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야... 나, 자기 없이 사는 게 너무 힘들어.... 혼자 살려고 노력
도 해 봤지만... 그럴수록 세상이 힘들다는 게 실감날 뿐인걸? 이
제... 자기 곁으로 가고 싶어....'
난 바지를 털고 그와의 추억이 있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허리정도
높이의 난간 밑을 보자 삐죽삐죽 튀어나온 바위들이 절벽 중간 중
간에 있었고 밑에는 불규칙하게 널려있는 뾰족한 바위들 사이로 파
도가 밀려나와 바위들을 적시고 있었다.
'기억 나? 이곳에서 자기와 나, 첫 키스를 했었잖아.... 혹시 기억나
지 않다는 건 아니겠지? 그럼 기억날 때까지 때려... 아니, 안아줄
게.... 이제... 자기 곁으로 갈 수 있어.... 사랑했어, 진우야.... 그리고...
미안해....'
한쪽 다리를 난간 밖으로 집어넣었다. 곧 다른 다리도 빠져 나오
고, 두 손을 뒤로하여 난간을 잡은 체 바닷바람을 들이켰다.
아... 시원해.
"어엇! 저 여자! 저 여자!"
날 발견한 남자의 외침이 들렸고 곧 주변이 웅성웅성 시끄러워 지
더니, 뒤에서 나에게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그러다가 다쳐요!"
다쳐? 다치는 정도가 아니라 몸이 산산조각 나겠지?
"아, 참하게 생긴 여자가 뭐 하는 짓이요? 어서 내 손잡고 이쪽으
로 오셔!"
나는 나를 걱정해 주는 이들에게 고개를 돌려 방긋 웃어 주었다.
고마워요, 걱정해 줘서....
"그래, 이쪽으로 와! 그런 지랄 같은 짓은 색시같이 생긴 여자가
할 짓이 안된 당께! 그건 미친년이나 하는 짓이여!"
구수한 사투리를 쓰는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께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난 웃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앗! 저! 저...!!"
그대로 손을 놔 버렸다. 할머니, 세상이 절 미치게 만들었어요...
진우야... 네 약속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머릿속으로 그동안의 삶이 지나갔다.
힘들고... 고통스럽고... 괴롭고.... 그런 삶 속에서 처음으로 찾아 온
행복.... 놓치기 싫었는데... 놓쳐버렸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행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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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1)
우... 오늘도 역시 만원버스이다. 생각해 봐라. 푹푹 찌는 7월의 더
위에 편히 일어설 곳 없는 만원버스. 게다가... 다른 사람과 몸이 스
칠 때는... 으윽.... 생각만 해도 얼굴이 자연스레 찡그려 진다.
--끼이익~
아앗! 기사아저씨!! 그렇게 버스를 험하게 몰면 어떻게요! 그렇게
모니까 급정거를 하면 이렇게 몸이 쏠리...
"엇!!"
"꺄아아악~!! 치, 치, 치... 치한이야!!"
--찰싹!!
"우욱... 아, 아프잖아!! 어? 어? 어?!"
버스가 흔들리는 틈을 타 내 가슴을 만진 치한(?)에게 손찌검을
한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클클클....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얼굴이 벌겋게 익어서 어쩔 줄 모
르고 당황하는 모습이.... 너 같은 치한은 한 번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흑, 흑... 어, 어라?"
그 치한은 다짜고짜 내 손목을 잡더니 열려있는 뒷문으로 나를 끌
고 나갔다. 우느라 정신이 팔려있던 나는 그대로 끌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 이놈, 이러고 나쁜 짓(?)하는 상습범 아냐?!
"뭐, 뭐 하는 짓이얏!! 숙녀의 몸을 만져놓고는 이런 후미진 골...
웁! 웁!"
착각하기 말길 바란다. 치한녀석이 손으로 내 입을 막은 것이다.
앗... 짜다. 그런데 진짜 상습범인가?
"야, 그렇게 떠들면 어떻게 할거야?! 내가 일부러 그랬을 줄 알아?
버스가 흔들리는 바람에 자빠질 뻔한 거 아무거나 잡았다가... 험,
험.... 아무튼, 내가 무조건 미안하니까 제발 소리 지르지 말아 줘.
응?"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치한은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천천
히 내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치웠다.
그 녀석의 얼굴을 본 나는 차마 '너 상습범이지?' 라고는 물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무 잘 생겼던 것이다. 여자 꽤나 울렸을 것 같았
다.
잘 생긴 그 녀석의 얼굴을 보자 무슨 심보가 들었는지 난 다시 소
리지르기 시작했다.
"나쁜... 어떻게 할거야? 내 인생 책임져! 책임 지라구우!! 웁! 웁,
웁!!"
젠장... 또 입이 막혀버렸다.
"아! 거참 시끄럽네! 조용히 하겠다고 했잖아!! 그리고! 무슨 그거
가지고 인생을 책임져?! 어이구! 책임 질 일도 많네! 결혼이라도 해
줘?"
우웅... 그건 그렇군.... 근데 나보다도 더 크게 소리지르는 넌 뭐
냐?
난 빠르게 고개를 저었고 녀석은 한숨을 쉬더니 또다시 입을 열었
다.
"그럼 내가 사과의 의미로 밥 한끼 사 줄게. 어때? 괜찮지?"
뭐야, 밥 한 그릇 먹고 떨어지라는 소리잖아?
고개를 젓는 날 보고 또 한숨을 쉬는 치한녀석이었다.
"모자라? 세끼 사주리?"
오호... 웬 횡재냐? 두끼만 뜯어먹으려고 했더니...
내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 녀석은 또 한숨을 쉬었다.
야, 야... 땅 꺼지겠다. 그만 쉬어라.
"세끼 사줄 테니까 손 치우면 소리 지르지 말아야 해? 그러면 밥
은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불안한 눈으로 날 보며 손을 치웠다.
난 그동안 코로만 숨을 쉬느라 모자랐던 산소를 공급하듯이 심호
흡을 하며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치한녀석이 무슨 짓이라
도 할까봐 괜히 겁이 났었던 것 같았다.
그 녀석은 내가 심호흡을 끝내자 또 한숨을 쉬고 물었다.
"휴우.... 너, 핸드폰 있어?"
".....왜?"
"밥 사주기로 했잖아."
"......"
별로 가르쳐 주기 싫었지만 밥을 위해서 입술을 쭉 내밀며 말해주
었다. 내가 불러준 번호를 그 녀석이 수첩에 적었고 나도 만약을
위해 그 녀석이 불러준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시켜 놓았다.
"그럼 난 간다."
치한녀석이 먼저 골목을 나왔고 나도 그 녀석을 따라 그 후미진
골목을 나왔다. 그런데 뒤에서 녀석의 뒷모습을 보니, 하나 깨달은
것이 있었다. 저 녀석이 입고 있는 옷은....
'우리학교 교복이잖아?'
그리고 또 하나, 내 머리를 자꾸 스치는 것이....
'저 녀석 왜 자꾸 내 앞을 가로막고 난리야?'
난 학교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러 버스정류장에 가야 하는데, 아
까부터 내가 가는 길목을 저 놈이 앞서가니깐 꼭 내가 저 놈을 따
라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저 녀석이 자꾸 힐끔힐끔 내 쪽을
보는 것이, '따라오지 마!!' 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것 같았
다.
그런데 갑자기 그 치한이 비틀거리더니 옆으로 난 골목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고, 해서 빨리 걸어 그 골목으로 머리
를 살짝 내밀고 보려고 했는데....
"우앗~!!"
"헤헤.... 역시...."
머리를 내밀자마자 보이는 그 놈의 눈동자에 깜짝 놀란 내가 뒤로
물러서자, 그 녀석은 그런 날 보고는 헤헤 웃었다.
.....굉장히 기분 나빴다.
"너, 나한테 관심 있냐?"
바지주머니에 재빨리 무언가를 집어넣는 그 녀석은 나에게 한 걸
음 다가오며 물었다.
이마에 힘줄이 하나 솟아나는 것을 느낀 나는 그대로 그 녀석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차 주었다.
"우악~!!"
다리를 잡고 닭싸움하듯이 껑충껑충 뛰는 그 놈을 보며 난 한 번
사악하게 웃어주고 정류장으로 갔고 곧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녀석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에게 다가왔고 내 옆에 서서 고개
를 쑥 내밀고는 나의 왼쪽 가슴 쪽을 보았다.
