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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과 한국을 바꾼 이건희의 3가지, “목숨 건 도박 같았다”
| 절박함, 지독한 공부, 깊은 생각
1993년 여름 삼성그룹이 전격 실시한 ‘7·4제’는 삼성과 우리나라 산업사(史)의 획(劃)을 그은 사건입니다. ‘7·4제’는 그해 7월 7일 일부 도입 후 닷새 후인 12일부터 모든 계열사로 확대된 ‘오전 7시 출근, 4시 퇴근제’로 2002년까지 9년간 시행됐다.
2004년 삼성전자의 경기도 기흥 메모리반도체 공장을 찾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삼성전자
이 제도를 세계 최초로 창안한 이건희(李健熙·1942~2020) 회장(이하 이건희로 약칭)은 한달 전인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호텔에서 ‘신(新)경영’을 선언했다. 그는 이날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며 삼성 종사자들에게 모든 폐습(弊習)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롭게 도약하자고 강하게 촉구했다.
◇ ‘신경영’, ‘7·4제’로 세계 1등 제패
이후 이건희는 8월4일까지 68일 동안 런던과 일본의 오사카·후쿠오카·도쿄를 오가며 350시간 임직원 간담회를 가졌다. ‘말’로써 설득하는 동시에 출퇴근이란 시간·공간·육체적 변경으로 ‘의식혁명’을 밀어붙인 것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993년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한 뒤 같은 해 7월 일본 오사카에서 삼성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신경영' 강의를 하고 있다./조선일보DB
훤한 대낮인 오후 4시에 모든 사원들이 퇴근해 자기계발토록 하는 ‘7·4제’는 세계 기업 문화를 통틀어도 찾기 힘든 ‘파격’이었다. 1938년 삼성상회(三星商會)로 출발한 삼성그룹 역시 밤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야근을 미덕(美德)이자 경쟁력으로 삼아왔다.
2017년 1월3일 대구시 북구 침산동 대구삼성창조경제단지 내에 복원된 삼성상회. 삼성물산이 보관해온 옛 삼성상회 건물 자재를 활용해 지상 4층 규모로 지었다./조선일보DB
그런 점에서 ‘7·4제’는, 삼성이 양적(量的)위주 성장·사고방식과 결별(訣別)하고 ‘질(質)’ 중심 선진 기업으로 웅비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개개인의 변화와 혁신을 촉구한 ‘신경영’의 생활판(版)인 이 제도의 위력은 상당했다. 한국의 삼류 제조회사였던 삼성전자는 9년 후인 2002년 일본 소니를 추월했고, 다시 7년 뒤인 2009년 매출액 세계 1위 IT기업에 올랐다.
◇ “1992년 한 해에 체중 10kg 넘게 줄어”
한국의 많은 오너 경영자 가운데 어떻게 이건희만 이런 기발(奇拔)한 발상으로 기적적인 성취를 이뤘을까? 의문을 푸는 세 가지 열쇠가 있는데 먼저 ‘절박감’이다. 그가 생전에 유일하게 쓴 책 <이건희 에세이-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 있는 구절이다.
“19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업 한두 개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삼성 전체가 사그라들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때는 하루 네 시간 넘게 자본 적이 없다. 불고기를 3인분은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대식가인 내가 식욕이 떨어져서 하루 한끼를 간신히 먹을 정도였다. 그해에 체중이 10kg 이상 줄었다.” (57쪽)
고(故) 이건희 회장이 생전에 유일하게 쓴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는 부제(副題)를 달았다. 1997년 11월 출간 당시 판매가는 6500원이었으나 최근 온라인 중고서적 사이트에서 한 권당 20만~30만원에 거래되고 있다./조선일보DB
수면 시간을 뺀 20시간 동안의 행적에 대해 이건희는 1993년 한 강연에서 “작년 1월부터 내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작년 8월부터는 잠이 오지 않더라. 매일 책 보고 물어보고 조사시키고 했다. 10월부터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가 그룹 총수로서 군림하거나 안온(安溫)한 삶은커녕 절박한 책임감으로 숱한 번뇌의 밤을 보냈다는 토로(吐露)이다. 선친인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타계한지 13일 만인 1987년 12월1월 열린 2대 회장 취임식에서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발언은 한동안 ‘메아리없는 약속’이었다. 그의 말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987년 12월 1일 서울시 중구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2대 회장 취임식에서 비감(悲感)한 표정으로 사기(社旗)를 흔들고 있다. 그는 당시 45세였다./조선일보DB
“회장에 취임하고 나니 막막하기만 했다. 삼성 내부는 긴장감이 없고 ‘내가 제일이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이런 삼성의 현실과 세기말(世紀末)적 변화에 대한 위기감에 등골이 오싹해질 때가 많았다.” (같은 책 56쪽)
‘말하기’ 보다 ‘듣고 침묵’하는 게 특기인 이건희는 1993년 내내 다변가(多辯家)로 변했다. 그 해에만 사장단 대상 800시간, 임직원 상대 350시간 등 총 1200여시간 강의를 했다. A4용지로 약 8500쪽, 200쪽짜리 책으로 42권 넘는 분량이었다. 그는 “일류로 변해야 한다. 그럴려면 ‘나 자신’부터 질(質)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정말 목숨을 건 도박...‘이건희 혁명’”
당시(1993년 10월~96년 12월) 회장 비서실장이던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은 자서전 <위대한 거래>에서 “이 회장의 모습은 마치 목숨을 건 사람처럼 절박해 보였다”며 이렇게 회고했다.
“가까이에서 본 회장은 마치 전쟁터에서 살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군인(軍人)처럼 보였다. 정말 목숨을 건 도박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이건희 혁명’에 몸을 담가 개혁에 앞장서자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아마 다른 사장들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 사업장에서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직원들이 불량 휴대폰·팩스·전화기 등을 태우고 있다. 이날 화형식(火刑式)후 삼성전자의 불량률은 크게 감소했다./삼성전자
1993년 5월 이건희의 일정을 보면 ‘은둔의 경영자’라는 세평과 정반대였다. ‘중소기업 경영자 대상 강연(12일)→고려대학교 강연(15일)→KBS라디오 ‘경제전망대’ 출연(17~20일)→한국과학기술원 강연(26일)’…. 그의 78년 생애에서 가장 활발한 연속 공개 활동이었다.
