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단전호흡’ 또는 ‘기’라는 용어를 내놓고 사용하지 않았을 뿐, 국내에서 정식으로 수련장을 열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수련지도를 시작한 인물은 청산 고경민 선사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도 물론 국내에는 수련문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련이라는 용어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호흡법 또는 조식법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산중의 이름 없는 스님들 사이에 개인적으로 전수되거나 알음알음으로 수련에 입문한 사람들이 있긴 있었다. 그런데 이 수련법들은 전인적인 품성도야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총체적 목적이라기보다는 무술적인 성격이 강했고, 효과적인 신체단련을 위한 방편으로 호흡 조절법 가운데 한 가지인 역호흡법들이 주를 이루었다.
같은 맥락으로 초야(충남 천안군)에서 맥을 이어오던 청산거사가 하산한 시기가 1967년, 초기에는 개인적으로 몇 명의 제자를 받아들여 생식과 함께 주로 외공위주의 수련을 시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시에 제자들과 함께 시범단을 구성하여 각종의 차력 시범을 보이는 것으로 수련 홍보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기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수련과정에서 얻게 되는 경지를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현상으로 초능력을 보여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지금도 차력이라는 말이 원래의 뜻과 꽤 거리가 있으나 당시에는 ‘차력이란 도통공부를 통해 얻게 되는 초능력으로, 자연에서 힘을 빌려 쓰는 것 ’ 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초기 시범단이던 청산거사와 1대 제자들의 이름이 신력사(청원 박진후), 태력산(청화 김종무), 철선녀(김단화, 후일 청와대 경호실 지도)인 것을 미루어 보아도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68년 청산선사는 당시 내로라하는 차력사가 모두 참가한 민족정기 선양대회에서 철화방(鐵火房 :불속에서 견디는 수련)을 보이는 등 차력 시범을 계속해 이름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70년 4월 단성사 부근의 팔진옥 4층에 최초의 수련장을 개설하였다. “70년 4월 사부님을 모시고 도장 개관 기념 일본 후지 텔레비전 강의 및 시범을 했고, 12월에는 철선녀 외 또 한 명의 여자 수련생을 데리고 동남아 순방 시범을 했다”.(청화 김종무 )
국선도가 칠십 년대 중반까지도 신체단련 위주의 외공이 우선이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82년 도로공사 임직원을 위한 수련 모임을 만들었을 때에도, 제자의 머리 위에 바위를 올려놓고 해머로 내리쳐 깨트리는 시범을 보였다.
초창기의 국선도는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으리만치 여건이 미비하여 수련장을 응암동, 청계천으로 옮겨 다니다가 71년에 현재 본부수련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종로4가 백궁빌딩에 자리를 잡았다. 명칭도 71년에는 사회단체 정신도법 교육회였다가 1986년에 이르러 현재의 국선도법 연구회(사단법인)로 등록을 했다.
본원 개원 직후인 칠십 년대 초반까지 수련법 명칭은 국선도가 아니라 신라의 화랑(國仙)들이 수련했던 정통의 심신 수련법인 정각도였다. 정각도라는 이름이 국선도로 바뀐 것은 칠십년대 중반, 이때를 즈음해서 국선도는 다시 국선도로 이름이 바뀌면서 청산거사도 청산선사로 승격했다.
그 이유는 정각도라는 이름으로 밝달법(국선도의 순우리말)을 수련하던 수련인 들의 수련 수준이 점차 높아지면서 고급 단계인 통기법단계를 수련하게 되었고, 수련 단계를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 초급과정을 정각도라 했기 때문에 총괄적인 수련과정을 의미하는 국선도로 명칭을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 국선도 측의 설명이다.