"민지희? 좋은 이름이네. 난 이진우라고 해. 이렇게 된 것도 인연
이고 나이도 같은 것 같으니까 친하게 지내자, 응?"
난 고개는 가만히 놔두고 눈동자만 돌려 진우라는 놈을 보았다.
다시 봐도 잘 생긴 얼굴이었고 웃으니까 더 잘생겨 보였다.
'윽! 이러면 안 돼, 민지희!! 정신차려!! 저놈은 나의 순결(?)을 빼
앗은 천하의 변태 치한이라고!!'
내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자 진우란 놈은 의아한 눈빛으로 날 보았
다.
"웃기지 마!! 너랑 나는 밥 세끼만 먹으면 모르는 사이야!"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그 놈이 순순히 물러가자 난 왠지 화가 났지만 뭐라 반박할 게 없
어 분을 삭이고 버스를 기다렸다.
5분 정도 지나자 버스가 왔다. 역시... 만원버스였다.
--치이익~ 치익~
버스가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와 그 놈을 포함한 4명이 버스
에 올라탔다.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앞쪽의 의자에 붙은 손잡이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1분 후... 난 엄청나게 화가 나 있었다. 바로 내 뒤에 누가 찰싹 붙
어서 자꾸 뭉그적거리는 것이었다.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런 상황
은 몇 번 있었다. 다행히도 뒤에서는 필살 적으로 나와 떨어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좋다, 이거야! 근데 왜 하필 뒤에 놈이 진우란 놈이냐
고!!'
그 놈이 또다시 내 가방을 툭 건드렸다. 난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
아봐서 눈에 잔뜩 힘을 주고 그 놈을 째려보았다.
"아, 미안."
그 순간, 버스가 급정거를 했고 난 손잡이를 잡은 손과 발에 힘을
주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중심을 잡기란 보통 힘든 게 아니다. 뒤에
서는 가방이란 놈이 무게 중심을 자꾸 흩트려 놓고, 구두란 놈은
날 자꾸 미끄러뜨리는데.... 그런 상황에서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방
지하기 위해서는 앞에 내가 한 행동과 같이 손잡이를 잡은 손과 발
에 힘을 주고 몸이 쏠리는 쪽의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여야 한다.
'휴~ 성공이다. 앗, 학교네? 내려야지....'
버스기사아저씨가 버스가 만원이기 때문에 앞쪽에 있는 사람들이
내릴 수 있도록 앞문도 열어주었다. 그런 아저씨에게 감사하며 버
스에서 내렸다.
"지희야! 넌 몇 반이냐? 난 6반인데...."
'.....6반? 6반이라고~?! 젠장!!! 왜 바로 옆반인거야아아!!!'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 잘생긴 상판을 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
바로 무시하기!! 하하!!! 이것보다 좋은 수가 있더냐??
진우는 내가 자길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자 무지무지 화가 났나보
다..... 였으면 오죽 좋을까?
그 녀석은 무시당해도 상관이 없는 족속인지 내 옆에서 싱글벙글
웃으며 날 따라왔다.
"가르쳐 주기 싫나보네? 뭐, 넌 너희 반에 갈 테니까 널 따라가면
알 수 있겠네."
'우우....'
왠지 이 녀석 옆에 있으면 피곤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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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2)
결국 진우는 내가 7반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바
로 옆 반인 6반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우리 학교 사준 고등학교가 남녀공학이라는 건 말 안 해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반까지 남녀공학이
아닌 짝수 반은 여자들 반, 홀수 반은 남자들 반으로 나뉘어 있다
는 것이다.
덕분에 학교 전체 분위기는 남녀공학의 전형적인 분위기이지만 남
자 반은 남학교 분위기, 여자 반은 여학교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다.
난 이런 학교의 반 배정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었다.
나는 이 학교보다 좋은 여고로 갈 수 있었지만, 여중에서 지냈었
기 때문에 남녀공학 학교에서 남자 짝꿍... 까지는 아니더라도 남학
생들과 같은 반에서 같이 공부했던 것을 꿈꾸었던 것이었다.
그 이유 때문에 난 한달 동안이나 우울증에 빠졌고 -다시 생각하
면 정말 어이없는 이유 때문에 우울증에 빠졌었다- 그 결과로 '얼
굴은 예쁘지만 우울하고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기분 나쁜 아이'
로 낙인찍혀 버렸다.
덤으로 반 아이들 중에 논다는(?) 아이들이 와서 이지메까지 하려
고 했었지만, 나도 중학교 때에 논다고(?) 소문이 나 있었기에 화려
한 말발로 그들은 모두 해치웠다(?).
하지만 무시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의 화려한 말발에 진
것이 분했는지 나의 뒷조사를 하여 꼬투리를 잡고 소문을 퍼뜨려
서, 아마 1학년 여학생들 중에선 나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
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 두 명이 있다.
5반의 진소라 와 나와 같은 반의 강윤아 이다.
이 둘은 내가 1학년의 모든 여학생들에게 무시당하고 기분 나쁜
눈초리를 받는 것을 무시하고 나와 친하게 지내 주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는데, 나보다는 못하지만 예쁘다는 소릴 많이 듣는다
(난 아무래도 공주병인가보다). 그녀들은 나 때문에 나와 같이 무시
와 따가운 눈빛들을 받아야 했다. 이건 그 둘에게 무지무지 엄청나
게 고맙고, 미안하다.....
그 와중에 좋은 점은....
여학생들에게는 무시당하지만, 남학생들에게는 우리 셋이 꽤 인기
가 좋다는 것이다.
나만해도, 1학년 5명, 2학년 2명, 3학년 3명에게 고백 받은 전적(?)
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나의 외모에 대하여 얘기해 보자.
어깨까지 내려오는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옅지만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눈썹... 동양인의 매력을 지닌 끝이 올라간 붉은 눈(난
시력이 좋지 않기 때문에 렌즈를 끼는데, 그 렌즈가 붉은 색 렌즈
이다)... 얼굴 전체에 자연스럽게 있는 예쁘고 작은 코... 분홍빛을
띄는 작고 탐스러운 입술...
오목조목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목구비는 위의 10명의 고백이 당연
하다 못해 왜 그렇게 숫자가 적은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공주병이
말기까지 갔나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옆길로 약간 센 것이 아니라 한 5km정도
센 것 같다.
--딩동! 딩동!
스피커에서 명쾌한 종소리가 들려왔고 사회 선생님이 나가는 동시에 교실은 웅성웅성 거리며 식당으로 가는 사람들에 의해 시끄러워졌다.
"지희야~~!! 밥 먹으러 가자아~!"
윤아가 나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에게 말했다. 난 윤아와 함께 교실 문을 나서며 5반의 소라에게 가기 시작했다.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있는 윤아... 저기서 달려오는 소라... 최악이다....
아니, 내가 왜 곤란해해야 하는 거지? 그냥 배 째라고 나가면 되잖아! 저 놈은 그냥 내가 좋다고 따라다니는 놈이야....
'제발 아침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길....'
"하핫! 지희 맞네? 저, 아침에...."
--퍽!!
"으악!!"
아침과 같이 닭싸움하듯이 뛰는 그 녀석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저기서 달려오는 소라에게 손을 흔들었다.
"지희야, 안녕! 그런데 얘는 왜 때렸어?"
소라는 방긋 웃는 얼굴로 나에게 다가오더니 귀에 입술을 가까이 하고 속삭였다.
"얘 1학년 짱이야...."
"에?"
난 못 믿겠다는 눈빛으로 허리를 숙이고 정강이를 문지르는 진우를 보았다. 허약한 몸매에 맞아도 별로 아파 보이지 않는 주먹... 이런 녀석이 1학년 짱이라니....
"하, 하, 하... 서, 설마...."
"잘 봐...."
소라는 호기심에 찬 윤아의 눈과 긴장된 나의 눈을 한번 훑어보고는 진우의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야, 너 1학년 짱이지?"
"아이고, 피멍들겠네... 똑같은 데를 정확히 가격하다니.... 어? 뭐라고 했어?"
소라는 한숨을 푹 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 1학년 짱이냐고."
"응. 얘들이 그렇게 부르더라고!"
