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의 광주항쟁 진압작전과 미국정부의 개입
박만규 (전남대)
1. 머 리 말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들불처럼 일어난지 벌써 19주년이 지났다. 더구나 금년을 끝으로 20세기가 지나고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면 80년 광주라는 話頭는 21세기에는 낡은 언사가 되고 마는 것일까?
그러나 그렇지 않는 것 같다. 비록 지금까지 광주를 다룬 각종 매체와 또 학술적인 연구성과가 적지 않게 나왔지만, 모든 진실이 밝혀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기 때문이다. 그 많은 논란 속에서도 발포명령자가 오리무중이고 정확한 사망자 숫자 또한 알지 못한다. 어디어디에 암매장하였다는 소문은 무성하지만 그 어느 곳 하나 제대로 조사가 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럴 의지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 모든 의혹들 가운데 가장 핵심은 역시 미국정부의 관련문제이다. 87년 광주청문회 당시 미국정부가 공식성명서에서 제 20사단의 부대이동을 승인한 점을 엉거주춤한 태도로 인정하기는 하였으나, 그 뒤로 추가로 공개된 미국정부의 공식문서는 계속 미국정부의 위선을 폭로하고 있는 중이다.
한편, 광주항쟁을 다룬 대부분의 연구들은 주로 광주항쟁의 비극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물론 이는 당연한 연구자세이지만, 그러다 보니 미처 가해자였던 계엄군에 대한 연구성과가 썩 많을 수 없었다. 간혹 계엄군의 증언과 국회청문회 등을 통해서 당시 계엄군의 실상이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되었지만, 학문적인 연구로 보기에 아무래도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본디 그 진실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울진대, 한 측면만 가지고 모든 것을 다 밝히었다고 말하기는 더욱 곤란할 것이다. 이 논문이 광주항쟁의 전개과정을 다루는데 있어서 굳이 계엄군의 활동에 주목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글에서 힘써 밝혀보고자 하는 요점은 신군부와 미국정부와의 관계이다. 여기에 광주진압에 따른 그들의 관계도 물론 포함되겠지만, 그보다 비상계엄령을 유지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하려던 新軍部측과 이를 저지하려던 대학생과 시민들의 대립 속에서 취하였던 미국정부의 태도를 밝히는데 더 애를 써 보고자 한다. 그러나 지면의 제약과 필자의 게으름 탓에 계엄군의 광주진압과정은 다루지 못하였다.
2. 충정훈련의 돌입과 그 성격
1980년 2월18일 육군본부의 특별지시가 1 . 2 . 3군사령관과 공수사령관, 수경사령관에게 내려졌다. 그 내용은 ¼분기의 폭동진압교육훈련(충정훈련)을 2월 중 조기 실시해서 완료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공수특전부대도 정규교육훈련을 거의 포기한 채 오로지 충정훈련에 돌입하였다. 주간에는 CS탄과 500MD차까지 동원되고, 매일 밤 출동준비 군장을 꾸렸다 해체하는 혹독한 훈련이 반복되고 반복되었다.
그 해 3월 6일 수도경비사령부 회의실에서 제 1차 충정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비롯하여 1 . 3 . 5 . 9 공수특전여단장, 20 . 26 . 30 사단장 등 신군부 핵심세력이었다. 이들은 회의에서 수도권 소요사태에 대한 대비책과, 향후 충정훈련을 더 강화하고 즉각적인 출동태세를 유지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4월부터 본격적인 충전작전이 전개되었다. 특히 제 1 . 3 특전여단의 경우 1시간 안에 출동이 가능하도록 육군 본부 출퇴근 버스 각 10대씩을 우선 배치하기까지 하였다.
