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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홈실(일명: 명곡)의 자연환경과 유래
경북 성주군 초전면 월곡1리 속칭 홈실(椧谷)마을, 이곳은 팔작지붕의 골 기와집이 처마를 맞대고 50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고풍(古風)스러운 마을이다. 이들중 몇 가구를 제외하곤 모두 벽진이씨(碧珍李氏)들 이다.
850여년전인 고려 인종때 벽진장군 이총언(李 言:858∼938)의 7세손인 이방화(李芳華 :광록대부 상호군)가 당풍(唐風)의 명당을 찾아 이곳 곡성산(穀城山) 아래 터를 잡았다.
당풍(唐風)이「이 마을에는 대대로 경상(卿相)이 나고 장래에는 오형제(五兄弟)의 고관이 태어날곳이라」고 하면서 만약 중세에 운이 쇠약하면 「천지(天池)북(北)쪽에 있는 달마산록에 큰비가 내려 천지(天池)가 붕괴 매몰되고 마을의 닭과 개, 다음에는 소와 말이 죽고, 이어 그 화가 장차 사람에게 까지 미치니 타 지역(他地域)으로 이거(移居)하지 않으면 그 화를 면치 못할것」이라 예언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홈실의 오봉산(五峰山)허리에는 통경대로(通京大路)가 있었는데 지금도 바위 몇 곳에 수령이 쓴 글씨등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방화가 홈실로 이거(移居)한후 그 아들 은(殷)이 은청광록대부 상호군(銀靑光祿大夫 上護軍), 손(孫) 당규(唐揆)는 태자담사(太子 事), 증손 옹(雍)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고손 견간(堅幹)은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등 대대로 현달(顯達)했다.
특히 이견간(李堅幹)은 호가 국헌(菊軒)또는 산화(山花)이고 시호는 문안(文安), 문장과 덕행으로 세상에 산화이선생(山花李先生)으로 널리 알려졌다.
1317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원순제(元順帝)가 선생의 문장과 풍채에 탄복하여, 살고 있는곳을 물었는데 그때 호음곡(好音谷)이라하여 고향을 그림으로 그려 보이니 원순제가 이를 보고 이 마을 에는 산이 많고 물이적어 걸수산(乞水山)의 물을 당겨와야 함으로 명(椧) 자(字)를 지어서 마을 이름
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전해지며 이때부터 명곡(椧谷)으로 불리워 졌다.
산화 이선생의 자손들도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는데 선생의 아들 대(玳)는 호가 묵재(默齋) 수문
관대제학(修文館大提學:1343. 4. 27 임술 별세),손(孫) 군상(君常)은 증 형조참판:1353. 3. 갑술 일에 조
일신(趙日新)난때 피화(被禍) 별세), 증손(曾孫) 희경(希慶: 1343∼1377)은 경상도 병마도원수(慶尙
道 兵馬都元帥)로 왜 구 아기발도(阿 拔都)를 격퇴하여 증 병조판서가 되었는데, 그의 아들 5형제가
모두 고관대작이 되어「오지다(五之) :가득차다」란 말이 생겼다고도 한다. 즉 도원수공의 1남 건지
(建之: 1357∼1415)는 조선조(朝鮮朝)의 이조판서(吏曹判書),시호는 정헌(正獻)이다, 2남 심지(審之)
는 증(贈) 병조판서(兵曹判書), 3남 수지(粹之: 1418년졸)는 운봉감무(雲峰監務), 4남 신지(愼之)는 조
판서, 5남 사지(思之)는 중랑장(中郞將)으로, 이들 5형제 모두가 문중을 빛나게 하고 나라의 갑족(甲
族)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 말년에 과연 당풍이 말한바와 같이 천지(天池)가 매몰되고 명곡의 닭,개,
소와 말이 죽곤하는 천재지변이 일어나 마을은 페허가 되고 자손들은 사방으로 흐터지게 되었다.
