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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학산 고대산 종주산행기
일시 : 2007년 6월 16일 (토) 일기 : 맑음 약 30도
장소 : 강원도 철원군 금학산, 경기도 연천군 보개산 고대산
인원 : 단독산행
준비물
특기사항 : 보개봉과 고대봉은 식수를 충분히 준비하여야 하며, 금학산은 철원 동송쪽에서만 식수확보가 가능하다,
군사지대임에 유의하고 신분증을 지참하는 것이 좋다.
등산코스 :
동송읍 철원여자중.고교->금학정->금학산체육공원->매바위->북망바위->금학산(947.3m)정상->담터계곡->보개봉(752m)->771봉->고대산(832m)->삼각봉(830m)->대광봉(827m)->칼바위->말등바위->고대산 입구(신탄리)
교통
열차 : 동두천에서 신탄리 출발 매시 50분
신탄리에서 동두천 출발 매시 00분 에 맞추어 고대산을 하산하면 좋겠다.
철원동송과 신탄리사이는 매시 10여분 간격으로 버스가 운행한다.
승용차편
수도권에서 금학산에 이르는 길은 의정부에서 축석령을 넘어 포천을 경유하는 43번 국도가 가장 빠르다. 축석령에서 약 25분 주행후 포천읍에서 38휴게소로 간다. 휴게소 앞 다리를 건너 우회전해서 약 2km를 가면 삼거리가 나타난다. 산정호수 입구 안내판을 오른쪽으로 보며 직진한다. 곧이어 운천 번화가를 지난다. 번화가를 벗어나 약 3km 가면 자일리 삼거리이다.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근홍교를 건너면 약 2km 가면 이평 1리 삼거리이다. 오른쪽으로 현대자동차 동송영업소 간판이 보이는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 골목안으로 들어가면 동송초교다. 동송초교 앞에서 왼쪽으로 약 300m 가면 군부대 초소 옆에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에 주차하면 된다. <자료>
고속버스편
전철 4호선 수유전철역에서 오전 6시부터 오후 9시15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동송행 시외버스 이용.
소요시간 : 약 1시간 30분
시내버스편
이평시가지에서 1일 6회 운행하는 금학산 입구행 시내버스 이용.
산행기
햇살 고운 날 길을 떠나면 하늘이 시리도록 파아란 것을 볼 수 있다. 지난 오월에는 회사의 여러가지 일로 인하여 제대로 산행을 할 수 없어 지루하였던 날들이었는데 이제는 그나마의 마음의 여유가 좀 생긴다.
유월의 중순!
소중한 선물인 오늘 이 하루의 고귀한 시간을 여유와 되돌아보는 날로 승화시킨다면 참으로 보람 될 것이다.
일찌감치 조반을 챙겨 먹고 아침 7시 40분에 지하철 7호선 면목역에서 승차하여 8시10분에 도봉산역을 지나 8시 반쯤에 의정부역에서 동두천행 열차를 탔다.
10분전에 출발한 기차를 기다리는 걸 생각하니 사전에 소요시간을 잘 파악하여 좀 더 일찍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이번에 확실히 느꼈다.
결국은 이런 후회를 만드는 것은 정확한 시간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였기에 산행에서 한 시간 정도를 더디게 시작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아까운 시간이 이렇게 버려지게 된다.
어제는 역사 내일은 미스테리, 오늘은 선물 이라는 말,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의 말이 떠 오른다. 결론은 오늘을 최고의 날로 만들자 이건만 시간의 소요를 따지면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만다.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아직은 이른 시간인지 산님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소요산으로 연결되는 전철이 개통된 이후로는 소요산 방면으로 산님들이 많이 길을 택한다고 한다.
일전에 나도 한 번 소요산에 전철을 타고 간 적이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철 없는 코스 모스가 철로변에 지나가는 바람에 한들거린다.
건너편의 산비탈 작은 마을의 밤꽃은 푸르른 빛이 감돌지만 그래도 밤 꽃임이 명확하다.
소요산역의 은행나무도 뜨거운 오전의 햇살에 지쳐가고 열차는 덜컹거리면서 수 많은 사연을 담고있는 작은 개울같은 신천변을 지난다.