이런 모습에서 “필요하면 50년 넘게 굳어진 내 생활방식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그의 과단성과 결단력이 드러난다. 그해 2월18일 미국 LA에서 사장단 대상 9시간 강의로 시작된 이건희의 ‘신경영 전도(傳道)’ 활동은 1년 넘게 한국 사회 전체를 뒤흔들며 공감(共感)을 샀다.
1997년 이건희 회장이 전자 소그룹 사장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연합뉴스
◇ “서른 번이라도 찾아가 배워야 된다”
여기서 ‘지독한 공부’라는 두 번째 열쇠가 나온다. 이건희가 자신의 관점과 철학, 즉 내공(內功)을 오랫동안 쌓아오지 않았다면, 그의 강의와 신경영 추진은 중간에 흐지부지되거나 좌초됐을 것이다. 그가 대충 겉핥기가 아닌 ‘눈에 불을 켠 공부’를 했다는 방증이다. 이건희의 말이다.
“부회장 시절인 40대일 때도 내 나이 또래든 내 나이보다 조금 많든 적든간에 나는 그들을 선생님으로 모셨다. 강의도 12시간, 20시간씩 받으면서 열심히 배웠다. 자기보다 지식이 앞선 사람한테 배울 때는 ‘삼고초려’의 정신으로 이쪽에서 머리를 숙이며 세 번 네 번, 안될 땐 서른 번이라도 찾아가서 배워야 된다.” (’삼성新경영’ 121쪽)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서울 한남동 그의 침실을 직접 가본 기외호 당시 비서팀장은 “책장은 물론 바닥에까지 각종 책과 자료들이 널려 있었고 침대 모서리에는 미국·일본에서 보내온 엄청난 영상 자료들이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야행성(夜行性)인 이건희가 매일 새벽까지 빼놓지 않고 이들을 봤다는 얘기입니다.
삼성 신경영 실천위원회가 1993년 9월 10일 사내 비매품(社內 非賣品)으로 발행한 <삼성 新경영>책자. 1993년 6월7일부터 약 3개월 동안 이건희 회장이 한 8500쪽 분량에 해당하는 발언을 199쪽으로 정리했다./송의달 기자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 근처에 있는 고(故) 이건희 회장의 자택. 이곳은 풍수지리상 용(龍) 머리에 해당하는 명당으로 알려져 왔다./조선일보DB
조용상 전 일본삼성 사장은 “이건희 회장은 일본인 기술 전문가들을 정말 극진히 대접했다. 당신 스스로를 낮추고 예의와 성의를 다하는 모습에 감동한 일본인 고문들은 삼성에 조언과 정보를 주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경제사상가 이건희’ 76~77쪽)
사실 이건희의 ‘지독한 공부’는 20대 후반부터 시작됐고 자신과 삼성, 나아가 대한민국의 명운(命運)을 바꾸었다. 이건희는 “1961년 일본 와세다대 상학부로 유학가기 이틀 전 아버지로부터 ‘네 성격엔 기업이 안 맞는 것 같다. 매스컴이 어떻냐?’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1989년 12월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밝혔다.
1980년 아버지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함께한 이건희 부회장. 당시 이건희는 38세였다./조선일보DB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 수료후 1966년 귀국한 그가 처음 한 일은 삼성 비서실에 출근해 삼성 관련 신문기사에 빨간 줄을 쳐서 올리는 일이었다. 당시 그는 “소년 시절 꿈도 별로 없었다. 대학 다닐 때 공부에 정말 취미가 없었다”고 말하는 재벌가의 평범한 청년이었다.
1967년 홍라희(1945~ ) 여사와 결혼하고 1968년 중앙일보·동양방송(TBC) 이사로 경영 수업을 시작한 그는 그러나 조금씩 달라졌다. 이병철 회장과 고위 임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가 1974년 4억원의 개인재산을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한 게 한 증거이다.
3년 만에 흑백TV용 트랜지스터를 만든 이 회사는 다시 3년 만에 칼라TV용 집적 회로를 만들었고, 또 다시 3년 후인 1983년 11월엔 64KD램 개발에 성공해 삼성의 반도체사업의 밑거름이 됐다
1983년 11월 64킬로바이트D램 개발생산 경축 행사 모습/삼성전자
◇ “20대 후반부터 ‘지독한 공부’ 계속”
그는 이 결정으로 1983년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선언한 아버지로부터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다. 삼성전자 연구원 출신인 김병완 작가는 자신의 책 <이건희 27 법칙>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20대 중반까지 이건희는 공부보다는 영화나 개나 스포츠에 더욱 더 많은 관심을 보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를 삼성의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의) 장남과 차남이 모두 경영 능력 부족 등으로 눈밖에 나서 더 이상 삼성을 물려받을 적임자가 없다는 현실을 통감(痛感)한 이건희는 그때부터 지독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309~310쪽)
1993년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은 미국 등 선진국 언론들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 1994년 2월28일자는 이건희 회장을 커버스토리로 다루며 '삼성경영혁명'이란 표지 제목을 달았다./인터넷 캡처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 1979년 삼성그룹 부회장을 맡아 후계자로 공식화된 뒤에도 이건희는 외부 사람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기 보다 집에서 경영·기술 관련 책을 읽거나 전자제품을 분해·조립하며 지냈다. 수시로 전문가들도 불렀다. 그는 사석에서 “주말에 우리 집에 초대해 한 수 배운 일본 기술자만 수 백명을 넘는다”고 했다.