즉 희경(希慶)의 1남 건지(建之)와 3남 수지(粹之)는 칠곡으로, 2남 심지(審之)는 선산으로, 4남 신
지(愼之)는 창령으로, 5남 사지(思之)는 밀양으로 그 일가(一家)를 데리고 흩어져 지금 영남의 여러군
으로 이거(移居)하게 되었으니, 이들 5형제의 후손들은 명곡이 실질적으로 제이발원지(第二發源地)
라 할수있다.
이 때가 1450∼1500년 사이로 추정된다. 현재 그 후손들의 숫자는 정헌공파 7,413명. 판서공파 12,836
명. 감무공파 4,989명. 참판공파 8,156명. 여은공파 9,092명등 42,486명이나 되는데, 영남 충청 서울 경
기등 전국에 걸쳐 살고 있다.
벽리(碧李)가 명곡을 떠난후에는 문화유씨(文化柳氏)가 입거(入居)해서 6형제가 모두 수만석 부자
가 되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그 유적이 남아 있다. 유씨(柳氏)이후에는 야성송씨가 살았다.
임술년(1622: 광해14년)정월에 완정 이언영(李彦英: 1568∼1639), 모암(慕巖) 이충민(李忠民: 1588∼
1673) 양공(兩公)이 술사(術士) 두사충(杜思忠)을 대동하고 산화선생고기(山花先生故基)인 명곡(椧
谷)을 방문했는데 두(杜)씨가 동네 입구에서 재배(再拜)를 하면서「이 곳은 횡기(橫旗)가 앞에 펄럭
이고 있는 장군패검형(將軍佩劍形)으로 실로 희귀한 명당이다」하면서 성주의 5명기(名基)중
마땅히 제1이라 했다.
벽리(碧李)가 명곡(椧谷)을 떠난지 약200여년이 훨씬지나 칠곡에 거주하고 있던 위 양공(兩公)의 후
손들이 페허가 된 명곡마을에 다시 터를 딲고 가문을 이르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요약 하면 고려 충숙왕때 호음곡(好音谷)이라 했다가 1317년경부터 명곡(椧谷)이라 개칭되었다.
근세에 와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월곡동(月谷洞)으로, 1952년 행정동이 월곡1, 2동으로 분동(分
洞)되었고, 1988. 동(洞)이 리(里)로 개칭되었다. 월곡(月谷)이란 마을 명칭은 마을을 둘러싼 달마산
계곡에서 산 봉우리에 달이 떠 오르는 광경을 상징 하여 붙인것이라 하기도 하며, 행정구역개편으로
월곡동(月谷洞)이 되었을때는 명곡(椧谷)과 월전(月田)의 이름을 따서 월곡(月 谷)이라
명명 하였다 한다.
명곡에는 5개의 자연부락으로 약 60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1). 제남(濟南: 담뒤): 마을의 중앙으로 흐르는 제천(濟川)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제남(濟南)이
라 한다. 곡성산밑에 있는 이마을에는 완정(浣 亭) 이언영(李彦英)선생 종택(宗宅)과 사당(祠
堂)이 있고 그 옆에는 제강서당(濟 岡書堂)이 있다.
2). 내곡(內谷: 안골): 이 마을의 안(內)에 위치하고 있어 내곡이라 했다. 제천(濟川)북쪽에 있는 안
골 중앙에 경헌당(敬獻堂)이 있다.
3). 도산(陶山: 뒷뫼): 동내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뒷산의 이름을 따서 도산이라 칭 했다고 하며, 이곳
에 산화(山花) 이견간(李堅幹)선생의 문곡서원(汶谷書院)이 있다.
4). 신계(新溪: 새뜸): 새로 잡은 터 라하여 신계(新溪)라 하고 홈실의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5). 이동(梨洞: 배나뭇골): 마을뒤에 배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기때문에 배나뭇골이라 하였으며
창령성씨 종당(宗堂)인 창성당(昌成堂)이 있다.
그리고 이 마을 벽리(碧李)는 "청렴과 결백이 온 가문에 전해지고, 충직과 삼가하는 마음을 대대
로 지켜라(家傳淸白 世守忠謹)"는 종훈을 생활지표로 삼고 있는 예절바른 집성촌 이다.
