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둑한 돈주머니를 만지며 흐뭇한 기분으로 관청에서 퇴청한 방종대가 관복
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는 동안 그의 등뒤에는 방씨 집안의 가장 늙은 하인
하나가 시립해서 오늘 아이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보고를 하고 있었다.
"첫째 도련님은 문학사님에게 배우는 시간이 끝나고 나서 방으로 곧바로 돌
아가셔서 글공부를 계속 하셨습니다."
"화련이는 무엇을 하던가?"
"예, 나리. 둘째 아가씨는 관청의 연무장에서 방호 중에서 고수로 알려진 노
군명에게서 삼재검법이라는 것을 배우고 계셨습니다."
"그럼 셋째는?"
"수련 아가씨는 마님 방으로 들어가셔서 화장을 하고 마님의 패물 상자를 꺼
내 몸에 치장하는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허--, 제대로 된 놈은 장남 밖에 없구나---, 그럼 막내는 오늘도 하루종일
졸더냐?"
푸른색의 평복으로 갈아입은 방종대는 좋았던 기분이 망가져 가는 것을 느끼
며 물었다. 거의 포기한 막내였지만 그래도 일말의 기대라는 것을 가지고 물어
보는 방종대였지만 늙은 하인은 고개를 저었다.
다음 순간 방종대는 점점 얼굴이 붉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 다른 아이들은 나름대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그 시간에도 소구 녀석은 여
전히 잠만 자고 있다고-----?"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던 방종대는 늙은 하인을 향해 말했다.
"수고했네. 그만 가서 쉬게나."
"예 나으리. 소인은 그럼 물러갑니다요."
늙은 하인은 고개를 숙이고 방 밖으로 물러갔다.
옷을 다 갈아입은 방종대는 탁자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갈증이
그의 목을 태웠다.
" 정녕---, 소구 녀석의 그 잠버릇은 병이라고 해야 하나?"
방종대는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막내의 그 지나친
잠은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아주 귀한 약재를 먹어치우고 나서 생긴 잠버릇
이었다. 몸에 엄청 좋다는 그런 약재를 먹어치운 아이의 힘은 일곱 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세진 것을 확인한 방종대였다. 병든 녀석이 그렇
게 힘이 셀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방종대는 막내가 게을러서 그렇거니 하
고 매로 다스리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몇 달 동
안 계속 그렇게 혼이 났음에도 막내는 점점 더 자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탐관이라고 소문난 방종대였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가족에 대한 애착은 큰 것
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막내의 잠버릇을 고치기 위해 매를 든다는 것이 그로서
도 이제는 힘이 들었다.
그렇게 방종대가 고민하고 있을 때 어느새 방으로 들어온 방종대의 아내가
조용히 비어있는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었다.
'쪼르륵'
주전자에서 차를 따르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방종대는 물었다.
"여보, 어떻게 생각하오?"
하얀 궁장을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그녀는 찻주전자를 들고 탁자 옆에 서서
물끄러미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시집오기 전부터 아주 아름다운 여자였
다. 그래서 그녀를 차지하려고 방종대는 별 수단을 다 강구해야 했다. 그녀는
거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폭의 그림 같이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지
만 그녀의 입에서는 아주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남편이 무엇을 물어보는지 그녀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정말이지--, 당신은---."
그렇게 말을 끊은 후 가슴속에서 울어나는 화를 삭힌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모두가 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당신만이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고요.
지금 소구 나이 또래의 아이라면 장난치고 돌아다니길 좋아 할 나이라는 것을
설마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죠? 그런데 소구 녀석이 하는 행동은 -----, 죽을
때가 다 된 노인처럼 하루종일 잠만 자고 있잖아요. 이러다 소구 녀석이 죽으
면 당신은 어쩌려고 의원을 안 부르는 거죠?"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잔잔한 것이었지만 그 내용은 신랄하기 그지
없었다. 신랄한 비난을 묵묵히 들으면서 방종대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던 방종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 야심한 시각에 어디 가시려고요?"
"소구한테 가보려고 하오."
"또 매를 들 작정이신가요?"
방종대는 우울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그냥 한 번 보려고."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방을 나와 정원을 가로질러 소구의 방으로 가는 방
종대의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가 겁내고 있는 것은 의원이 소구가 치
유할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렸다는 말을 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 자신의 실수
로 벌어진 일이기에 그는 더욱 두려웠다.
관직을 사기전에는 그는 중원과 변방의 작은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행상을 하
고 있었고, 고려 땅에 들어가게 된 적이 있었다.