난 갑자기 빈혈이 일어나 몸이 비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윤아가 날 부축해졌고 진우는 그런 날 의아한 눈빛으로 보고는 소라를 보고 밝게 웃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앞에 한 글자가 빠졌네...."
"호, 혹시.... '쌈'?"
그 뒤의 글자가 짱이 아니라 장이라면 쌈장.... 아, 이게 아니군.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하고는 입을 열었다.
"아냐, 그건... '얼'"
"우아아아악~!!!"
--짜악!!
난 다짜고짜 그놈의 면상에 손자국을 남겨줬고 그놈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보았다. 주변의 눈길이 느껴진다.
"왜 때려?!"
난 검지로 진우란 놈에게 삿대질을 하며 대답했다.
"이 상판때기가? 말도 안 돼! 이건 꿈이야!!"
그는 내 말을 듣고 잠시 휘청거리는 듯 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야, 넌 이 잘생긴 얼굴이 안보이니?"
그 말에 난 진우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펴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윤아도 나와 같이 고개를 저었고 소라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
를 으쓱 해 보였다.
"휴.... 심각하군. 나의 잘생긴 얼굴이 보이지 않다니.... 혹시...?"
진우는 나의 눈앞에서 손바닥을 보이며 그 손바닥을 위 아래로 흔
들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깜빡이며 머리를 뒤로 뺐다.
윤아와 소라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했고 그 둘은 나와 비슷한 반응
을 보였다.
"흠... 모두 눈은 정상인데...."
난 그의 말에 이마에 힘줄이 솟는 것을 느끼며 그의 머리에 꿀밤
을 주었다.
"휴... 그런데, 나는 왜 불렀어?"
그 말을 다 내뱉은 순간 아까 진우의 입에서 '아침에....'란 말이 나
온 게 기억나며 입을 막으려 했지만 발이 꼬여 앞으로 꼬꾸라질 뻔
하며 그의 말을 들어야 했다.
"아침에 밥 사 주기로 했잖아. 이번 점심은 내 식권으로 먹어."
몸의 중심을 다 잡았을 때에 그 말을 끝까지 다 들은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뭐야, 너무 짜잖아."
"야, 식권이 2천 원 하는 거 알잖아? 그 정도면 돈 많이 쓴 건 줄
알아."
"그래두...."
"자, 빨리 가자고! 잘못하다가는 자리 없겠다!"
그의 말에 윤아와 소라는 날 '무슨 일이야?'라는 표정으로 보았고,
난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가며 '자, 배고프다. 빨리 가자.'라며 외
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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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3)
파란 하늘 가운데 떠 있는 태양은 뭉실뭉실한 구름 뒤로 숨어 그
구름 밑은 구름의 그림자로 인해 여름의 무더움을 어느 정도 가려
주고 있었다.
그 구름의 그림자 안의 어느 학교는 그림자의 시원함을 만끽하며
점심이란 이름 하에 밥을 먹고 있었고 그 중에는 나, 지희라는 예
쁜 이름과 그 이름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소녀가 있었
다(역시 공주병 말기...).
이런 시원한 구름이 만든 그늘 안에서 결점이 있다면, 내 옆에서
떠드는 진우라는 인간일 것이다.
"우리학교 급식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니깐! 아~ 오늘은 어떤 반찬
날 기다리고 있을까?"
"으... 시꾸랏!! 우웅.... 근데 아까 소라 너무했어.... 그렇게 놀리다
니...."
"어머, 놀리다니! 난 엄연히 사실만을 말했다고~! 호호호...."
입을 가리며 사악하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웃어 보이는 소
라의 모습이란.... 정말 악마가 따로 없었다.
"아 참! 지희야, 너 저번에 그 일은 어떻게 됐어?"
"뭐? 아, 그거~ 오호호호호호!! 그거야 내 화려한 말발로 10% 더
붙여서 받았잖냐!!"
"와... 정말?"
"내가 빈말하겠니~?"
윤아가 이렇게 묻는 '그 일'이란, 내가 집안형편이 안 좋은 관계로
아르바이트로 주유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악질 주유소 사장
이란 놈이 돈을 안주는 거였다.
그래서 내가 집에 가서 분풀이를 한 다음.... 그 다음날인 어제 그
사장에게 '돈 안주면 무슨 법 0조 0항에 의해 고소할 수 있고, 그
벌금이 얼마며 징역 0개월이다!'라는 식으로 협박을 하니깐 식은땀
을 삐질 흘리면서 10%를 더 줬었다.
물론, 법 어쩌고 한 거는 순간적으로 나온 협박이라서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런 법이 있는지도 잘 모르고 말이다.
"그래서, 너 거기서 계속 알바 할거야?"
소라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물었다.
"내가 미쳤니~? 다른 일 구해 봐야지...."
말꼬리를 흐리며 말하는 나에게 지금까지 우리의 이야기에 끼지
못했던 진우가 무슨 말이냐는 듯이 물어왔다.
"알바? 아르바이트? 무슨 일인데?"
"아, 그건 내가 알바 하는 게 있는데 잘려서 그러는 거야."
내가 대충 대답하자 진우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바닥에
주먹을 탁! 치며 말했다.
"내가 좋은 일자리 알고 있는데, 소개시켜 줄까?"
"뭔데?"
일단 급하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야 하는 나는 진우의 말이 끝
나자마자 바로 물었다.
"응. 패스트푸드점인데, 한시간에 몇 천 원이던가?"
"아, 나 그거 할래!"
"알았어. 내가 잘 말해줄게. 일단 밥부터 먹자."
우리가 이렇게 얘기하는 동안 우린 벌써 줄을 서고 있었던 것이었
다.
난 진우에게 식권을 받아서 입구에 있는 아줌마에게 건네고는 여
전히 맛있는 급식을 먹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는 하숙집의 내 방에 들어가 침대에 풀
썩! 엎드리고는 침대의 포근함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 음... 한 생후 5개월 정
도 때에 고아원에 버려졌다고 들었다.
어떤 언니의 말에 의하면 나의 아버지란 사람은 이미 죽었고, 어
머니가 혼자 살기도 힘들어서 나를 고아원에 버렸다는 얘기이다.
하여튼, 밥도 얼마 안주고 이상한 일들만 시키는 고아원에 질려서
그 곳에서 5살 때에 가출을 했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아무것도 모
르는 5살 때에 가출했겠나?- 길에서 쓰러져 있던 나를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가 집 안에 들여서 그때부터 나를 키웠단다.
할아버지는 81세에, 내가 13살 때에 이름 모를 병으로 돌아가셨다.
난 그때부터 다 무너져 가는,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몇 평 안 되고
난방도 연탄으로 하는 집에서 정부에서 주는 약간의 돈과 내가 틈
틈이 일해서 번 돈으로 학교도 다니며 살아갔고 지금 이 하숙집에
서 살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집은 지금 무슨 개발 어쩌고 하는 것 때문에
아파트가 되어 버렸지만....
아무튼, 지금 이 하숙집 아주머니는 마음씨가 착하고 별로 돈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매달 돈을 적게 받는 편이었다.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언니, 오빠들도 편
하게 대해 주어서 옛날에 비해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이면 주유소에서 기름 묻히고 있을 때인데.... 패스트
푸드점이라면.... 햄버거도 주려나?'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대
학생 늑대라면 베개를 던져줄 생각으로 베개를 꼬옥 잡고 문 쪽으
로 고개를 돌렸다.
"아... 미나 언니. 무슨 일이야?"
"헤헤.... 할 일이 없어서... 지금 자기에는 뭐하고. 같이 나갈래?"
손민아 언니... 백조다. 대학도 졸업했다는데, 취직이 안되나 보다.
아침에 일어나서 뒹굴뒹굴 굴러다니다가 PC방이나 가고, 오는 길
에 만화책을 빌려서 보다가 뒹굴뒹굴... 그 후엔 TV를 보거나 컴퓨
터를 하고, 새벽 3시쯤 되어서야 침대에 눕고, 12시에 아침 겸 점심
먹고 또 뒹굴뒹굴....
그냥 멍하니 다니는 것 같지만, 방학 때에 관찰한 결과 엄청나게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생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아마 만화책을 다 보고 뒹굴다가 내가 오는 것을 듣고 -귀
는 엄청나게 좋다- 오는 것이리라....
"어디가게?"
"음... 일단 나가고 보자."
"잠깐, 나 교복 갈아입어야 되."