또한 왜정및 육이오사변때 많은 주민들이 징용 징병에 같다왔지만 한사람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귀향 하였으며, 오봉산과 제천에 있는 큰 바위들이 마을을 향해 읍을 하고 있는 모양세를 취하고 있
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모두가 어렵고 간난한 시절에도 동네를 찾아온 걸인에게 밥을 소반에 밭혀 주
는등 넉넉한 인심을 갖인 마을로도 유명하다. 홈실의 또 한가지 특징은 예로부터 학자, 애국지사,
교수, 총장, 박사, 법조인, 국회의원 장관을 포함한 고급관료와 의사 사업가 금융인등 많은 인재를 배
출하였고, 최근에는 수륜∼농소간 지방도로가 동네를 관통, 깨끗하게 포장되어 김천, 대구등지로의
교통이 아주 편리해 졌다.
(나) 명곡(椧谷)의 문화유적, 유물
<1. 문곡서원(汶谷書院)>
홈실 도산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조 영조26년(1750년: 경오)에 세워진 건물로서 문안공 산화 이
선생을 향사(享祀)하여 오다가 1871년(고종 8년 신미)에 훼철되어 문곡서당으로 보존하여 오든중
1989년(을사)에복원 하였으며, 1996년봄에 유림의 정론으로 고려 충혜왕때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
學)을 지낸 묵제공(默濟公)과 형조참판을 지낸 군상(君常)공을 배향(配享)하고 있으며, 유림에서 매
년 춘추에 향사하고 있다. 이 서원에는 묘우(廟宇)인 현덕사(顯德祠)와 경제문(敬 門: 三門) 그리고
강의당(講義堂), 동재(東齋)인 근독제(勤篤齋), 서재(西齋)인 존성제(存省齋),와 신도비(神道碑) 외삼
문(外三門)이 있다.
<2. 산화(山花) 이선생 유허비와 신도비>
1884년(고종 갑신)에 동구(洞口)에 입석(立石)하여 유허(遺墟)를 표(表)하고 비명(碑銘)은 진성인(眞
誠人) 이만규(李晩 )가 음기(陰記)는 후손 만수(萬洙)가 지었다. 신도비(神道碑)는 문곡서원(汶谷書
院)남쪽 도산북록(陶山北麓)에 있으며 비명은 광주인 이채진(李埰鎭)이 찬(撰)하였다.
<3. 정헌공(正獻公) 이선생(李先生)의 신도비>
홈실 도산(陶山) 동록(東麓)에 있으며 비명(碑銘)은 한산인(韓山人) 이설(李渫)이 찬(撰)하였다.
<4. 완정고택(浣亭古宅)>(경북 문화재자료 제163호: 성주 초전 월곡 809번지)
이 건물은 성주군 초전면 홈실(椧谷)의 재남(濟南: 담뒤)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완석정 이언영(浣
石亭 李彦英 : 1568∼1639)선생의 부조대묘(不 大廟)를 모시고 있다. 선생(先生)은 조선조(朝鮮朝) 선
조(宣祖) 31년(1603年) 가을에 실시된 계묘(癸卯)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 제1로 장원(壯元)
급제 하신후 내직(內職)으로는 승지(承旨)를 비롯하여 형조 병조 공조 호조 예조좌랑(刑曹 兵曹 工
曹 戶曹 禮曺佐郞),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중국사신접반사(中國使臣接伴使), 사복시첨정(司僕寺
僉正),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용양위부사과(龍 衛副司果),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사예(司藝),
내담사정겸사헌부장령(內膽寺正兼司憲府掌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승정원좌부승지겸 경
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기주관(承政院左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記注官), 우부승지(右副
承旨), 동부승지(同副承旨)등을 역임하시고,외직(外職)으로는 경상(慶尙) 및 강원(江原)도사(都事),
대구부사(大邱府使, 不就), 청주(淸州) 선산(善山) 및 밀양(密陽)의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역임하면
서 학문진작, 민심 안정등 선정을 배풀고, 퇴임시에는 오직 책 몇권과 옷 몇벌만 갖이고 귀향하니 그
청렴을 모두 칭찬하였다.