그는 골프와 파티를 즐기고 연예인들과 어울려 놀던 일부 재벌 2세들과 확연히 달랐던 것이다. 이건희는 “맥주 반 컵만 마시면 두드러기가 나고 근지럽다”고 할 정도로 술을 못했다. 47세였던 1989년 12월 인터뷰에선 “술집에 1년에 두세 번 가면 많이 가는 겁니다”라고 했다. 회장 취임후 공식 석상에서 외국인들과 와인 건배를 할 때도 미리 와인 색과 비슷한 음료를 컵에 담아놓았다. 1990년대 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한번은 김영삼 정권 시절 스페인 국왕의 방한(訪韓) 행사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전날 밤을 새워 책을 읽고는 눈이 벌게져서 청와대에 간 적도 있다. 그의 방은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의 것처럼 늘 책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술 중독자들이 밤새워 술을 마시는 것처럼 책 중독자인 그 역시 밤 새워 책을 읽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건희의 서재’ 58쪽)
1994년 1월21일 청와대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과 30대 재벌그룹 회장단 오찬 모임 모습. 김영삼 정부 출범 1년이 채 안된 시점이었다. 맨 왼쪽부터 구자경 LG그룹 회장, 최종현 SK그룹 회장, 김영삼 대통령,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등이다./조선일보DB
◇‘ 깊은 생각’과 ‘궁리’...입체적 사고
그의 다른 진면목(眞面目)이자 세 번째 열쇠는, 이건희가 ‘생각 중독자’라 불릴 만큼 ‘생각의 대가’(大家)였다는 사실이다. 서울사대부고 동기인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은 생전에 “건희는 독특한 ‘세상 보기 안목’을 갖고 있었다. 내가 한참씩 궁리해야 비로소 말뜻을 알아들을 때가 허다했다”고 썼다. 이건희는 1989년 12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배경을 털어놨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게 버릇이 됐다. 그래서 내성적이 됐고 친구도 없고 술도 못먹으니 혼자 있게 됐다. 그러니까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생각을 해도 아주 깊게 생각하게 됐다.”
1972년 서울 장충동 자택에서 (왼쪽부터 시계방향)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이명희 신세계 그룹 회장,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이인희 전 한솔그룹 고문,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삼성
1942년 1월 대구에서 출생한 직후 그는 경남 의령 본가로 보내져 네 살때까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5학년때 일본으로 유학간 것을 포함해 초등학교 시절에 6번 전학을 다녔다. 소년시절 일본에서 3년 살면서 극장에서 1200~1300편의 영화를 보는 ‘지독한 고독’ 속에서 그는 자연스레 ‘생각’하고 ‘궁리’(窮理·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함)하는 습관을 키웠다.
진돗개를 돌보고 있는 이건희 회장/조선일보DB
한 예로 고독감 때문에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개[犬]와 가까이 지낸 그는 10년 넘는 연구와 현지답사 끝에 1983년 진돗개를 세계견종(犬種)협회에 공식 등록시켰다. 그는 승마·레슬링·휴대폰·농사기술·골프 등 무엇에겐 깊고 파고드는 집념과 끈기의 소유자였다. 터득할 때까지 온갖 책·자료를 섭렵했고 전문가에게도 물었다. 그는 ‘개박사’ ‘골프박사’ ‘휴대폰박사’가 됐고, 직관(直觀)과 통찰력(洞察力)이 몸에 배였다.
경영이나 일상사와 관련해 그는 최소한 다섯 번 정도 ‘왜?’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일[事]의 본질(本質)을 계속 캐물었고 의식적으로 입체적 사고를 했다. 이건희의 말이다.
“나는 일하고 챙기는데 내 나름의 몇가지 원칙과 습관이 있다. 먼저 목적을 명확히 한다. 다음은 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파악한다. 본질을 모르고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는다. 본질이 파악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물어보고 연구한다.” (‘이건희 에세이’ 34쪽)
“오늘날처럼 모든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는 동일한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는 ‘입체적 사고’가 필요하다. 영화를 감상할 때 주연, 조연 뿐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처지에서 보면 모든 사람의 인생까지 느끼게 된다. 감독, 카메라맨의 자리에서까지 생각하면서 보면 또 다른 감동을 맛볼 수 있다.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입체적으로 보고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사고의 틀’이 만들어진다.” (같은 책 38~39쪽)
2002년 삼성그룹 사장단 워크샵에서 이건희 회장이 말하고 있다./삼성전자
◇ “21세기 경영자는 철학자의 경륜 필요”
본질에 대한 탐구와 성찰은 무수한 선문답(禪問答)을 낳았고, 이를 통해 이건희는 선지자(先知者)적 능력을 갖게 됐다. 25년 전인 1997년, 이건희는 기술이 지배하는 ‘팍스 테크니카(Pax Technica)’ 시대를 예견했다.
“선진국들은 과학기술을 국가 안보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과학기술이 부족하면 경제 식민지가 될 뿐 아니라 국가 안보마저도 남의 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19세기가 군사력, 20세기가 경제력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기술 패권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책 173쪽)
삼성전자가 256메가 D램 세계 최초 개발을 기념해 1994년 9월 각 신문에 실은 전면 광고. 구한말 당시 태극기를 크게 실어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극일(克日) 의지를 보였다./삼성전자
경영관(觀)도 여느 대기업 총수들과 차원이 달랐다. 이런 식이다.
“경영이 무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답한다.(중략) 나는 ‘경영은 종합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경영의 뒤에는 탁월한 경영자가 있다. 21세기형 경영자는 스스로 변화를 일으키고 유연한 조직 문화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변화에 대한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고 조직 내에 전파할 수 있는 철학자의 경륜(經綸)이 요구된다.” (같은 책 38·275·276쪽)
회사 출근 대신 그가 주로 자택에서 일한 것도 남다른 ‘생각’을 위한 몰입과 관련 있어 보인다. 혼자만의 고독 속에서 그는 ‘신경영’ ‘7·4제’ ‘지역전문가제도’ '마하 경영' ‘초격차 경영’ 같은 큰 그림을 그렸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11년 7월 29일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열린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서 권오현 사장으로부터 반도체 사업 현황과 신기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조선일보DB
세부 실행은 김광호·윤종용·최지성·권오현 같은 전문 경영인들을 믿고 맡겼다. 제3세계의 변방 회사이던 삼성전자는 지금 애플·구글·마이크로소프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일류 글로벌 기업이다. 1987년 2조원대이던 삼성전자의 매출은, 그가 타계한 2020년에 246조원대로 111배 늘었다. 삼성그룹의 시가총액은 같은 기간 1조원에서 719조원으로 비약했다.