"알았어. 기다릴게."
고개를 끄덕이고 교복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는데, 언니는 멀뚱멀
뚱 가만히 서서 날 보는 것이었다.
"언니~이!"
"왜 그래? 같은 여자끼리~."
"그래도 이건 실례라고!!"
"우~ 알았어."
--탕!
문이 닫히고 난 재빨리 교복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지금 시각은 6시. 아마 지금쯤 아주머니가 음식을 준비하고 계실
것이다.
"자, 다 갈아입었다~!"
"그래?"
아까도 말했듯이 이 여자는 귀가 엄청나게 좋다.
문에 귀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언니는 그 복장 그대로 나갈 거야?"
"응!"
"......"
검은 색의 큰 뿔테안경에 고등학교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군청색
의 체육복. 뒤로 아무렇게나 묶은 부스스한 머리카락.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 아마 나갈 때에도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커다랗고 빨
간, 눈에 확 띄는 슬리퍼를 신고 나갈 것이 분명했다.
백조의 표본도 이보다는 덜할 것이다.
저번에도 언니의 복장을 바꾸려고 했지만, 오히려 '이게 얼마나 편
한데~!!'라는 언니의 주장으로 나까지 언니의 중학교 체육복을 -난
신장이 159cm로 작은 편이라서 오히려 조금 헐렁했다- 입고 나가
야 했었다.
"휴우... 어쩔 수 없지...."
"나가자앗!!"
민아 언니는 나에게 팔짱을 끼고 거의 날 끌고 가듯이 현관으로
나갔다. 물론....
"아주머니~ 저흰 나가서 먹고 올게요~!"
라는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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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4)
번화가에 나온 우리는 일단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집으로 향
했다.
짬뽕을 배 터지게 먹고 근처 오락실에서 놀고, PC방에서 한 시간
더 놀다보니 벌써 시간이 9시가 되어 있었다.
난 거의 언니에게 이리저리 휘둘려서 별로 재미를 보진 못했지만
언니는 엄청나게 즐거워 보였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지희야, 나중에 우리 또 놀자! 다른 얘들은 다 저거 한다, 이거
한다 라며 놀아주지도 않는단 말이야."
하긴, 우리 하숙집에 사는 언니, 오빠들이 다니는 대학교는 입학할
때에도 경쟁률이 높아서 입학하고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힘들어진
다는 말을 들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서 달리 할게 없어서
언니랑 논거야. 내일부터는 새로운 아르바이트 다녀야 해."
"뭐, 어쩔 수 없지...."
그런 언니의 얼굴엔 아쉬움이 들어 있었지만 그리 크게 실망한 듯
보이진 않았다.
"자! 늦었다. 집에 빨리 가야지."
언니는 나와 팔짱을 끼고는 왼쪽으로 돌아 아까 지나갔던 곳을 되
돌아가기 시작했다.
차 한 대 정도 지나갈 폭의 골목에는 여러 가지 잡다한 상점들과
숙박업소도 간간이 보였다.
"와~ 예쁘게 생겼는데? 이봐, 나랑 놀러가지 않을래? 내가 재미있
는데 가르쳐줄게."
길 잘 걸어가던 우리에게 갑자기 머리카락을 반은 빨강, 반은 파
랑으로 염색하고 귀에는 귀걸이를 5~6개정도 건 '나 양아치요.'하고
광고하는 듯한 차림을 한 20대 초반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그의 주위에는 양아치임을 광고하는 듯한 차림을 한 남자가 3명
더 있었다.
"우리 바쁘니깐 길 좀 비켜줄래?"
거부의사를 확실히 밝히는 언니를 잠깐 흘겨본 그의 옆에 있던 남
자는 나에게 눈을 돌리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밝은 듯 한 웃음을 지
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은 나의 이들을 만날 때부터 유지시켰던
관심 없다는 무표정을 찡그러뜨리고 말았다.
"거기 못생긴 아줌마는 가도 되니깐, 어때? 우리랑 같이 놀러 갈
래?"
"어쭈? 아줌마?! 이거 누굴 물로보나!"
언니가 눈을 치켜 뜨며 소리지르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그 남자는 그런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비릿한 웃음을 언니에
게 보내며 말했다.
"뭣하면 아줌마도 같이 데리고 가 줄 수 있어."
"이, 이게!"
뚜껑이 열린 듯 팔을 걷어붙이는 언니에게 멈추라는 듯이 언니의
앞을 가로막았다.
"언니, 그냥 가자. 이런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에 일일이 오냐오냐
해주면 우리 입이 남아나질 않을 거야."
일부러 그들을 '개'로 취급함과 동시에 그들의 말을 무시하며 그들
을 비켜서 가려고 하자 그들은 살짝 얼굴들을 찌푸리며 우리들을
막아섰다.
"이게 얼굴 반반하게 생겨서 같이 놀아주는 영광을 주려고 했는데
뭐가 어째? 이게 맞고싶어 환장했나!"
그는 때리려는 듯이 손바닥을 치켜올려 겁을 주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내가 겁을 먹을 리가 없다.
"흥, 무슨 얼어죽을 영광? 그런 영광 개한테나 줘 버려! 손은 올려
서 어쩌려고? 손찌검이나 하려고? 해봐! 해봐~!! 꺄악!!"
내가 때려 보라는 듯이 얼굴을 앞으로 들이밀자 그가 정말로 나의
고운 뺨에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냐?- 손자국을 만든 것이
다.
덕분에 난 그의 힘에 의해 고개가 옆으로 꺾이고 다리에 힘이 풀
려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야! 니가 뭔데 우리 지희한테 손찌검이야!!"
날 때린 그는 순간 아차! 한 듯 했지만 언니가 따져들며 소리치자
다시 손을 들었다.
"하! 또 때리려고 하시나? 안되니까 폭력부터 나오네? 그래서 니
가...."
"지희야! 여긴 왜 넘어져있어?"
갑자기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바로 진우였다.
그는 바로 뛰어와서 나의 양팔을 잡고는 날 일으켜주었다.
"얜 또 뭐야?"
날 때린 놈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고 난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녀석이 내 뺨을 때렸어."
진우의 시선이 내 손가락을 따라 그 놈에게 꽂혔고, 그와 함께 그
의 몸에서 왠지 오로라가 펼쳐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오로라에 쫄은 양아치가 신음을 흘리더니 다시 마음을 다잡은
듯 소리쳤다.
"그, 그렇게 노려만 볼 거냐? 덤비려면 덤벼 봐!"
용기를 되찾은 그가 도발하자 진우는 간단히 넘어가고 그에게 달
려들었다.
하지만 그가 달려가는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어딘가 왠지 어설퍼
보였다.
처음의 그 오로라에 부응하지 못하는 진우의 모습에 그 양아치는
몸을 살짝 움직여 그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어리둥절해 있었다.
"이거 싸움의 '싸'자도 모르는 풋내기 아냐?"
라는 그의 말이 끝나자 진우는 온 힘을 쏟아 부은 주먹 공격이 허
공을 치자 몸의 중심을 잃고 철푸덕! 넘어져버렸다.
그의 모습을 어이없게 쳐다본 양아치들은 모두들 시선을 주고받으
며 고개를 끄덕이고 진우를 사정없이 밟았다.
양아치의 말대로 진우는 싸움의 '싸'자도 모르는 듯 몸을 웅크리고
충격을 최소화 할 뿐, 갑자기 슈퍼맨이 되어 벌떡 일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쿡쿡쿡...."
왠지 만난 지 별로 되지도 않았는데 나 때문에 4명의 양아치들에
게 밟히는 진우에게 미안해져서 그들을 말리려고 일어섰는데, 갑자
기 옆에서 소름이 돋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나의 절친한 동생을 걱정해주는 친구를 밟다니... 용서 못
해!! 오늘 너희 다 죽어써~!!!"
그 웃음소리를 낸 장본인은 다름 아닌 민아 언니였다.
민아 언니는 그렇게 소리치며 달려나가 등을 보이며 진우를 밟는
양아치에게 돌려차기를 선사해 자신의 등장을 알리고 나머지 3명을
각종 태권도 기술과 8단 콤보까지 보여주며 해치웠다.
양아치들이 달려간 후에 안경을 치켜올리고 씨익 웃는 언니의 모
습이란.... 앞으로 절대 언니에게 화를 주지 않겠다는 다짐이 절로
생겨났다.