파란 들판, 넓은 그 들판에는 모심기가 끝나고 이제는 결실의 계절을 향해 줄달음치는 따사로운 태양의 노래가 한껏 들려온다.
하얀 빛의 왜가리가 논두렁에게 무엇을 응시하는지 잽싼 듯한 자태가 간간히 보인다.
저들은 기다림의 미학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산 아래의 마을은 그저 평화롭게만 보이는데 이 달리는 열차는 북녘을 향하고 가는 도중에 보이는 많은 군인들과 군 시설물들은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존재라는 것을 생각할 때는 다시금 저 북녘땅의 양반들이 싫어진다.
오직 입으로는 평화를 주장하지만 핵무장을 하고,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는 일부의 친북좌파들과 어울리는 것을 생각하니 몸서리 처진다.
달리는 열차 밖에는 한탄강역 남단에는 38도선이라는 표지석이 커다랗게 보인다. 강원도 양양을 가다보면 역시 이런 표지석이 보이는데 묘한 느낌이 들긴 마찬가지이다. 두 번째의 이 길에서 오늘 처음 본 것같은 느낌이 든다.
길에 보이는 표지만으로는 이 지점에서 약 1.5 km만 더 가면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나온다고 한다.
-전곡리 선사 유적지-
고대산 산행 후 돌아오는 길에 들르면 일정에 딱 맞다. 1978년 미국병사 보엔이 주먹도끼와 가로날 도끼등 아슐리안형 석기 4점을 우연히 발견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을 대표하는 유적지로 구석기 시대의 직립원인 또는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적지내에는 구석기 유적관과 자료관등 관람시설과 구석기 시대 생활상을 보여주는 야외 조형물(짚으로 만들어진 방갈로 형태의 집과 모형들)이 자연환경과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매년 어린이날을 전후로 전곡리 구석기문화제가 열린다.
학창 시절에 역사 시간에 배운 전곡리의 선사 유적지에 대한 개념이 없어 외우기도 힘들었던 생각이 스친다.
이어서 한탄강변의 하류쪽의 절개지가 철교너머로 아름답게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유유히 흐르는 한탄강이 말 없이 흐른다, 그리고는 이내 창가에서 사라진다.
옛 직장의 고 이수영님이 생각난다. 저 강에서 사고를 당하였었지.. 가만히 고인의 명복을 다시 빌어본다.
산딸기를 파는 아주머니가 보인다. 붉게 물들은 아름다운 채색을 자랑하는 산딸기, 먹음직스럽게 보이지만 막상 사려는 생각을 접는다. 혼자 먹으려니 좀 쑥스러울 것 같다.
여성분들이 산다, 그냥 지나친다.
북쪽으로 향하는 노인분들을 많이 태운 열차는 몇 군데의 역을 지나 오늘의 1차 목적지인 신탄리역에 10시 35분에 도착하였다.
경원선 북쪽 종단점이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글귀에 눈에 들어온다.
정녕 안타까운 글귀이다.
두 해전 막동이와 같이 왔을 때도 그러하더니 여전하다.
오늘은 열차에서 내리는 산님들이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토요일이어서 그런 모양이다.
역 앞의 광장에서 잠시 동송행 버스를 기다리니 이내 버스 한 대가 도착한다. 역시 노인분들이 많이 탄다. 오른쪽 창가에 앉아 갈 수 있었다. 가는 길에 고대산과 금학산을 멀리서 보려는 욕심이 앞서기에 왼쪽에 앉았던 것이다.
10 시 50분에 출발에 출발하는 버스의 요금은 1,650원이다. 가는 도중에 오른쪽을 바라보니 고대산의 능선과 금학산이 우뚝하니 보인다. 카메라를 돌려 촬영을 하여보지만 흔들림이 심하여 제대로 찍히질 않는다.
버스는 이내 강원도 철원을 진입을 한다, 구불 구불한 길을 돌아 한참을 가니 광활한 철원평야가 북녘의 산들에 에워 싸인채 나타난다.
묘한 느낌을 주는 저 쪽의 산록들, 동쪽으로 연이어진 강원도 쪽의 전방 산악지대가 한 없이 펼쳐진다.
제2 땅굴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역시 군사용 방호벽들이 이어진다. 강원도 양양쪽의 길과 흡사하다.