◇ 선진국으로 이끈 義人...‘소명의 실천자’
그는 33년 전 취임식에서 한 약속 이상을 완수(完遂)하고 2년 여전 떠났다. 삼성의 도약을 지켜본 국민들까지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자기 혁신에 힘쓰게 됐으니, 이건희는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이끈 ‘의인(義人)’이자 ‘소명(召命)의 실천자’이다.
2020년 10월 28일 오전 서울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발인식을 마친 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운구차가 장례식장을 빠져나오고 있다./조선일보DB
삼성그룹 계열사들의 합계 매출액 증감 추이/자료=한국CXO연구소
2011년 7월 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이건희 회장이 인사하고 있다./연합뉴스
2022년 가을 세계 정치와 경제, 안보와 기술의 판이 요동치고 있다. 세계가 경제 양극화·대공황·자유주의와 전체주의 진영간의 혈투로 점철된 20세기 전반 30년(1914~45년)처럼 되어 간다는 관측도 나온다. 위기일수록 시대를 앞서는 화두로 방향을 제시한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과 냉철한 나라사랑이 그립다.
그는 25년 전 “우리는 지난날 나라를 팔아먹은 이(李)완용을 매국노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지금 나야말로 김(金)완용, 박(朴)완용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자문(自問)해 봐야 한다. 제2의 이완용이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할 때”(‘이건희 에세이’ 127쪽)라고 했다. 우리가 지금 이 회장께 다시 묻는다면, 그는 “모두 깨어나 절박한 마음으로, 공부하고, 생각하며 각자 최선을 다해 달라”고 얘기하실 것 같다.
경제사상가 이건희(양장본 HardCover)|저자 허문명|출판 동아일보사|2021.10.20.
✵ 책소개 :
1. 사상가로서의 이건희 회장을 만나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타계한지 꼭 1년(10월 25일)이 되었다. 이 책은 고인의 1주기를 맞아 고인과 가까이에서 일했던 전직 삼성맨들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중심으로 하면서 고인이 남긴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를 부분 발췌해 고인의 사상과 철학을 담았다.
이건희 회장은 기업인이었지만 시대를 앞서 읽은 예언자였으며, 이 힘든 세상을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 지혜를 말해준 사상가였다. 지금까지 이건희 회장을 다룬 많은 책은 오직 그의 리더십과 기업 경영 능력을 다루는 쪽에 국한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허문명 기자가 전직 삼성맨들의 증언, 고인이 남긴 글과 자료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완성해낸 이 책은 기업인이 아닌 사상가로서의 인간 이건희를 본격 조명한다. 책을 읽다보면 지금은 만날 수 없는 고인의 생각과 삶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 저자 : 허문명 기자
1990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사회부ㆍ경제부ㆍ문화부를 두루 거치며 선후배 동료들과 취재원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사회부에서는 ‘삶은 복잡하다’는 인문학적 상상력을, 경제부에서는 ‘삶은 비용이다’라는 사회과학적 상상력을, 문화부에서는 ‘삶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유심론적 상상력을 키웠다. 사회부 기자 시절, 언론사상 여성으로는 최초로 사건팀장을 맡았다. 논설위원을 거쳐 현재는 국제부 차장으로 근무하며 글로벌 세상을 실감 중이다. 삶은 허망한 것이고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한줄기 변치 않는 우정, 사랑, 신의 같은 게 있다고 믿는다. 활달한 상상력으로 삶의 지평을 열어준 불교철학에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 현각 스님의 출가 수행기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엮었고 숭산 스님의 가르침을 담은 《선의 나침반》을 번역했으며 그의 평전 《삶의 나침반》을 펴냈다.
✵ 목차 :
저자의 말 | 한국의 산업사는 ‘비포 이건희’와 ‘애프터 이건희’로 나뉜다
Part 1 변해야 살아남는다
01 비효율이 비도덕이다/02 새로운 변화에 과감히 맞서라/03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04 비전은 매크로하게, 지시는 마이크로하게/05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본질에 대한 탐구/INTERVIEW | 기보 마사오 전 고문과의 일문일답
Part 2 파격적인 상상, 현실이 되다
06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과 예언/07 제품의 질이 아닌 삶의 질/08 신경영은 문화혁명이었다/09 몸이 바뀌어야 정신이 바뀐다/REVIEW | 인터뷰와 글을 통해 보는 이건희의 내면 1
Part 3 업이란 무엇인가
10 다양한 앵글로 업을 바라보다/11 업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12 원점 사고가 먼저다/13 브랜드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INTERVIEW | 인형무 변호사와의 일문일답
Part 4 기술 경영으로 미래를 준비하다
14 빨리가 아니라 먼저다/15 변화를 선점하는 안목/16 모두가 이기는 지혜를/INTERVIEW | 야마자키 가쓰히코 전 서울지국장과의 일문일답
Part 5 미술과 기술이 만나다
17 경영에 미술을 더하다/18 문화는 든든한 부모와 같다/19 기업의 철학과 문화를 파는 시대가 온다/20 철인이자 광기를 품은 예술가/REVIEW | 인터뷰와 글을 통해 보는 이건희의 내면 2
✵ 책 속으로 :
그가 생각하는 도덕성은 일반의 관념과는 좀 달랐다. 그는 기업 내부에 비효율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도덕적인 일이라고 했다. 기업 내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그래서 나쁜 것이라고 했다. 그의 시선은 ‘돈’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는 듯했다. -p.28
흔히들 이 회장에 대해 ‘위기 경영’의 화두를 던진 기업인이라고 한다. 생전에 고인이 내놓은 한마디 한마디가 뉴스가 되고 사회적 공명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가 단지 삼성의 위기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산업계의 위기,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까지 고민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p.60
삶의 질이 바뀌어야 제품의 질이 바뀐다는 그의 말은 매우 본질적이다. 생전의 그가 기업의 목적을 단지 이윤 추구에만 두지 않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p.121
고인은 말에 그치지 않았다. 실천하고 행동했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만족하지 않고 늘 위기의식을 갖고 변화하는 바깥세상과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엄청나게 공부했다. -p.188~189
이건희 회장의 기술관은 알기 쉽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p.262
뭔가를 오래 수집해본 사람들은 안다. 거기에는 취향, 관심을 넘어 물건 하나하나를 손에 쥐기까지 들인 정성, 다시 말해 영혼이 배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건희 컬렉션’을 받아드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p.337
피 말리는 결정과 선택 앞에 선 기업인들에겐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p.384
✵ 출판사서평
“글로벌 코리아는 ‘비포(before) 이건희’와
‘애프터(after) 이건희’로 나뉜다”
1. 사상가로서의 이건희 회장을 만나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타계한지 꼭 1년(10월 25일)이 되었다. 이 책은 고인의 1주기를 맞아 고인과 가까이에서 일했던 전직 삼성맨들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중심으로 하면서 고인이 남긴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를 부분 발췌해 고인의 사상과 철학을 담았다.