진우의 온 몸에는 그들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고 얼굴은 그래도 최
대한 보호했는지 약간 까진 상처만 있었다. 대신 팔과 다리에 퍼렇
게 멍이 든 게 보였고 옷도 약간 찢겨져 있었다.
"으윽... 하아... 크윽... 헤헤... 안녕... 지희야?"
힘겹게 고통을 참고 일어선 진우는 나를 향해 밝게 웃으며 인사했
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속에 보이는 웃음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으이구~ 바보.... 가만히 있어도 언니가 나섰을 텐데 왜 나서서 이
꼴이야?"
"난 얘가 맞지 않았으면 나서지 않았을 거야. 아, 너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언니의 황당한 대답에 잠시 얼이 빠져 있는 사이 진우에게 묻는
언니였다.
"아뇨... 헤헷... 이 정도는 괜찮아요. 하루나 이틀정도 쉬면 괜찮아
질 거예요."
"그래? 그럼 말고.... 지희야, 가자!"
나를 향해 웃으며 말하는 언니에게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얘 좀 집까지 데려다 줄게.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그
냥 가면 너무 미안하잖아...."
"아, 난 괜찮...."
"그래? 그럼 집까지 데려다주기만 해. 너무 늦지 말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언니는 손을 흔들며 저쪽으로 달려나갔고
난 진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 너희 집 어디야?"
"아... 그러니까 이 길로 쭈욱 가서 오른쪽으로 꺾은 다음 또 쭈욱
가서 왼쪽으로 꺾으면 우리 집이 보여."
"혼자 일어날 수 있겠어?"
내 말에 그가 힘겹게 일어나서 비틀비틀 다리를 쩔뚝거리면서 걷
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매우 불안했다.
별 수 없이 그의 팔을 내 어깨에 두르고 천천히 걸어야 했다. 그
렇게 20분 가량 걷자 진우가 내 어깨에서 팔을 빼고 나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여기야. 우리 집이... 고마워. 괜찮으면 언제든 놀러와."
그는 그렇게 말하고 벨을 누르더니 철컹! 하고 열린 문을 열고 들
어가며 나에게 손을 흔들고 문을 닫았다.
"와.... 이건 꼭 궁전 같네..."
내가 그의 집을 본 소감이었다.
집에 대한 소감을 마치고 시계를 보자 9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
다. 시계를 보자 '늦었다.'란 단어가 머리에 떠오르며 냅다 달리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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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5)
다행히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시계가 9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
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내 방에 들어간 나는 곧바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아, 피곤한 하루였다. 내일 진우가 아르바이트 소개시켜 준다고
했었지?'
비교적 쉽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대로 편안한 침대 속에서 잠의 세계로 빠져 버렸다.
--띠띠띠띠~!!
엄청나게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엎드린 채로 오른손으로 자명종
의 소리를 멈췄다.
'우웅.... 나중에 자명종 좀 바꿔야지.... 좀 더 좋은 멜로디로....'
또다시 잠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아 졸린 눈을 비비며 힘겹게
일어났다. 욕실로 가서 씻고 다시 방에 들어와서 교복을 갈아입은
나는 곧장 학교로 향했다.
그렇게 쉬는 시간에는 소라, 윤아와 이야기를 하며 수업은 대충대
충 듣던 중, 드디어 4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시작되었다.
윤아와 함께 소라네 반에 가던 중, 진우를 만나고 소라를 만나고...
대충 어제와 비슷한 스토리로 진우에게 식권을 받아 밥을 먹었다.
"쳇, 치사하다! 그 세 끼가 이 세 끼였냐?"
듣는 사람에 따라 눈살이 찌푸려지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나는
진우를 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내용은 Baby가 아닌
3번의 끼니를 말하는 것이다.
진우는 그 말의 뜻을 아는지라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자신만만하
게 대답했다.
"물론 두 번은 이런 거지만 마지막 거는 기대해도 좋아. 아, 그리
고 오늘 아르바이트 소개니깐 수업 끝나고 우리 반 앞에서 기다려."
"알았어. 그런데 한 시간이 얼마야?"
내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평일 4시간 주말 7시간이다. 그럼
한 달에 약 150시간정도 하게 되는데, 웬만큼 주지 않으면 생활이
어려워지고 생활이 어려워질 정도라면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음... 글쎄? 내가 소개해주는 거니깐 다른 곳보다는 많이 줄걸?"
자기가 소개해 주는 거니까 다른 곳보다는 많이 줄 거라고? 음...
무슨 뜻이지?
하지만 그렇게는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일단 가 봐야 알겠
지... 그것보다는 기대해도 좋다는 마지막 밥에 관심이 더 가는 나
였다.
학교가 끝나고 윤아와 소라에게 인사를 하고 진우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우리 하숙집에서 세 정거장 정도 거리에 있는 패스트푸드
점이었다. 저녁시간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손님은 꽤 많았다.
진우와 내가 들어간 곳은 '직원휴게실'과 '관계자 외 출입금지'란
글이 걸려있는 문이 있는 곳이었다.
그 안에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고 있었다.
"이제 바빠질텐데 그렇게 누워있어도 괜찮아요?"
진우가 장난기 있는 목소리로 묻자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남자
가 TV에서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진우 왔구나! 그래, 무슨 일이냐? 그런데 옆에 있는 학생은
누구?"
"아, 전...."
"아르바이트하려고요. 우리 둘이."
내 말을 끊은 그를 째려보려고 했는데 그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우리'라니....
"야, 너도 할거였어?"
"시간당 얼마 줄 거예요?"
내 말을 무참히 씹고 남자에게 묻는 진우에게 이전의 2배에 달하
는 째림을 주자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요즘에 천훈이 형님이 용돈을 안주시냐? 그 애는 네 여자친구?"
"아무것도 묻지 마시고 시간당 얼마 줄 거예요?! 많이 줄수록 좋
아요!"
그는 진우의 외침에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
었다.
"흠.... 너야 뭐, 제대로 한 적이 없으니깐 시간으로 하면 용돈도 제
대로 못 벌 거야. 그러니까 월급으로 150만원씩 줄게. 그 정도면 괜
찮지?"
뜨악~! 배, 배, 백 오십?
"저, 정말로 그렇게 주시는 거예요?"
"내가 한 입으로 두 말할 것 같니?"
"전 아저씨 처음 보는걸요?"
"으윽....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아줘라.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니?"
그러나 그런 그의 말과는 달리 얼굴 표정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불러요?"
"음... 오빠라던가 이름을 부르던가."
"이름이 뭔데요?"
"천명, 이천명이다. 그래, 이름 부를래? 천명 씨이~ 하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자 그 눈빛을 보고 바로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아 시선을 슬쩍 돌리고는 말했다.
"그냥 아저씨라고 부를래요."
"큭... 그래,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진우, 넌 아르바이트 할거냐?"
그렇게 우리 둘은 월 150만원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한 달에 150만원이라니.... 우리 둘만해도 한 달에 300은 나갈 거
아냐? 그래, 이건 하늘이 날 불쌍히 여기셔서 주신 축복이야!
그 아저씨에게 대충 어떻게 일을 하는지 들은 후, 진우와 헤어지
고 하숙집으로 곧장 와서는 침대에 누워버렸다.
"우아~ 아무것도 하기 싫어! 피곤하다."
그러나 말 한대로 한다면 아주머니에게 '내가 싸게 방도 내주고
밥도 최선을 다해 만들었는데 맛이 없어서 안 먹는 거니?'나, '욕실
이 지저분해서 씻지 않는 거야?'라며 울먹이는 소리를 들어야 하기
에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후에 씻고 저녁식사를 한 다음 침대에 누
워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학교로 나와 평소와 다름없는 학교생활을 보
내고 드디어 점심시간이 되었다.
"야, 진우! 오늘은 식권 아니지?"
설마 어제 기대하라고 했는데 나보고 식권을 기대하라고 한 것 같
지는 않았기에 물어봤다.
"'오늘은'이 아냐. 그 기대는 내일까지 해야 할걸? 오늘은 그냥 네
식권으로 먹어라. 내일 내가 아주 근사한 점심을 먹여주마."
내일은 토요일이라서 내일 점심을 노리는 것 같았다. 훗! 내 기대
에 못 미쳤다가는 -예를 들어 중국집이라던가 분식집이라던가....-
유언이나 생각해둬야 할걸?