국선도는 사실 우리나라 수련단체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구십 년대 초반까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는 초창기 국선도의 경우 초능력적인 차력 시범을 위주로 소개되었던 까닭에 특별히 무술 지향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수련을 희망하는 대중적 요구가 너무도 빈약했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 같은 무술적인 능력자들을 필요로 하는 소위 군 고위층이나 정부 요인 같은 고위 정치권에서 먼저 관심을 보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시범단의 잦았던 군부대 차력시범을 비롯해 청와대 경호실 직원들을 지도했던 철선녀의 경우, 그녀가 행한 것은 무술 지도였지 정신적인 수련 지도 차원이었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고위층이나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지식층과 가까워졌을 것이라는 추축이 가능하다.
현재 국선도를 수련하는 회원들의 친목 모임인 단우회의 회장직은 윤필용(전 도로공사 사장)씨가, 선우회 회장직은 장덕진(전 농수산부 장관)씨가 맡고 있다가 최근에는 남욱(전 한화그룹부회장)씨로 바뀌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이 같은 추측이 사실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은퇴 뒤 청곡서화연구회를 이끄는 윤길중씨는 한때 함께 등산하던 교우들 앞에서 바위를 한 발로 밟아 부서뜨리는 괴력을 보인 적도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국선도의 정신적인 바탕과 실제 수련법이 현재의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칠십 년대 초반부터 중반에 걸쳐서이다.
이들의 차력 시범이 유명세를 타면서 수련장은 시내 복판인 종로통으로 이전하게 되었고, 이 시기를 전후로 동야 철학과 민족주의 역사관을 가진 많은 식자층들이 관심을 갖고 개입되어 정신적인 체계를 확립하는 한편, 수련법 체계도 차츰 일반인을 위해 외공의 비중을 줄여가면서 현재의 수련법 체계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국선도의 이론적 정립에 관여하면서 이십여 년간 국선도 고문을 맡았던 김건(작고)씨는 문교부 사상 국장을 거쳐 건국대 문리대학장을 지냈다.
“시내의 백궁 도장 운영을 계획하면서 수련법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됐는데, 내공 50%에 외공 20%, 이론 30%로 잡고, 이론은 동양철학과 음양오행, 민족사관을 중심으로 하자고 했다. 여기에 한의학, 서양 철학과 심리상담, 한문과 붓글씨를 넣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청화 김종무,太力山)
“사부님께서 너는 근골이 좋으니 외공도 배워 보라고 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때 사부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평광 임경택 법사)
“육십 년대 정치적 이유로 수형 생활을 하는 동안 요가를 접하게 됐고, 요가의 원리를 이해하고 수련을 통해 건강을 되찾으면서 어릴 적 한학선생이신 최일중 씨가 우리에게 강요했던 도통공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요가와 어릴 적 배웠던 조식행공을 병행하면서 전신에 퍼지는 열감을 경험했다. 때문에 우리의 전통 수련법인 선도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칠십 년대 초반 선도수련 단체의 체계를 확립하는데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준 적이 있다.”(전 국회부의장 청곡 윤길중)
두 번째 이유는 청산거사의 재입산이다.
국선도가 차력 위주가 아닌 일반인의 심신수련 단체로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다져 가는 한편, 사회적으로도 호흡이나 명상, 또는 수련이라는 단어가 차츰 일반인들에게 부담감 없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할 무렵인 84년, 돌연 청산거사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국선도 측은 청산거사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글을 통해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산중에서 세간으로 도법을 끌어내왔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 내에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펼쳐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국적으로 많은 도장이 확산되어야 하는데 지도자가 없으니 과도기적 방편으로, 사회적으로 신망을 얻고 인품을 갖춘 몇 명을 모아 집중적으로 교육시켜 앞에 내세우고 배우며 가르치게 했다.”라는 말에서 ‘주어진 시간’이라는 글귀를 지적한다.
딱 꼬집어 말하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하고 靑山이라는 이름 그대로 청산으로 되돌아 가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동시에 퍼져 나온 소문이 ‘정보기관연행설’, ‘고문으로 인한 사망설’ 들이었다.
앞에서 지적했듯, 민족사관에 입각한 식자층과 고위층을 둘러싼 청산거사의 발 넓은 행보가 정치권의 알력에 의해 저지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서서 밝히기 전까지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