이건희 회장은 기업인이었지만 시대를 앞서 읽은 예언자였으며, 이 힘든 세상을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 지혜를 말해준 사상가였다. 지금까지 이건희 회장을 다룬 많은 책은 오직 그의 리더십과 기업 경영 능력을 다루는 쪽에 국한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허문명 기자가 전직 삼성맨들의 증언, 고인이 남긴 글과 자료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완성해낸 이 책은 기업인이 아닌 사상가로서의 인간 이건희를 본격 조명한다. 책을 읽다보면 지금은 만날 수 없는 고인의 생각과 삶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이건희 회장의 통찰과 지식은 깊고 넓었다. 경제경영 전반은 물론, 물리학, 수학, 사회학 심지어 아동심리학까지 넘나들었고, 한국과 일본의 문화, 역사에 통달했다. 그러한 사상과 철학의 바탕 위에서 이 회장은 새로운 변화에 과감히 맞서 도전했고 변화의 속도만큼 절박한 태도로 기업을 움직였다. 고인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고 늘 과거가 아닌 미래를 주시했다. 이건희 회장을 만난 많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생전의 그를 단순한 경영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다.
이건희 회장은 전통적인 제조업이 주류였던 한국의 산업을 디지털 정보산업으로 바꾸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산업사는 ‘비포 이건희’와 ‘애프터 이건희’로 나뉜다고 할 수 있겠다. 1978년 삼성전관에 입사한 뒤 이건희 회장 취임 때 비서실 운영팀 과장으로 ‘이건희 회장 비서실 1기’ 멤버였던 박근희 전 삼성생명 부회장(현 CJ대한통운 부회장)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건희 회장은 1980년대 말부터 ‘디지털 인력을 키워야 한다’거나 ‘소프트 경영을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디지털’이라는 말은 글로벌 시장에서 제품들이 막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요즘 인공지능AI 시대를 준비하는 것처럼 ‘아,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준비해야 겠구나’ 정도의 생각은 할 수 있었지만 소프트 경영이라는 말은 상당히 생소하고 추상적으로 다가와서 ‘대체 무슨 말이지?’ 하는 분위기였다. 회장이 (현장 경험 없이) 부회장에서 바로 회장에 취임했으니 뭐 현실성 없는 이야기를 하시나 보다’ 정도로 생각했고, 당시 사장들은 ‘저러시다가 말겠지’했던 것 같다.”
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장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소프트 경영을 주창했던 이건희 회장의 메시지야말로 고인을 기업인 이전에 사상가이자 철학자 반열로 볼 수 있게 하는 면”이라며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1980년대 말 ‘소프트웨어 인재 1만 명을 양성하라’는 지시를 받고 인사팀에 강제로 명령해 소프트웨어 인력을 잔뜩 채용했는데, 몇 년 뒤 추적해보니 다들 엉뚱한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회장의 의도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몰랐던 거다. 돌이켜보면 회장은 4차 산업혁명을 이미 1980년대부터 내다보고 있었다. 앞을 내다보는 예지력이 뛰어났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기업가 이전에 사상가이자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인과 깊이 교류했던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 야마자키 가쓰히코 전 서울지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좋은 자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세 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첫째가 심침후중(深沈厚重)이다. 깊게 가라앉는다, 두텁고 무겁다는 것을 뜻하는 한자 네 개를 나열한 것인데 항상 당당하고 침착한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두 번째 좋은 자질로는 호방뇌락(豪放磊落)이다. 매우 당당하고 결단력이 있으면서 행동은 다이나믹하며 소소한 일은 일절 신경 쓰지 않는 대담한 사람들이 갖는 자질이다. 3등 자질은 총명재변(聰明才辯)이다. 머리가 비상하고 말이 뛰어나다. 고인은 이 모두를 겸비한 분이다. 동시에 혼돈한 상태를 깨뜨려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파천황(破天荒)적인 분이다. 정말 보기 드문 위대한 경영자였으며 경영자 이전에 철학자, 사상가적 성향이 강한 분이었다.”
서울대 사대부중, 사대부고 동창으로 지금은 세상을 떠난 홍사덕 전 국회의원과 함께 고인과 죽마고우였으며 현재 생존인물 중 이건희 회장을 가장 오래 가까이에서 접했던 인형무 변호사도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인은 너무도 많은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분이다. 기술에 해박했다는 점에서 공학자이기도 했고, 본질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철학자이기도 했으며, 역사와 인간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는 점에서 문화인류학자이기도 했다. 한민족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히 강했다. 이 회장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고인의 인품과 상상력, 철학에서 배운 것이 너무 많다.”
그를 가까이에서 접해 본 삼성맨들은 이건희 회장이 평소 말을 하기보다 듣는 것에 집중한 경청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은둔형 경영자’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공식석상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말도 어눌한 눌변이었다. 그래서 생전의 그와 대화를 나눠 본 사람이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책에 등장한 다양한 삼성맨들의 증언을 퍼즐처럼 맞춰보면 인간 이건희, 경영자 이건희, 사상가 이건희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하나로 그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2. 왜 지금 다시 그의 신경영 어록을 읽는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미국의 철학자 니컬러스 버틀러는 “기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는 혁신은 거의 대부분 국가가 아닌 기업에 의해 이루어졌다. 기업은 인류에게 ‘밥’과 ‘일자리’와 ‘미래’를 제공해온 가장 중요한 사회제도다. 오늘날 국력의 기준도 군함이나 병력 숫자보다 세계적으로 내세울 만한 기업이 과연 몇 개나 있는지가 아닐까. 해외에 가보면 한국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한국의 대기업들 이름을 아는 이들은 많다. 그러나 기업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위대한 기업인이 있어야 한다.