자료에 의하면 제 2 땅굴은 제2땅굴은 강원도 철원군 민통선 내에 위치한 제2땅굴은 북한지역의 입구에서 군사 분계선까지 남쪽으로 1.1km.총 3.5km의 길이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대, 야포와 함께 1시간당 3만명의 무장병력을 침투시킬수 있는 대형 남침형 땅굴이라고 한다.
여기에 그 가는 길의 입구가 있고보면 민통선의 시작인 모양이다.
생각에 잠기는 동안 버스는 계속 이동을 하여 손님들을 연신 태우고 내려주고 한다.
모퉁이를 돌아서는 길에 왼쪽에는 수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북한땅에 있던 노동당사가 쇠파이프들로 감싸인채 지나친다.
전방이라는 생각이 다시 울컥 치민다.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저네들이 미워진다.
이것도 수행의 부족인가 싶다. 그러나 종교도 나라가 있고 종교의 자유가 있어야만 누릴 수 있는 신앙의 자유가 형성될 것이다.
노동당사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에 있는 조선노동당의 철원군 당사로 철원읍 관전리에 위치하고 1946년에 지은 지상 3층의 건물이다
1946년 초 북한 땅이었을 때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시공하여 그해 말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 560평의 면적에 지상 3층의 무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현재 1층은 각방 구조가 남아 있으나, 2층은 3층이 내려앉는 바람에 허물어져 골조만 남아 있다.
1층 구조를 보면 몇 개의 방은 공간이 매우 협소해 1~2명이 사용하였거나 취조실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의 참화로 검게 그을린 3층 건물의 앞뒤엔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으로 1개리(里)당 쌀 200가마씩 거두었고, 지역 주민들로부터의 강제 모금과 노동력 동원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내부 작업은 비밀유지를 위해 공산당원 이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8·15광복 후부터 6·25전쟁이 일어나기까지 공산치하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잡혀와서 고문과 무자비한 학살을 당하였다.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줄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그때의 참상을 알 수 있다.
현재는 민간인출입통제선 안에 자리잡고 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곳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하였으며, KBS의 열린음악회가 녹화되기도 하였다. 2001년 2월 통과된 '문화재보호법 중 개정법률안'에 의하여 근대문화유산 등록대상이 됨으로써 정부 차원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자료참조>
그 폐허(북녘의 실상)가 저들의 현실임에도 저들은 아직도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건만, 부화뇌동하는 일부 정치인들과 좌파인사들은 그저 퍼주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참담함을 생각할 때는 공연히 짜증이 난다.
달리는 버스는 한참 후에 도피안사가는 길이라는 이정표를 보여준다.
불자인 나그네는 도피안사가 유명한 보물을 지니고 있는 도량이라는 것을 알지만 바로 이 근처라는 사실에 감격을 금치 못한다.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년) 도선국사가 높이 91cm의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을 제조 철원읍 율리리에 소재한 안양사에 봉안하기 위하여 여러 승려들과 같이 가다가 잠시 쉬고 있을 때 이 불상이 갑자기 없어져 그 부근 일대를 찾다가 현위치에 그 불상이 안좌한 자세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이 불상을 모셨다 한다.
당시 철조불상이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에 이르러렀다 하여 절이름이 도피안사로 명명되었으며 절내에는 도선국사가 제조한 국보 제63호인 철조비로사나불좌상과 보물 제 223호로 지정된 높이 4.1m의 화강암 재료로 된 3층 석탑이 보존되어 있다.
전에는 민간인출입통제구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제한되었으나, 현재는 누구나 자유로이 출입 할 수 있다고 하니 다음에는 꼭 한번 순례를 하여야 겠다.
연이는 승하자를 반복하던 버스는 드디어 11시 25분경에 동송읍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려 짐작되는 길을 따라 가니 터미널이 나오고 이 동송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로쪽으로 보이는 철원 여자 중,고교표지판 따라서 약 600여 미터를 가면 나오는 동송읍 이평 7리에 위치한 철원여자 중.고교가 산행기점이다.
이 코스는 동송읍 북쪽인 이평7리 철원여자 중.고교 앞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 능선길을 타고 매바위 능선을 경유해 정상에 이른다는 사전 조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동송읍 철원여자 중.고교의 교문을 중심으로 좌측길로 들어 섰다.