한편, 공수특전부대의 충정훈련장면은 美 정보요원에 의하여 생생하게 본국에 보고되었다. 그 만큼 미국정부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매우 민감해져 있었다. 여기에는 신군부가 12 . 12 쿠테타를 감행하면서 미국정부의 승인 없이 군 병력을 동원한 것에 대한 불만과 의혹이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정부는 신군부의 가장 중요한 권력기반이던 공수특전부대가 강도 높은 충정훈련에 돌입하자 그 동태를 예의주시 하였던 것이다.
충정작전의 개념은 소요와 폭동에 따라 작전의 주체와 목표, 그리고 진압의 성격이 크게 차이가 났다. 군대를 투입하여 시위를 공세적으로 진압하는 것은 시위가 폭동에 해당될 경우에 적용되는 작전개념이었다.
1980년 2월에 작성된 육군본부의 충정작전지침 개요는 다음과 같았다. 군 투입시 강력 응징할 것, 자위권발동은 흉기를 소지하고 시설물을 파괴 방화 탈취하고자 하는 자를 대상으로 3회 이상 정지명령 . 위협발사 . 하복부 사격의 차례로 할 것. 따라서 특전부대가 2월 18일부터 돌입하였던 충정훈련의 작전개념은 소요사태가 아닌 폭동진압훈련이었다. 특전부대가 훈련에 사용하였던 진압장비를 살펴보면 이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즉, 가스총과 진압봉의 기본장비 외에도 화학탄과 화염방사기에서 TNT, 크레모아까지 철저하게 공격적인 장비였던 것이다. 따라서 특전대원들이 80년 5월 광주시민을 무자비하게 살상한 것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표 2-1> 광주항쟁 당시 진압장비(진압봉과 M16 및 대검은 제외한 수치임)
<표2-2> 광주항쟁 진압에 사용된 장비
그런데 특전부대의 잔혹성은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과 1980년 5월 서울 영등포역전에서 벌어졌던 진압사례를 통해서 이미 드러난 바 있었다. 당시 상황은 대충 이러하였다. 부마항쟁 당시 부산에 투입된 부대는 제 3특전여단이었다. 이들은 18일 저녁 8시쯤에 부산시 중구 남포동에서 3백 명의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부산 동래구 동상동에 살던 신희철씨(회사원, 당시 37세)는 18일 밤 8시 50분쯤 서구 충무동 상록 다방 앞에서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끌려가 개머리판으로 얻어맞고 머리를 크게 다쳤다. 뇌 좌상과 뇌 경막 손상을 당한 그는 뇌수술까지 받았다. 전병진씨(금은방 종웝원, 당시 32세)는 계엄령 첫날인 10월 18일 밤 9시 30분쯤 태화극장 앞에서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얻어맞고 군화발로 걷어차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결국 그는 앞니 다섯 개가 부러졌고 오른쪽 귀 위의 머리뼈에 분쇄 골절이 생겼다. 마산에 투입된 부대는 제 1 . 5특전여단이었다. 제 5특전여단은 진입할 때 전군이 착검하고 트럭에 타 시내를 질주하는 위력 시위를 벌였다.
이렇듯 공수부대에 의한 잔인한 진압방식은 서울에서도 저질러졌다. 1980년 5월 17일 오후 서울 영등포역 광장에 공수부대를 실은 트럭이 나타났다. 공수부대의 한 장교가 핸드 마이크를 잡고 경고를 했다.「즉시 해산하라, 1분 이내로 해산하지 않으면 강제로 해산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광장에는 시위 군중은 없었고 행인들만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1분이 지나자 그 대위는 「해치워!」라고 명령했다. 수십 명의 공수부대원들은 진압봉을 휘두르면서 군중 속으로 돌진하더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어느 노인이 대어들자 5-6명의 군인들이 그 노인에게 몽둥이질을 했다. 이건 진압이 아니고 집단 폭행이었다. 30초만에 영등포 역전은 무인지경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80년 5월 투입된 지 불과 이틀만에 공수부대는 광주시를 피가 난자한 거리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표 3> 5월 18 . 19일의 후송자 사례
이처럼 부마항쟁과 서울의 영등포역, 그리고 광주에서 공수특전부대가 전개한 시위진압방식은 모두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공수부대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공수부대는 요인의 암살과 적의 후방에 침투하여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는 최정예 병사들로 구성된 특수부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민들을 상대로 충전작전을 수행하기에는 지나치게 과격하고, 또한 터무니없이 강력한 부대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점은 80년 5월 광주에서 너무도 비극적으로 폭로되고 말았던 것이다.