하지만 그가 유언을 생각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고급 레스토랑'. 진우가 날 데리고 간 곳이었다. 약간 유치한 이름
의 레스토랑이었지만 그 이름에 뒤지지 않게 정말 인테리어라던가
실내 장식이라던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한눈에 '고급!'이라는 단
어가 머리에 떠오를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야.... 너 돈 많나보다?"
그가 메뉴를 고를 동안 주위를 둘러본 내가 혹시 얘가 나보고 계
산하라 그러지 않을까라는 불안에 휩싸여 슬쩍 물었다.
"후후... 저번에 우리 집 못 봤냐?"
나는 그의 말에 저번에 내 앞에 앉은 인간이 4인조 양아치에게 밟
히고 그를 그의 집까지 바래다 줄 때를 기억해 냈다. 그 궁전 같은 집을....
"아아.... 쳇! 좋겠다. 누군 뼈빠지게 벌어서 겨우 입에 풀칠하는데
누군 부모 잘 만나서 밥 먹을 때마다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서 외식
하고!"
"아냐, 난 얼마 전에 가출해서 돈도 얼마 없다고. 여기에 온 것도
삼촌 -아, 그러니까 우리 아르바이트하는 곳 주인. 그 분이 우리 삼
촌이셔- 한테 돈 꿔서 온 거란 말이야. 마지막으로 사주는 건 좋은
곳에서 사 주려고. 그래서 지금까지 식권 준거고."
"....그래? 근데 왜 가출했냐?"
부잣집에서 태어난 그가 잘못한 것은 아니기에 그건 넘어가고 가
출한 이유를 물었다.
"으응.... 그게... 아니다. 나중에 우리가 더욱 친해지면 그때 말해줄
게. 아마 이 가출, 엄청 오래 갈 거니까."
"그렇구나. 아, 왔다. 그만 얘기하고 먹자."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배가 고팠던 나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스
테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아~ 오랜만에 좋은 음식 먹었네. 잘 먹었다."
맛있는 점심에 만족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진우의 부름
만 없었다면 말이다.
"지희야! 잠깐 자리에 앉아봐."
"응? 왜?"
뭔가 할말이 있을 듯한 그의 말에 난 일어서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진우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더니 나의 눈을 보고 입을 열었
다.
"지희야?"
"응?"
"나랑 사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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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6)
시간은 모든 자에게 평등하다. 모든 것에 주어지는 시간은 같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내느냐에 따라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
지는 사람도 있고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도 있다.
난 전자에 속했다. 지난 2년 간 진우와 지낸 시간을 되돌아보면
모두 행복한 시간들이었고 2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진우가 나에게 사귀자고 한 때가 마치 어제 같은데...
오늘은 졸업여행을 가는 날이다. 3박 4일 동안 경상남도로 여행을
간다. 지금 난 버스에서 바깥풍경을 구경하며 앉아있었다.
"와~ 저 산은 어떻게 저렇게 높냐? 앗! 앗! 저기 침 뱉는 트럭 아
저씨! 저러면 벌금이... 얼마였지?"
처음엔 이렇게 호들갑을 떨었지만 한 시간쯤 지나자 어제 밤을 설
친 덕분인지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내 옆에는 소라가 벌써 곯
아떨어져 있었다. 내 뒤에는 윤아가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만화책을 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여섯 미인 의자매에 새로 가입(?)
한 시연이가 있었다. 내 앞에 두 자리에는 나머지 2명이 있고 말이
다. 지금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 설마 우리가 3학년이 될 때까지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겠지? 우리가 3년 동
안 무시당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들도 3년 동안 계속 우리들을 무
시할 골빈 녀석들은 아니고 말이다.
오히려 우리 여섯 미인 의자매는 -우리는 충분히 미인이라고 생각
하고 있고 그렇게 불리고 있다- 학생들의 인기를 여섯 몸에(?) 받
고 있다. 2학년 때에는 학교 축제에 나갔다가 꽃을 너무 많이 받아
서 꽃 장사를 하기도 했었다.(믿거나 말거나)
"하암~ 에구 졸려라. 시연아, 휴게실에 도착하면 나 깨워."
뒤를 돌아보며 시연이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가방에서 모자를 꺼내
푹 눌러썼다.
하아... 행복한 걸까? 내 주위에는 나에게 미소지으며 말을 걸어오
는 또래 아이들, 후배들. 내 옆에서 항상 같이 있을 것 같은 다섯의
친구들. 그리고 남자친구란 이름으로 나에게 잘해주는 진우.
진우가 처음에 나에게 사귀자고 했을 때에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그 고백을 거절했다. 만난 지 며칠 안됐는데 벌써?
그리고 그 뒤에서부터 나에게 질책하지도 않고 다른 날처럼 웃으
며 날 대하는 그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편안해졌다...고나 할까? 아
무튼 그렇게 계속 지내고 일주일 뒤에 다시 고백을 받을 때에는 흔
쾌히 승낙을 했다. 뭐, 얼짱이라는데 한번 사귀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 뒤로 그와 사귀고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조폭의 아들이
란다.... 그땐 아마 현기증이 났었지?- 그도 나에게 대해서 많은 것
을 알게되고...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편하게 상담하고.... 그 정
도까지 되자 학교에서는 우리가 닭살커플이라고 소문이 났다. 덕분
에 나에게 '골키퍼 없다고 골 안 들어가나?'라고 필승을 외치던 남
자, 여자들도 우리의 닭살에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던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린 닭살이 아니다. 그냥 다른 연인들처럼 찰
싹 붙어 다니고 밥 떠 먹여주고 모르는 거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사
랑(?)을 확인하는 대화를 할 정도.... 조금 생각해 보니 조금. 아주
약간 닭살이 돋는 행동을 한 적이 있던 것 같다.
"지희야! 숙소에 도착했어!"
응? 휴게소가 아니라 숙소?
"숙소라니?"
"휴게소에서 깨웠더니만 일어나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오래 잘
수 가 있어?"
내가 그렇게 오래 잤나? 시계를 보니... 내가 이때쯤에 잤으니까....
9시간 잤나? 에고... 휴게소에서 진우랑 만나기로 했는데... 9시간이
나 잤다니.... 밤에 잠 다 잤군. 뭐, 밤에 신나게 놀아야 하기도 하니
깐...
"자, 숙소로 들어가자~ 지희는 지금까지 버스에서 구경하는 거 하
나도 못 봤겠네? 괜찮아. 그렇게 볼 것도 없었으니까. 저녁 먹고 자
유시간이니까 신나게 놀자."
마, 말이 엄청나게 빠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빨리 말할 수 있는
거지? 아차차... 9시간동안 내리 잤으니 점심도 못 먹었겠군? 저녁
은 많이 먹어야겠다.
우리 여섯 미인 의자매들은 배정된 방에 -다행히도 6인 실 하나
있는걸 소라가 잽싸게 뺏었다(?)- 짐을 풀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저
녁은 비교적 맛있는 음식이었고 저녁을 다 먹고 우린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자~ 이제 이 호텔의 이름을 사칭한 모텔을 어떻게 빠져나갈지 계
획을 정해야지?"
윤아가 이 지역의 여행지도를 꺼내어 펼치며 말했고 우리 여섯 의
자매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두시간 뒤...
"야호~ 바다닷~!!"
미녀 의자매에 올해에 가입한 아라가 소리를 지르며 소라와 맨발
로 파도 피하기 놀이(?)를 하기 시작했고 윤아는 갈아입기 위해 가
지고 온 남방과 청바지를 모래사장에 내려놓고 밤바다를 수영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밤바다를 수영하는 게 로맨틱하다
나? 시연이와 혜미는 -혜미는 미녀 의자매에 작년에 가입했다- 모
래사장의 모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나? 난 진우와 팔짱을 끼고 밤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얘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후훗! 저런 솔로들은 저렇게 놀지만 난
애인과 함께 밤바다를 수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로맨틱을 즐기
고 있다고.
"얘들 재미있어 보인다."
"뭐? 그럼 우리 진우는 나랑 있는 게 재미없어? 힝~ 그럼 나 삐친
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진우는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재미야 있겠지."
