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지청장 시절에 자신처럼 어려운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자 '동백장학회'를 설립했다.>
89년 땅끝 마을이 있는 해남지청장으로 발령을 받아 내려갔다. 관내가 모두 시골이라 가정형편이 어려운 어린 학생들이 사고를 치고 잡혀 들어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아주 작은 보살핌만 있으면 건강한 심성과 훌륭한 학생으로 자랄 청소년들이 가정환경과 금전적인 문제로 공부를 포기하고 다른 길로 접어드는 현실을 보면서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박주선은 어머니와 동생의 희생으로 공부하며 궁핍하게 생활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자신처럼 어려운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굳세게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그는 장학회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박주선의 뜻에 감복한 해남지청 청소년 선도위원들은 장학재단 설립을 발의했고 그 스스로가 사재를 털어 금일봉을 출연했다. 이름하여 ‘동백장학회’였다. 검찰이 주도한 최초의 장학재단이었다. 설립초기부터 열화같은 성원이 답지했다. 당시로서는 거금인 1억 5천만원이라는 기금이 조성되어 출범되었다. 불우한 인재를 키우기 위한 그의 간절한 소망은 해남지청 청소년선도위원들과 지역 유지들의 계속적인 노력과 기여로 현재 10억원 가량의 기금이 확보되었으며 그간 불우 장학생(중, 고, 대학생), 소년 소녀 가장 및 불우 시설을 지원하는 등 모두 1천 여 명이 훨씬 넘는 학생들에게 수 억 원씩을 지급해 오고 있다.
땅끝 마을 해남에 심어 놓은 박주선의 따뜻한 ‘동백꽃 사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박주선은 “가난과 불우한 환경에 내몰린 그들에게 희망마저도 잃어버린다면 그들은 훗날 이 사회를 원망하게 될 것”이라며 “배움의 길을 포기하는 것은 새로운 삶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한 그의 남다른 ‘해남 사랑’은 더욱 깊어만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