미국정부도 공수특전부대가 부마항쟁을 어떠한 방식으로 진압하였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더 나아가 공수부대가 시위하는 대학생들에게 발포할 수도 있으며 그럴 때 파급될 수 있는 문제까지 검토하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미국정부는 공수부대를 동원한 시위진압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미국정부의 의사를 신군부에게 여러 차례 전달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3. 신군부의 시위진압작전과 미국의 개입 : 전기(1980. 5. 1∼16)
80년 5월,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을 해제할 의도가 추호도 없었다. 여기에는 미국정부가 자신들을 지지한다는 판단이 깔려있었다. 그 당시 미국정부는 80년 4월 14일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하자 잠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글라이스틴은 4월 18일 전두환이 요청한 회동을 보류하였다. 그렇다고 미국정부가 전두환의 중정부장 겸임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중정부장 겸임이 몰고 올 정국의 변화 -시민들의 저항과 군부내의 반발-에 대한 판단이 확고하게 서 있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저항이 사실상 없었고, 군부도 동요하지 않자, 미국정부는 글라이스틴과의 회동을 승인하였다. 4월 22일, 전두환이 중정부장 겸임을 발표한 지 8일만의 일이었다.
신군부는 이제 미국정부가 전두환의 권력장악을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전두환이 4월 30일 기자회견에서 12.12사태에 대한 미국의 오해는 완전히 풀렸으며, 자신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한국의 국내문제에 대한 내정간섭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이후 미국정부가 취한 일련의 움직임도 신군부의 판단이 충분한 근거가 있었던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미국정부는 신군부가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무참하게 진압하는 동안 E-38조기경보기 2대와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한국에 출동시킴으로써 신군부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확인시켜주었던 것이다.
5월 접어들면서 대학생들의 시위도 더욱 드세어갔다. 만약, 시민들까지 대학생의 시위에 동참한다면, 신군부의 정치적 운명이 위태로운 것은 불을 보듯 하였다. 마침내, 80년 5월부터 신군부의 시위진압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시위진압작전은 5월 17일 비상계엄령의 전국확대를 기점으로 두 단계로 전개되었다.
<표 4> 신군부의 시위 진압작전
전기(5. 1∼5. 16) 의 작전개념은 5.17비상계엄령전국확대를 앞두고 시위진압준비태세를 완료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진압부대와 장비들이 서울에 집결되었다. 제 11 . 13 특전여단이 서울과 김포로 이동 . 배치되었으며, 보병 제 1 . 3 . 5 . 6 . 7 . 8 . 9 . 12 . 15 . 21 . 25 . 27 . 28사에서 차출된 장갑차 50대가 수도경비사령부와 제 33사단에 배속되었다. 그 외에도 제 1항공여단(500MD 등 항공진압장비)과 화학지원대(가스살포기 등) 등에서 차출된 각종 진압장비가 속속 서울로 집결되었다.
글라이스틴의 전문은 당시 미국정부의 태도를 잘 보여주었다. 먼저, 미국정부는 학생들의 계엄령 해제요구가 더 거세질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둘째, 서울과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서 시위가 격화될 경우 특수부대를 동원하여 진압하는데 상호 협의하였다. 셋째, 미국정부는 신군부가 군사적 행동을 하기 전에 그들과 사전 협의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이 제안은 관철되었다. 결국, 미국정부는 신군부가 계엄령을 해제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특수부대의 시위진압을 협의 또는 승인함으로써 신군부를 지지하였다. 그 결과, 미국정부의 신군부에 대한 견제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신군부에서 5월 14일 제3특전여단 병력 128/586명을 서울대 진압을 목적으로 국립묘지로 이동시킬 것이며, 16일에는 20사단 60연대 병력 95/1585를 양평에서 태능으로 재배치한다고 사전에 한미연합사로 통보하였던 것이다.