정문의 왼쪽으로 진입하여 금학정 표지를 따라 금학산 안내문이 나오고 여기에는 약수가 있다. 여자 중학생들이 여럿 보인다. 아마 들고 있는 비닐 봉지를 보지 산에서 휴지들을 주워서 오는 모양이다.
착한 아이들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저 맑은 마음들이 우리네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근원일 것이다.
아이들이 연신 약수터에서 줄을 이어 시원한 약수를 마신다.
물컵을 빌려 주니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해맑은 미소가 둘째 아이를 생각나게 해준다.
금학산은 원도 철원군 동송읍에 있는 산.
높이는 947m이다. 산 이름은 학이 막 내려앉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901년 궁예가 태봉을 건국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할 때, 도선이 이 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300년을 통치할 것이며,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국운이 25년밖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아 18년 통치 끝에 멸망하고 말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안내문 참조-
역사의 흐름이 무슨 가정이 통하는 것은 아니지만 곰곰히 생각하여 볼 가치는 있다는 느낌이 든다. 다음에 다시 알아 보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안내문을 지나 세멘트 포장 도로를 걸어가니 금학정이라고 하는 할터가 보인다. 제법 규모가 크다.
세멘트 오름길을 가면 이어진 벚나무의 숲이 보인다.
한창 곱게 붉은 색을 치장하며 버찌들이 아름답게 익어간다, 새큼함을 상상하며 오르니 목이 촉촉하여 지는것 같으면서도 막상은 땀이 연신 이어진다.
금학정을 지나니 시간은 벌써 11시 25분이다. 지금부터는 시간을 체크하여 본다.
활터를 왼쪽으로 하면서 오르니 잠시 후에 금학산 체육공원이 아담한 정자와 여러가지 체육 시설을 보여준다.
왼쪽 골짜기에 시원한 약수가 두 줄기 흘러 내린다. 더위도 식힐 겸 약수를 마셔보니 상큼한 산의 맛이 그대로 향이 되어 입안에 가득 고인다.
그리고 이 약수터는 금학산과 고대산으로 이어지는 산록에서의 마지막 약수터인 것은 나중에야 깨달았다.
뒤돌아 보니 철원여자 중.고와 활터가 저 아래 보인다. 동송읍내도 제법 멀리 떨어져 보인다.임시 벌목용 도로(임도)가 가로질러가는 곳에서 작은 표지판을 찾았다.
이 산길에는 매바위 가는 길이라는 작은 안내판이 유일하게 보인다. 다른 산님들이 묶어 놓은 표지가 몇 개 보인다.
길을 찾아 오르니 가파른 경사길이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배낭을 끌러 땀을 흠치고 길을 오르다가 문득 안경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였다. 어디에서 두었는지도 모르니 씁쓸함을 안고 그냥 오르기로 했다.
연이어지는 경사길을 오르니 산 님 한 분이 하산을 한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오르니 또 다른 두 분의 여성 산님이 하산을 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여기 까지 겨우 세분을 본 셈이다.
앞쪽에 부자간으로 보이는 세 명의 산님이 오르고 있다. 길을 비켜 준다.
간단한 복장을 보니 아마 중간까지만 오를 모양이다.
앞에 묘하게 생긴 바위가 보인다. 드디어 매바위에 도착한 모양이다. 마치 형상이 매처럼 보인다.
매바위는 조망이 매우 좋은 곳이다. 저 아래 마을이 그리고 학저수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군 막사에서 흘러나오는 군가가 메아리되어 들려온다.
사진을 찍으며 오름길을 택하였다. 삼부자는 이제 여기에서 머물 모양이다. 나주에 보니 계속 매바위에 머물다 간 모양이다.그리고 두 분의 산님들 더 만나고 북망바위까지 올랐다.
북망바위는 북쪽을 향하고 있어 이름이 그렇게 불리는 모양이다. 바위 하나에도 망향의 아품이 담긴 곳이다.
토치카가 보인다. 저 북녘땅을 바라보는 시설물들이 이어지고 그 산길의 능선을 따라 오르니 거의 정상부근에 네 분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다. 자상하게 길을 안내해 준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람도 사랑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仙人인 것이다.
여기까지 오르면서 본 산님들은 채 열 분이 안된다.