있겠지? 내가 살짝 얼굴을 찌푸리자 그는 나의 이마를 검지로 살
짝 누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랑 같이 있으면 난 너무 행복해서 다른 감정을 읽을 수
없어. 오직 행복하다는 감정만...."
"진우...."
"지희...."
아, 이제 드디어 첫키스인가? 1년 간 만나면서 뽀뽀는 해 봤지만
입맞춤, 키스는 못해 봤는데. 난 진우의 눈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았고 살짝 입술을 내밀었다. 첫키스야 첫키스....
근데, 근데, 근데, 왜 눈을 떴는데 바로 앞에 보이는 아라의 얼굴
은 뭐지? 아아... 내 앞에 있는 게 아라니까 아라의 얼굴이 보이는
거구나. 그리고 아라가 나랑 키스를 했으니까 눈을 뜨면 아라가 보
이는 거구나. 그런 거구나...가 아니잖아 지금!!!
"으아아악~! 너, 너, 너가 왜 나랑 키스를 해?"
약간 여자들을 좋아했던 것 같았지만 얼굴이 예쁘고 성격도 좋고
공부도 잘하기에 그냥 넘어갔더니만.... 얘, 얘가 설마 그런(?) 아이
였을 줄이야!
"박아라 양?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옆에서 넘어져 있던 진우가 일어나며 아라에게 물었고 아라는 그
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무 닭살이길래... 한소리 해 주려고 왔더니 키스를 하려고 하잖
아? 근데 입술을 내미는 지희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
게.... 헤헷!"
첫키스가 아라야. 첫키스가 여자야. 혀까지 집어넣었어. 첫키스를
했는데 그게 아라고 혀까지 집어넣었는데 아라는 여자야. 내 첫키
스가 여자한테 뺏겼어.
아니지? 난 아라를 연애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좋은 친구라
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난 우정의 키스를 한거야! 그래! 우
정의 키스! 이건 인공호흡 할 때에 키스한 거랑 같은 거...일까?
우정의 키스인데 혀를 집어넣었어. 우정의 키스? 우정의 증표로
키스를 하나? 만약 그렇다고 해도 우정의 키스라면 혀를 집어넣지
는 않아야 해. 그러니까 이건 우정의 키스가 아냐.
그럼 첫키스인가? 아냐, 내가 우정의 키스라고 우기면 되잖아? 그
래 이건 우정의 키스야. 혀는 어쩌다가 집어넣은 거고. 그래 이걸로
됐어. 된 거야. 첫키스는 진우에게 줘야지. 암, 그래야지.
아라는 다시 소라랑 놀러갔다. 우린 다시 둘이 됐다. 아까 아라가
'하던 거 계속 해!'라고 한 것 같았지만... 지금 이 분위기는 그럴 상
황이 아니었다.
난 다시 진우와 팔짱을 끼고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달이
저쪽 절벽에 걸려있었다. 어? 그런데 저기 절벽에 난관이... 꽤 높은
데.... 저기에 올라가면 경치가 좋을 거야. 달도 밝으니.... 저기 저
절벽으로 가는 것 같은 길이 있네? 별로 멀지도 않을 것 같아.
"진우야? 우리 저기 가 볼래? 저기서 내려다보면 경치가 꽤 좋을
것 같아. 응? 가보자."
"어디? 아~ 저기! 저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아무튼 여기서는
꽤 유명하다고 알고있어."
우린 혜미와 시연이에게 절벽을 가리킨 다음 그곳으로 간다고 말
하고는 길을 따라 절벽으로 올라갔다. 길은 비교적 완만해서 별로
힘들진 않을 것 같았지만 다 오르고 나니 난 숨을 헐떡이고 있었
다. 역시 내 예상대로 절벽에서의 경치는 엄청나게 좋았다. 난관 밑
을 보면 낭떠러지 밑에 삐죽삐죽 나온 돌들 사이로 파도가 치고 있
었고 그 오른쪽을 보자 우리 둘이 없어도 잘 노는 5명의 친구들이
보였다. 내가 그 광경들을 보고 숨을 내뱉자 내 뒤에 서 있던 진우
가 내 옆에 서서 나의 옆모습을 보았다.
"지희야, 넌 내가 조폭의 아들이라는데.... 왜 계속 나랑 사귀어 준
거야? 내가 무섭지 않아?"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묻자 난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고
는 천천히.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
"그럼 넌 왜 내가 가난하고 부모도 없는 걸 알고도 나랑 계속 사
귀어 준거야? 난 앞으로 대학교도 못 가. 학비가 없어서. 대학도 못
가는 날 왜 안 버렸어?"
설마 그냥 얼굴이 예뻐서, 졸업하면 차려는 건 아니겠지?
"그야... 난 네가 좋으니까."
"나도 똑같아. 네가 좋으니까. 주위 배경은 상관없어. 그냥 네가 좋
으니까."
그가 부드럽게 미소짓자 나도 같이 미소지었고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아, 이제 드디어 첫키스를... 난 그의 얼굴이 혀 내밀면
닿을 거리에 오자, 눈을 살며시 감고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아! 닿았다.'
그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맞닿았고 그의 손이 등에서 느껴졌다.
난 그의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고 입술을 더욱 밀착시켰다.
아아...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오랫동안의 키스를 끝내고 눈을 뜨고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도
나의 눈을 보았고 우린 서로를 껴안았다.
"사랑해."
내 귓가로 그의 목소리가 퍼졌고 그의 뜨거운 숨결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나도 널 사랑해."
왠지 달이 우릴 향해 미소짓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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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7)
"아아... 또 하고 싶어라...."
"야, 야, 야. 너 조심해야돼. 남자는 언제든 늑대로 변할 수 있으니
깐."
우리는 바닷가에서 신나게 놀다가 한 10분쯤 전에 호텔의 이름을
사칭한 모텔에 몰래 들어왔다. 2층이라서 벽을 타고 올라오는 데에
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발 디딜 곳도 많고....
"너 진우는 언제든 너랑 같이 있을 거 같지? 아냐, 이 언니의 경
험에 따르면 남자는 그렇게 여자한테 잘해주다가도 한 번 자고 나
면 '누구세요?' 한다고."
웬 언니? 쳇... 괜히 부러우니까 사이 떼어놓으려고 하는 거 아냐?
내가 그렇게 말하면 들어줄 것 같아?
"그럼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안 되는데?"
....요놈의 입이 방정이지! 이 입을 오늘 안에 꽉 묶어두리라! 결국
난 시연이의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가 그녀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
게 되었다. 진우야! 미안해! 이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야! 이건
어디까지나... 보험! 그래, 보험이야! 죽기 싫은데 생명보험 하잖아?
이게 바로 그런 거야!
"'누구세요?' 소리 듣지 않으려면 남자가 여자한테 꼼짝 못하도록
해야해. 그러니까, 남자를 휘어잡아서 결코 '헤어지자.'란 소리를 못
내게 한다거나 보호본능을 일으켜서 결코 널 버리지 못하게 한다거
나...."
그렇게 시작된 시연이의 강의(?)는 1시간 동안 이어졌고, 시연이와
난 나머지 4명이 모두 잠들고 한참 후에야 잠들 수 있었다.
수능 D-100.... 칠판의 왼쪽 구석에 눈에 띄지 않게 쓰여진 글. 그
러나 엄청나게 존재감이 느껴지는 글. 수능 D-100.... 이제 수능이
100일 남았다. 약 3개월... 지금까지 12년 동안 공부해온 모든 것을
수능이라는 종류의 시험 하나로 평가된다.
"이런 유형의 문제는 재작년 수능에도 나왔고, 작년 수능에도 나왔
다. 우선...."
--딩동! 딩동!
"다음 시간에 하겠다. 반장!"
"차려, 경례."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나감으로 토요일의 4교시가 끝났고 난 책상 옆에 걸린
가방을 들어서 오늘 공부할 과목의 책을 넣었다. 휴~ 벼락치기도
힘들구먼... 이걸 100일 동안 해야 하는 건가?
"지희야, 너 우리 집에서 수능 100일 파티 하기로 한 거 잊지 않았
겠지?"
"당연하지!"
우리 여섯 미인 의자매는 종례가 끝나고 바로 혜미네 집으로 갔
다. 혜미의 집은 굉장히 컸다. 비록 진우네 집보다는 작지만... 우리
하숙집의 10배는 족히 될 것 같았다. 우린 그 큰 집 들어가서 혜미
의 방으로 추측되는 곳에 들어갔다. 무슨 호텔 방 같았다.
