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교육청, 그 시절의 잊혀지지 않은 이야기들
임 종 식
*전라남도교육청 장학사
1996년 3월. 꽃샘 바람과 함께 예재를 넘어 보성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습니다. 구례교육청에서 1년간 장학사 생활을 끝내고, 보성교육청으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산 설고, 낯설은 보성 땅에서 교육장님을 만나 2년 6개월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살다, 그만 교육장님께서 도교육청 초등교직과장님으로 발령을 받아 가시면서 아쉬운 작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전라남도교육연수원을 거쳐 도장학사로, 교육장님은 도 초등교직과장에서 교육과학연구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근무하다 보니 어느새 원장님께서 정년을 맞이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보성교육청에서 2년 6개월 동안 모시면서 근무하던 시절의 옛 이야기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칩니다.
학생 교육을 교육 행정의 최우선으로
오후 4시 쯤이 되면 교육청 3층 대회의실은 영재교육을 받으러 온 중학생들로 항상 시끌벅적하였습니다. 한창 크는 애들인지라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의자를 끌고 잡아 당기고, 비나 눈이 오는 날이면 그 도가 너무 심하여 가만히 참고 견디기가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근무했던 곳은 바로 그 옆 조그만 사무실인지라 그들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못마땅해 큰 소리로 야단을 치기가 일쑤였습니다. 나 외에도 이러한 일을 못 마땅해 하는 사람은 더 있었습니다. 학생 교육이 끝나고 돌아가면 대회의실 의자를 매일 수리해야 하는 아저씨였습니다.
몸집이 쑥쑥 불어나는 학생들인지라 의자를 가만히 둘리가 없었습니다. 공부하는 시간에도 의자를 앞으로 뒤로 젖히다 보니 의자가 모두 삐끄덕거리기 일쑤였습니다. 아저씨는 긴 대못을 들고 매일 올라 와 의자를 수리하시면서 고놈들 참, 고놈들 참, 겉으로 표나지 않는 불만을 토로하면서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넸습니다.
“우리 교육장님은 학생들밖에 모르십니다. 내가 의자 이야기를 말씀 드리면 부서진 의자는 고치면 그만이고, 더 못쓰게 되면 사면 되지 않겠오. 그러나 교육은 시간이 없는 법이요. 그 시간을 잃으면 아니됩니다.”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애들이 좀 떠들더라도 꾹 참고 견디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한참 후에야 교육장실 바로 윗층이 영재 교육 교실인데 교육장님도 학생들이 의자 끌고, 책상을 당기며 떠드는 소리가 수없이 들렸겠지만 아무 말씀 안하시고 계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교육장님!
지금쯤 그 학생들도 훌쩍 자라 그 어디에선가 이 나라의 동량으로 자라고 있겠지요.
장학지도의 전형을……
교육장님께서는 우리들이 일선 학교의 장학 지도를 나가기 전에 꼭 이런 당부를 하시곤 하였습니다.
“빈 손 들고 가는 장학지도는 해서는 안된다. 자기 나름대로 무언가 생각을 가다듬고 자료를 정비하여 우리 선생님들에게 실질적으로 수업에 도움을 주는 장학을 해야 한다. 교육학 책 몇 구절을 읽고 가서 그것이 마치 최고인냥 강의만을 하고 돌아오는 그런 장학을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점심도 우리 학생들과 교원들이 이용하는 급식소에서 함께 해야 한다. 장학사랍시고 교장, 교감이나 몇몇 부장 선생님들과 함께 다른 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그것도 반주까지 곁들여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장학지도를 한다고 할 때 그게 되겠는가?”
강한 신념과 호소력에 찬 교육장님 말씀 때문에 우리들은 항상 장학 지도 때마다 긴장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일선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실력 없고 형편 없는 장학사라는 소리만은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육장님께서는 우리들이 학교 장학 지도를 하고 돌아올 때마다 교장 선생님들로부터 건의 사항을 받아오게 하신 후, 실현 가능한 것부터 하나 하나 해결해 줌으로써 장학사들에게 큰 힘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지금 이런 교육장님이 과연 몇 분이나 되실지…….