13시 30분경에 드디어 태극기가 휘날리는 금학산의 정상에 도착하였다.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된 셈이다. 쉬엄 쉬엄 올라와서인가 보다.
헬기장이 넓게 보인다. 마치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 처럼 보인다.
6사단의 별모양의 마크가 하늘색을 감당하고 넓디 넓은 하늘을 향해 두팔을 벌리고 있다. 그래서 육사단을 청성부대라고 하는 모양이다.
조금 옮겨 금학산 정상석에 섰다.
금학산(947.3m)
모든 번뇌와 힘들었던 것들이 모두 산바람에 날려 보내본다. 시원한 이 마음, 정녕 산정에 서 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알 것이다.
초소에는 우리 젊은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저 휘날리는 태극기는 오늘 따라 더욱 감격스럽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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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2
청하 권대욱
온다던 비는 소식이 없고
나그넷길 돌리려니
석양이 길을 막네
발돋움하지 아니하여도
그예 낮아지는 내 마음
저 붉은 덩이 낮아지는 만큼
노을이 깊어가도
발걸음은 그 자리에 있고
산은 말이 없고
나도 말이 없더라.
-- 금학산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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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은 산세는 부드럽게 보이나 산 속으로 들어서면 매바위능선과 큰바위능선·용바위·용아름 등 암릉이 연이어져 있다.
마애석불과 부도탑갓 등의 볼거리가 있다지만 오늘 산길에는 매바위 코스였기에 다음을 기약한다. 이중 참고로 마애불에 대하여 적어 본다. 나그네가 불자이기에 이런 것들에 관하여는 관심이 많은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마애석불은 신라시대 불상 양식으로 전체 높이는 3m이며 몸통은 바위에 조각되어 있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져 바위 위에 놓여 있다. 가까이에 백마고지가 위치하며 민통선과 인접한 산이다.
멀리 북녘의 산하가 보이고, 저 아래 학저수지, 그리고 드 넓디 넓은 오대미를 생산하는 철원평야, 강원도 방면의 전방지대, 동송읍이 발 아래이다.
북서쪽으로는 오늘 종착 목적지인 고대산이 멀리 보인다.
남쪽으로는 향로봉이 그리고 지장산과 종자산이 연이어 보인다.
잠시 주변을 관망하다가 헬기장에서 고대산 방면으로 하산을 하기 시작하니 재미있는 글귀가 보인다. "summit:꿈을 이뤘을 때를 상상하며 웃어라"
이 표지판들은 연이어 서 있었는데 그 단위가 해발 표고 100m 단위였던 것 같다.
식수를 보급하는 기계 시설인듯한 곳에 보초병이 보인다. 반갑다.
서로 인사를 하고 조심하시라는 군인의 배웅을 받으며 계속 하산길에 조심을 더하여 내려오니 또 재미있는 안내문이 보인다.
"400M:시간을 정해놓고 웃어라, 병원과는 영원히 바이바이다"
이 글귀가 있는 아래켠의 한적한 암릉에서 식사를 하였다. 방울토마토를 먹으며 김치와 함께 맛있게 허기를 채웠다, 커피 한 잔을
마시니 몸이 점점 녹아드는 느낌이다. 이 산길을 내려가서 다시 보개산으로 오름길을 택하여야 하니 힘들게 느껴만 진다.
"300M: 일어나자 마자 웃어라, 아침에 첫 번째 웃는 웃음이 보약이다" 그래 웃음이 최고야!
이 곳의 아래에도 마찬가지로 초병들이 보인다. 씩씩하게 보이는 초병들, 역시 인사를 나누며 길을 옮겼다.
"100M: 크게 웃어라, 크게 웃을수록 큰자신감을 만들어준다"
그렇다 웃음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상대방에게 희망과 꿈을 주기도 한다.
기쁜 마음으로 산을 찾는 것도 웃음의 연속이리라..
그런 글귀를 바라보며 대소리치(담터계곡)에 내려서면 좌측으로 비포장 군사도로가 이어지고 우측으로는 방호벽이 설치되어 있으며 벙커에는 녹슨 탱크가 위장되어 분단의 아픔을 되새기게 만든다. 이 대소리치는 담터계곡이라고도 한다.
엉컹퀴가 무리지어 곱게 피어있다.
