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징조(signs)와 기적(miracles)/징조와 조요(enlightenment)
스베덴보리의 편지들에서
6. F.C. 외팅어에게 보내는 편지, 1766년 11월 11일
1 질문 :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조가 필요한가?
답변 : 징조(signs)와 기적(miracles)이 지금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외적으로 강요하고
내적으로 설득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기적과 시나이 산 위에 여호와의 강림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럼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한 달 후에
스스로 황금 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여호와로 숭배하지 않았는가!
주의 기적이 유대 민족에게 무엇을 이루었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는가!
오늘날 주께서 구름 속에 천사와 나팔과 함께 나타나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누가복음 16장 29-31절 참조)
오늘날은 깨우침(조요, 빛 비추임)이 징조가 될 것이고,
따라서 이것으로부터 새 교회의 진리에 대한
인식과 수용이 있게 될 것이며
나아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징조 그 이상인
생생한 깨우침이 또한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 어떤 징조는(깨우침 이외의 어떤 징조)
여전히 주어질 것이다.
(6. Letter to Oetinger, November 11, 1766
1. Whether a sign that I have been sent by the Lord to do
what I am doing is necessary?
Reply. Nowadays there are no signs and miracles
because they compel outwardly but do not persuade inwardly.
What did the miracles in Egypt, and Jehovah's alighting
upon Mount Sinai accomplish among the Israelitish nation!
Did they not one month later nevertheless make a golden calf
for themselves to worship as Jehovah!
What did the Lord's miracles among the Jewish nation accomplish?
Did they not nevertheless crucify Him!
It would be the same today if the Lord were to appear in the clouds
together with angels and their trumpets; see Luke 16:29-31.
Nowadays enlightenment will be the sign,
and from this will come recognition and acceptance
of the truths of the New Church.
Among some it will also be an enlightenment that speaks,
and that is more than a sign.
But perhaps some sign will still be given.)
- - -
- 징조(sign)와 조요(enlightenment)
브루스목사의 마태강해에서
마 24:30 “하늘에서 인자의 징조가 보이겠고”
30. 교회의 모든 짜임새, 교회의 내적, 외적 측면 모두가
뒤흔들리고 기우뚱거릴 때,
그때야 말로 신성한 권능이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진력하시어 그 견고성을 회복하실 때이다.
발광체가 어두워지고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면
“하늘에는 사람의 아들의 징조가 나타날 것이고
땅에서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것이다.
그 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과 더불어
하늘의 구름 안에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두 번째 강림하신다는 장엄한 발표이고,
지금까지 교회들이 찾기를
결코 중단하지 않았던 사건에 대한 발표이다.
이 큰 사건은 지상의 교회들이
불확실하거나 꾸준히 기대하는 상태에 있도록 한 것이
하느님 섭리의 의도였던 것 같이 보인다.
깨어 경계함(watchfulness)이 요구된다.
“깨어 있으라.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언제 올는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본문의 사건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말해왔던 요점이다.
현실과 기대 사이의 첫 번째 큰 차이점은
주님의 오심이 개인적인 어떤 인물의 오심이 아니라
영 안에 오신다는 것,
또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라고 보게 된다면
그분이 오신다는 주변 묘사 역시 전체적으로 그 의미가 바뀐다.
그분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볼 수 있게 오시지 않는다면
그분은 물질계의 구름 안에 오실 수도 없다.
그분의 오심에 수반되는 주변 환경이
글자적 해석으로 상상하게 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면
그분이 오심 역시 글자대로의 해석에 따른 상상과도
전혀 달라야 타당할 것이다.
예견된 어느 한쪽 부분이 영적으로 이해되고 있다면
나머지 부분도 그렇게 이해되어야 하리라.
본문의 세부 사항을 정확하게 해석한다면
그 해석은 그분의 강림에 관한 참된 본성도
우리에게 밝히 알게 할 것이다.
주님이 개인 자격으로 오시지 않고
영과 권능 안에서 오신다면 그 오심이 어떻게 거행될까?
그분은 사람들의 영과 심정 안에 오실 수 있다.
참으로 이 오심은 실재적인 실제이며 구원의 강림이다.
인간의 영혼과 마음에 이 오심이 있다고 해도
어떤 매체를 통해 결과되어야 하는데
그 매체는 말씀이고
그 안에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을 밝히 알리시고 있다.
그분의 거룩한 영은 그들의 심정 위에 작용하지만
진리의 영은 진리의 말씀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구원할 수 있게 작용할 수 없다.
이 진리의 말씀은 주님의 오심이 거행되는 매체이다.
그분이 나타나실 하늘의 구름이란
글자 의미로 있는 말씀 속의 진리들이다.
그 의미가 구름에 비유되고 형상화되고 있다.
그 이유가 글자 의미는 내면의 영적 의미를
마치 구름이 태양의 밝음을 가리듯 덮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성서구절들, 즉 주님의 정의가 구름 안에 있다든지,
그분의 진리가 구름에 와 닿고 있다든지,
그분께서는 구름을 그분의 병거로 만드신다든지,
구름은 그분의 발아래 있는 먼지라든지 하는 등등에서
구름은 말씀의 글자의 의미임을 말해주고 있다.