요즘 장학력이 저하되어 큰 문제가 되고 있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교육장님과 같은 지도력이 아쉬워지곤 합니다.
원로교사에게 항상 깊은 존경심을
매년 스승의 날이 돌아오면 교육장님께서는 원로 교사들을 교육장실 옆 소회의실에 모셔 놓고 그 동안의 노고에 대해 치하의 말씀을 드리셨습니다. 그 때 교육장님께서는 항상 원로 교사님들에게 비록 교장이나 교감으로 승진은 하시지 못했더라고 절대 기가 죽어서는 안된다는 것과, 여러분의 곁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제자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쑥쑥 커나가고 있으니 그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달라는 간곡한 당부를 하셨습니다.
교육장님께서는 원로 교사님들과 간담회가 끝나신 후에는 꼭 그 분들을 식당으로 모셔서 점심을 대접하시고 정성으로 마련하신 작은 선물을 증정하시고는 하셨습니다.
교육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많은 원로 교사들이 떠나 버린 교육 현장을 돌아 볼 때마다, 교육은 지식보다는 참된 인간을 기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되새길 때마다, 우리 교육 현장에서 원로 교사님들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그 분들에게 참된 용기와 힘을 불어 넣어 주시기 위해 애쓰시던 교육장님의 그 모습이 생각납니다.
직원을 꼭 내 형제처럼
교육장님은 내 생일이 언제인가를 꼭 기억하셨습니다. 나도 내 가족도 내 생일이 언제인지 모르고 넘어갈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교육장님은 내 생일, 아니 전 우리 보성교육청 직원들의 생일을 꼭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나도 모르고 넘어가던 내 생일날 교육장님께서 선물하셨던 책의 제목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 책의 제목은 「마음을 열어 주는 101가지 이야기」였습니다. 잭 캔필드․마크빅터 한센이 짓고 류시화가 옮긴 책이었습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느낀 감동의 이야기의 한 부분을 우리 교원들을 대상으로 한 연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끔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육장님은 그렇게 소박하고, 정감이 넘치시는 분이셨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같이 근무했던 모든 직원들에게 나에게 대해 주셨던 것처럼 그 보다 더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항상 대해 주셨습니다.
환환 미소로 호된 꾸중을
교육장님은 기억력이 대단하였습니다. 제가 보성교육청으로 발령을 받아 채 몇 개월이 되지 않았으니 선생님들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할 수는 없었습니다. 교원 연수 차출시 학교에서는 양호 교사도 교사, 유치원 교사도 교사로 보고하기가 일쑤였습니다.
나는 그 공문을 그대로 믿어 일정 기준에 의해 연수 대상자를 차출하여 결재를 올리면 교육장님께서는 “어허, 이사람, 누구 누구는 양호교사고, 누구 누구는 유치원 교사인데…….”라고 하나 하나를 꼼꼼히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나는 그 때마다 어떻게 교육장님이 보성군 전체 선생님들의 이름 하나 하나를 저렇게 기억하고 계실까 하면서 깜짝 깜짝 놀라곤 하였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저희들이 교사에서 바로 장학사로 나간 터인지라 모든 일이 허술하고 실수 투성이였습니다. 그러나 교육장님께서는 우리들이 실수를 할 때마다 “어허, 이 사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런데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이 말씀이 꾸중의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몸둘 바를 모르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제가 교원연수원을 거쳐 도에 들어와 함께 근무하였던 다른 도 장학사님들이 주석에서 교육장님의 그런 모습을 이야기하며 정말 훌륭한 분이시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을 때마다 나 또한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덧없는 게 세월인가 봅니다. 지금도 한창 일하실 연세이신데 정년퇴임이라니 우리 교육계가 뭔가 잘 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된 것만같아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선생님들을 존경하고, 직원들을 내 형제처럼 아끼셨던 교육장님!
하늘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셨던 교육장님!
평생을 내 집처럼 아끼고 가꾸어 주셨던 정든 교단을 떠나시드라도 내내 건강하시고 복된 일만 항상 가득하시기를 먼 곳에서 기원 드리겠습니다.
매화꽃 꽃망울이 맺혀있는 매곡동에서
임 종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