“삼성을 초일류 기업을 만들겠다”던 이건희 회장의 약속은 현실이 됐다. 변화의 키워드로 대표되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신 경영 정신은 한국을 넘어 지구촌 곳곳에 뿌려졌다. 대한민국 국민과 기업인에게 세계 일류 DNA를 심어주었던 그가 삼성과 대한민국에 던졌던 말들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지금 다시 천금만금의 무게로 다가온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과 기후변화라는 지구적 위기 속에서 국제 질서가 크게 출렁거리고 있다. 대한민국이 피 말리는 국제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뼈아픈 자기부정과 환골탈태가 시급한 상황이다. 저자는 “이 시점에서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던 이건희 회장의 절규를 되살려 다시 대한민국을 꿈틀대게 해야 하지 않을까“라면서 평전 집필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 책이 단지 한 위대한 기업인에 대한 업적 찬양이나 위인전에 머무는 것이 아닌 이유는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이때, 끊임없이 위기를 경고하고 변화와 혁신을 역설했던 고인의 삶과 생각이 힘과 에너지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93년 신경영 현장에서 변화를 진두지휘했던 고인의 말들은 지금 이 순간 미래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유용한 실천적 지침이자 앞날을 설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나침반이 되기에 충분하다.
3.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날카로운 통찰과 지혜
이 책은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온 이건희 회장의 말과 개혁으로 첫 장을 시작한다. 고인이 당시 쏟아낸 말들은 기억에도 아득한 먼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박제된 목소리가 아니라 바로 이 순간,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게 한다. 안개가 자욱한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지금, 이렇듯 절박하게 위기를 말하는 지도자가 과연 있는가 하는 묵직한 질문 앞에 서게 만든다.
고인이 28년 전 했던 말들은 마치 지금의 혼돈을 예감하고 있는 듯 촌철살인의 메시지가 많다. 본문에 나오는 말들을 인용한다.
“두뇌 산업으로 모든 걸 바꾸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정신, 환경, 제도, 시간의 위기라는 사면초가에 처해 있다. 그중에서도 정신적 위기가 제일 큰 문제다. 기업가는 투자 의욕을, 근로자들은 근로 의욕을 잃고 있다.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나 사회의 리더들은 앞장서서 문제를 풀어나가지 못하고 구심점 없이 표류하고 있다. 시대는 급변하는데 아직도 낡은 옷을 걸치고 과거의 제도와 관행에 얽매여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
“옛날에는 위기의식과 헝그리 정신으로 눈이 반짝반짝했는데 지금은 그저 잘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들을 하고 있다.”
“경제적 공황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지만 심리적 공황은 한번 빠지면 쉽게 벗어나기 힘들다.”
“경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지금처럼 변화가 궤도 없이 빨라지는 시대에는 모든 걸 뒤집어 바라보는 원점 사고가 필요하다.”
“과학기술이 부족하면 국가 안보까지 위태롭다. 19세기가 군사력, 20세기가 경제력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기술패권주의 시대다.”
“나눌 몫이 적으면 피를 나눈 가족도 갈등한다. 파이를 더 크게 키우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
“이런 경제 전쟁에서는 끓고 있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죽는 줄도 모르고 무너질 수 있다. 이 전쟁의 패자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반목과 대립의 시대는 지났다. 한쪽이 모든 걸 얻거나 잃어버리는 게임보다는 모두가 이기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사상가 이건희 회장은 패배자체보다 패배의식이 문제라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몸을 던져서라도 난관을 돌파하겠다는 정신적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일이다. 진정한 힘은 사람에게서 나오며 그 힘은 밖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다.”
“잘나가던 사람이나 기업이 한번 패배해서 이류 인생, 이류 기업이 되고 나 면 다시 일류로 올라서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패배 자체의 타격보다 패배 의식이 심중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패배 의식은 공포를 불러오고 의지와 행동을 위축시킨다. 지금 불황의 단면들이 곳곳에서 보이 는데 어떤 이는 공황의 조짐까지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가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공황은 오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 무서워해야 할 것은 패배 의 식에 사로잡히는 일이다. 경제적 공황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지만 심리적 공황은 한번 빠지면 쉽게 벗어날 수 없다.”
4. “미래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생전에 그를 가까이에서 만났던 전직 삼성맨들은 고인이 항상 미래를 말했다고 증언한다. 생전 고인의 말이다.
“향후 10~20년 변화는 더 클 것이다. 인간이 바뀐다는 게 아니라 경제 제도, 시스템, 판단 속도, 정보 습득 방법이 바뀐다는 거다. 당장 10년 전과 비교해 봐라. 등허리에 진땀 날 정도의 변화가 있지 않았나. 나는 미래를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지금 세계는 업(業)의 개념이 급속도로 바뀌어가고 있다. 과거 10년 동안 세 상 이 바뀐 것보다 앞으로 10년 동안 더 빨리 더 많이 바뀔 것이다. 자동차에 서 전기·전자 비중이 지금은 25~30% 정도지만 앞으로 10년 뒤엔 50% 이상 이 돼 전기·전자 연구 안 하면 외국과 경쟁하기 힘들게 될 것이다.”
변화와 혁신의 전도사이기도 했던 그의 ‘변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담긴 철학은 구체적이다.
“모든 변화는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동심원의 파문이 처음에는 작지만 점점 커져 호수 전체로 확산돼나가는 것과 같이 모든 변화의 원점에는 나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나부터 변화’, ‘너부터 변화’는 비 록 획 하나의 차이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전부(全部)와 전무(全無)의 차이인 것이다. 그리고 변화의 방향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큰 배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노를 저으면 배는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다.