우리의 야생화가 이렇게 지천으로 피어 있는 이 수려한 강산이 분단이라는 아픔을 겪고 있는 이 역사의 현장에서 나그네는 한 없는 슬픔에 젖어든다.
방호벽을 지나 다시 보개봉으로 오를 즈음에는 약간 습진 곳에는 나비의 무리들이 쉼터로 삼아 나그네의 길을 가로 막는다.
조심스럽게 카메라들 들이대어 보지만 그렇게 모델의 역활을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포진지에는 군인들이 모여 작전 중인 모양이다. 엔진 소리가 굉음을 울리며 산천을 뒤 흔든다. 조요하여야 할 이 산천이 이렇게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다.
오름길은 온통 정글마냥 컴컴하다. 바람이 없어서인지 숨이차다. 참고 참고 오르니 능선이 나오고, 드디어 지나온 금학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람한 자체의 태고적 모습, 그대로 인 산, 산은 아무런 말이 없다.
향로봉은 아름다운 자태로 나그네에게 멀리서 손짓을 주고 산길을 오르는 나그네도 역시 말이 없다, 이미 나는 산 자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드디어 시원한 산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보개봉(해발 752m)에 올랐다.
탁 트이는 정상, 북녘이, 저쪽 강원도 땅의 험준한 준령들이 보이고 고대산의 준령들이 아마득하게 오후의 햇살을 등지고 우람하게 서있다.
향로봉이 지척이다.
시멘트로 만든 넓은 헬기장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보개봉이다. 별로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된 흔적이 보인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지점인 것이다.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넘어오는 것이 이렇게 간단할 줄은 생각을 미쳐 못하여 보았다,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지장봉을 보개봉이라고 한다던데 이곳이 경계선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은 넘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은 좋다.
숲길의 왼쪽에는 거대한 남성의 그것처럼 보이는 바위가 보인다. 처음에는 선바위로 보이더니 위치를 바꾸니 남성처럼 보이다가 아예 날씬한 여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곳을 한참을 지나니 석문이 나타난다. 문바위라는 지명이 생각난다. 아마도 고대산에서 출발하면 영락없는 문바위라고 생각할 것같다. 오르내리기가 그리 수월치는 않은 곳이다.
조금 더 가니 관악산의 왕관바위를 축소한 듯한 바위가 길 옆에 자리하고 있다.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 아닐 수 없다.
힘든 발걸음을 고대산 정상에 도달한다는 것을 희망삼아 걸음을 옮기니 드디어 헬기장 같은 771봉에 도착하였다. 연이은 암릉과 흙길이 연결된 으슥한 산길이다.
이곳부터는 좌측의 바위지대를 우측으로 우회해 진행하게 되고 이따금씩 나타나는 짧은 바위 지대는 직진으로 로프를 붙잡고 넘어가기까지 한다.
머루와 다래 넝쿨이 지천이다, 늦여름이나 초가을이면 이곳은 풍성한 자연 식탁임을 자랑할 것 같다, 그 때 이 풍성한 만찬에 참여하여야 겠다는 다짐을 하고 걸음을 천천히 옮겨 본다.
그렇게 오르락 내리락 하다보면 또 다시 호젓한 산길이 이어지다가 억새가 무성한 오래된 헬기장을 대하게 되고 이어서 약 8분 후에 돌탑봉을 다시 대하게 되는데 한쪽에 군 시설인듯한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저 쪽에 고대산의 정상이 지척에 보인다.
이제 고대산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자리하고 지나온 금학산은 까마득하게 멀어져만 간다.능선의 안부만 지나면 바로 고대산이다.
돌탑봉을 뒤로하고 잠시 내려섰다 고대산을 향해 10여분 남짓 올라서면 우측으로 성터와 같이 잔돌로 쌓은 낮은 성곽이 자리하고 있다
어느 시절에 쌓았는지 야트마한 산성, 형체가 뚜렷하게 남아있다.
여기에도 후삼국 시절의 궁예의 자취가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하여 본다.
약 70여 m에 걸쳐 있는 산성을 따라 이어진 참호의 길을 오르니 드디어 고대산의 정상이 10m 의 높이에서 나그네를 반겨준다.
