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당하는 엄마의 ‘일’ “학년초 가정환경조사서에 엄마아빠 직업 다 써냈는데도, ‘엄마’만은 언제든 불러낼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건지…. 요샌 한반 35명 중 절반 이상이 직업을 가진 엄만데도, 어처구니가 없었죠.”
고려대 보건대학 강의를 맡고 있고 이화여대 여성학 박사과정 졸업시험을 앞둔 조씨로서는 난감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100% 의무도 아닌데, 안가면 그만이잖아”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우리 엄마만 안왔다고 풀죽을 아이 얼굴도 떠오르고, 행여 담임에게 아이가 밉보일까 걱정도 된다. 3인 1조로 짜이는 다른 어머니들에게 폐를 끼치게 되니 모른 척 할 수도 없다. 급식 당번표에 ‘못감’이라고 적힌 아이가 두명 있기에 ‘이 집 어머니는 참 용감하구나’ 감탄했지만, 알고보니 어머니가 없는 집이었다.
“다들 신기하게도 어떻게든 해결해요. 친정어머니, 시어머니, 이모, 언니, 옆집아줌마, 주변의 여자란 여자는 다 동원하죠. 가보면 할머니들이 등에는 빽빽 우는 젖먹이를 업고 밥퍼주고 있다니까요.”
학교 앞 문방구는 이런 실정을 이용, 일당 2만원의 급식도우미 소개소로 나서기도 한다. 대타도 없고, 급식도우미를 쓸 형편도 안되면 월차를 내고 오는 어머니까지 있다. 회사에선 “이젠 그냥 학교로 출근하시죠?”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
#왜 아버지회는 없나 조씨는 궁금증이 생겼다. 왜 ‘녹색어머니회’는 있어도 ‘녹색아버지회’는 없을까. 왜 똑같이 일하는 부모여도 학교는 ‘어머니 급식당번표’만을 작성해주는 걸까. 그는 남편이 학교 급식에 딱 한번 대신 갔던 날, 동물원 원숭이가 돼야 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어! 남자다! 아저씨 누구세요?” 몰려와 구경하고, 담임교사도 아버지 급식당번은 상상조차 못한 채 “아버님, 무슨 상담하실 일이라도?”라며 놀란 표정으로 뛰어왔다. 조씨는 “어머니는 밥하고 아버지는 신문보는 교과서 삽화만 바꾸면 뭐합니까. 정작 학교에서부터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데”라고 분노했다.
급식제도 개선을 위한 ‘학교급식네트워크’나 여성단체에서 이 문제는 왜 이슈화시키지 않을까 기다려도 봤다. 그러나 조씨는 결국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어머니들이 직접 움직여야 해결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만든 것이 ‘어머니 급식당번 폐지를 위한 모임’이라는 인터넷 카페(cafe.daum.net/momcry). 컴맹인 그가 하루종일 낑낑대며 만든 것이다. 회원수가 많아지면 교육인적자원부 앞에서 릴레이 1인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공감하는 어머니들이 많이 모이면 국가인권위원회에 다같이 진정도 제기할 생각이다.
“어머니의 모성본능을 이용해 움직이는 곳이 바로 학교예요. 우리 사회에서 엄마는 인간도 아니라 자식이라는 버튼만 누르면 나오는 자동판매기죠. 밥푸는 거, 교통정리하는 거, 모두 엄마한테 명령만 내리면 항상 토해내야 하는 자판기 신세말예요.”
지금의 학교 급식제도는 태생부터 어머니의 노동력 동원을 전제로 깔고 도입된 것이었다. 급식을 나르고 퍼줄 인력에 대한 예산은 애초부터 배제돼 있었다. ‘자식의 일인데 엄마가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라는 이 한마디로 모든 건 정당화된다.
“도시락 싸주는 수고를 더니 이젠 밥 퍼주는 것까지 귀찮은 거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제 아이의 학교에서 부모 도움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참여해야죠. 그러나 아이를 볼모로 학교나 사회가 담당해야 할 부분까지 어머니의 노동력을 공짜로 써먹으려는 지금의 인식은 문제 아닌가요.”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의 가치 조씨가 우려하는 더욱 큰 문제는 가족, 학교에서의 이런 인식이 사회 전체로 확대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여성의 노동을 노동이 아닌 ‘모성본능’에 입각한 행위로 받아들일 때 정당한 가치를 평가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 “여성 서비스직 임금이 남성 정규직의 20%에 불과한 것은 마치 엄마라는 유전자, 염색체가 있어서 여성은 타인에게 서비스하는 모성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신화 때문이라고 봅니다.”
어머니 급식당번 문제에 대해 조씨가 쓴 글이 인터넷에 올라가자 밑에는 수많은 답글이 달렸다. “어디 급식뿐인가요. 출근시간에 학교 앞에서 교통정리까지 해야 하죠”, “직장에 겨우 양해구하고 갔는데 복도, 계단 청소까지 다 하고 가라더군요”… 같은 처지인 어머니들의 하소연이 봇물터지듯 쏟아졌다.
조씨는 “고학년 학생들이 저학년 아이들의 급식을 돕거나,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라도 예산을 들여 노인 등을 활용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양성평등교육 차원에서 급식당번을 남성들에게도 맡길 수 있다”며 나름대로 대안까지 제시했다.
‘일하는 여성’이 더 이상 새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시대. 그러나 ‘일하는 엄마’란 말만은 단어의 조합상으로나 성립가능할 뿐이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엄마’는 오직 ‘엄마’일 뿐, 다른 수식어는 양립될 수 없나보다.
-한달에 두세번꼴, 당번 끝난후엔 청소까지-
▲학부모 급식 실태
초등학교 급식제도가 전국적으로 실시된 건 1997년부터다. 식당이 갖춰진 학교도 있지만 수도권 대부분의 학교는 따로 식당이 없어 급식수레로 교실까지 운반해와 먹어야 한다. 상당수 학교의 경우 어린 저학년생은 학부모들이 학교에 와서 대신 운반해주고 밥과 반찬을 나눠주고 있다. 일부 학교는 고학년까지 학부모가 급식당번을 맡기도 한다.
보통 학부모 두세명이 한조로 구성되며, 한달에 두세번꼴로 순서가 돌아온다. 낮 12시10분쯤 급식을 나르고, 아이들의 식사가 끝나면 다시 식판을 거둬서 세척실로 운반한다. 끝나면 오후 1시10분쯤. 이후 학교에 따라선 복도, 계단, 세면대 청소까지 해야 하는 곳도 있다.
어머니 급식당번 제도에 대해 교육인적자원부 담당자는 “처음 학교급식이 도입될 당시만 해도 일하는 어머니들이 많지 않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며 “학부모들이 급식운영에도 직접 참여할 겸 이런 제도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따로 인력고용 예산을 투입하기 힘든 데다 아이들은 부모가 학교에 오는 걸 좋아한다”며 “어머니들의 고충은 고학년 아동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각 학교차원에서 잘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