"히야~ 혜미 방 엄청 크다! 내 방의 5배는 되 보여."
"고풍스런 느낌이 들어."
우리는 각자 혜미의 방에 대하여 감상을 늘어놓았고 혜미는 손으
로 입을 가려 쿡쿡 웃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여긴... 손님 접대용 방이야."
"....왠지 침대가 안보였다 했지."
이 곳에 들어올 리 없는 차가운 바람이 방을 휩쓸었고 우린 어색
한 웃음을 내야 했다.
"아, 빨리 파티 해야지. 우리 파티 하러 여기 온 거잖아. 너희들 오
늘도 공부해야 하잖아?"
내가 재빨리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말을 던졌고 우린 다시 화기애
애한 분위기로 바뀌어 즐거운 수능 100일 파티를 할 수 있었다. 파
티가 끝나고 우리 여섯 미인 의자매는 각자 집으로 흩어졌고 나도
하숙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학비가 없으니 대학은 못 가고... 그냥 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싶어. 그래도 무리하지는 말고 벼락치기라고 해도 새벽 2시에
는 자야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진우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진우... 내 애
인. 저번에 시연이의 강의(?)를 듣고 그대로 실행해 봤다. 시연이의
말이 꽤 그럴 듯 했기에 그녀의 말 그대로 했지만.... 실패했다. 하
지만 진우에게서 맹세를 받아낼 수는 있었다. 나 이진우는 민지희
를 끝까지 사랑하겠다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는데 엄청 기분이
좋았었다. 요즘에는 진우가 수능 준비 때문에 그와 별로 만나지는
못하지만 전화는 자주 한다.
"지희! 민지희!"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난 어느새 하숙집으로 가는 길목
을 걷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자 민아 언니가 보였다.
언니는 작년에 백조의 탈을 벗어 던지고 취직했다. 다니는 회사가
꽤 가까워서 여전히 하숙집에서 계속 살고 있다. 아무튼 정장을 입
은 언니는 엄청나게 이쁘다. 검은 뿔테안경도 콘택트 렌즈로 바뀌
었다. 백조일 때와 지금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랄까? 이미지가
엄청나게 많이 변했다. 지저분하고 멍~ 한 이미지에서 아름답고 우
아한...
"아, 미나 언니~('미나'는 '민아'를 부르기 쉽게 부른 거다.) 회사 지
금 끝났어?"
"응! 우리 귀여운 지희~ 어디 한번 안아 볼까?"
"아앗! 아프단 말야! 팔 치워~"
우린 이렇게 티격태격 싸우며 -언니가 공격하고 내가 방어하는 거
지만- 하숙집에 도착했고 난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아, 피곤한 하루였어.
이제 드디어 끝났다. '고졸'이라는 표시를 달기 위해 노력했던 12
년은 이제 추억거리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왕이면 '대졸'이 더 취
직하기에는 좋겠지만 난 학비가 없다. 요즘에는 '대졸'아니면 인간
취급도 안 한다는데.... 앞길이 캄캄하지만 지금까지 혼자서 잘 해왔
다. 앞으로 그것보다 조금 더 노력하면 될 것이다. 어떻게든 되겠
지....
'여섯 미인 의자매'에서 4명이 대학에 갔다.
진소라와 서아라는 우리 하숙집 언니, 오빠들이 다니는 대학에 입
학하고, 강윤아는 공부를 잘 해서 제법 좋은 곳으로 갔다. 박시연은
다른 지역의 대학으로 갔다.
소혜미는 지금 사는 집에서 교육을 받으며 살다가 아버지의 회장
직을 물려받으면 된단다. 연줄이 있어서 좋겠군....
진우는 공부를 꽤 잘 했었는지 엄청 좋은 대학으로 갔다.
쩝... 그럼 나만 안 좋은 엔딩인가? 시간은 많으니 아르바이트나
하면서 직업을 구해야겠다.
"지희야."
"아, 자기야....(언제부터 호칭이 바뀌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좀 걸을까?"
진우는 머리를 엄청 짧게 깎았다. 군대에 다녀온단다. 내가 대학교
졸업하고 다녀오라고 말해 봤지만 나중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 하
는데 좀더 빨리 체력을 키우고 싶다고 휴학하고 다녀온단다.
바보... 그렇게 나랑 빨리 헤어지고 싶나?
"내일이지?"
"응.... 저, 지희야. 나 없을 동안 고무신 거꾸로 신지 마."
"내가 그렇게 할 거 같아? 칫...."
내가 과장되어 보이게 삐진 척을 하자 진우는 피식 웃더니 나의
양 볼을 꼬집었다.
"아아 므스 지시야! 바리 나!(아아 무슨 짓이야! 빨리 놔!)"
"아우~ 귀여워!"
"구여다니!(귀엽다니!)"
진우는 내 볼을 놨고 난 볼을 문지르며 아픔을 달랬다. 내가 볼을
문지르는 동안 진우는 씨익 웃더니 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
쳤다.
"하핫! 미안... 지희야, 내가 안 보인다고 슬퍼하지 말고 내가 없어
도 잘 있어야 돼. 그리고.... 내일은 따라오지 마. 오면 나 오래 못
가서 탈영 할 것 같아. 면회도 오지말고. 그리고 제대하고 얼마간
여행을 가야 할 것 같아. 그러니까 나 찾지 마. 내가 널 찾기 전까
지는."
말이... 이상하네? 꼭 헤어지는 것 같잖아. 내가.... 싫어졌나?
"왜 그래? 내가 싫어서 그래?"
내가 약간 슬픈 기운을 머금고 물어보자 진우는 싱긋 웃으며 나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아냐. 내가 널 싫어할 리가 없잖아. 할 일이 많아서 그래. 오래 걸
리겠지만.... 기다려 줄 거지?"
"내가... 기다리지 않을 리가 없잖아."
"약속!"
그가 새끼손가락을 제외한 모든 손가락을 접은 채 손을 내밀었고
나도 그와 똑같이 손 모양을 한 뒤에 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
손가락을 걸음과 동시에 내 눈에서 따뜻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고 진우는 내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가슴이 아프다. 2년 2개월... 그것보다 긴 시간이다. 과연 내가 잘
참고 기다릴 수 있을까?
"미안해. 힘들게 해서. 나, 이제 가 볼게."
진우는 내 눈물을 닦아주던 손을 떼고는 그 손을 흔들며 파란 불
이 켜진 횡단보도를 건넜다. 기다릴게.... 그게 얼마나 걸리던지. 얼
마나 힘들던지. 참고 견딜게.
--끼이이익!!
.....진우야?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직업만 6번 바뀌었다. 거의 수입은 아르바
이트로 번다.
고등학교 졸업이라도 할 수 있는 직업은 있었다. 다만 고졸이란
이유로 무시당하고 돈을 많이 받지도 못하고 희롱 당하고.... 그래서
직업을 구하면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나오게 된다.
아르바이트로는 별로 벌지도 못한다. 그래서 부족한 돈을 친구들
한테 빌리게 되고.... 친구들은 괜찮다고 하지만... 난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미안해.... 정말...."
"괜찮아. 친구 좋다는 게 뭐니?"
이번엔.... 소라였다.
"지희야, 너 그러지 말고 빨리 진우 잊고 새 출발 해야지. 돈 잘
버는 남자랑 결혼해. 넌 가사일 하면 되잖아? 너 같은 외모면 남자
들이 줄을 서겠다."
"미안해. 이 돈.... 못 갚을지도 몰라."
"갚지 않아도 돼. 너 언제까지 그렇게 살거니? 계속 진우 타령만
하다가는 좋은 꼴 못 봐."
"....그냥 이대로 죽어버릴까?"
작게 내뱉은 말이 소라에게 들렸는지 소라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머,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진우 따라가겠다고? 진우가 니
모습 보면 좋아할 것 같아? 진우는 죽은 애야! 죽은 사람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고 계속 그 애한테 매달리는 거야?"
그래... 진우는 죽었다. 1년 전 트럭에 치여서. 나에게 인사하다가.
손을 흔들다가. 내 눈물을 닦아주던 손을.
"나 갈게."
난 소라가 준 돈을 주머니에 넣고 카페를 나섰다. 뒤에서 소라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난 무시하고 택시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