드디어 고대산(832m)에 도착을 하였다. 넓은 헬기장에서 두 팔을 벌려 마음껏 심호흡을 하여 본다.
시간을 보니 벌써 네시 정각쯤이다. 많이도 걸어온 셈이다.
다섯 분의 산님이 연신 북녘을 향하여 손짓을 하시는 분과 시선을 일치시키고 있다.
나도 끼어들어 들어보니 이 곳에서 오랫동안 군생활을 하신 분이 지형과 지명, 그리고 유래를 설명하여 주신다.
덕분에 전에는 몰랐던 전방의 산야와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상 표지석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햇살이 눈부시지만 이제는 점점 식어 가는 모양이다.
고대산은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신탄리에서 강원도 철원군까지 걸쳐 있는 산으로 그 높이가 832m. 경원선 철도가 휴전선에 막혀 멈춘 곳에 이 산이 솟아 있다.
경기도 최북단인 연천군 신서면 신탄리와 강원도 철원군 사이에 있는 정상에서는 북녘의 철원평야와 6·25 때 격전지인 백마고지(白馬高地), 금학산(金鶴山:947m)과 지장봉(地藏峰:877m)·북대산(北大山)·향로봉(香爐峰)은 물론 한탄강(漢灘江) 기슭의 종자산(種子山)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뒤돌아 본 저 금학산의 위용이 정말 멋스럽다. 오늘 종주하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광주산맥(廣州山脈)의 지맥으로 동부산지를 이루며, 화강편마암계 산답게 암반과 암릉이 발달되어 있다. 북동쪽 골짜기의 표범폭포에서 흐르는 물이 동막골계곡과 유원지를 지나 동서방향으로 흘러 남북주향의 산지를 돌아 차탄천(車灘川)과 합류, 북에서 남으로 전곡을 거쳐 한탄강으로 흐르다가 임진강(臨津江)으로 들어간다.
떡갈나무 숲을 지나 낙엽송 우거진 산길을 오르면 능선안부 갈림길이다. 암릉의 소나무 옆 넓은 암면에 겨울이면 흰눈이 쌓인 모습이며 하얀 능선과 스카이라인을 이룬 지능선이 멋지다.<자료 참조>
재 작년에 이 산에 올라 적었던 글 귀를 다시금 되뇌이어 본다.
상협이와 같이 올랐던 추억이 문득 되살아 난다.
고대산 태극기
청하 권대욱
칼바위 능선길을 멤도는 새 매 한 마리
저 능선 끝에 가면 북녘땅 이라는데
겨울 바람 끝에 봄 소식 온다지만
달리지 못하는 철마는 울어 목이 쉴 것 같네
작은 돌탑에 통일의 소원 가득 싣건만
석양을 물들이는 피빛 하늘은 어느 세월인가
작은 초소에는 찬연한 태극기 휘날리고
저 멀리 안개빛 철원평야 작은 구릉
백마고지에는 피에 맺힌 함성 들리고
작은 호수에는 북녘소식 담은 철새있어
작은 아이 초롱임에 세월을 한탄하나
푸른하늘 맑은 날 우리야 엉켜 안아보리
녹슬은 철책은 저 언덕에 뒹굴건만
말 없는 소나무는 봄 바람만 기다리네
아이가 올리는 작은 돌멩이도 탑이 되어라
고대산 태극기는 석양에 홀로 날리지만
세월을 지킨 저 산록을 목메어 불러보니
통일의 그 날에는 뉘 손잡고 이리올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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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하늘에 매가 없어도 그리고 봄 바람이 아닌 솔바람이 불어도 석양이 멀었지만은 그날의 그 감격스러움은 여전하다.
부부로 보이는 산님이 올라왔다가 제 3코스로 내려가시고 서울서 왔다는 산님과 같이 커피를 한 잔 나누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산에서는 모르는 사람과도 대화를 잘 하게 된다. 이 큰 산에 단 둘이만 있으니 그러할 법도 하다. 좀 전에 들은 지명들을 설명하여 주니 무척 고맙게 생각을 한다.
식수도 이제는 조금 남았고, 배낭에 남은 방울 토마토를 꺼내 같이 나누어 먹고는 정상에서만 한 시간여 정도 산천을 보면서 머물렀다.
