인을 파고들 필요는 없어진다.”(밤바키스, 427쪽) 게다가 원자들은 당구공처럼 고정된 경로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진동하며 미세하게 원래 경로를 빗겨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떻게 ‘최초’를 가정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원자의 유물론은 일자뿐 아니라 제1원인으로서의 신도 쫓아낸다. 아니, 나아가 그마저도 원자들의 집합체로 만들어버린다. 어떤 섭리도, 목적도, 외부적 개입도, 신의 의도도 사라진 세계. 그 안에서 우리는 신과 죽음 앞에 벌벌 떨 필요도 제물을 바칠 필요도 없다. “사물들의 총체는 항상 새로워지고, 필멸의 존재들은 서로 차례 바꿔 산다.”(2:78)
이것이 루크레티우스가 원자론으로 밝히려 한, 두려울 것 하나 없는 자연의 밝은 풍경이다.
무엇이 우리를 구원하는가?
세상은 원자로 되어있다. 우리는 그것을 들어서 안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그것을 싸워서 이해했다. 그들에게 원자는 우주와 운동과 영혼을 설명하기 위해 발명한 개념이었다. 그리고 루크레티우스는 누구보다도 원자를 필요로 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괴로움을 넘어가기 위해서였다.
사치와 미신, 오락과 종교가 나란히 번창하던 팽창기의 로마인들을 보면서, 그는 시종일관 물었다.
“우리로 하여금 그만큼이나 의혹과 위험 속에 떨도록 강제하는 것은 삶에 대한 어떤 못된 큰 욕구인가?”(3:1076)
우리의 탐욕과 두려움은 자연에 대한 어떤 무지와 몰이해로부터 나오는 걸까? 루크레티우스는 긴 시를 통해 이 질문에 답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원자가 있다. 원자와 허공 외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로부터 삶과 죽음, 영혼과 신체, 감각과 표상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그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것을 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지, 탐욕스럽게 집착하는 그것에 왜 매달릴 필요가 없는지 풀어간다. 영혼의 동요로부터 풀려나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원자와 더불어 루크레티우스가 말하는 구원이다.
21세기의 우리도 원자와 더불어 어떤 구원을 꿈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대의 히어로 아이언맨을 생각해보자. 그는 마블 히어로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데, 물론 그건 외계 세력들을 물리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그가 토르나 헐크 같은 다른 영웅들과 달리 초능력이 없는 ‘보통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는 슈트를 빼면 시체다. 번쩍번쩍한 슈트와 날아다니는 첨단 무기들이 그를 초능력자보다도 더 강한 인간으로 만든다. 그런데 그 어마무시한 힘을 가진 강철 조각들을 작동시키는 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의 가슴팍에 꽂혀 있는 ‘아크 원자로’에서 나오는 힘, 다시 말해 완벽하게 제어된 원자력이다. 주먹 크기만한 아크 원자로는 일종의 인공 태양이다. 거기서 나오는 무제한적 에너지가 그의 강철 슈트는 물론 뉴욕 한복판의 거대한 빌딩까지 작동시킨다. 놀랍게도 여기에 아무런 방사능 폐기물도, 탄소 배출 걱정도 없다! 그 원자로만 있다면, 인간은 그 어떤 초능력자보다도 강해질 수 있으며, 누릴 것을 전부 누리면서도 머리 아픈 환경파괴 걱정 없이 선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꿈이 아니던가. 그 중심에는 원자가 있다. 원자력이 우리를 외부의 적으로부터, 온실가스의 증가로부터, 에너지의 한계로부터, 자연의 제약으로부터 구해주리라!
여기, ‘원자’를 사이에 두고 있는 두 개의 구원이 있다. 원자론의 구원과 원자력의 구원. 루크레티우스의 구원과 아이언맨의 구원. 탐욕과 두려움으로부터의 구원과 탐욕과 두려움을 수반하는 구원. 과연 이 두 번째 것이 구원일 수 있을까? 대체 이런 테크놀로지들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 원자력이, ‘하이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실존적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넘어가게 할 수 있을까? 고대와 비교했을 때, 아니 지난 몇십 년 전과 비교해봐도 우리는 이미 넘칠 정도로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고, 아프고, 중독되고, 갖가지 미신을 만들며 살고 있다. 아무리 원자에서 최대의 힘을 뽑아낸다 한들 이런 삶의 황폐함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가 말하듯, 문제는 세계 위에 우뚝 서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가 어떤 세계 속에 살고 있는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묻고 이해하지 않고서는 반복되는 괴로움을 벗어날 수 없지 않을까?
“그것이 어떤 원인으로부터 생겼으며, 어디서 와서 그렇게 큰 해악의, 말하자면, 돌덩이가 가슴속에 들어앉아 있는지도 분별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대부분의 경우에 보듯이 삶을 그렇게 살지는 않으리라.”(3:1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