<표 5-1> 계엄군이동사항(1980년 5. 1∼16)
4. 신군부의 광주항쟁무력진압과 미국의 개입 : 후기(1980. 5. 17∼27)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18일 00:01분부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진압부대와 장비가 각 지방의 주요도시에 투입되었다. 저항이 발생하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 무력으로 진압할 태세였다. 사태는 예측하기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표 5-2> 계엄군이동사항( 1980년 5. 17∼27 )
그러나 신군부의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기도는 곧바로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광주에서 비상계엄령 해제요구가 불붙기 시작한 것이다. 신군부는 시민들의 민주화요구에 합리적으로 대응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들은 타 지역으로 항쟁의 불씨가 옮겨 붙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광주를 철저하게 진압하는 단호함을 과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 결과 인구 80만의 지방 도시에 공수부대를 포함한 정예병력 2만 여명이 진압에 투입되었다. 이는 시민 4명에 진압군 1명의 엄청난 무력이었다. 어쩌면 신군부는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도미노 논리에 사로잡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5월 18일 01시 10분, 금마에 주둔 중이던 제 7공수특전여단 33 . 35대대 82/604 병력이 광주에 투입되었다. 지난 2월부터 혹독하게 폭동진압훈련을 받았던 공수부대는 광주시를 피로 물들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광주의 시위는 부마항쟁과 달리 수그러들기는커녕 더 거세어져 갔고 조직화 되어갔다. 그리고 제 11공수와 3공수가 연거푸 광주에 투입되었다.
<표 6> 광주에 투입된 진압군부대
그 당시 광주진압에 동원된 부대는 공수특전사 10개대대 504/2901, 20사단 9개대대 279/2901 그리고 전교사 28개대대 3944/8022명에 달하는 규모였다.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는 충정작전결과보고서는 광주진압작전이 다음의 5 단계로 진행되었다고 보고하였다.
. 1단계 : 5. 17이전 /경찰데모진압
. 2단계 : 5. 18 - 5. 21 (4일간) / 군 병력으로 시위대 해산 및 진압
. 3단계 : 5. 22 - 5. 23(2일간)
1) 주요도로 봉쇄 및 지점확보(전주,목포,화순,담양)
2) 교도소 고수 및 병참선 확보
. 4단계 : 5. 25 - 5. 26(2일간)
1) 2단계작전 계속
2) 수습대책위원회와 협상
3) 적극적인 선무 . 활동
. 5단계 : 5. 27 / 충정작전 수행
그리고 보고된 각 작전단계별로 투입된 병력과 장비는 다음과 같았다.
<표 7> 각 작전단계별 투입병력 및 장비
그러나 위 기록은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광주항쟁기간 사살된 시민이 42명으로 기록되어있는 점은 특히 더 그러하다. 또한 신군부가 5단계의 작전계획을 세운 뒤 광주를 진압한 것 같지도 않다. 만약 그랬다면 21일 도청에서 그토록 많은 시민을 학살해야만 하는 작전상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위 보고서에서 언급된 5 단계의 작전개념은 사후에 작성된 것이 틀림없다. 신군부의 광주항쟁 진압은 다른 각도에서 재검토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편, 광주항쟁을 조기에 진압하는 문제가 신군부에게 가장 시급한 현안이었지만, 이와 함께 서울로 광주항쟁의 여파가 파급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표였을 것이다. 광주는 철저히 외부로부터 고립되었다. 당시 어떠한 방송이나 언론매체도 진실을 보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서울 도심은 매일같이 무장한 계엄군을 가득 실은 트럭과 장갑차와 그리고 헬리콥터가 위력시위를 벌이며 시민들을 위협하였다.