변화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변화가 가져올지도 모를 불편, 불이익에 저항하는 이기주의의 전형적인 예가 ‘총론 찬성, 각론 반대’다. 그러므로 변화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공감대를 확보하는 것이 성공하는 지름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미시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부분 최적화에 집착하게 되고, 그 결과 나갈 길을 찾지 못한 채 미로 속을 열심히 뛰어다니기만 하는 모르모트와 같은 신세가 될 지도 모른다. 변화의 방향을 올바르게 제시하고 속도를 조절하는 ‘변화의 관제 탑’으로서 사회 지도층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 다. 그리고 한꺼번에 모든 변화를 이루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보아도 혁명이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
아무리 실력 있는 산악인도 처음부터 에베레스트를 오르지는 않는다. 인수봉 을 비롯하여 비교적 덜 험난한 국내의 산악을 두루 거친 후에야 티베트로 향 한다. 변화란 쉬운 일, 간단한 일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라가야 한다. 작은 변 화라도 지속적으로 실천하여 변화가 가져다주는 좋은 맛을 느껴보고, 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정치·경제적 환경변화는 우 리에게 강도 높은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변화 불감증’, ‘복지부동’에 대한 비판과 질책만이 비등할 뿐 실질적인 변화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바다 속의 조개는 주위가 조용하면 기어 나와 활동하다가도 시끄러우면 두꺼운 껍데기를 꼭 닫고 움직이지 않는다는데 바로 이런 자세가 발전의 걸림돌이다. 미래에는 무겁고 두꺼운 껍데기를 과감히 깨뜨리고 변화를 추구하는 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 즉 변화의 일상화만이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 성공을 거두었던 수많은 변화들의 공통점은 세 가지다. 나는 지금까지 이 공통점을 올바른 변화의 계명(誡命)으로 삼아 기업 경영에 적용하려 애써왔다.”
5. “업의 경계가 사라지는 지금, 원점사고가 필요하다”
고인은 무엇보다 업의 개념에 천착했다. 변화가 궤도 없이 빨라지는 지금 같은 시대에 모든 것을 뒤집어 생각하는 원점사고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일하고 챙기는 데 내 나름의 몇 가지 원칙과 습관이 있다. 먼저 목적을 명확히 한다. 보고를 받을 때도 보고의 목적과 결정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한다. 다음은 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파악한다. 본질을 모르고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는다. 본질이 파악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물어보고 연구한다. 나는 삼성의 임직원들에게 ‘업의 개념’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당신이 하는 일의 업의 개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사람들이 당황한다. 대답할 준비가 되 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가 하는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모든 사물과 일을 대할 때 원점 사고를 갖고 새롭게 바라보아야 비로소 본질 을 파악할 수 있다. 프로 골퍼들이 슬럼프에 빠지면 골프채 잡는 법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나의 업을 생각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사업을 영위하는 기본 정신과 목적은 무엇인지, 둘째, 사업을 하는 데 필요한 핵심 기 술과 제품 특성 그리고 유통 구조상 특성은 무엇인지, 셋째, 관련 법규와 제 도, 기술 개발, 소비자의 의식 변화 등 외부 여건의 변화는 어떤지 하는 것이 다. 예를 들어 제약 사업이라고 할 때 ① 기본 정신면에서는 ‘인류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사업’이고, ② 기술적인 특성은 ‘화학·미생물학 등 기초과학은 물론 유전공학과 같은 첨단 기술이 필요한 사업’이며, ③ 사회 제도 면에서는 ‘정부 규제가 많은 사업’이다…흔히 ‘자동차업이 뭐냐’고 할 때 ‘네 바퀴를 축으 로 하고 구동장치를 얹은 탈것(수레)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업’이라고 한다면 틀 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자동차업은 이보다 더 큰 개념이다. 자동화된 대형 일 관 체제를 갖추고 연구개발 시스템과 판매 네트워크를 기본으로 하며 ‘할부 금 융과도 유관한 산업 또는 비즈니스’라고 정의 내려야 한다. 앞으로는 가솔린 연 료가 없어지고 수소 연료나 전기로 움직이게 될 것이므로 수송업이 아니라 전 자·전기 업으로 바뀔 수 있다.”
고인은 계열사 사장들에게 화두를 던지듯 업의 개념을 파악하라고 했는데 원대연 전 제일모직 사장 말에서도 그런 게 느껴진다. 본문에 소개된 원 전 사장 말이다.
“회장이 어느 날 전 사업 부문 책임자들에게 ‘업의 개념을 정립하라’고 해서 그제야 ‘패션업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타사 브 랜드보다 값싼 제품을 많이 만들어 팔아 매출을 올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 했다. 섬유 봉제업은 가격 경쟁력을 잃으면 망하기 딱 좋은 업종이다. 당시 삼 성도 중국이든 동남아든 제작 단가가 싼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패션업을 파고들어가 보니 정보기술IT 못지않은 ‘선진국형 고부가가치 문화 창조산업’이란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렇게 업의 개념을 세우니 비전이 달 라졌다. 더 이상 사양산업이 아니라 문화 산업이었다. 회장이 제시한 ‘업의 개 념’은 고인이 단순한 경영자가 아니라 본질을 탐구하는 사상가라고 느끼게 하는 대표적 메시지였다.”
비슷한 일화는 또 있다. 고인은 신용카드업 개념을 물장사에 비유하기도 했다. 1994년 1월 금융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불쑥 “신용카드업의 개념이 뭐냐”고 물은 뒤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외상 관리업”이라고 한 것. 사장단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자 이 회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카드업은 외상값을 잘 받아야 한다. 아무리 영업을 잘해도 돈을 제때 받지 못하면 망하는 경우가 많다. 즉 채권 관리가 생명이란 거다. 실적을 올린다고 마구잡이로 회원을 모집하면 당장 경쟁사와의 외형 경쟁에서는 앞서나갈지 몰라도 나중에 가면 연체와 부실채권 양산으로 힘들어진다.”
