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강의 아버지 홍필승의 돌연한 죽음이 불러온 사연은 칠십 년 전의 시간을 재생한다. 홍필승의 장례식장으로 김동연이 조문을 온다. 김동연은 홍해강의 어머니 정인주의 친구 서정임의 아들이자 해강의 초등학교 동창생이다. 김동연이 미국으로 이민 간지 오십 년 만의 만남이었다.
홍해강은 아버지 홍필승이 살아 있는 동안 한 번도 자신에게 애정을 보이지 않았음을 서운해 했다. 김동연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났을 때 작은 도시에 살던 정인주와 서정임은 스무 살이었다. 서정임의 아버지가 북한군을 피해 남으로 피난가자 정임은 인민군들의 등쌀에 자신의 집에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면서 홍해강의 외할아버지 정연재가 운영 중인 삼세병원의 아랫집 상춘당에 머물렀다. 상춘당 뒷산에는 방공호가 있었고 그 안에는 경찰 홍필승이 숨어 지내고 있었다.
홍필승은 일제 식민지 시절 삼세병원의 사환이었다. 정인주와 서정임은 상춘당 우물가에서 남침한 인민군 대위 김단과 마주치게 되었다. 김단은 삼세병원 병실을 인민군 장교 숙소로 사용했다. 정인주와 서정임은 김단과 음악실에서 음악감상을 하던 중 미군의 공습을 받기도 한다. 미군이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며 김단은 정인주와 서로 사랑을 확인조차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빨치산으로 활동하던 김단은 상춘당으로 정인주를 찾아와 하룻밤을 묵으며 사랑을 확인하고 황급히 북한으로 철수했다. 이후 해강을 임신한 정인주는 어쩔 수 없이 신분이 낮은 홍필승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딸 해강에게 명목상 아버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953년 휴전과 함께 정인주는 딸 홍해강을, 서정임은 아들 김동연을 낳았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남파간첩이 된 김단이 정인주를 다시 찾아왔고 그는 다음날 또 월북하고 만다. 두 해 후 정연재 원장이 인민군 부역혐의로 구속되었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의 부상을 치료해준 혐의였다. 정인주는 홍해강이 공산당원 김단의 딸인 것이 탄로 날 것이 두려워 죽은 듯이 지내야 했으며, 이후 서정임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훗날 홍해강은 의사가 되고 김동연은 미국의 대학 교수가 되었다. 김동연은 아내와 이혼한 후 어머니 서정임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다.
홍필승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동연의 어머니 서정임은 홍해강과 함께 정인주의 묘소에 들러 김단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인주와 김단의 애절한 사연을 말해준다. 그렇게라도 서른한 살 김단과 스물아홉 살 정인주의 ‘숨어 있던 생’이 연결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