<표 8> 서울에서 전개된 계엄군의 위력시위
한편, 5월 19일 오전, 데이비드 밀러 당시 광주 미국문화원장은 공수부대가 저지르던 참혹한 시위진압을 본국에 보고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정부의 성명서는 밀러의 보고서가 불완전한 것이어서 미국은 광주의 비극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미국정부가 보여준 정보수집능력을 감안하면 그 주장을 액면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그보다는 미정보국 요원들이 수집한 정보를 기초로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보고서 또한 시시각각 전달되었다고 믿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따라서 미국에 갔던 위컴 주한미사령관이 5월 19일 급거 歸韓하여 유병현 합참부사령관을 만나고, 글라이스틴 대사가 최규하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고위관료들과 잦은 접촉을 한 것도 광주의 사태진전이 극히 심각하다는 보고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국정부는 특전부대의 진압방법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공수특전부대를 일단 광주 외곽으로 철수시키고 보병 제 20사단을 시위진압에 투입하는 방안을 신군부에게 제안하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21일 공수특전부대가 도청에서 철수하고 계엄사가 시민들과 대화하려는 기색을 내비쳤던 것은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정부의 개입이 본격화된 결과로 생각된다. 5월 22일(오후 4시-5시 55분)에 워싱턴 백악관 상황실에서 에드먼드 머스키 당시 국무장관의 사회로 '고위 백악관 정책검토위원회'가 개최되었다. 2시간 정도 진행된 토론의 결과 광주사태에 관한 우선적 과제는 최소한의 병력을 사용해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리고 최악의 사태가 발생될 경우에 대비한 국방부의 계획과, 광주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명 손실이 발생할 경우 정책검토회의를 재소집하여 추후 대책을 논의하기로 결정하였다.
고위백악관 회의의 내용이 신군부에게 전달되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5월 24일 유병현 장군이 위컴에게 무력으로 광주를 재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완성하였다고 전달하였다. 다음날 한국외무부는 모든 외국인들에게 광주를 떠나도록 요청하였다. 주한미국대사관과 기타 대사관들은 아직 광주를 떠나지 않은 자국국민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다. 광주공항에 미국 . 캐나다 . 이탈리아 . 영국 및 아프리카의 국민 91명이 집결하였고, 그 가운데 23명이 5월 26일 미 공군에 의해 철수되었다. 그 외 외국인들도 공군기지에서 안전을 도모하였다.
한편, 5월 26일자 뉴욕타임즈는 광주봉기의 학생지도자들이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로 하여금 휴전을 주선하여 유혈사태를 중단할 수 있게 할 것을 미국에 요청했지만 글라이스틴이 이 중재요청을 거절하였다고 보도하였다. 27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한국의 상황이 1975년 사이공이 패망한 이후 아시아의 미국 맹방이 처한 가장 위험한 상황이며, 두 대의 공중지휘용 공군기와 항공모함 코랄시호가 한반도 해역에 배치되었는데, 위컴은 한미연합사에 배속되어 있는 한국군 네 개 연대를 '폭동진압'(riot control)용으로 허용해달라는 한국군부의 요청을 '승인'(approve)했다는 미고위관리의 말을 인용해 지면에 실었다.
5월 27일 새벽, 도청을 무력 진압한 신군부는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작전이 잘 수행되었으며 무기를 내놓기를 거부하여 살해된 30명을 제외하고는 사상자가 경미했다고 보고하였다. 미국정부는 공수부대가 도청무력진입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진압 직후 20사단과 교체되었다는 것도 매우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5월 28일의 워싱턴에서 개최된 고위참모회의에서 홀부르크 당시 동아태담당차관보는 상황이 보다 명확해질 때까지 한국군부장성들을 성급하게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지 말아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는 한국 군부가 민간정치인들과 대화를 열지 않고 보다 광범한 지지를 받는 정부형태로 복귀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공개적으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 이 날 회의에서 합의된 결론은 남한군부가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 기다려보자(wait and see)는 것이었다.
