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의 문화산책]
노벨문학상이라는 폭풍, 그 너머
이문열 분서갱유가
야만이었듯
과도한 한강 비난,
문학 몰이해
이제 세계가
한국 작가 읽을 것…
그것만으로도
수상 의미는 충분
10월 10일 저녁 유튜브 ‘민음사TV’의
노벨문학상 현장 라이브에 나온
출판사 직원 3인은 전원 ‘해외 문학’
담당자였다.
지역·성별 안배를 고려해 그들이
유력 후보로 꼽은 작가는 중국의
찬쉐, 일본의 다와다 요코,
캐나다의 앤 카슨 등이었다.
발표자의 입에서 ‘한강’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방송 사고인 듯 모두가
얼어붙었다.
‘한국 문학’ 담당은 참석조차 하지
않은 생중계,
“(수상작을 펴낸 출판사 직원들은)
퇴근하다가 다시 회사에 돌아가고
있겠다”
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K컬처’를 둘러싼 기류가 심상찮기는
했으나 아무도 ‘감히’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까지는 기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폭풍과 같다.
소설가 한강의 아시아 여성 최초,
한국 첫 노벨문학상 소식은 문학계를
넘어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많은 책이
팔리며 (몇몇) 출판사와 (대형) 서점과
인쇄소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마땅히 축하할 일이다.
작가 개인의 영광인 동시에 한국
문학의 큰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원어로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는 말이야말로 언어 공동체로서 우리가
함께 누리는 감격의 표현이다.
열광한 군중의 시간은 지나지 않았지만,
폭풍 한가운데서 맞닥뜨린 특이점들은
기록해 둠직하다.
어떤 사건에도 반응 속도와 양상이
남다른 한국 사회이기에, 월평균
독서량 0.8권으로 세계 최하위권에 속한
국민들이 갑자기 서점으로 몰려가
전작(全作)주의자가 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다만 몇몇을 제외한 다수 출판사들은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고, 대형 서점을
제외한 지역의 작은 서점들은 물이
들어와도 맨땅에서 노를 젓는
처지였으며, 앞선 원고들까지 밀쳐두고
밤샘 작업을 하는 인쇄소들이
사양산업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현실은 변함없다.
중장기적인 효과를 믿어 보고 싶지만
메말라 사막 같은 문학과 출판에서
낙수효과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수상작의 내용을 둘러싼 논란은 더욱
당황스럽다.
수상자와 나의 스승이었던 마광수에
대한 ‘마녀사냥’과 이문열의 책에
대한 ‘분서갱유’가 진영을 넘어선
야만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 왜곡과 표현의 선정성에 대한 비판은
문학에 대한 오해와 소설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안타깝게도, 당신이 불편한 바로
그 지점부터 문학이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친일 논란이
있는 인촌상을 비롯해 현대·삼성 등
재벌 기업이 주는 상을 받은
작가에게 좌파 운운은 어불성설이다.
그 와중에 동인문학상은 후보에만
오르고 ‘다행히’ 수상하지 못했다는
반대 진영의 변명은 실소를 자아낸다.
(문장으로 적어놓고 보니 얼마나 시시하고
쩨쩨한가!?
한국 문학과 작가들은 그렇게 얄팍하지 않다)
운동적 경험과 상관없이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역사의식이 일견 아쉽다 해도,
그 또한 왕관의 무게와 함께 수상자가
감당하며 숙고할 일이다.
무릇 작가는 자신이 쓸 수 있는 것만을
쓴다.
말이 아니라 행동이 인격의 근본을
드러내듯, 작가는 주의주장보다 작품으로
평가해야 마땅하다.
2024년의 세계는 한국 작가 한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분명했다.
그뿐이고, 그로부터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 문학은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폭풍과 쓰나미의 한가운데서
생각하노라니, 어쩌면 노벨상이라는
이름 자체가 2002년 이전의
‘월드컵’처럼 실제를 넘어선 권위로
우리를 주눅 들게 하지 않았나 싶다.
월드컵 4강 진출 이후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공포로 얼어붙지 않고
해외 진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처럼,
앞으로 한국 문학은 더 자유롭고
활기차게 세계의 독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한강의 역할,
노벨문학상 수상의 의미는 충분하다.
김별아 소설가
[출처 : 조선일보]
[100자평]
살며_생각하며
노벨상은 축하할 일이다만, 그녀가 쓴 역사에
해당하는 부분을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소설로만 이해할까?
개인의 제한된 경험을 사실화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은 당연히 우려되는 점이다.
흰구름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문학적인 수사로
예찬하고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로 그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해 하는 것 같은데
초록은 동색이라는 느낌 밖에 안 든다.
한강은 노벨상 역사상 최악의 수상자다.
비극의 역사의 양면성을 무시하고 치우친
이념과 사상에 매몰돼 이를 좌파적으로
미화한 것은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기만이고 범죄다.
한강의 소설은 한국 사회에 악령 같은
것이다.
외국에서 읽거나 말거나 한국에서는 모두
판금조치 해야 한다.
soyuz
노벨상 수상은 국가적인 영광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바로 잡아야할 5.18, 4.3을
어릴때부터 그 동네에서 세뇌된 작가의 작품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는것이 걱정된다.
이 기사는 '나는 한강의 후배다'로 명성에
묻어가려는 것에 방점!
밥좀도
소설은 허구라지만 역사적 사실을 담은 소설은
편견이나 거짓에 치우치면 안 된다.
독자는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soyuz
어디 이런 글을 조선일보가 실는가?
정기구독 끝.
先進韓國
김별아 작가가 옳은 말했다.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받을 만하니까 받은
것이다.
그건 우리 한국문학 전체의 영광이고 나아가
우리 한국인 전체의 영광이다.
그런데 여기 조선일보 댓글자들은 한강 작가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축하하는 사람들보다
많았다.
부끄러운 일이다.
심지어는 스웨덴 대사관 앞에까지 가서 반대
시위하는 정신병자들까지 있었다.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한강 작가가 좌파 성향이라서 우파 사람들이
그러는데, 나도 우파지만 그런 우파들은
창피하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한강은 한강식으로 소설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탔다.
그 수상으로 그의 작품은 한국 작가로서
우수함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런데 한강 작가를 비난한다면 나는 그들은
왜 노벨문학상 탈 작품을 못 쓰느냐고 묻고
싶다.
한강은 한강식으로 작품 써서 노벨문학상
받았다.
그게 아니꼽고 싫다면 자신도 자기식으로
작품써서 그런 큰 상을 타서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면 되지 않는가?
777
푸틴의 전쟁, 나치의 역사를 문학적으로
묘사해서 노벨상 받으면, 그것도 찬양해야
하나?
기업만 사회적 책임이 있는게 아니다.
문필가, 영화감독, 소설가도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4.3. 등 역사적 사건을 편향된 입장에서
기술한 것은 반성해야 한다.
문필가 당신들은 왜 특별하게 열외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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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이라는 폭풍, 그 너머
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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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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