오늘은 이렇게 여유를 마음껏 부려 본다,
열차시간을 잘 알고 있기에 이런 여유가 나오는 것이다. 즐거운 마음이 가득하다,
지난 날의 번뇌들이 모두 씻겨 바람에 날리우는 것 같다.
정각 다섯시에 길을 나섰다. 카메라를 들고 다시 여러 곳을 촬영하다보니 그 분과는 거리가 생겨 먼저 가시라 하고 천천히 산록을 둘러 보면서 하산길에 오르니 잠시 후에 삼각봉(830m)의 푯말이 보인다
고대봉 정상이 깍은 듯한 평평한 모습으로 저만치 보인다. 여기는 온통 군사 시설물이다.
대광봉(827m)에는 처음 보는 고대산 표지가 서 있다, 아마도 세멘트로 조성한 것 같은데 녹색 페인트 칠이 벗겨져 보기가 흉하다.
대광봉에서 갈림길이 나오는데 능선을 빙둘러 가는 제 1코스와 일명 칼바위 능선이라는 제 2코스로 나누어 진다.
오늘은 예전의 추억을 살려 보기 위하여 제 2 코스로 하산한다.
일명 칼바위라고 불리는 말등바위는 산 아래에서 보면 능선이 움푹 들어간 말등처럼 생겼기에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하산하여 열차에 올라서 좌측으로 바라보면 그 능선의 이름이 말등 바위라고 하는 말이 실감이 났다.
말등바위의 중간에 있는 칼바위의 좁은 산길은 양쪽이 벼랑이다, 겨울에는 칼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며, 아래켠에 있는 큰 바위는 예전에 상협이와 같이 이 등산로로 고대산에 오를 때 식사를 하던 곳이다. 컵라면을 끓여 먹던 추억이 떠 오른다.
북서쪽으로 바라보면 표범폭포의 벼랑이 바위산으로 소나무들로 치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 웅장하게 보인다.
하산길에는 그 쪽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이정표로 유혹을 한다.
이제는 다리도 아파고 갈 길이 있는터라 그냥 하산 목표 지점으로 계속 조심스럽게 걸음을 계속한다.
아까 고대산 정상에서 뵈었던 어르신들이 하산을 하신다. 이곳에 대하여 상당히 많이 알고 계신 분들이신데 덕분에 철원 인근의 산세와 전방지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한참 먼저 내려가셨는데 중간에 보이신다. 어르신들이 근력이 많이 쇠약하여 지신것 같다.
인사를 드리고 먼저 하산을 한다. 길이 재작년 보다 많이 달라져 있다. 나무로 계단길을 정성들여 만들어 놓고 가드도 정비하여 놓았다.
잠시 벼랑길을 내려서니 숲 길이 나온다. 제 1코스와의 갈림점이 나오고 저 아래에 고대산 입구의 형상물이 석양에 비추인다.
여섯시 10분이다. 이미 기차는 10분전에 출발을 하였을 것이다.
어차피 천천히 온 걸음이니 개의치 않았다.
신탄리역에서 매표를 하고 화장실에서 땀을 씻어 낸후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역안으로 입장하여 이리 저리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면서 오늘 산행을 정리하여 본다
오후 7시에 출발한 동두천행 열차가 일찌 감치 도착을 하고 이곳에 손님들을 내려 놓는다
한반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현장, 신탄리 고대산. 경원선 철도의 종착점 신탄리는 아직도 계속되는 역사의 현장, 신탄리에서 시작하는 고대산 산행은 멀리 북녘을 넘나본다.
아!
경원선 철도중단점
한국전쟁 이전엔 서울과 원산을 오가며 사람과 물건을 실어 나르던 경원선.
1914년 개통된 경원선은 용산과 원산을 잇는 총 길이 222,7km의 철도였으나 남북 분단으로 인해 이제는 원산까지 미처 가지 못하고 신탄리역에서 쓸쓸히 회차한다. 신탄리역에서 옛 철원역을 지나 휴전선 너머 평강 사이에는 철길이 없어진 상태이다. 경원선 철도의 남쪽 중단점을 알리는 푯말만이 외로이 외치고 있다.
나도 외쳐 본다. 이 몸도 북녘의 산하를 자유롭게 다니고 싶다고.
그냥 석양에 외쳐본다.
끝