5. 맺 음 말
광주민중항쟁에서 미국정부의 역할은 모호한 상태로 남겨져왔다. 미국정부는 87년 광주청문회에서 제시한 공식성명서를 통하여 미국의 개입을 부인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정부의 비밀문서들이 추가로 공개되면서, 그 동안 미국의 주장이 위선이었다는 사실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연구의 초점도 미국정부의 개입 여부에서, 미국정부의 개입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밝히는 수준으로 옮겨져야 옳다.
미국정부는 신군부의 권력장악을 사실상 지원하였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국정부의 對韓 정책은 누가 정권을 장악하던지, 미국의 이익이 침해받지 않는 것이었다. 정국이 불안정한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따라서 신군부가 12.12 쿠테타를 통해서 신속하게 정권을 장악해버린 것을 미국이 적극적으로 환영할 수는 없었지만, 나쁠 것 또한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미국은 신군부를 통해서 미국의 정책을 관철시키면 되었던 것이다. 이 것이 12 . 12 이후 미국과 신군부와의 관계였다.
하지만, 미국은 신군부를 완벽히 공식적인 권력으로 지원하기가 곤란하였다. 우선 신군부의 불법적인 권력장악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여기에 김대중 . 김영삼 등의 정치세력이 각축하고 있었다. 국민들은 유신체제에서 억눌려있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분출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신군부가 군부를 완벽하게 장악했는지 여부를 미국정부는 자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12 . 12 이후, 전두환의 중앙정보주장서리 겸임에 이르는 기간에 드러났던 미국정부와 신군부의 갈등도 이러한 배경 하에 진행되었다.
80년 5월에 접어들면서 미국정부의 정책은 신군부의 권력장악을 받아들이기로 결정되었던 것 같다. 우선 공수특전부대를 비롯한 충정부대가 수도권에 배치되었으며, 각종 진압장비도 차출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정부와 신군부는 서로 긴밀하게 의견을 조율해 갔다. 5월 17일 비상계엄령의 전국확대를 기점으로 김대중을 비롯한 일련의 정치세력이 제거되고, 국회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전국의 주요도시에 충정부대가 배치되어 시민들의 저항을 억누를 태세가 완료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광주민중들의 저항이 전개된 것이다.
미국정부는 신군부가 조기에 강경하게 시위를 진압하는데 동의하였다. 그렇지만,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어갔다. 외국의 언론들은 광주에서 벌어진 비참한 상황을 전세계에 타전하기 시작하였다. 군부 내에서도 진압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장성들이 나타나서 경질되기도 하였다. 백악관정책검토위원회는 대규모의 인명이 살상되는 최악의 상황을 검토한 뒤, 광주를 완전히 제압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5월 26일 광주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이 소거되고, 미 항공모함이 한반도의 해역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월 27일 신군부는 광주를 진압안 뒤 한미연합사에 작전이 성공하였다고 보고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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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사령부,「계엄상황일지」(1980. 5. 1 - 1980. 5. 31)
육군본부 작전상황실,「상황일지」(1979. 12. 1 - 1979. 12. 7)
육군본부 작전상황실,「작전상황일지」(1980. 5. 1 - 1980. 5. 16)
육군본부 작전상황실,「작전상황일지」(1980. 5. 17 - 1980. 6. 19)
육군본부,「충정작전 대비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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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사(전투병과 교육사령부) 작전처 상황실,「전교사 작전상황일지」
전교사,「전교사 전투상보」
31사단,「31사단 전투상보」
20사단,「20사단 전투상보」
20사단,「20사단 충정작전보고」
20사단,「20사단 충정작전상보」
특전사령부,「특전사 전투상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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