인삼을 사서 중원으로 가지고 오는 동안 한 늙은 노인을 도와 준 대가로 받
은 산삼들--, 그것 덕분에 벼슬을 사서 이렇게 관직에 앉게도 되고, 가족들 모
두 잔병치레를 겪지 않게 되었지만 막내만은 달랐다. 그 노인이 준 산삼 중에
특이한 것이 하나 있었고, 그것은 인연이 닿지 않는 자가 먹으면 천벌을 내린
다는 말을 듣고 인삼삼자 속에 깊숙이 감춰두었다. 그것을 네 살 먹은 소구 녀
석이 먹어치웠던 것이다. 자신의 관리 소홀로 인해 막내가 죽는다면 방종대로
서는 참기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그 약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고 있던 방종
대는 약도 약이었지만 소구가 죽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
었다. 거기다 이 일을 누군가 알면 소구 녀석을 잡아먹으려 드는 인간이 생길
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한사코 의원을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가 갈
수록 비정상적으로 잠만 자는 자신의 막내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마음은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침상 위에 잠옷으로도 갈아입지 않은 막내아들이 잠에 빠져있는 광경이 방종
대의 눈에 들어왔다.
그 광경을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던 방종대는 다시 아들의 방을 빠져 나와 정
원으로 걸어갔다.
깜깜해진 밤에 빛나는 별무리를 보면서 방종대는 결심을 굳혔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함부로 먹으면 병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싫지만 이제
는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의 막내아들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이곳으로 이
사 온 뒤 아들은 점점 더 자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어쩌면 이 막내가 영원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방종대의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방종대 일가의 밤은 깊어가고 있을 때 다른 두 곳에서는 밀담이 이루
어지고 있었다.
노인은 멍하니 넋을 잃고 침상 위를 쳐다보았다.
" 아버지, 그 놈을---, 그 놈을 반드시 죽---죽여-----컥!-----."
"오냐,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 놈만은 반드시 죽여주
마!"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아들은 피를 토하며 소리치다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아
들의 손을 움켜쥐고 대답하던 노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아들의 고개는 옆으로 꺾였다.
비단으로 된 금색의 옷을 걸치고 있는 노인은 잠시 무표정한 표정으로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아들을 쳐다보았다. 자신보다 수십년은 더 오래 살아야 할 자
식이 먼저 죽는 꼴을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이가장의 장주 이충염이었다.
'네 놈이 아무리 소림사의 비호를 받는 놈이라 할지라도 이번에는 절대로 죽
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를 부드득 갈며 침상 옆에서 일어선 이충염이라는 이름의 노인은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들 이엄의 몸을 반병신이 될 때까지 때
린 엄소군의 등뒤에는 소림사가 있어서 이 하남성 일대에서 활동하는 살수들은
고용할 수 없었지만, 다른 지역의 살수를 고용할 수 있었다. 청부살인을 업으
로 삼고 있는 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살수집단에 의뢰를 한 상태였다. 이
곳마저 의뢰를 거절한다면 더 이상 살수(殺手)를 고용할 길은 사라질 것이다.
창문 밖으로 깜깜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는 이 노인의 마른 얼굴 위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얻은 막내아들이 지금 죽은
것이다. 참으려해도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 두 달을 질질 끈 재판은 끝이 나고 아들은 무죄로 풀려나고 그자는 유
죄를 받고 옥 안에 갇혔다. 그러나 두 달 내내 각혈을 하며 고통스러워하던 아
들은 끝내 쓰러져서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져 버린 것이다.
노인은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팠다.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것은 그의 아들이었
고 그 아들은 지금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얼굴은 하얀 천으로 덮여 있
고 밖에서는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와 노인의 심사를 한층 더
어지럽혔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지만 졸지에 아들을 잃어버린 아비의 마음은 복수심으로
불타올랐다.
노인의 귓가로 작은 목소리로 들려왔다.
'당신의 의뢰는 살막(殺幕)에 접수되었소. 그리고 요청대로 일급 살수(殺手)
가 보내질 것이오. 요금은 언제 지불하겠소?'
슬픔에 가득 차서 눈물을 흘리고 있던 주름살 가득한 노인의 얼굴은 열려진
창 밖으로 하늘만 보라보다 땅으로 시선을 던져졌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아무
도 보이지 않았지만 거기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노인은 창문 밖으
로 툭하고 소매 속에 준비해둔 주머니를 던지며 말했다.
"그자는 등봉현의 관아에 있소."
노인의 입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돈주머니가 땅에 떨어지
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더 이상 어떤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노인은
자신에게 이 슬픔을 맛보게 한 건달 또한 자식과 똑 같이 죽음에 이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복수를 위해 적어도 그가 알기로는 중원 최고의 살수조직
이라는 살막(殺幕)에 막대한 거금을 들여 살인을 청부 한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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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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