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회장은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업의 개념을 설파했다. 그리고 생각할 거리 를 많이 던져줬다. 어느 날은 안양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던 임원들끼리 골프장 업의 개념이 뭔가 토론을 벌인 게 기억이 난다. 코스를 잘 만드는 것은 기본이 요, 향후 땅값이 오를 것까지 계산에 넣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부동산업이고, 나무를 잘 키워 미래에 팔 수 있다는 점에서는 조경업이라는 상상력까지 확대 됐다. 이렇게 회장의 철학은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생각의 씨앗을 뿌려 자 신이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배종렬 전 제일기획 사장의 증언이다.
“회장은 매년 10월쯤 되면 관계사 사장들을 불러 저녁 식사를 하며 보고를 받 고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10여 명의 사장이 돌아가면서 얘기하고 나면 새벽 1시가 넘어야 끝이 날 때가 많았다. 회의는 단지 사업 보고를 하는 자리가 아 니라 회장의 경영 철학, 경영관, 인생관을 배우는 자리였다. 고인의 깊으면서도 넓은 지식과 생각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품 브랜드 구찌와 에르메스가 말안장에서 탄생했다는 얘기에서부터 개犬에 대한 이야기까지 화제가 정말 다 양했다. 주제도 하나에 집중하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예를 들어 신라호텔 사 장에게는 ‘접시는 몇 개이고 종류는 몇 가지인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해 옛날 여인숙에서 시작하는 한국 숙박시설의 역사, 일본 료칸의 역사, 서양 호텔 역사 를 두루 꿰면서 호텔업의 본질을 설명했다. ‘호텔’이란 주제 하나만 갖고도 2시 간 이상 얘기하곤 했다. 회장은 인간, 생활, 삶의 모든 것을 비즈니스와 연계해 생각하는 분이었다.”
6. 단독 미공개 인터뷰들과 이건희 컬렉션
책에는 처음 공개되는 인터뷰들이 많이 실려 있다. 인형무 변호사의 ‘학교 일진을 때려눕혔던 건희’도 눈길이 가고 기보 마사오 등 삼성전자 초기 시절 삼성에 영입된 일본인 기술인 고문의 장문의 인터뷰, 야마자키 가쓰히코 전 서울지국장의 증언 등은 최초 공개되는 내용들이다.
특히 기보 마사오 전 고문이 이회장과의 첫 면접에서 ‘이 나라는 30년 전까지 굶어 죽은 사람이 있을 정도로 가난했던 나라였다. 기보 씨가 도와주는 셈치고 입사해 달라’고 했을 때 이회장이 이익을 최고로 여기는 기업이 아니라 기업을 통해 나라와 국민을 잘살게 만들고 싶은 ‘사업보국’정신을 가진 애국자로 느껴졌다고 말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기보 전 고문은 삼성의 가장 큰 성공비결을 묻는 질문에 “이건희 회장의 집념 때문이었다”고 단언한다.
고인은 일찍이 기술이 지배하는 ‘팍스 테크니카’ 시대를 예견하기도 했다.
“선진국들은 과학기술을 국가 안보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과학기술이 부족하면 경제 식민지가 될 뿐 아니라 국가 안보마저도 남의 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19세기가 군사력, 20세기가 경제력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기술패권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일반화된 ‘상생’이란 말이 고인의 처음 썼던 말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고인은 상생의 철학을 이렇게 설파하기도 했다.
“파이를 독점하는 이기주의는 일시적으로는 득을 보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는 모든 것을 잃는다. 협력해서 파이를 더 키워 나누는 상생의 지혜가 필요하 다. 오늘날 세계의 흐름 역시 반목과 대립에서 벗어나 경쟁자에게도 내 것을 주고 협력함으로써 더 큰 것을 얻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러나 국내 사정 을 돌아보면 우리는 아직도 좁은 테두리의 소모적 상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파이를 키우기보다 얼마 되지도 않는 파이를 나누는 데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고 있다. 나눌 몫이 적다 보면 피를 나눈 가족도 이기적인 갈등 을 겪고 대립하게 마련이다. 아직 우리는 파이를 더 크게 키우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하는 단계에 있다. 대승적 차원에서 서로 양보하고 화합하는 상생의 길이 장래 더 큰 몫을 가져다주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한편 저자는 책에서 ‘미술과 기술이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최근 화제가 된 ‘이 건희 컬렉션’에 대해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많은 내용을 할애했다. 사업뿐만 아니라 문화에서도 초일류를 지향했던 고인의 생각과 철학을 새삼스럽게 느껴볼 수 있는 대목이 많다. 실제로 고인의 삶에서는 기업 경영이나 문화를 보는 상상 력이 별개 영역이 아니었다. 그는 기업이 단순히 제품만 파는 단계에서 더 나아 가 자기 기업의 철학과 문화를 팔아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고, 이런 관심과 노 력을 빠르게 실천으로 옮겼다.
◇ 참고한 책
삼성 新경영(1993년), 이건희 에세이(1997년), 이건희(홍하상·2003년), 스물일곱 이건희처럼(이지성·2009년), 이건희의 서재(안상헌·2011년), 이건희 27법칙(김병완·2012년), Samsung Rising(Geoffrey Cain·2020년), 경제사상가 이건희(허문명·2021년·이상 출간 순서 기준), 월간조선(1989년 12월호)
출처: 〈조선일보 2022년 09월 11일(토) 조선경제|산업·재계 (송의달 에디터) 〉, 〈동아일보 (경제사상가 이건희(허문명·동아일보사) 〉, 인터넷 교보문고
첫댓글 고봉산 정현욱 작가님
경제사상가 고 이건희회장
읽다보니 몰랐든 비하인드 스토리가 너무 많아 시간가는줄도 모르고 다 읽었는데 이 글을 쓴 집필자부터 이건희 정신을 닮은듯 이건희 경영철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보고 박사학위 논문 쓰듯 철저히 연구했다는
사실에 먼저 놀랬습니다
고 이건희회장의 인생역정은 부자가 되어 평생 웃으며 누구보다 행복하게 산것이 아니라 평생 무거운 지개짐을 지고 험한 산길을 오르는 고행의 일생이었다는 생각에 눈시울까지 뜨거워지네요
대한민국을 세계의 중추국으로 만든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