말씀은 신성하게 영감되어 있는 책이요,
상응의 법칙에 따라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위와 같은 구절의 표현들은 한낱 풍유적일 뿐이고
확실치 않은 숭고한 말씀들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신성한 계시의 참된 본성을 보는 이들만이
영적 의미가 받아들여 질 수 있다.
이런 일반적인 사실을 서술해보아도
주님의 오심은 자연적 수준이 아닌 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오심은 말씀의 가르침 내지는 말씀을 매체로 해서
결과가 있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바,
이제 글자그대로 읽어도 그 중대함이 느껴오는
이 구절을 다시 살펴보자.
“그때에 사람의 아들(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나타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것’과
‘사람의 아들에 관한 징조가 나타난다는 것’,
이것은 분명히 구분되지만 거기에는
연결을 이루는 사항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우리는 먼저 언어 기교상의 구분을 서술한 다음 설명을 추가해보자.
사람의 아들에 관한 징조(sign)란
신성에 속한 진리(truth divine)이고,
사람의 아들은 신성한 진리(divine truth)이다.
먼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있고
둘째로 진리로서의 주님이 있다.
전자는 우리 자신 밖으로부터 주님을 알게 해주고,
후자는 우리 자신 안에서 주님을 알게 한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영(the Spirit)으로서의 주님 자신을 표현하신 대목,
곧 “그분은 너희와 더불어(...with you) 계시고,
너희 안에(...in you) 계실 것이다”에 잘 나타나고 있다.
신성같이 여겨지는 진리는 우리와 더불어 있고
신성한 진리는 우리 안에 있다.
전자는 진리 자체는 아니고 진리의 징조이다.
진리에 관한 징조는 진리 자체에 대한 선구자(precursor)에 해당된다.
이런 준비는 시험이라는 고난 없이 준비가 완료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마음이 겸허해지고 순수해져
진리를 충만하고 완전하게 영접하는데 꼭 맞게 되려면
시련이나 번민을 수단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사람의 아들에 관한 징조가 나타나면
“땅에서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것이다.”
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땅에 있는 모든 민족이란
선과 진리 안에 있는 교회 내의 사람들이다.
그들이 통곡함이란
그들이 첫 상태에서 둘째 상태로 건너가는 가운데 경험하게 되는
환난과 슬픔을 표현한 것이다.
참으로 새로운 모든 진리는 영적 시련을 유발한다.
그 이유가 새로운 진리는 마음의 옛 상태들을 휘저어
제거하려는 의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위 구절은 순수하게 영적 의미만으로 본다면 더 알기 쉽다.
이 의미에서 민족(tribe)들이란
선과 진리 자체에 관한 원리를 뜻하고
땅(earth)은 이런 원리가 있게 되는 자연적 마음을 뜻한다.
사람의 아들에 관한 징조가 하늘에서 나타날 때,
즉 신성에 속한 진리(truth Divine)가
하늘이라는 영적 마음 안에서 처음 지각될 때,
다시 말해 신성에 속한 진리가
영적 마음 안에 유입(influx)되거나 영향을 줄 때,
자연적 마음은 고통과 통곡을 초래하고
통곡의 나날은 그 상태가 반전될 때까지 이어지다가
사람이 아들이 올 때 그 상태의 반전이 일어나
그분의 오심이 받아들여진다.
(When the sign of the Son of man appears in heaven—
that is, when truth divine is first perceived in the spiritual mind,
which is heaven一its influx into, or influence upon,
the natural mind causes distress and mourning,
and the days of mourning continue till the state is inverted,
and inversion of state takes place when the son of man comes,
and is received at his coming. )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첫 번째 오심과 두 번째 오심 사이에
유추해야할 것이 있음을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께서는 그분의 인성을
먼저 신성에 속한 진리(truth divine)로 만드셨고
그 뒤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로 만드셨다.
이를 달리 표현해보면,
그분은 먼저 그분의 인성을 거듭나게 했고 그 다음 영화하셨다.
또한 그분은 먼저 인성을 신성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그 뒤 신성으로 만드셨다.
똑같은 내용을 또 달리 말할 수 있다.
즉 그분은 먼저 인성을 천국적으로 만드셨고
그 뒤 신성으로 만드셨다 등등으로 설명해 볼 수 있다.
이런 사항들은 통곡이나 시험의 쓰라림 없이 결과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그분 스스로 이런 사항을 직접 수행할 수 없다고 해도
아직도 그분께서는 그분의 교회와 백성 안에서 수행해가고 있으시다.
그분의 두 번째 오심에서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진리로 만드실 수 있기 전
먼저 신성에 속한 진리로 만드셔야 한다.
이런 것과 상응되는 발전단계는
교회 안에서, 또 세상에서 계속 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앞에서 계속되는 것을 먼저 본다.
우리는 세상에서 명백히 나타나는 모든 새로운 진리 안에서
사람의 아들의 징조를 본다.
이는 종교적인 모든 새로운 진리만이 아니라
철학이나 과학 등등에 있는 모든 진리를 포함해서 이르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이런 모든 진리도 주님으로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른다.
그럼에도 그것은 그분의 오심에 관한 징조이다.
물론 본문에서의 경우
땅의 민족들이 슬퍼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권능 있는 모든 변화는 “피와 불과 짙은 연기” 같은 것 없이는
결과 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