임진왜란때에는 학봉 김성일(學峰 金誠一),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와 더불어 창의(倡義)에
앞장섰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때는 이원익(李元翼)과 같이 창령(昌寧) 화왕산성(火旺山城)방어에
진력하여 많은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진주대첩에도 크게 기여 하였다.
또한 광해군(光海君)의 폭정과 불의(不義)에 대하여 일신을 돌보지 않고 항의(抗議)직언(直言)하다
가 삭탈관직(削奪官職)과 방귀전사(放歸田舍)를 당하는등 효렴(孝廉), 청백(淸白)과 절의(節義)로 칭
송되는 영남(嶺南) 팔학사(八學士)의 한분이 되었다.
완정(浣亭)이선생(李先生)의 부조대묘(不 大廟)를 모신 종택(宗宅)으로서 이건물은 선생(先生) 7세
손(七世孫)으로 효,학행(孝 學行)이 뛰어난 요산(堯山) 이존영(李存永 :1787∼1849)이 건립했다고 전
해진다.
이 집은 안채 사랑채 대문간채 사당 내삼문 외삼문등 6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안채는 정면5
간 양측면 5간반의 ㄷ字形 박공 기와지붕으로 중앙정면 3간 측면2간등 6간이 대청이고 좌우에는 마
주보는 익사(翼舍)가 한단 낮게 전후로 돌출(突出)하여 위에서 보면 H자형(字形)에 가까운 형태를 하
고 있으며, 정면 대청에는 둥근기둥을 세운점이 특징이다. 사랑채4간 대문채 3간은 一 字로 연이어
있고, 사당 내삼문 외삼문은 각각3간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 및 대문채는 건립당시 초가6간 이었으나 노휴 붕괴되어 현재의 건물은 1949년경 개축되었
다. 이 집 뒷편에 있는 곡성산(穀城山)주봉을 의지하고 정방형(正方形)에 가까운 토담속에 동향(東
向)으로 배치되고 있는데, 안채 사랑채 및 사당은 토담으로 분리되어 별도 공간으로 되어 있고, 외삼
문에서 사랑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시 협문을 통하게 되어 있다. 또한 사당과 안채사이 토담에
도 하나의 협문이 있다.
완정고택(浣亭古宅)의 현판은 성산인(星山人) 극암(克菴)이기윤(李基允: 1891∼1971)의 글씨이다.
이 집은 1985년 12월 30일 경북 문화재자료 제16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1992∼1996까지 4회에
걸쳐 도,군비,자부담등 약 2억원의 예산으로 안채의 기단보수, 석가래 전면교체, 하수도신설, 담당설
치, 사당개보축 및 외삼문 신축등 공사를 완료하여 원형보존비교적 잘되고 있다.
<5. 경헌당(敬獻堂)>
옛날의 서당인데 벽리(碧李) 정헌공(正獻公) 이건지(李建之)선생후손들의 종당(宗堂)이다.
<6. 제강서당(濟岡書堂)>
제남(濟南)마을에 있으며 한학자 제서(濟西) 이정기(李貞基)선생이 후학(後學)을 가르치던 서당이
다.
<7. 애국지사 백아(白啞) 이정기(李定基)선생 추모비>
명곡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김창숙 이덕후 성배식 제공과 더불어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최연소
서명자로 적극 참여 하였을뿐만아니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등 조국 광복운동에 일생을 바
친 백아 이정기(李定基)선생의 추모비로 1995년 8월에 향리 유림에서 건립하였다. 정부에서 1995년 8
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다. 비문(碑文)은 이윤기(李潤基)박사가 찬(撰) 하였다.
<8. 창성당(昌成堂)>
배나뭇골(梨洞)에 위치하고 있는 창령성씨 집성촌의 종당(宗堂)이다.
<9. 절골>
약 400년전 이곳에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빈대가 많아서 페사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당시 사
용하던 기왓장, 그릇조각,맷돌바닥등 그 흔적만이 남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